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320화
55. 화룡점정(25)
“엎드려.”
앙리 마르소가 침대에 걸터앉아 고압적으로 말했다.
미셸 플라티니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
주인에 예속되어 그 어떤 지시에도 복종하는 충직함.
작은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잘했어.”
왕! 왕왕-
웦! 웦! 웦어웡엎-
왘올오아앙앍-
앙리 마르소가 육포 포장지를 뜯자 빠삐용을 비롯한 강아지 아홉 마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강아지들에게 덮쳐진 앙리 마르소가 침대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미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 옆에 아홉 개의 개밥그릇이 나란히 놓여 있고 이빨 자국이 난 공 여럿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분명 매일 청소할진대 카펫과 이불에 털이 잔뜩 묻어 코가 간질거렸다.
며칠 사이에 난장판이 된 침실을 확인한 미셸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아르센이 황당해서 넋이 나간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며칠 전 젠느빌리에에서 입양해 왔습니다. 귀엽죠?”1)
미셸이 손을 펴 보였다. 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물었다.
“심하잖아요. 대체 몇 마리를.”
“여덟 마리입니다. 작가님도 잘 따르고 빠삐용하고도 잘 지내더군요. 한 번 버림받았는데도 건강하고 밝게 지내니 기특하지 않습니까?”
아르센이 태연히 답하자 미셸이 고개를 저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한 뒤로 며칠 시간을 둔 그녀는 앙리가 충분히 고민하길 바랐다.
구속하고 독점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길 기대했다.
“아이들을 데려오시고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아르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거 다행이네요.”
“정원에 집도 짓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직접 디자인했죠.”
미셸이 이마를 짚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들어가 보시죠. 다들 장난꾸러기지만 귀엽습니다.”
“사양할게요.”
아르센이 안타까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훈이 일로 마음이 복잡한 가운데 대표님하고도 소원해지니 외로우셨던 모양입니다.”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르센이 앞장서 걷자 미셸도 뒤따라 앙리의 작업실로 향했다.
어두운 작업실에 들어서서 아르센이 손뼉을 두 번 치자 커튼이 걷히고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
캔버스가 가득 놓여 있었다.
해바라기 그림 사이에 미셸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11점의 그림 모두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데, 미셸은 앙리가 언제를 표현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옷, 신발, 시계 같은 소품들은 물론 당시의 분위기까지 생생히 전달되었다.
“저러고 계시다가도 밤만 되면 이곳에서 대표님을 그립니다.”
그림은 대부분 미완성이었다.
완벽주의자인 앙리 마르소가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만족하지 못했기에 몇 번이고 다시 그린 것이었다.
* * *
앙리 마르소가 촵촵 소리를 내며 간식을 먹는 강아지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알아듣는 말은 몇 없어도 충직했다.
앞발을 내밀고 엎드릴 수도 있었으며 공을 던지면 꼬리를 흔들며 물어왔다.
고작 일주일 만에 정이 들어서 침대 위로 올라와도 귀엽기만 했다.
그의 독점욕을 조금이나마 채워주어 미셸과 고훈으로 인해 복잡했던 심경을 위로해 주었다.
“……맛있냐.”
촵촵촵-
강아지들은 간식 먹는 데 집중하였고 오직 빠삐용만이 고개를 들 뿐이었다.
앙리가 육포를 하나 더 뜯어 빠삐용에게 조금 나눠주었다.
강아지들에게 위로받은 앙리 마르소는 미셸과 고훈을 향한 마음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랑한 미셸은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자신을 가꿔나가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뒤처지거나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반했었다.
고훈을 아끼는 이유도 비슷했다.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그에게 고훈의 해바라기는 여태껏 생각지 못한 답을 보여주었다.
앙리는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을 가진 천재를 통해 본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막연했던 그의 캔버스에서 잘난 점과 부족한 면이 드러났고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소중했고 그래서 갖고 싶었지만 자신 안에 가둬둘 순 없었다.
그래서는 미셸도 고훈도 처음 사랑했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터였다.
앙리 마르소가 육포를 내던지고는 침대에 눕자 빠삐용이 다가와 앙리의 뺨을 핥았다.
“더러워, 인마.”
앙리가 빠삐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2030년 8월 1일.
마침내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개막하였다.
나라별 전시관 운영에 부정과 비리가 있다는 제보가 속출하여 한때는 국제전(자르디니)을 폐지하고 본 전시(아르세날레)만 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한국‧프랑스 공동 전시관 설립에 힘입어 반대 여론을 잠재울 수 있었다.
고수열, 장미래, 고훈, 앙리 마르소 등 인기 작가들이 본 전시를 포기하고 국제전에 참가하니, 국제전 폐지를 주장하던 이들도 마냥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명분을 얻은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행사를 앞두고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동안 모든 운영을 각 국가에게 맡겼던 관행을 벗어던지고 감사단을 파견하니.
도리어 미술 애호가들은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건강히 운영되고 있다고 믿었고 세계 최대의 미술제는 유례없는 관심 속에 개최될 수 있었다.
“와.”
베네치아에 도착한 고훈과 차시현, 비다 라바니, 블랑쉬 파브르, 마은찬이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 구역이 아님에도 거리마다 사람이 가득했다.
“엄청 많다! 이런 거 처음이야!”
“나, 나는 돌아가면 안 될까?”
“매미다. 우는 소리가 달라.”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화구통 챙겨올걸.”
차시현, 비다, 블랑쉬, 마은찬이 저마다 감탄했다.
“화구통은 왜요?”
고훈이 마은찬에게 물었다.
“초상화 알바하면 돈 좀 벌 것 같지 않아?”
고훈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얘들아. 손 꼭 붙잡고 다녀야 한다. 떨어지면 큰일나.”
고수열이 아이들을 다독였다.
부모와 동행한 블랑쉬와 마은찬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비다는 해외에 나온 적이 처음이었고 고훈과 차시현은 너무 어렸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한눈팔다가 길이라도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비둘기다! 여기도 있네?”
차시현이 비둘기를 가리키자 비다 라바니가 좋아했다.
“귀엽다. 파리에선 보기 힘든데.”2)
“비둘기 중에는 과일만 먹는 비둘기도 있대.”
“과일은 나도 잘 못 먹는데.”
“그러고 보니 이때쯤이 살이 올라서 맛있는데. 비둘기 파이 하는 데 없으려나.”3)
아이들과 마은찬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훈을 바라보았다.
“왜?”
“먹으면 안 돼! 더럽잖아!”
차시현이 고훈을 붙잡고 흔들었다. 해바라기 씨를 주워 먹는 등 위생 관념이 부족한 친구가 걱정되었다.
“이런 애들은 먹으면 안 되지. 기생충 있잖아.”
고훈이 웃으며 차시현을 달래자 비둘기를 유심히 바라보던 마은찬이 슬쩍 물었다.
“진짜 맛있어?”
“네. 지방이 많아서 닭고기보다 고소해요.”
고수열은 아들 부부가 고훈에게 참 다양한 걸 먹였다는 데 다소 충격을 받은 채 아이들을 인솔했다.
한편.
장미래, 백설기, 유라임도 참가자 자격으로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즐기고 있었다.
개막식에 굳이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셋째 날에 모이기로 약속했었다.
아르세날레를 찾은 세 사람이 감탄했다.
“저 여기 본 적 있어요! 카날레토!”4)
“나도. 거기서 여기 다리 만들고 있었잖아. 어떻게 이렇게 똑같아?”
“그러니까! 대박. 미쳤다. 진짜.”
유라임과 백설기가 연신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다를 뿐, 300년 전 풍경화의 대가가 그렸던 베네치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배님은 이런 데 많이 와보셨죠?”
유라임이 고개를 돌렸다.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장미래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나도 처음. 진짜 너무 멋있지 않아?”
유라임과 백설기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날도 진짜 좋다.”
“그러니까요.”
“저기, 저기서 저 좀 찍어주세요.”
세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걷다가 한 전시관 앞 정원에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기가 너무나 자욱해 건물 외관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뭐야?”
“어디 불났나?”
안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걸어왔던 길에 날도 너무나 화창했고 묘한 냄새도 났다.
일행이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른 관광객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저기요.”
한 관광객이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을 불렀다.
“불이 난 거예요? 지금이라도 신고할까요?”
“아닙니다, 부인. 라라 파바레토 작가의 작품입니다.”5)
“이 연기가요?”
“네. 즐겁게 관람해 주시길 바랍니다.”
대화를 엿들은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미래, 백설기, 유라임도 안심했지만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요새 진짜 신기한 작품 많이 나오네요.”
“그러니까. 왜 공기랑 빛으로 만들었다는 조각상도 있고.”
“그거랑 이건 좀 다르지 않나? 그래도 이건 공간 개념을 활용했잖아.”
“그건 또 그러네요.”
“뇌가 아프려고 해.”
유라임이 머리를 부여잡고 앓는 시늉을 하자 장미래와 백설기가 작게 웃었다.
* * *
1)SPA(Société Protectrice des Animaux).
1845년에 설립된 동물 보호소.
나폴레옹 3세 시절에 공공시설로 인정받아 프랑스 파리 젠느빌리에에서 첫 보호소를 열었다.
2)파리시는 비둘기의 배설물 때문에 옛 건축물이 부식되자 비둘기 개체 수를 줄이고자 대형 둥지를 만들어 알이 부화할 수 없게끔 흔들거나 매를 푸는 등 꾸준히 노력해 왔다.
3)비둘기 고기(Squab)는 유럽과 지중해 연안 등지에서 식재료로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프랑스에서도 먹기 시작하여 현재는 고급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살이 차오르는 늦여름의 비둘기 스테이크 또는 구이는 파인다이닝 같은 고급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이기도 하다.
4)<아르세날레 입구의 풍경>, 카날레토, 1732년.
본명은 지오반니 안토니오 카날. 베네치아 출신으로 풍경화의 대가였다.
5)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작 .
설치 예술가 Lara favaretto(1973년생)는 중앙 파빌리온 앞을 연기로 자욱하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