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321화 (27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1화

55. 화룡점정(26)

LED 전선을 꼬아 인체를 표현한 작품 <인간> 앞에서 이인호와 김지우가 감탄했다.

미국 출신의 미술가 올리버 프라이스는 동맥과 정맥을 빨갛고 파랗게 점멸시켜 혈액이 순환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인호는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루어 배치된 세 명의 LED 전선 인간을 관찰하다가 문득 발에 주목했다.

피부가 덮인 유일한 부위였는데 모두 색이 달랐다.

“다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저도 그렇게 보여요.”

김지우가 <인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긍정했다.

이인호의 추측처럼 <인간>은 외견이 다를 뿐 안을 들여다보면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다만 그녀는 <인간>이 취한 자세에 더 눈이 갔다.

뛰는 동작이 상당히 역동적이라 마치 무엇에 쫓기는 상황처럼 보였다.

세 개의 조형물이 삼각형을 이루니 꼭 서로가 서로를 뒤쫓거나 혹은 서로에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자세는 어때 보여요?”

“글쎄요. 엄청 열심히 뛰는 것 같은데.”

“그렇죠?”

두 사람은 한동안 고민하다가 다음 작품으로 발을 옮겼다.

“여유롭게 볼 수 있으니 좋네요.”

“그러니까요.”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개막식과 시상식을 함께 진행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시상식을 따로 진행했다.

개막식은 간단히 진행하고 방문객이 작품 감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굵직한 행사는 일주일 뒤로 예정하였다.

“수상작 위주로 관람하는 경향 때문에 바꿨다는데. 좋은 일이죠.”

“국가관 관련해서도 그렇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도 많이 변했네요.”

이인호의 말에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통을 고수했던 세계 최대 비엔날레의 개혁은 예술가와 언론, 대중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맘 놓고 즐겨도 되고. 좋아요.”

김지우가 씩 웃었다.

연재처 보자르로부터 일주일 관람권 두 장을 지원받은 덕에 비엔날레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항공료를 지원받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과거 예화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여유로웠다.

넉넉한 일정에 숙식비도 지원받으니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듯했다.

김지우의 밝은 표정에 이인호가 쑥스러워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럼 자르디니 쪽으로 가실래요? 불한당 보러.”

“재밌는 건 뒤로 좀 미루고 싶지 않아요?”

“아. 그렇죠. 하하!”

김지우가 키득댔다.

“지금 가도 제대로 못 볼 것 같아서요. 사람 엄청 많을걸요?”

고수열, 고훈, 장미래, 앙리 마르소가 참여한 덕에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본 전시보다 불한당 전시관이 더욱 관심받고 있었다.

방문객이 오죽 많을까 싶었다.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어. 저쪽으로.”

“그보다 덥지 않아요? 세상에. 땀 좀 봐. 시원한 거 마시면서 좀 쉬었다가 봐요. 시간도 많은데.”

“그럴까요?”

이인호가 서둘러 주변 카페를 찾았다.

콩깍지가 씌었는지 어리숙하고 순진한 모습마저 귀엽게 보였다.

* * *

김지우의 예상대로 불한당 전시관은 첫날부터 발 디딜 틈 없이 혼잡했다.

“와. 이거 촬영 안 될 것 같은데?”

뉴튜버 알렉스 우드가 큰길까지 이어진 줄을 보고는 당황해했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 이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홍보 요청을 받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작품을 하나하나 담긴 힘들 것 같았다.

“여러분, 불한당은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 보시다시피 뭐 들어갈 수도 없어 보여요.”

알렉스 팩토리의 시청자들도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했다.

“여기가 스페인관 맞은편이거든요? 저쪽 큰길로 가면 스위스, 베네수엘라, 러시아, 일본, 한국, 독일 이렇게 나와요. 영국이랑 프랑스도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 이쪽으로 가볼게요.”

알렉스 우드가 땀을 닦아내곤 계속 말을 이어갔다.

“여기 오실 분들은 구경할 곳을 정해두고 오시는 게 좋아요. 레귤러 티켓 사면 아르세날레랑 자르디니를 한 번씩만 입장할 수 있거든요. 티켓팅이요? 저번에는 안 기다리고 바로 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인터넷으로 미리 사는 게 좋아 보여요. 사람이 진짜 엄청 많아. 제가 베네치아 비엔날레 이번이 네 번째거든요? 근데 관람 못 할 정도로 많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알렉스 우드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인파에 연신 감탄했다.

└3일 관람권 사는 게 더 낫지 않음? 어차피 하루 만에 못 보잖아.

└일주일 관람권은 어떰?

└할인은 없어?

└도록은?

“사실 3일은 봐야죠. 할인? 원래 30유로인데 학생이나 16살 미만은 20유로에 살 수 있어요. 3일권은 55유로. 일주일 관람권은 솔직히 전문적으로 보시는 분 아니면 추천 안 해요. 도록은 좀 비싸더라고요. 100유로 하던데? 아이고. 글리치 님 도록 사라고 하시며 50달러 감사합니다.”1)

스위스, 베네수엘라, 러시아, 일본 국가관을 둘러본 알렉스 우드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기. 이거 보세요.”

고훈이 외딴곳에 자리한 한국관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그려놓은 <한으로 핀 꽃>을 발견했다.

하얀 꽃잎에 핏방울이 번진 듯한 무궁화.

알렉스는 상처 입었으나 결코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느꼈다.

└멋진데.

└무슨 꽃임?

└여긴 대기 줄이 좀 있네.

└한국관 뒤집어지지 않았나? 누가 참여함?

└서인호.

“오늘은 한국관까지 보고 갈게요. 영국이랑 프랑스도 보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알렉스가 대기 줄을 잇곤 곧장 앞에 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뉴튜브에서 미술 관련 채널 운영하는 사람인데, 잠깐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닉이에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알렉스를 알아보곤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요. 닉, 어디서 오셨나요?”

“캐나다에서 왔습니다.”

“캐나다! 멀리서 오셨는데 오늘 어떤 작품 구경하셨어요?”

“많이 봤죠. 외부 국가관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들어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네요. 하핫!”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지역 외의 국가관을 무료로 관람하다가 관람권을 사서 입장했다는 말이었다.

외부 국가관은 아직 둘러보지 못한 알렉스가 관심을 보였다.

“어떤 느낌이었어요?”

“저는 잘 모르지만 뭔가 세계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여기만 해도 이 꽃이 재밌더군요.”

닉이 <한으로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훈 작가의 그림이에요. 무궁화라고.”

“무긍하?”

“무궁화.”

“무긍화.”

“나아졌어요.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랄게요. 고마워요, 닉.”

알렉스가 캐나다에서 온 닉과 악수를 하고 돌아서자 금세 줄이 늘어나 있었다.

바로 뒤에 선 여자에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알렉스라고 해요.”

“아멜리아에요.”

“뉴튜브 촬영 중인데. 괜찮으면 몇 마디 물어도 될까요?”

아멜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서 오셨나요?”

“에딘버러요.”

“와우. 너무 멋진 곳에서 오셨네요. 여행은 재밌게 즐기고 있나요?”

“네. 뉴튜브에서만 보던 아저씨가 말도 걸고 재밌네요.”

알렉스가 입을 크게 벌렸다. 기쁜 마음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니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이렇게 안 반가워해요? 난 엄청 반가운데!”

“반가워요.”

“사인이라도 해줄까요? 아니면 사진?”

“사양할게요.”

“그 정도로 좋아하진 않는구나? 아무튼. 오늘 어떤 작품을 보셨어요?”

“아르세날레 가볍게 둘러봤는데. 예전이랑 다르더라고요.”

“어떻게요?”

“한 10년 전에 왔을 땐 전부 흑인만 다뤘거든요. 이 세상에 흑인만 있는 건 아닌데 말이죠.”

알렉스가 눈을 크게 떴다.

혹시나 아멜리아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근데 이번엔 백인이든 흑인이든 아시아인이든 다양하게 다뤄서 좋았어요. 사실 여전히 차별받는 흑인도 있고, 백인도 소외당하기는 마찬가지고. 아시아인들은 말할 것도 없죠.”

“멋진 말이네요.”

“알렉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쉽지만 저는 정치적 발언을 해서 구독자를 토막 내고 싶지 않아요.”

아멜리아가 다소 실망한 눈초리를 보였다.

“하지만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메,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줄여서 부르지 말아 주세요. 친한 것 같잖아요.”

“5분 정도 대화했으면 친한 거 아니에요? 난 우리 아빠하고도 5분 동안 대화해 본 적 없는데.”

알렉스가 손바닥을 펴 보이자 아멜리아가 웃으며 마주쳤다.

* * *

본 전시(아르세날레)를 다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하루가 후딱 지나고 말았다.

빛나는 전선으로 인체를 구성한 작품이라든가, 네 사람의 얼굴을 잘라다가 하나의 얼굴로 조합해 둔 작품 등 신기하고 재밌는 작품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햄버거 먹고 싶다.”

차시현이 침대에 엎드려 햄버거 타령을 했다.

햄버거 만드는 영상을 본 뒤로 몇 번이나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던 나도 먹고 싶어졌다.

고개를 돌려 블랑쉬와 비다, 마은찬에게도 의견을 구하니 세 사람 모두 마찬가지인 듯했다.

저녁을 먹고도 햄버거라니.

젊은 게 좋긴 하다.

“할아버지, 아저씨.”

거실로 나가자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응?”

“배고파서 햄버거 주문하려는데 드실래요?”

“배고파?”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가 턱을 당기고 잠시 고민하셨다.

“자네는 어떤가.”

“안주 삼아 감자튀김 어떠십니까.”

“음. 그러세.”

“아저씨가 주문할게. 4개면 되지?”

“네. 하나는 피클 빼주세요.”

“오케이.”

-오늘 개막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프랑스‧한국 공동 전시관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막 돌아서려는데 TV에서 불한당 이야기가 나와 멈췄다.

-두 국가의 공동 전시관에는 오늘 하루 4만 명이 방문하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최대 관심사로 부상하였습니다.

“사람이 많긴 하더만.”

“시작이 잘 되어 다행입니다.”

중간에 한 번 가보려고 했다가 사람이 원체 많이 몰려 있어 나조차 못 들어갔었다.

조직위원회에서도 인파가 너무 몰려 안전이나 감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작가들이 전시관을 직접 찾는 건 자제해 달라고 했었다.

-공동 전시관을 방문한 미술사학자 캐롤라인 스트릭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이 드디어 미술계를 주도하게 되었다고 평했습니다.

“껄껄. 저분은 우리 훈이한테 항상 좋은 말만 해주시는구나.”

“그러니까요.”

칭찬이 싫을 리 있겠냐마는 가끔 민망해질 때가 있다.

그나저나 앙리가 어떤 작품을 내놓았는지 궁금하다.

뮌스터 시상식 이후로 또 연락을 안 하고 있는데, 어떻게 화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군가와 싸우면 항상 그대로 멀어진 탓에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이렇게나 힘든 줄 몰랐다.

내일 불한당 전시관에 올까.

사람 많은 장소를 싫어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 번 얼굴은 비춰봐야겠다.

* * *

1)2019년 기준 레귤러 티켓 값은 25유로. 65세 이상은 20유로. 학생 또는 26세 미만은 16유로. 3일권은 48유로. 도록은 85유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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