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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25화 (25/258)

25화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안현수의 모습에 우성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처음부터 보게 될 줄이야. 5일 차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가장 껄끄러운 상대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우성과 혜미는 수풀에서 벗어나 오두막을 향해 걸어갔다. 안현수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의 플레이어는 우성과 혜미의 등장에 각자 무기를 움켜쥐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과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플레이어들답게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만만치 않군.’

안현수 한 명만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없었다. 그 중에는 여성 플레이어도 끼어있었는데, 눈빛이나 분위기나 범상치 않았다. 아마도 현실에서 운동 꽤나 했겠지.

조심스레 다가간 우성은 이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혜미 역시 우성의 옆에 딱 달라붙어 플레이어들을 경계했다.

“이건 무슨 경우지?”

처음에는 동맹이라도 맺었나 싶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안현수는 물론이고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동맹은 아니지만, 서로 싸우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미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게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하. 그건 이제부터 설명해 주지.”

멋쩍게 웃는 안현수의 얼굴 아래로 상처 입은 오른팔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성과 헤어진 후, 어디선가 플레이어와의 싸움 중에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다쳤군.”

“얼떨결에 세 놈이랑 붙게 돼서 말이야. 간신히 이기긴 했는데, 이 꼴이야. 어, 왜 그렇게 웃어? 이봐, 그래봤자 조건은 같아.”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 우성을 보며 안현수가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우성도 부상을 가지고 있었고, 안현수 역시 부상을 입었다. 안현수는 똑같이 부상을 입은 상태라는 점을 꼬집어 조건이 같다고 말했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우성의 플레이어 특성 <불굴의 의지>였다. 이 플레이어 특성 덕분에 우성은 강인한 맷집을 얻을 수 있었고, 조금이지만 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즉, 똑같이 부상을 입은 상황이라면 우성이 유리했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다. 혜미의 <심연>과 우성의 <불굴의 의지>처럼 안현수 역시 자신만의 플레이어 특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아직까지 서로의 특성을 모르고 있는 만큼 우성은 천천히 그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무튼, 상황이나 설명해 주지?”

“아, 그렇군. 상황이야 보는 그대로야. 너랑 나랑 그랬던 것처럼, 잠시 휴전 중이지.”

휴전. 동맹이 아닌, 휴전이라면 곧 싸울 것이라는 의미였다. 두 글자짜리 간단한 단어 하나만으로도 우성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너한테도 아마 위험 경고 메시지가 전달 됐을 거야. 그렇지?”

안현수의 물음에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곳으로 몰아가는 듯한 메시지. 점차 그 범위를 좁혀온 위험 경고 메시지는 우성과 혜미뿐만이 아닌 살아남은 모든 플레이어들을 이 오두막을 향해 이끌었다.

“지금은 다섯이지만 이제 곧 살아남은 다른 세 명의 플레이어들도 이곳으로 모여들겠지. 경고 메시지를 무시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네 말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모였을 때 싸우자, 그런 건가?”

“바로 그거지.”

양 손을 부딪쳐 짝 소리를 낸 안현수는 고개를 크게 몇 번 끄덕였다.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번거롭지는 않은 방법이었다.

우성은 문득 이 방법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안현수가 아닐까 생각했다. 두 명의 플레이어들은 우성과 혜미처럼 거리를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고, 안현수와 다른 여성 플레이어는 서로 멀리 동떨어져 있었다. 우성과 혜미가 오기 전까지의 대립 구도는 1:1:2의 상황. 안현수에게 썩 유리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안현수와 여성 플레이어가 가장 먼저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 제안을 신청해 전투를 소각 상태로 만들고, 다른 두 명의 플레이어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겠지.

문득 안현수의 머리가 꽤 비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명의 플레이어가 모두 모이게 되면, 결과는 난전. 수적 우세가 아닌, 가장 강한 한 사람이 살아남게 된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안현수에게 있어서 이만한 환경도 없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좋다. 우리도 기다리지.”

“탁월한 선택이야.”

우성과 혜미의 합류로 현재 오두막 근처에 모여 있는 플레이어는 모두 여섯. 남은 플레이어는 둘이었다. 그들이 모두 모일 때까지 우성과 혜미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찬가지로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우성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건 몸을 쉬어두는 것. 즉, 컨디션 조절이었다.

안현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성 역시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이틀 전이라면 모를까, 부상을 입은 안현수라면 한 번 싸워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침이 밝은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5일 차의 하루는 꽤 여유가 남아 있었다. 우성은 모든 플레이어가 모일 때까지 쉬기로 결정했고, 혜미는 두 자루의 단검을 꼭 붙잡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긴장이 될 만하다. 눈앞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이 지옥 같은 배치고사를 5일 차까지 살아남은 사람들. 혜미 역시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성이라는 든든한 창과 방패가 옆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각오를 다지는 모양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생긴 게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남은 두 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도착했다. 그는 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남자였는데, 옷 여기저기가 찢겨져 있는 반면 이렇다 할 부상은 없어보였다.

남은 두 명의 플레이어는 분명 한 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렇다면 이들 중 두 명 이상 팀을 이룬 플레이어는 우성과 혜미를 포함해 두 팀밖에 없었다. 확실한 동맹을 확보한 우성의 입장에서는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자세한 설명이 끝난 뒤, 새로운 플레이어 역시 조건을 받아들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기를 움켜쥔 채 자리를 지켰다.

해가 중천에 뜨고, 조금 기울어질 때쯤이었다. 오두막을 둘러싼 가운데 이렇다 할 소식이 없자 다시금 안현수가 넉살좋게 나섰다.

“이러지들 말고 소개들 하지 그래? 다른 한 녀석은 소식도 없고, 심심하기만 한데.”

“얼굴 한 번 두껍군. 조만간 그 얼굴에 창을 꽂아 넣을지, 칼을 꽂아 넣을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안현수의 제안에 두 명을 팀으로 이룬 플레이어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의 표정은 이 자리에 모인 그 어느 누구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긴, 그렇게 보면 웃고 있는 낯짝은 안현수 말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삐딱한 대답에 안현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지 표정이 잠시 굳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이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하얀 웃음을 내비췄다.

“그럼, 지금 당장 칼부림이라도 한 판 할까?”

“우리야 뭐 아쉬울 것 없지.”

유독 ‘우리’라는 말에 힘을 주는 모습이 사뭇 유치하게 들렸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들은 하나가 아닌 둘이라는 점을 꼬집어 보인 것이다.

안현수도 그게 썩 마음에 걸렸는지 이내 미간이 三자를 그렸다. 하지만 한 번 세게 나온 것, 그도 물러설 순 없었다.

“남자새끼가 쪽수 믿고 덤비기는.”

“그만 들 하지?”

그 때, 잠자코 있던 우성이 입을 열어 안현수를 말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현수와 두 명의 플레이어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우성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잔디 바닥에 앉아있던 우성은 몸을 일으켰다. ‘아직까지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무기는 꺼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아?”

“무슨 소리냐?”

안현수와 다툼을 벌이던 플레이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아도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표정을 구기자, 인상 한번 더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우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배치고사다. 게임 ‘아포칼립스’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어. 나흘 동안 죽은 플레이어들? 아마 게임이 시작되면 다시 마주칠 수도 있겠지. 그들은 ‘사망자’가 아닌, ‘탈락자’일 뿐이야.”

“…….”

“지금부터 얼굴 붉혀서 좋을 게 있나? 굳이 그렇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후 본격적인 게임에 들어가서까지 오늘 일은 잊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생각해 둬야지. 안 그래?”

우성의 말은 백번 옳았다. 모두들 착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과정은 어디까지나 게임을 시작하기 전 준비를 위한 ‘배치고사’일 뿐이다.

오늘이 지나고,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하게 된다면 여기에 모인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죽었다고 생각한 플레이어들 모두가 게임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오늘 생겼던 악연 관계가 꼬리를 잡게 된다면 곤란하게 될 건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가 싸우기 시작하면, 구경만 할 것 같아? 그럼 웃는 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플레이어 한 명이다. 난 그 꼴은 못 보거든.”

“……우릴 말린 이유는 그거였나?”

“뭐, 그것도 있고.”

플레이어의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우성의 속내는 따로있었다.

‘안현수는 내 거거든.’

안현수. 배치고사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부동의 1위를 유지한 플레이어.

우성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만 하더라도 2750포인트였다. 안현수는 유일하게 그보다 많은 양의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였다. 아마 못해도 3000포인트가 넘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우성은 안현수를 가장 큰 타깃으로 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현수만큼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1500포인트 이상의 어마어마한 먹잇감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1등은 나다.’

그런 생각이 막 떠오를 즘, 안현수가 불평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한 놈은 어지간히도 안 오는군.”

마지막 플레이어가 모습을 드러내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눈에 띄게 기울어진 걸 보면, 족히 세 시간은 지나지 않았나 싶었다.

모두의 불만은 당연했다. 하루가 아무리 길다고 해도, 배치고사는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한 명이 남지 않으면 살아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 거, 마지막 놈이 오면 그 새끼부터 죽이는 게 어때?”

조용하게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던 여성 플레이어의 제안이었다. 조금 비겁하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그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경쟁자 한 명이 줄어드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 때, 오두막 주변 숲속을 지켜보던 우성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하나같이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에는 물음표가 그러져 있었다.

“저길 봐라.”

우성이 손가락 끝으로 숲속을 가리켰다. 언뜻 보면 그냥 모두들 똑같이 지나쳐온 숲 그대로였지만, 자세히 보면 달라진 점을 볼 수 있었다.

타닥, 타닥-.

익숙한 소리와 조금씩 코를 찌르기 시작하는 탄 내. 게다가 숲 속 멀리 보이는 화사한 반짝거림. 그것을 발견한 플레이어들은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확인한 메시지의 ‘위험 경고’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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