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21화 (7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1화

29. 해바라기씨(4)

뒤숭숭한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작업을 마쳤다.

길쭉한 원통형 총알의 옆면을 그리는 대신 총알의 정면을 그림으로써 레이몽드와 뤼팽을 부각했고.

반쯤 보이는 총알 옆면에 이지도르와 헐록을 배치하여 그들의 왜곡된 얼굴과 자세로 감정을 표현해냈다.

<해바라기>, <손님>, <행복>, <서리 밀밭>, <가면>을 그릴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기술적으로 다소 벅찼다.

총알의 매끈한 질감과 그 위에 반사된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덕분에 구상을 마치고도 몇 번이나 다시 그려야 했고 약속한 날짜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그림을 보내기 전에 우선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니 곧장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계속 기다렸던 모양이다.

“네, 노먼.”

-넌 천재야.

다짜고짜 꺼낸 칭찬에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먼이 꺼낸 말이라 기쁘기도 하다.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니에요.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랬겠지. 이런 걸 뚝딱 만들면 그게 사람이겠어?

노먼이 잔뜩 띄워준다.

“노먼이 그리기만 하면 괜찮다고 해서 하긴 했는데, 이거 찍을 수 있어요?”

-그럼. 말했잖아. 그릴 수 있는 건 뭐든 촬영할 수 있다고.

날아가는 총알을 어떻게 촬영할 수 있는지 몰라도 노먼의 말이니 믿음이 간다.

-혹시나 해서 맡겼는데 그게 정답이었어. 네 이미지로 갈게. 고생했어.

워낙 중요한 장면이라 나뿐만 아니라 컨셉트 아트 디자인팀과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 또한 기획안을 냈는데, 노먼은 내 그림을 선택했다.

그간 고생하고 노력한 것을 인정받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원본은 태호 아저씨 통해서 부칠게요.”

-그래. 좋은 밤 보내. 또 연락할게.

통화를 마쳤다.

행복한 기분도 잠시 고요한 작업실을 보고 있으니 공허함이 밀려든다.

어수선한 마음을 잊으려고 그간 엉망이 된 작업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학교 공부를 신경 써야 할 테고 방송도 조금씩 해봐야겠다.

또 뭘 해야 하지.

할 일이 없으면 걱정이 밀려들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기암성> 콘셉트 아트 작업을 하는 것으로 겨우 억눌렀던 우려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할아버지가 혹시라도 내게 물어본다면. 내가 정말 당신의 손자냐고 물어보신다면 나는 거짓말할 수 있을까.

차마 당신의 손자가 아니라고.

백 년도 전에 죽은 네덜란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분은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돌려달라고 하신다면, 손자를 돌려놓으라고 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분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그분을 이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나는 어쩌면 좋을까.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이 질문보다 어렵진 않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 * *

“교수님.”

“응?”

한국 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육 조교 이나리가 장미래 교수를 빤히 보았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정장 치마를 입고 안 하던 화장도 한 것이 의아했다.

“오늘 누구 만나요?”

“왜? 나 오늘 예뻐?”

장미래가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니요. 이상해요.”

이나리 조교가 눈썹을 찌푸렸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그림은 그렇게 잘 그리시면서 화장은 왜 그렇게 해요?”

장미래가 눈과 입을 크게 떴다.

자신의 미적 감각에 제법 자신이 있던 그녀로서는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상해?”

“네. 중학생이 엄마 흉내 낸 것 같아요.”

이나리의 냉정한 평에 장미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무실 입구 쪽에 걸려 있는 거울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가?”

“누가 요즘 그렇게 눈을 진하게 해요. 언더라인도 너무 진해요. 속눈썹 컬링도 심하고. 화장 열심히 했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했는데…….”

장미래의 말에 이나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3년 선배인 장미래와 가깝게 지낸 지 10년. 오늘은 분명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말해봐요. 누구 만나는데요?”

“대한일보에서 인터뷰 나온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 이상해?”

이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를 저런 꼴로 언론에 공개할 순 없었다.

“빨리 지워요. 가방 좀 볼게요.”

이나리가 장미래의 가방을 열었다.

파우치를 꺼내 보니 웻앤소프트사의 하이라이터와 블러셔, 아이섀도 팔레트, 파운데이션, 립 컬러 등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었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제품을 내놓아 사랑받는 브랜드였다.

장미래가 화장품 파우치를 빤히 내려다보는 이나리의 눈치를 보았다.

“왜? 이상해?”

“귀찮아서 한 곳에서 다 샀죠?”

장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거 별로야?”

“화장품은 문제없죠.”

“그럼?”

“교수님이 문제죠.”

이나리가 충격받아 굳어버린 장미래에게 클렌징폼을 쥐여 주고 떠밀었다.

어쩔 수 없이 화장을 지우고 온 장미래를 의자에 앉히고 자기가 쓰는 화장품을 꺼냈다.

장미래의 얼굴에 스킨 토너와 로션을 차례로 바른 뒤 크림을 짜냈다.

“그건 뭐야?”

“톤업 크림이요. 이목구비 뚜렷하니까 이것만 발라도 괜찮아요.”

“순해 보이는 거 싫은데.”

“그럼 입술만 좀 바르고.”

“이건 안 돼?”

“그림 그릴 때 쓰면 좋겠네요.”

차마 버리라는 말은 하지 못해서 꺼낸 말에 장미래가 반응했다.

“그러게? 왜 립스틱으로 그릴 생각은 못 했지? 입술에 발라서 그리는 작가도 있잖아.”1)

이나리가 헛웃음 지었다.

무엇이든 그림과 연관해 생각하는 선배가 그저 신기했다.

“끝.”

장미래가 이나리에게 넘겨받은 손거울로 얼굴을 살폈다.

“허전한데.”

“아니에요. 지금이 훨 나아요.”

“취향 차이 아닐까?”

“아니에요.”

“너 오늘 왜 이렇게 단호해?”

“솔직히 아까 얼굴에 분칠만 더 했으면 경극이었어요.”

쓸데없는 저항을 이어가던 장미래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가봐야겠다. 고마워.”

“고마우면 밥 사 줘요.”

“그래. 내일 점심? 뭐 먹을까?”

“초계국수!”

“크흫흐. 알았어.”

가방을 챙겨 일어나던 장미래가 문득 고수열의 정년 퇴임식을 떠올렸다.

“맞다. 선생님 퇴임식은 어떻게 돼가? 많이 온대?”

“난리죠. 문자 보냈는데 거의 다 온다고 해서 장소를 어디로 잡을지 모르겠어요.”

장미래가 이나리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드렸다.

“나도 찾아볼게.”

“교수님이 왜 찾아요.”

“나도 선생님 학생이야. 선생님 퇴임식하는 데 그런 게 어딨어.”

장미래가 이나리를 보며 웃어 보이곤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향한 그녀는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한일보 이인호 기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인호가 반색하며 인사했다.

“일전에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훈이 인터뷰 잡을 수 있었는데 인사가 늦었네요.”

상사의 지시로 미술계를 취재하기 시작한 이인호는 작년 일을 떠올리며 장미래와 눈을 마주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젊은 사람이 교수라고 하기에 놀랐을 뿐인데, 미술계가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장미래라는 화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1997년생. 만으로 31세인 장미래는 현재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에서도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앙리 마르소와 함께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뭘요. 훈이 일인데요. 기사도 잘 써주셨고.”

장미래가 센서에 손목을 대 작업실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발표 안 한 작품도 있어서 사진은 조심해 주세요.”

“네.”

장미래의 작업실에 들어선 이인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한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기구가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었고 작업실 곳곳에 선혈 같은 붉은 물감이 튀어 있었다.

잔뜩 헤진 그물이 천장에서 널려 있고 대용량 물감 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언뜻 봐서는 기괴한 사건 현장처럼 보여서 젊은 나이보다도 어려 보이는 앳된 외모의 작가의 작업실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아.”

이인호가 입구 맞은편에 걸린 대형 캔버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가로가 3m를 넘어서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사람을 압도했다.

“엄청나네요.”

“멋있죠?”

“멋집니다.”

이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 중인지 오른쪽에 단 한 송이의 분홍빛 작약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였다.

“앉으세요. 커피 괜찮죠?”

“네. 감사합니다.”

장미래가 작업실 냉장고에서 어제 사 둔 콜드브루 커피를 꺼냈다. 잔에 얼음을 채우고 커피를 따라낸 뒤 이인호 기자에게 권했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여 걸어오던 중에 땀을 흘린 이인호는 그것을 반갑게 받았다.

“화가의 작업실은 처음 오는데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르네요.”

“많이 지저분하죠.”

장미래가 웃었다.

“아뇨. 뭐랄까. 우아하다? 고상한 장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둘러보니 상당히 치열해 보이네요.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이인호 기자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미래는 커피를 마시며 이인호를 관찰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슬쩍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지저분하단 말씀이네요.”

“아! 그렇게 되나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정말로요.”

이인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름의 방법으로 이인호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한 장미래가 인터뷰에 응해 줄 생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인호 기자가 분위기를 읽고 질문을 시작했다.

“올해 말에 전시회를 연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가요?”

“서울이랑 뉴욕, 런던, 파리, 상파울루에서 열려고 해요.”

“그럼 순회전이 되겠네요?”

“글쎄요.”

장미래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인호가 미간을 좁혔다.

“모호하게 답변해 주셨는데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전시회 콘셉트라든지.”

“네.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이인호가 수첩에 장소와 시간이란 단어와 물음표를 적었다.

미술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현대 예술가들의 기행에 당황하길 반복했지만, ‘상식’이 부정되는 세계임을 깨닫고 나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가장 기본적인 전시회 일정조차 말할 수 없다면 장미래 작가의 의도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한국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은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간의 소감은 어떠신가요?”

“이것저것 정신없는데 학생 가르치는 게 어렵더라고요.”

“아무래도 교단에는 처음 오르시니까요.”

“음. 그것도 그런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가 되게 무섭다? 조심스럽다?”

“아.”

“네. 그런 느낌이에요. 제 답이 어떤 학생에게는 답이 아닐 수 있으니까.”

이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되도록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려고 해요. 제가 강의하는 시간보다 학생들이 발표하는 시간이 더 많아서 날로 먹는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날로…….”

“들은 말이니까요.”

이인호 기자가 웃고 말았다.

솔직한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한국대학교 대나무숲을 보면 교수님의 수업이 인기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 강의 방식이 영향을 미쳤을까요?”

“글쎄요. 공부 안 해도 볼 수 있는 시험이라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핳하하!”

한차례 웃은 뒤 장미래가 설명을 덧붙였다.

“고수열 학장님께서 그런 식으로 강의를 하셨어요.”

“그럼 그때부터 교수가 되면 고수열 학장님처럼 강의하겠다고 마음먹으신 건가요?”

“그때는 교수가 될 줄 몰랐으니까 그냥 좋았죠. 제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들어주신 분이 처음이었거든요. 세 시간 연강이었는데 두 시간은 말했던 것 같아요. 중간에 한 번 쉬고 다음에 쉴 때까지 계속 말했으니까.”

이인호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무슨 주제였길래 두 시간이나.”

“리처드 사라 이야기였어요.”

* * *

1)알렉시스 프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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