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살아남은 자들>
어느 순간부터인지 플레이어들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둘이든, 셋이든, 혼자서 움직이는 플레이어는 드물었다.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길을 걷다가 마주친 플레이어 둘을 상대로 접전을 벌여야 했다. 나흘 차까지 살아남은 만큼, 플레이어들은 실력과 독기를 가지고 있었다.
혜미가 한 명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동안, 우성은 간신히 플레이어 한 명을 처치할 수 있었다. 나흘 동안의 경험 덕분인지 무기를 휘두르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지만, 기본적인 실력은 분명 우성이 위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둘이 상대였다면 아무리 우성이라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나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플레이어 둘을 상대하기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우성은 혜미와 동맹을 맺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성은 애초의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살인에 대한 대가가 있는 만큼 동맹이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플레이어들은 꽤 유동적으로 팀을 구축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배치고사 첫날밤에만 해도 세 명의 플레이어가 동맹을 맺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혼자 활동하는 안현수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생존 플레이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팀을 이룰만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팀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고 봐야 한다. 우성과 혜미처럼 말이다.
나흘 차의 깊은 밤.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우성과 혜미는 수풀을 걷어내며 차근차근 걷고 있었다. 혜미야 심연(深淵) 특성이 있는 만큼 무리 없이 잘 걷고 있었다. 만약 플레이어들이 주위에 있다고 해도 미리 감지할 것이다. 그거야말로 우성이 혜미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였고 말이다.
[띠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실 수 없습니다.]
정처없이 걸음을 걷던 중, 우성과 혜미의 눈앞에 경고 알람이 떠올랐다. 메시지는 곧 다시금 왔던 길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대충 시스템을 알 것 같았다.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살아남았을 때면 모를까, 배치고사가 막바지에 달하며 소수밖에 남아있지 않은 지금은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마주치기란 쉽지 않았다.
게임 시스템은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마주치게끔 만들고 있었다. 숲 바깥으로 움직이려고 하면 위험 경고가 떠오르며 플레이어들끼리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유도했다. 아마 왔던 길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문득 이대로 계속 가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지 궁금했지만, 우성은 굳이 모험을 하지 않기로 했다. 하프 구울 정도면 몰라도 이런 숲 속에서 괴물 원숭이와 같은 놈들을 만난다면 꽤나 곤란할 수밖에 없다.
사박-.
어느새 말이 없어진 두 사람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 때, 등 뒤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어어어어-.
“……설마 위험이라는 게 고작 이건가?”
하프 구울. 소리로 보아 한 놈이었다. 이 정도를 위험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내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어디까지나 하프 구울 한 마리는 경고일 뿐이다. 아마도 경고를 무시한 채 더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한 마디가 아니라 더 많은 수, 아니 어쩌면 하프 구울이 아닌 더 위험한 무언가를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저 녀석부터…….”
한숨과 함께 검을 빼들려던 우성의 옆으로, 혜미가 쏜살처럼 달려들었다. 그녀의 양 손에는 어느새 두 자루의 단검이 곧추세워져 있었다.
사악-, 사악-.
엑스자로 교차된 단검을 크게 휘두르자, 혜미의 단검이 하프 구울의 목과 가슴을 베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우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몇 번 마주쳤던 만큼 하프 구울에 대한 공포는 덜하겠지만, 설마하니 먼저 검을 빼들고 나설 줄은 몰랐다.
가슴쪽 상처는 그렇다 쳐도, 목이 베인 이상 하프 구울도 더 이상 움직일 순 없었다. 평소의 움직임처럼 느릿하게 쓰러진 하프 구울을 내려다보며 혜미가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힘들다기보다는, 긴장한 탓이었다.
그녀도 꽤나 오래 생각했을 것이다. 하프 구울이라는 괴물을 상대로, 그리고 사람을 상대로, 선뜻 검을 휘두르고 달려들기란 쉽지 않다. 보통 정신력으로는 힘든 일이거니와 싸움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가녀린 여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임에는 분명했다. 처음 하프 구울을 만났을 때처럼 겁먹고 벌벌 떨거나 도망쳤다면, 동맹의 의미가 없었다. 변화한 혜미의 모습에 우성은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순간, 우성의 눈에 왼쪽 옆구리 쪽 혜미의 상처가 들어왔다.
‘이대로 계속 싸우는 건 무리겠군.’
당장 우성만 하더라도 몸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불굴의 의지>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정신력과 직접적인 영향이 강하지, 맷집에 대한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상처에 대한 효과는 일정 지혈 효과 이상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물론 우성과 혜미만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살아있는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부상을 당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당장 낮에만 하더라도 혜미가 상대했던 플레이어는 어디선가 오른팔을 다친 상태였다. 부상을 당했으니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고, 그 덕분에 혜미는 별다른 피해 없이 플레이어의 발을 묶어둘 수 있었다.
배치고사는 이제 나흘 차. 당장 내일이면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 오두막 앞에서 안현수와 결판을 지어야 한다.
갈등하던 우성은 결단을 내렸다.
5일 차.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
그 날을 위해 잠시 쉬어가기로.
**
플레이어의 수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전 날까지와는 달리, 우성과 혜미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습격 없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교대로 불침번을 보면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긴 했지만 별다른 위협은 없었다. 아마도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인 만큼,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체력을 아끼는 모양이었다.
[띠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실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메시지. 우성과 혜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메시지가 뜬 이유는 안전 지역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아치듯. 죽어가는 자의 숲은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을 어느 한 지점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쉴 만큼 쉬었다 생각한 우성은 메시지가 떠오르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슬슬 해가 떠오르며, 숲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메시지 창은 오두막과 멀어질수록 경고를 두드리고 있었다.
우성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메시지를 따라 방향을 옮길수록, 그는 까닭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띠링-! 배치고사의 마지막 아침이 밝았습니다.]
[하프 구울이 구울로 진화합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수는 총 8명입니다.]
[살아남은 플레이어들 전원에게 5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축하합니다.]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 500포인트. 그리고 8명의 생존자와, 하프 구울이 진화한 구울.
이번 메시지는 어느 하나 빼놓고 볼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우성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500포인트였다. 김정원을 죽였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의 포인트. 아무래도 배치고사의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은 우수한 플레이어들에 대한 보상인 듯했다.
‘대박이군.’
이로서 우성이 보유한 포인트는 2750포인트. 지금 당장은 이 포인트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배치고사가 끝나면 분명 필요한 곳이 있으리라.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총 8명이었다. 하루 사이 6명이 죽었다. 이제 이 살아남은 8명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랭킹을 확인하자 여전히 안현수는 1위에, 우성은 2위에, 혜미는 7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혜미가 8위가 아닌 건 의외였다. 지금껏 그녀가 죽인 플레이어는 고작해야 둘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8위는 단 한 명의 플레이어도 죽이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는 말인가?
상처 부위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거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움직일 만하다고 생각이 들자, 우성은 혜미에게 물었다.
“상처는 좀 어때?”
“오빠 걱정이나 해. 나야 어차피 오늘을 못 넘길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건… 그렇군.”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며 친근한 어조로 대답하는 혜미를 보고 있자, 문득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위험천만한 가시밭길에서 나흘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해서 그런지, 꽤나 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되도록 그녀는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배치고사의 시스템 상, 죽이지 않으면 결국 둘 다 죽게 될 뿐이다.
이상하게도 게임의 알람은 계속해서 <위험한 오두막>을 가리키고 있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길로 돌아가야 비로소 다른 플레이어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기에.
앞의 대화가 있고부터 우성과 혜미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소소한 대화라도 몇 마디 하거나 조금 친해진 이후로는 가끔씩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혜미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열지 않았고, 우성 역시 곧 혜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어색함과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갔건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명 오두막 근처로는 울창한 숲이 즐비해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나 수풀이 사라지고 하나의 작은 평원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는 유일하게 익숙한 모습의 오두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오두막 주위로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서 있다는 점이었다.
‘동맹인가? 아니면…….’
오두막 주위에 있는 네 명의 플레이어들. 무려 생존자의 절반에 이르는 플레이어들이 동맹을 이루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긴장의 끈을 다잡은 채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곧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거기,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