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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322화 (27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2화

55. 화룡점정(27)

베네치아 비엔날레 개막 이틀 차에 불한당 전시관을 찾았다.

어제보다는 사람이 줄지 않았을까 기대했건만 다들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

줄이 대로까지 이어져 있다.

인근에 있는 스페인관과 스위스관 앞은 적어도 건물 밖까지 나와서 기다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거 난감한데.”

방태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와 할아버지, 마은찬이야 참가자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다지만 시현이와 비다, 블랑쉬는 어디까지나 관람객이다.

이 아이들을 두고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베네치아까지 찾아와 준 분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데 친구들을 앞세워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어 곤란하다.

“저녁때는 좀 낫지 않을까요? 다른 곳 둘러보다가 다시 와요.”

“그래. 여기서 기다릴 바에야 그러는 게 낫겠다. 어떠십니까, 파브르 씨?”

할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신 듯 블랑쉬의 부모에게 동의를 구하셨다.

“이거 발라.”

“뭐야?”

“모기 퇴치제. 베네치아에는 모기가 많대.”

시현이와 비다, 블랑쉬는 아무래도 좋은 듯하다.

블랑쉬가 친절하게도 아이들과 내게 모기 퇴치제를 뿌려주었다.

“근데 누나 모기는 싫어? 모기도 곤충이잖아.”

“싫어.”

그 누구도 모기를 좋아할 순 없을 거다.

* * *

치맛자락 같은 꽃잎이 함박만 하여.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백설기는 <작약> 앞에서 넋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화폭을 가득 채운 한 송이 작약꽃이 어찌나 싱그러운지 향을 내는 듯했다.

고혹적인 색감에 취한 탓일까.

눈을 감아도 여전히 향을 맡을 수 있었고 가슴 속에서 다시 한번 작약이 피어났다.

무엇이 그리도 부끄러운지 작약은 아리따운 잎을 잔뜩 모으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뜨자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자태를 자랑하는데, 함께한 유라임이 감탄했다.

“박력 장난 아니다.”

꾸밈없는 감상에 백설기가 작게 웃고 말았다.

확실히 100F(162.2㎝×130.3㎝) 캔버스를 가득 채우니 그림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백설기도 유라임도 장미래가 왜 그토록 사랑받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큰 화폭에 단지 꽃 한 송이를 그렸음에도 그림의 밀도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도리어 바로 눈앞에 꽃을 둔 것처럼 흡입력이 있었다.

“나 진짜 놀랐잖아. 향도 나는 것 같고.”

“너도?”

유라임의 말에 백설기가 깜짝 놀랐다.

그림이 아름답고 강렬하여 착각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본 친구도 마찬가지라 하니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장미래는 바로 옆에 걸린 마은찬의 <꼬꼬 꺅꺅>을 보며 웃고 있었다.

대단한 줄은 익히 알았지만 단 한 점의 그림으로 사람을 홀리니 새삼 그녀가 달리 보였다.

“선배.”

백설기와 유라임이 다가가자 장미래가 웃으며 <꼬꼬 꺅꺅>을 가리켰다.

“이것 좀 봐. 너무 귀엽지.”

마은찬의 <꼬꼬 꺅꺅>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 수탉과 한국인에게 친근한 까치를 표현한 그림이었다.

수탉과 까치가 부리를 맞대고 눈이 닿을 듯 가까이에서 서로를 노려보는데, 목 부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덕에 하트 모양의 틈이 나 있었다.

백설기와 유라임도 피식 웃고 말았다.

“꺅꺅?”

“우는 소리 아니야?”

꼬꼬도 그렇고 어감을 살려 우는 소리를 표현한 것 같았다.

“까치가 꺅꺅 하고 울어요?”

세 사람이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다가 유라임이 정신을 차렸다.

“작약 봤어요. 진짜 대박.”

“정말?”

“정말로요. 막 향 나는 것 같아서 신기했는데 설기도 그랬대요.”

백설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미래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선배가 왜 웃는지 몰라서 두 사람이 의아해하니, 장미래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향수 뿌렸으니까. 그림에서 냄새가 어떻게 나. 물감 냄새면 몰라도.”

“아.”

유라임은 굳어버렸고 백설기는 부정했다.

“진짜 향이 나는 것처럼 심상이 강하다는 뜻이니까요. 너무 멋있었어요.”

“그랳. 고마워.”

장미래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인사하자 유라임이 다시금 물었다.

“어떻게 그린 거예요?”

작품 의도를 묻는 말이었다.

“그런 거 없어. 그냥 예쁜 꽃 그리고 싶었어.”

장미래가 <작약>을 감상하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새로운 거 찾고. 멋진 생각 덧붙이는데 난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예쁜 거 좋아하는 게 뭐 잘못됐나?”

장미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은 지 오래된 미술계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다른 매체가 충분히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미학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화만이, 수채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많이들 묻더라고. 꽃을 왜 그리냐고.”

장미래가 고개를 돌려 백설기와 유라임과 눈을 마주했다.

“예쁘니까.”

이번에는 두 사람이 미소 지었다.

현재 미술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면서 한국대학교 교수이니,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장미래의 답은 간단했고 그것을 말하는 태도는 당당했다.

“좋아하는 데 굳이 이유를 줄줄 나열할 필요가 있나? 좋아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 말이야.”

장미래가 마은찬의 <꼬꼬 꺅꺅>을 보다가 입구로 시선을 옮겼다.

단풍이 계절도 모른 채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 * *

저녁 무렵이 되자 예상대로 제법 한산해졌다.

국가전이 이뤄지는 자르디니에는 식당이 없어서 저녁을 먹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느긋하게 불한당 전시관을 찾을 수 있었다.

“와.”

작품을 내고도 일정이 꽤 겹쳤던 터라 전시 관련해서는 방태호를 믿고 맡겨두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멋지다.

“어때?”

“너무 멋져요.”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기둥 두 개가 서 있다.

왼쪽은 파란색, 오른쪽은 빨간색이며 그 가운데로 하얗게 도색된 전시관이 눈에 들어오니 얼핏 삼색기(La Tricolore: 프랑스 국기)처럼 보이기도 하다가.

건물 입구로 이어진 돌길에 아 하고 감탄하고 말았다.

사괘를 형상화한 검은 돌 발판을 보니 영락없는 태극기다.

한국과 프랑스의 공동 전시관다운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아래로도 내려가네?”

차시현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완전히 지하는 아니고 지상과 반쯤 걸쳐 있다.

1, 2층으로 구성한다고 들었던 터라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방태호가 씩 웃었다.

“이유가 있어서. 들어가자.”

시야를 가리지 않으려고 했는지 내부가 상당히 독특하다.

둥근 건물 벽면을 따라 양쪽으로 길이 나 있고 가운데는 텅 비었다.

길을 따라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아래로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내부가 상당히 넓음에도 줄을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런 구조 때문인 듯하다.

앙리가 디자인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는지 의아하다.

“저기다.”

마은찬이 자기 작품을 찾아갔다.

그림이 어떻게 전시되었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은 나 또한 마찬가지.

뒤돌아봤지만 입구 바로 위에 높이 걸린 탓에 바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1층 반대편으로 가거나, 2층에서 내려다봐야 할 듯싶다. 지하 가운데에서 올려다봐도 보일 듯싶다.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기며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던 중 장미래의 <작약>을 발견했다.

그녀의 작약 연작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서, 지하로 내려갈 생각도 잠시 잊은 채 멍하니 보고 말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옮기니 귀여운 그림을 발견했다.

마은찬의 <꼬꼬 꺅꺅>이다.

“꼬꼬 꺅꺅?”

“꼬꼬라고 부르잖아. 까치는 꺅꺅 하고 울고.”

감사하게도 작가가 직접 설명해 주었다.

분명 서로 한바탕할 듯이 머리를 맞대고 노려보는데 두 새 사이의 공간이 하트 모양으로 비어 있어 웃음이 나고 말았다.

“만화 같다.”

차시현의 감상이 마음에 든 모양.

마은찬이 씩 하고 웃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고개를 드니 <149,597,870.696㎞>가 높이 걸려 있다.

크기가 제법 되는 덕에 충분히 잘 살펴볼 수 있는데 묘하게 더 빛나는 느낌이다.

“어…….”

1층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지하 벽면에 나무 기둥과 뿌리가 그려져 있다.

“훈아.”

방태호가 부르기에 고개를 돌리니, 그가 가리킨 곳에 단풍 모양, 아니, <149,597,870.696㎞> 모양의 창이 나 있다.

2층 벽면의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내려온 노을이 <149,597,870.696㎞>을 비추어, 자연스러운 조명 역할을 해주었다.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마르소 씨가 6개월이나 공들여 만들었어.”

“네?”

무슨 말인지 듣고도 믿기지 않아 되물어 버렸다.

“노을이 드는 방향이랑 각도 계산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 계절마다 고도가 달라지니까.”

방태호는 앙리가 기상학자 여럿을 대동해서 창을 냈다고 덧붙였다.

“액자 의뢰할 때 피에르 말로 씨가 그러더라고. 자기가 어떤 액자를 만들어도 이 전시관보다 멋진 액자는 만들어 줄 수 없다고.”

이 바보가.

베네치아에 몇 달씩 틀어박혀 있길래 작품이 잘 안 나오나 걱정했거늘.

이런 걸 준비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저기.”

목울대가 묵직해져 어떤 말도 꺼내기 힘든 와중에 방태호가 나무 그림을 가리켰다.

“단풍이 떨어지는 아래잖아. 2층 가보면 나뭇가지랑 단풍잎을 그려놨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고개를 드니 방태호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 마르소 씨가.”

침을 삼키고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이르니 과연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과 단풍으로 가득한 벽면과 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한쪽 벽에 앙리 마르소의 서명이 적혀 있다.

Henry Marceau

“훈아.”

미셸 목소리다.

“미셸.”

“이건.”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을 나누기도 전에 벽면에 서명한 의도를 묻고 말았다.

미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전시관이 앙리 출품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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