35화
서현이가 혼자서 몸을 일으킨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병으로 몸이 약해진 서현이는 음식을 먹을 때도 간호사의 부축을 받아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나마도 힘에 부쳐, 약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혼자서 몸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쌩쌩하기까지 하니 어리둥절할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준 라이프(Life) 덕분임을 상기하자 우성의 얼굴은 환해졌다.
우성은 팔팔함을 과시하며 침상에서 내려오겠다는 서현이를 만류했다.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성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토록 쌩쌩한 서현이를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결국 우성의 만류에 못 이겨 서현이는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침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무리해서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힘없이 누워있어 얼굴만 보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만족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잠에서 깨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지 않았나.
아마 의사가 이 광경을 봤다면 기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성은 안다. 이건 기적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오래 가진 않겠지.’
두 달. 아마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 우성은 다시금 서현이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못 한 이야기.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서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성은 시간을 보냈다. 무어 그리 할 말이 많고 궁금한 게 많은지 서현이는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나누는 아빠와의 대화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처럼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우성 역시 한껏 들뜬 상태였다. 서현이와의 대화는 그에게 있어서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활력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아빠, 난 나중에 커서…….”
“보호자 이우성씨?”
행복한 기분을 깨뜨리는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한창 들떠서 떠들고 있던 서현이도 우성의 뒤로 나타난 간호사들을 보며 하던 말음 멈췄다.
시간. 우성은 손목에 차고 온 시계를 살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된 거지? 벌써 1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 같은 기분에 우성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저… 죄송하지만 시간이…….”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차마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과는 다른, 억지 웃음을 지으며 우성은 서현이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윽, 스윽-.
“아빠 없어도 서현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금방 다시 올게.”
“언제……?”
어린 아이답게 뾰로통한 표정이라도 지으면 안 되는 걸까? 투정이라도 부리면 좋겠건만, 서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어른스러웠다. 고작 7살짜리가 슬픈 표정이라니. 우성의 가슴은 칼로 쑤셔진 것보다 더 아팠다.
“금방. 약속할게. 나중에 서현이 더 건강해지면, 가고 싶다던 놀이공원도 데려다 줄 게.”
“됐어. 안 가도 돼. 그냥, 아빠랑 같이만 있으면 돼.”
우성을 데리러 온 간호사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어쩔 줄 몰라 손톱을 깨물거나 입술을 곱씹었다. 그녀들 모두 우성과 서현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고, 우성이 얼마나 서현이를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시간이 될 때마다 하루 30분에서 1시간씩 묵묵히 딸아이의 얼굴만 보고 사라지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몇 달 만에 드디어 딸아이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웃는 얼굴 한 번 보였던 적 없는 우성이, 서현이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 딱딱한 얼굴을 활짝 피웠다.
하지만 규칙은 규칙. 원래라면 30분에서 최대 1시간이었던 면회 시간을 무려 30분이나 늦춰졌다. 이조차도 간호사들 여럿이 사정사정한 덕분에 늘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제 정말 가셔야 해요. 죄송하지만 더 이상은…….”
“네, 알겠습니다.”
무거운 다리가 겨우겨우 움직였다. 못내 아쉬운지 서현이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고는 우성이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보자, 서현아.”
**
다소 건강해진 모습의 서현이를 만났던 건 우성에게 있어서 새로운 계기였다. 새로이 각오를 다질 수 있었고, 혜미의 일로 침울해졌던 기분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갔다.
면회가 끝난 우성은 잠시 인근 공원에서 쉬었다가 직장인 클럽으로 향했다. 게임도 중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서현이의 병원비도 중요했다. 막노동과는 달리 클럽은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었다. 시급이 아니라 손님들을 상대하며 받는 팁이 꽤 짭짤했기 때문이었다.
밤 12시가 조금 넘어서 우성은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서 교대 직원이 꽤 일찍 출근한 덕분이었다.
다른 때라면 곧장 서현이를 보러 가겠지만 우성은 멀리 생각했다. 어차피 오늘 낮에 서현이의 얼굴은 한 번 보았고, 지금 당장은 게임에 접속하는 게 우선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클럽에서 팁으로 받은 오만 원 권을 가지고 택시를 탄 우성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막 1시가 조금 안 되었다. 약속한 현실에서의 12시간까지 고작 몇 분. 게임을 접속하려면 잠을 자거나 의지를 표명하면 된다고 했으니, 바라는 것만으로도 게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쉽네, 이거.”
잠깐 눈을 깜박였다 뿐인데, 우성의 눈앞으로는 방 안이 아닌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원의 방처럼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공간에는 오더가 없었고, 우성의 앞으로는 둥근 원형의 안개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 상황으로 보아 게임은 시작된 것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우성은 눈앞에 보이는 안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보기에 너무 두터웠다. 어둠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우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 일분정도 걸으며 대체 끝이 어딜까 싶었을 때, 우성은 안개 끝으로 다른 공간을 볼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 시작의 광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의 광장. 아무래도 이름 그대로 신규 플레이어들이 모여드는 장소인 듯했다.
눈앞으로 활짝 펼쳐진 광장은 그 넓이가 어지간한 운동장보다 몇 배는 넓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거대한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전면으로는 멀리 조잡한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라면 우성이 걸어 나온 절벽으로 가로 세로 3미터 정도 크기의 푸른 안개가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플레이어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절벽에 펼쳐진 푸른 안개는 신규 플레이어들이 나오는 ‘문’인 모양이었다.
웅성웅성-.
광장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현세의 사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우성과 같은 신규 플레이어인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상 광장에 모인 플레이어들 중 신규 플레이어로 보이는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광장의 가장자리를 원형으로 둘러 싼 다른 플레이어들은 현세의 사복과는 사뭇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어떤 이들은 옷이라기보다는 갑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기존의 플레이어들인가?’
신규 플레이어들은 아직까지도 이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는 배치고사에서 친해진 플레이어와 수군거리며 잡담을 떠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어, 왔구만!”
그 때, 익숙하고 친근한 말투가 우성의 귀에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안현수가 손을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 있나 찾았어. 역시 시간 한 번은 칼 같이 지키는군 그래.”
“당연하지.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안현수는 우성과 함께 소원의 방에 있으며 오더를 통해 서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성의 딸 서현이가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성이 서현이를 살리기 위해 이 게임에 명운을 걸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는 안현수로서는 우성이 당연히 게임이 열리자마자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게임에 꽤 흥미를 느끼고 있는 만큼 들어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몇 마디 인사로 재회의 시간을 가지고 우성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존 플레이어들은 신규 플레이어들을 원으로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다. 배치고사와는 달리 신규 플레이어들의 손에는 무기랄 게 없는 상태였는데, 갑옷과 무기까지 모든 무장을 갖춘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기가 눌려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간혹 기존 플레이어들에게 말을 거는 간 큰 신규 플레이어들도 있었는데 대답 없이 날카롭게 째려보는 그들의 눈빛에 압도되어 꼬리를 말고 말았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기존 플레이어들이 신규 플레이어들을 억압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포인트가 목적인가? 아니,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엔…….’
우성은 자신의 손에 씌워져 있는 검은 장갑을 힐끗 흘겼다.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달리 우성에게는 무기가 있었다. 그것도 S등급 특전에 해당하는 반(半) 마검 아포피스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기존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쪽수에서부터 차이가 나거니와 이 게임을 더 오래 플레이한 만큼 그들의 스텟 능력치는 아마 우성보다 훨씬 윗줄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 때, 신규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던 곳 중앙에서 시끌벅적한 소음이 일었다.
“이 개새끼! 네가 내 뒤통수 친 놈 맞지?”
“그렇다면?”
“멸치새끼가 뒤지려고 환장했나… 무기도 없는 주제에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아?”
“지랄하네, 허접새끼가. 등치만 산만하면 뭐하냐? 또 뒈지고 싶어서 찾아왔어?”
신규 플레이어들끼리의 싸움. 죽고 죽이는 배치고사를 거쳤던 만큼 원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신규 플레이어들끼리 싸움이 벌어지자 주위의 플레이어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말려야 할까, 그냥 구경해야 할까. 하지만 서로 죽이겠다고 싸우는 만큼 말리러 드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그만둬라.”
그 때, 내내 지켜보고 있던 기존 플레이어 한 명이 다가와 두 플레이어 사이로 끼어들었다. 광채를 발하는 검은색 갑옷과 검은 감히 덤벼들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꿀꺽.”
“신규 플레이어들끼리의 싸움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네!”
두 명의 플레이어는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대답했다. 더듬는 모양새까지 똑같아 그 모습이 방금 전 기개와는 달라 절로 웃음을 자아냈다.
신규 플레이어와 기존 플레이어의 첫 접촉. 우성은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더니 곧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구 찾는 사람 있어?”
“응.”
“혹시 같이 다니던 여자친구?”
“여자친구는 아니고. 그냥…….”
마지막 순간 우성과 혜미의 사건을 알지 못하는 안현수는 그저 단순한 친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성은 마지막 그 순간을 혜미에 대한 ‘빚’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 순간 자신을 죽였더라면…….
포인트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라이프를 잃고 추가 라이프 역시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서현이에게 줄 생명이 두 개나 날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아!”
몇 분째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우성이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혜미와 혜정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다급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안현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때, 방금 전 두 명의 플레이어들의 싸움을 말린 기존 플레이어가 신규 플레이어들 틈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아포칼립스. 정확히는 악마들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