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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플레이어-5화 (5/258)

5화

치지직-.

반쯤 태워진 담배가 모래사장 밑에 깔렸다. 입 안에 남아 있던 담배 연기를 도넛 모양으로 말아 뱉으며 우성은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첫째로 이게 정말 현실이 맞긴 한 걸까 하는 생각. 너무나도 뚜렷한 현실성과 생생한 촉감이 더 의심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믿기 어려운 게 현재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우성은 짧은 순간에 수도 없이 현실을 부정하고 받아들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둘째로 이 게임을 통해 서현이의 병을 고칠 생각. 이것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꿈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서현이의 병을 다른 무엇도 아니고 게임으로 해결할 수 있다니. 만약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몸이 으깨지고 찢어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게임에서의 죽음은 곧 현실에서의 죽음, 아니 존재의 소멸을 의미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법도 하건만, 우성은 두려움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현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는 그였다. 죽는 것 따위 뭐가 대수란 말인가?

걱정되는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서현이의 존재 역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단 하나 이것만큼은 몸서리 칠 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우성의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언젠가 서현이는 죽게 된다. 그렇게 두고 보느니, 제대로 된 지푸라기라도 한 번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입 안에 남아 있는 담배 향을 느끼며 우성이 눈을 감았다. 모든 생각이 하나하나 정리되고,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 상황에 맞지 않게 감겼던 눈꺼풀이 열리고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매우 침착했다.

[맑은 눈이군.]

“내가 보이긴 보이나 봐?”

[질문의 허용 범위 내. 잘 보인다. 너뿐만 아니라, 이 황무지의 모든 게 나에겐 손바닥 위처럼 훤하다.]

오더의 대답에 우성은 주위를 둘러봤다.

대체 이 황무지는 얼마나 넓은 걸까? 아까부터 불던 얕은 바람이 서서히 사라지며 황무지는 이미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황무지는 넓다 못해 지평선이 둥근 모양이 보일 정도였다. 이곳이 모래로 가득 찬 황무지가 아니라 바다였다면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넓은 황무지가 손바닥 위처럼 훤하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거짓말일지도 모르지만 우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상황 자체도 우성에겐 너무나도 생소하고 비현실적인 일. 특히 이 게임이 정말 사실이라면 게임의 가이드 역할인 오더는 게임 내에서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있는 운영자와 같을 것이다.

[준비는 다 끝났나?]

“그래.”

[그렇군. 그렇다면 이제 이동하도록 하지.]

“어딜…….”

우성은 눈앞이 흐려지며 빈혈과 흡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잠깐 시야가 사라진 정도였다.

휘청거리며 뒤로 주춤 물러난 우성은 흐려진 시야를 되찾기 위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자 잠시 후 뿌연 안개처럼 눈앞을 가렸던 흐릿함이 사라지며 곧 황무지와는 전혀 다른 시야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긴……?”

[아포칼립스에 온 걸 환영한다, 플레이어 우성.]

아무래도 아포칼립스는 이 게임의 이름인 듯했다. 황무지에 있을 때처럼 여전히 오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위는 확실히 변화했다.

아포칼립스. 게임의 이름이라기엔 지나치게 부정적인 단어였다. 파멸, 대재앙, 세상의 종말. 마지막을 의미하는 온갖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아포칼립스였다. 짐작은 했지만, 게임 이름에서부터 이미 그리 밝은 분위기는 아닌 듯했다. 아마 오더의 말처럼 서로가 죽고 죽이는, 그런 게임이겠지.

우성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 눈에 바뀐 시야는 비현실적으로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우선, 옅은 갈색의 모래와 높은 하늘이 사라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고 봐야했다. 오더에 의해 우성이 이동한 공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하얀 빈 방이었다. 아니, 하얗다고 볼 수나 있을까? 아예 색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임이 시작되긴 한 건가?”

[아니. 플레이어 우성, 넌 지금부터 이 공간에서 게임에 대해 배워야 한다. 아포칼립스가 어떤 세계이고,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 졌는지…….]

“말하자면 튜토리얼 같은 거로군.”

[정확하다, 플레이어 우성.]

튜토리얼.

게임을 시작하기 전, 게임의 기본에 해당하는 전반적인 지식을 얻는 단계였다. 보통 어느 정도 게임을 해 봤다 싶은 사람이라면 게임을 하면서 그 게임에 익숙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르다. 아포칼립스는 일반적인 게임이 아닌, 현실과 직결되는 게임이었다. 게임 속에서 직접 체득하고 배우며 게임을 익혀 나가겠다는 안일한 생각 따위는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다.

“얼른 시작해. 시간 없어.”

치지지직-.

그 때, 아무것도 없던 투명한 공간이 일그러지며 서서히 사람의 형태가 입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회색이 조금 섞인 검은 갑옷을 입은 중세 기사의 모습이었는데, 머리에 푹 눌러쓴 투구 탓인지 눈동자 외에는 얼굴의 외향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눈동자에는 검은자위가 없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작하도록 하지.”

“……오더?”

예상은 했지만 검은 갑옷에서 오더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조금 놀랐다. 오더는 쓸데없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대답 대신 말을 이어갔다.

“아포칼립스는 너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악마들의 세상이다. 그곳의 기존 주민들은 인간이 아닌 마(魔)의 성향을 가진 이른바 마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악마? 마족?”

아무래도 악마나 마족과 같은 단어는 인식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NPC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왜 이 게임의 이름이 아포칼립스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악마와 대재앙, 일치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연관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신화에서만 보더라도 악마의 재림은 자연재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재앙으로 분류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이들과 한 편이 되어 게임을 해야 한다니. 그런 우성의 꺼려하는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오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아포칼립스에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너희 플레이어들의 편이니까. 오히려 플레이어 우성, 네가 경계해야 할 존재는 같은 플레이어인 인간들이다.”

“무슨 소리지?”

“아포칼립스에서 플레이어인 너희들의 근간은 포인트(Point)라고 할 수 있다. 이 포인트는 플레이어의 힘이 되기도 하고, 생명이 되기도 하며, 무기와 아이템, 그리고 현실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포인트.

우성의 귀를 쫑긋 세우는 단어였다. 앞서 오더에게 설명을 듣긴 했지만, 이 포인트야말로 우성이 절실하게 원하는 서현이의 병을 고칠 유일한 수단이었다.

“포인트는 어떻게 하면 모을 수 있지?”

“질문 범위 안이다. 포인트를 얻는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마족의 적인 천족의 사냥. 둘째, 퀘스트. 셋째로 플레이어의 사냥이다.”

사냥과 퀘스트야 어느 게임이든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일반적인 RPG게임 대부분이 이 두 가지 요소를 통해 기본적인 즐거움과 레벨업을 위한 경험치와 보상을 획득하게 되어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앞의 두 가지와는 달리 세 번째, PVP컨텐츠는 존재하는 게임과 그렇지 않은 게임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특히나 PVP가 있는 게임들 중에서도 PVP를 유도하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것을 즐기는데서 끝내는 게임도 있다.

오더의 말을 이해한 순간 우성은 소름이 끼쳤다. 플레이어의 사냥이라면 당연하게도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PVP가 있는 게임을 해 본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는 게임이면서도 게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게임에서의 목숨은 현실에서의 목숨과 같았다. 만약 다섯 개의 라이프 중, 네 개의 라이프를 잃은 플레이어가 있다면 그 목숨이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아포칼립스에서 목숨의 무게가 현실에서 목숨의 무게와 같아지는 것이다.

“이것 참 끝내주는 설정이네.”

마른 침과 함께 중얼거린 우성이 오더의 흰자위를 노려보며 마음 속으로 갈등했다. 과연 자신이 이 물음을 던져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여태 살아왔던 것처럼 양심에 몸을 맡길 것인가.

그의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차분히 마음을 정리한 우성은 바짝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떨리는 목소리를 열었다.

“다른 플레이어를 죽였을 때… 얼마만큼의 포인트를 얻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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