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정신을 차린 우성의 눈앞으로 보이는 장면은 황갈색 모래들로 가득한 황무지 벌판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무지를 바라보던 우성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방금 전까지 서현이와 함께 있었는데, 왜 자신이 여기에 있을까?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 순간 나타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소원을 이뤄주는 게임?”
[그거다.]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우성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런 황무지 한 가운데 허허벌판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나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물론 방금 전 목소리는 분명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또렷하게 들린 목소리가 환청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근처에는 마땅히 사람이 숨을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찾으려 해도 소용없어.]
“누구야? 어디 있는 거지?”
[어디 있는지는 가르쳐 주고 싶어도 나도 몰라. 누구냐는 질문에는 오더라고 대답하지.]
“오더?”
우성은 머릿속에 방금 전 보았던 퀘스트 창을 떠올렸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보았던 퀘스트 메시지 창. 그 속에서 분명 오더라는 이름을 보았던 것 같았다.
“당신이… 가이드?”
[그래.]
“이건 게임?”
[아직 시작은 않았지만, 일단은.]
게임이고 가이드고, 기억나는 대로 지껄이긴 했지만 아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황무지의 풍경도 그렇고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꿈. 그거라면 이해가 갔다. 우성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었다. 머릿속에 그린 생각이나 그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착각이 종종 들 정도로. 그리고 그 상상력 덕분인지 우성은 꽤나 꿈을 자주 꿨다. 그 꿈들 중에는 꿈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꿈들이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지금처럼 사고 역시 가능했다. 자각몽, 또는 루시드 드림이라고 하는 꿈이 바로 그것이다.
꿈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우성은 밟고 있는 모래를 한 손 가득 집어 들었다. 발바닥을 통해서도 느껴지긴 했지만 역시나 건조하고 까끌까끌했다. 어떻게 이런 느낌이 꿈을 통해 느껴지는 걸까 신기할 정도로 생생하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부정하려 들지도 말고. 그냥 선택받은 것뿐이다.]
“선택 받아? 무슨 선택을?
[게임에 참가할 플레이어로 선택받은 거지. 운이 좋은 거다. 수십억 명의 사람들 중, 플레이어로 선택받은 사람은 극히 소수니까.]
지극히 비현실적인 설명들이었다. 게임 속에 자신이 들어와 그 가이드와 채팅이 아닌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하지만 우성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황무지 벌판의 까끌까끌함과 귓속에 울리는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현실적이었다.
우성은 현재의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성은 이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더라고 했지? 네 말대로라면 이건 게임이고, 난 플레이어, 그렇다면 가이드인 너는 플레이어인 내 보조 역할이겠군.”
[이해가 빠르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빠르고. 정확히 말하자면 내 역할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대해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다.]
비록 실체는 없다지만 오더의 목소리엔 분명 높고 낮음이 있었다. 남성의 목소리로 ‘그’라고 할 수 있는 오더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다기보다는 흥겨움이 섞여있었다.
그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깊게 할 여유는 없었다. 우성은 일단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대체 이 정신 나간 게임은 누가 만든 거지?”
[대답범위 밖. 지금의 너에겐 그 질문을 할 권한이 없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우성은 오더라는 존재가 누군가 만들어낸 게임 속 기계인지, 아니면 자신처럼 인격을 가진 개체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이 게임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알 길이 있나. 아무래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과 그렇지 않은 질문이 나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게임의 제작자만큼은 알아낼 수 없었다.
생각에 잠겼던 우성이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게임 따위에 매달리고 있는지. 현실처럼 생생한 느낌에 정신이 나갔던 모양이었다.
“꼭 이 게임을 해야 하나? 난 한가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
우성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사치다. 담배 한 개비조차 아껴가며 살아가는 그에게 게임은 찰나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해괴망측한 게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네 선택은 의미가 없다.]
“……뭐?”
[넌 이미 플레이어로서 선택받았다. 플레이어 우성, 네가 원하지 않아도 넌 잠이 든 순간부터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잠이 든 순간부터?”
서현이의 상태가 나빠진 이후로 우성에겐 이렇다 할 활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은 하루 쪽잠 몇 시간이 고작이었고, 남들과 같은 여가 시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요새는 그 얼마 안 되는 잠자는 시간조차도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게임. 썩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만약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직장에 다녔다면 남는 시간에 소소하게 게임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잠을 자면서 동시에 게임을 할 수 있다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이 게임은 네가 생각하는 보통 게임이 아니야.]
마치 우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오더가 말을 걸어왔다.
“그럼?”
[게임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포인트’다. 이 포인트는 점수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현실에서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지.]
고작 게임일 뿐인데,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영향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 이 상황 자체도 비현실적인 일의 연속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황무지와 알 수 없는 남자의 목소리, 눈앞에 나타난 게임 메시지 창. 이 모든 것들이 지금껏 우성이 살아온 환경이나 상식에 비춰보기 힘든 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 흥미가 동했다. 우성은 귀를 쫑긋 세우며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돈 같은 것도 얻을 수 있는 거야?”
‘돈’
현재의 우성에게 가장 급한 한 가지다. 서현이의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그는 하루 밤낮을 포기하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질 만큼 일한다. 호기심에 물었지만 우성에겐 절실한 일이었다.
[네가 소원하는 것이 정말 돈인가? 포인트만 충분하다면 네 딸의 병을 낫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뭐?”
[거짓 같은가? 포인트만 있다면 공룡과 같은 힘을 얻는 것도, 불로장생에 가까운 수명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깟 병 하나 고치지 못할 리 없지.]
서현의 병이 나을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게임에 대한 우성의 인식은 완전히 돌변했다. 지금껏 게임이 단순히 귀찮고 피곤한 정신 나간 일이었다면, 이제는 썩은 동아줄을 대신할 튼튼한 동아줄로 바뀌었다.
“어떻게 하면… 그 포인트라는 걸 모을 수 있지?”
[그걸 설명하기 전, 게임 중 주의 사항을 설명하지.]
우성은 한 시가 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게임을 시작해서 포인트를 모아, 서현이의 병을 낫게 해 주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서현이를 생각하면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성은 주의사항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작 해야 게임, 주의라고 해봤자 크게 신경 쓸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성의 생각은 다음 오더의 설명에 무참히 깨져버렸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가지는 목숨을 라이프(Life)라고 한다.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5개의 라이프를 가지며, 한 번 죽을 때마다 닷새간의 접속 금지 패널티를 부여받는다.]
오더의 설명에 우성은 섬뜩한 가설이 떠올랐다.
“5개를 다 잃으면?”
[죽는다. 현실에서 우성, 너라는 사람은 완전히 소멸된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당연히 네가 없으면 네 딸의 존재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
모든 목숨을 잃으면 현실에서도 죽는다. 아니, 그보다는 모든 목숨을 잃으면 서현의 존재 역시 사라진다. 우성의 귀에는 이 사실이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과연 이 게임을 시작해야 할까?
의사의 말로는 시대가 좋아져서 더 이상 불치병이란 없다고 한다. 조금만 시간이 있으면 약이 나올수도 있고, 자만 하면 꾸준히 약을 투여 받다보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