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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34화 (34/258)

34화

<시작의 광장>

눈을 뜨자 커텐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눈을 찔렀다. 기분 좋은 포근함에 잠이 들었나 싶었지만 그것도 찰나, 우성은 방금 전까지 있던 일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절대 꿈일 리 없지.’

그 생생함이 어찌 꿈일 수 있을까. 분명 닷새라는 시간 동안의 경험은 우성의 몸과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집에 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려던 찰나, 우성의 머릿속에 새로운 기억들이 파고들었다.

‘보호자분, 이제 퇴실하실 시간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우리 서현이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하죠.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이건 병원에서의 기억.

‘아무래도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출근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요새 무리하더니만. 몸 관리 잘하고 내일 보세.’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건 오늘 아침의 기억.

어떻게 된 일일까? 지난 닷새간의 기억은 물론, 우성의 머릿속에는 어제 병원에서와 오늘 아침의 기억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꿈 따위가 아니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닷새간의 비현실적인 일들에 저울이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기엔 그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길었다. 그렇다고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으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우성은 덮고 있던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9평 남짓한 좁은 원룸. 화장실로 들어간 우성은 거울을 확인했다.

‘달라진 건 없다.’

평소와 같은 일상. 막노동을 뛰러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언제나처럼 똑같은 하루였다. 하지만 석연찮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너무 생생한 지난 닷새간의 기억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우성의 몸은 너무나도 멀쩡한데 그는 출근하지 못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평소라면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어 서현이의 병원비를 대겠다고 일찍부터 출근했을 것인데 말이다.

더군다나…….

‘서현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마지막 순간 우성의 질문에 대한 오더의 대답.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준 그 대답은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상태.”

[플레이어 정보]

이름 : 우성

직업 : 플레이어

국적 : 대한민국

진형 : 악마

성별 : 남자

클레스 : A

[능력치]

- [근력 : 15] [민첩 : 15] [체력 : 21] [맷집 : 14] [반사능력 : 14] [마력 : 10] [정신력 : 26] [PP : 1800]

가장 처음 보았던 스텟 포인트들. 아니, 그보다는 조금 상향된 능력치였다. 아무래도 게임 속에서의 능력치보다 현실에서의 능력치가 상향폭이 훨씬 적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확인은 충분했다. 지난 닷새 동안 보았던 플레이어 정보창이 눈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지난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은 뭐란 말인가? 단순히 알게 된 것과는 달랐다. 우성은 분명 병원에서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인지하고 있었다. 휴가를 위해 전화를 했던 통화 내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의 몸이 두 개로 나뉜 것처럼. 그래, 그게 정확했다. 게임 속의 우성과 현실의 우성이 따로 나뉘어져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말도 안 돼.”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지만 역시나 믿기지 않았다. 현실과 게임, 두 곳에서 모두 우성이라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다니.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어.”

분명 게임 속에서 우성은 닷새를 보냈다. 아니, 체감상으로는 평소의 닷새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뜻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 벽에 걸어둔 작은 시계를 보니, 우성이 서현이를 찾아갔던 시간은 불과 12시간 전이었다. 그 때가 새벽 1시가 안 되었던 시간이었는데, 지금 시간이 12시 반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닷새를 보냈는데 현실에서는 12시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시간을 조작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아니 비상식적으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긴. 안 될 것도 없으려나.’

잠시 멍하니 있던 우성은 곧 납득했다. 불로장생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한 게임이다. 시간을 되돌린 게 아니라 사람의 뇌를 조작해 시간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느리게 만든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우성은 이제부터 ‘아포칼립스’라는 게임에 대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식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한가하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얼떨결에 하루 휴가를 내버렸다. 평소에는 하루가 25시간이어도 부족할 것만 같더니, 출근을 안 하니 심심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취미도 없고 집에는 그 흔한 TV나 컴퓨터도 없었다. 아포칼립스로 다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오더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신규 플레이어들의 게임 접속 가능 시간은 배치고사가 끝난 시간을 기점으로 12시간 뒤부터였다. 이 12시간이 게임 속에서의 시간인지 현실에서의 시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현실에서의 12시간이라는데 무게추가 더 기울었다.

‘게임에서 12시간이면… 현실에선 고작 1시간 정도밖에 안 되니까.’

현실에서의 12시간이 게임 속에서의 닷새. 즉, 120시간으로 바뀌었다. 시간의 비율은 1:10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게임 속에서의 12시간은 현실에서 고작 1시간 남짓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데, 신규 플레이어들이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시간치고는 너무 적은 감이 있었다.

집안 구석에서 길을 잃은 우성은 일단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좁디좁은 화장실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개운했다. 지난 닷새간은 따뜻한 물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찾기 어려웠다.

따듯한 물을 한동안 맞고 있던 우성은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간 길 그대로 저녁에 클럽에 출근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옷은 셔츠와 마의를 챙겨 입었다. 직원복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입을 옷이 없을 때는 사복으로도 꽤 괜찮은 옷이었다.

주머니에 꼬깃꼬깃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몇 장을 쑤셔 넣고는 집을 나섰다.

시간은 많았다. 버스를 이용할까도 싶었지만 오래간만의 여유인 만큼 산책 겸 걷기로 했다. 민첩 스텟이 올라서인지 내딛는 걸음이 한층 가벼웠다.

우성이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평소 자주 가지 못했던 만큼, 오늘은 병원에 좀 더 오래 있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남으면 서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산보하듯 가볍게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이 채 안되어 병원에 도착했다. 오래간만의 여유도 좋지만 서현이를 본다는 생각에 병원 앞에서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어머, 서현이 보호자 분 또 오셨네요?”

“기억하세요?”

“그럼요. 저 기억력 좋아요.”

간호사는 호호 웃으며 우성을 서현이가 있는 중환자실로 안내했다. 기억력이 좋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특이해서 기억하는 것이겠지.

우성의 이야기는 간호사들 사이에서도 간간히 나오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에 일곱 살 딸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스무 살에 딸을 가졌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제대로 된 혼인절차도 없으니 소위 말하는 사고, 고속도로를 밟은 것이다.

보통 이런 관계에 있어서 부모는 딸이나 아들에게 그렇게 큰 애정을 갖지는 않는다. 애초 사고로 생긴 아이를 지우는 경우도 허다한데, 그 나이에 아이를 낳고 애정을 쏟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화제가 된 이유는 우성의 태도였다. 달에 500이라는 어마어마한 거금. 그것도 스물 중반의 나이인 우성에게는 대출을 받더라도 구하기 힘든 거금이었다. 그런 돈을 오직 딸아이를 위해 내기 위해 힘든 생활을 겪으니, 그 애정이 어느 정도일지 보통 사람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은 우성은 어제 새벽에도 왔던 중환자실에 도착했다. 평소와는 다른 시간에 왔는데, 다행히도 중환자실의 면회가 가능한 시간인 듯했다.

주머니에 넣었던 돈으로 산 과일바구니를 가지고 서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면회시간은 30분이라고 말하며 간호가사 한쪽 눈을 깜박였다. 이럴 때 꼭 1시간은 뒤에 면회시간이 끝났다고 찾아오곤 했다. 우성을 위한 간호사들과 의사의 작은 배려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간호사가 밖으로 나가고, 우성은 서현이의 옆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자신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아마 많이 외로울 것이다. 과일바구니를 옆의 작은 탁상에 놓으며 우성이 말했다.

“서현아, 아빠 왔어.”

여전히 서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서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쩍 자는 시간이 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나름대로 체력을 아끼기 위한 아이의 노력일 것이라고 했다.

잠들어 있는 모습조차 천사 같았지만 그래도 일어나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깨우기는 미안해, 우성은 조용히 가져온 과일을 깎으며 서현이가 깨기를 기다렸다.

어제 가져왔던 과일들은 담당 간호사들에게 나누어준 후였다. 서현이가 먹지 않고 곧장 잠들어서 먹여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과일을 사 온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한 입이라도 먹여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다.

사각-.

사과 깎는 소리가 중환자실에 조용히 울렸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니어서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깨지 않을 것이다.

“우움…….”

그 때, 옆으로 누워서 잠들어있던 서현이가 몸을 뒤척였다.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의 눈이 조금씩 떠지더니 우성과 마주쳤다.

“아…빠?”

“아, 깼어?”

잠을 깨웠다는 게 미안하면서도 아빠라고 불러주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우성을 깎고 있던 사과를 자그마하게 잘라 서현이의 입으로 가져다주었다.

“서현이가 좋아하는 사과야. 먹을… 수 있어?”

“응.”

졸린 눈을 비비며 자그마한 입술을 벌린다. 먹기 좋게 잘라진 사과를 입 안에서 우물거리는 게 그리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힘들게 번 돈으로 손수 깎은 과일을 먹여주는 것. 별 것 아닌 소소한 일이었지만 우성은 행복함을 느꼈다. 다른 때라면 힘들다고 먹기 싫다고 했을 텐데, 병이 조금 호전되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움?”

“왜, 왜 그래?”

“아빠.”

졸음이 달아났는지 서현이가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성을 바라봤다. 평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 때쯤, 서현이의 상체가 벌떡 일어났다.

“나 안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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