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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4화 (948/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4화 >

    우리는 로엘의 집에 마주 앉아서, 말 그대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냐면, 집주인인 로엘이 잠시 우리 얘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나간 다음 다시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 머리를 맞대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오랜 고민과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은, 결국 이런 거였다.

    "이리 오너라!"

    "오오오오! 성자 님! 오셨습니까!"

    "그러니까 넌 왜 맨날 남의 집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건데?!"

    아니. 어차피 오늘은 이 녀석도 같이 얘기해야 하니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내게 덮쳐드는 호랑이 얼굴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나서, 나는 뒤따라오는 듀크와 쓰레온에게 시선을 줬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엔 또 뭐냐."

    초장부터 인사도 없이 툭 내뱉듯 용건만 묻는 쓰레온에게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용건을 외치기로 했다.

    응? 원래 태도가 저러면 흡족해할 게 아니라 기분 나빠해야 하지 않냐고?

    하핫. 무슨 소리를. 그야 쓰레온의 태도는, 아니. 쓰레온은 저 얼굴만 봐도 기분이 우중충해질 정도지만, 나도 딱히 이놈들이랑 오래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마음에도 없는 안부 인사 같은 걸 하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하느니, 간결하게 용건만 말하는 게 서로에게 편하다.

    뭐, 지금부터 그런 녀석들이랑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는 게 또 문제지만.

    "같이 던전에 가자!"

    "무, 뭐라고?! 네 녀석! 드디어 미친 거냐?!"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나도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자, 쓰레온은 거의 몸에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으로 발작하며 격한 반응을 보내왔다.

    음. 안 그래도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녀석인데, 저렇게 발작까지 하니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꼴 보기 싫군.

    그래도 뭐, 이 두 녀석이랑 같이 생활하고 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특히 옆에서 부담스럽게 두 눈을 빛내며 ‘오늘도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떠나시는 위대하신 성자와 그 곁을 호위하는 충직한 세 명의 남자들’이라는 타이틀로 노래하기 시작하려는 저 망할 놈을 보고 있자면 더욱.

    어차피 제목을 그렇게 길게 지을 거면 애매하게 생략하지 말고 제대로 여신님의 사랑을 이라고 말하라고. 어째서 그렇게 애매하게 생략하면서 사랑과 남자들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거냐. 그래선 마치 게이 같잖아. 아니. 저 새끼 진짜 게이 아니야? 레벨은 대

    체 어떻게 올린 거야?

    해주고 싶은 말은 그 외에도 산더미같이 있었지만, 그걸 다 토해내기에는 여백이 부족하여 생략하기로 했다.

    "시끄러. 나도 예쁜 우리 애들 놔두고 너희랑 행동하는 게 좋아서 이런 말 하는 줄 아냐?"

    "심지어 또 우리끼리만 간다고?!"

    당연하잖아. 뭘 기대한 건데. 그럼 우리 애들이랑 같이 갈 수 있는데 내가 굳이 너희를 쓰려고 하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상식적으로.

    "난 안 가! 아니. 못 가! 죽여! 차라리 날 죽여!"

    "그러면 네 저주가······."

    "알 게 뭐야! 어차피 난 이대로 살다가 죽을 운명이라고!"

    대체 그동안 얼마나 시달린 건지, 쓰레온은 그 몸에 걸린 저주를 반드시 풀고 말겠다는 다짐까지 약해진 상태였다.

    하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지금부터 가려는 곳은 7계층. 그리고 거기에 내려가면 제일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 바로 구미호의 마을이다."

    "구미호?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아, 그러고 보니 저놈은 구미호가 뭔지도 모르겠구나.

    쳇. 귀찮기는. 할 수 없으니 조금만 더 설명해주도록 할까.

    "7계층은 마신, 그러니까 전쟁신을 추종하는 무리가 사는 세계야. 즉, 강한 사람이 잘 나가는 세계라는 얘기지. 그리고 구미호족은 여성밖에 존재하지 않는 종족이야."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발작하던 쓰레온은 갑자기 몸을 우뚝 멈추고 대신 두 눈을 크게 떴다.

    새끼. 속물적이기는.

    "······그, 그래 봤자 어차피 적으로 만나면!"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마신의 추종자들을 여신님의 교리로 교화하는 거야. 싸우는 되도록 피하는 게 좋아. 괜히 싸워봤자 마신의 부활만 서두르는 꼴이 될 테니까."

    "교, 교, 교화! 그, 그 말은······!"

    야. 넌 제발 말이라도 좀 더듬지 마라. 진짜 보기 괴롭다.

    아무튼 거의 다 넘어왔군. 이대로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리고 내가 아까 대충 둘러보고 왔는데, 구미호족은 온통 미녀밖에 없더군."

    "이! 거짓말하지 마라! 그렇게 뭐든 이쪽 입맛에 딱딱 맞는 좋은 얘기가 있을 것 같냐!"

    녀석이 눈이 뒤집혀서 먼저 가자고 재촉할 정도의 떡밥을 날렸을 셈이었지만, 쓰레온은 너무도 좋은 얘기에 오히려 경계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저거 또 쓸데없는 데에서 신중하네. 다른 걸 의심 안 하고 하필 진실을 의심하냐.

    아니. 내가 여기서 한 말은 전부 진실밖에 없지만. ······말 안 한 게 조금 있을 뿐.

    "아니. 진짠데.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건데, 구미호라는 종족이 마신의 종족이면서 이상할 정도로 서큐버스랑 특징이 비슷하거든. 서큐버스는 뭔지 알지? 왕족의."

    "그, 그 말은 섹······."

    이어지는 내 설명에, 쓰레온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쪽에 특화된 종족이라는 얘기다. 그런 애들이 얼굴이 안 예쁘겠냐? 즉, 싸움 실력으로 매력 어필을 할 수 있는 세계의 서큐버스 같은 애들이란 얘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딱히 거짓말 같은 건 안 했다.

    싸움 실력으로 매력 어필할 수 있는 세계라고 했지, 구미호들한테 싸움 실력으로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그, 그, 그럼! 그럼 나도! 아니! 내가 그 세계에서는 너와 같은······! 크흑. 오늘 이날까지 필사적으로 무술은 연마한 보람이 드디어······!"

    하이고. 꿈도 크셔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라. 그게 되겠냐?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벌써 김칫국 원샷으로 드링킹하는 것 봐라.

    하지만 벌써 저 희망을 깨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뭐······정 가기 싫다면······."

    "누가 가기 싫다고 했어?! 누구야! 어떤 새끼야! 나와! 다 죽여버리겠어! 가겠어! 아니! 데려가 주십시오! 제발! 꼭 좀 부탁합니다!"

    또. 또 오버한다. 이 호랑이 새끼가 볼 때마다 달려드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너까지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지 마라.

    한 대 차주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나는 그렉과 듀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들도 같이 가는 거지?"

    "물론입니다! 성자 님과 함께 여신님의 교리를 전파하러 가다니! 이보다 더 명예로운 일이 있을까요! 그렇지않습니까, 듀크 씨!"

    여전히 그 호랑이 눈을 부담스럽게 번쩍이면서, 그렉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그 듀크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선뜻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뭐야. 저건 또 왜 저래? 저놈 취향이 많이 독특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정의감은 있는 성격이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면 선뜻 나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성자 님. 출발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구미호족은 전부 미녀밖에 없다.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렇다면 아직 나이가 다 차지 않은 숙녀분들도······."

    "그냥 죽어 새끼야!"

    진짜 이것들은 던전에 가기도 전부터 사람 피곤하게 하고 있어.

    젠장. 벌써 우리 애들이 그리워진다. 바프라인지 뭔지를 빠르게 처리해서, 얼른 우리 애들이 맘 놓고 돌아다닐 환경을 구축해야겠어.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쓰레기 삼인방을 이끌고 다시금 던전에 진입하게 됐다.

    애초에 구미호 마을에서 올라온 게 나 하나였기 때문에, 우리 애들과 합류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바프라의 동향을 살피는 동안, 우리 애들도 구미호의 마을에 남아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모양이다.

    구미호들의 신뢰를 제대로 얻어서 임시로 설치했던 텔레포트 마법진을 조금 더 안전한 결계 중심부 쪽으로 옮긴다든가, 자기들 나름대로 정보를 얻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직 로엘하고만 제대로 얘기가 됐을 뿐 제대로 신뢰를 얻지는 못한 구미호족 마을에 우리 애들만 남겨두고 가는 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구원 씨. 저희보다 구원 씨 자신을 더 걱정해주세요. 구원 씨가 하려는 일이 훨씬 더 위험하니까요."라는 레이아의 말

    에는 나도 할 말이 없어서 말이야.

    뭐, 아마 괜찮을 거다. 보아하니 로엘은 구미호들 사이에서도 높으신 분인데다. 인망이 두터운 모양이고.

    만에 하나 구미호들이 뭔가 나쁜 마음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매력 500으로 구미호들의 스킬에 완전 면역이 가능할 디아나가 있으니까.

    게다가 디아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온갖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만에 하나 속박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구미호들의 하드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디아나가 있으니, 아마 별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우리 애들이 구미호 마을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락한 거다.

    그러니 지금은 레이아의 말대로, 그쪽 걱정보다 우선 이쪽 일을 완벽히 끝마치는 걸 우선시하자.

    이쪽이 일을 빨리 끝마치면 끝마칠수록, 우리 애들이랑 합류할 수 있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잠깐만 기다려 봐."

    그렉과 듀크 두 놈 망할 놈들이 날뛰어도 쓰레온은 나랑 같이 우울해져서 밸런스가 맞는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쓰레온까지 저렇게 눈을 빛내니까 진짜 기분 더럽네.

    아니. 딱히 쟤랑 동병상련의 기분을 맛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쓰레온의 재촉도 일리는 있다. 어디로 갈지는 정해야지. 물론,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어차피 며칠 내로 바프라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일단 주변지리도 파악하고 바프라의 분위기가 어떤지도 파악하는 게 목적이니, 산에서 내려가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구원!"

    그렇게 생각하고 산 아래로 쓰레기 삼인방을 이끌려던 순간,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 정체는 바로 우리 사라였다.

    "다행이다. 늦지 않았네요. 어머, 여러분. 안녕하세요. 함께 해주시기로 하셨군요. 감사드려요."

    사라뿐만이 아니라, 디아나와 레이아도 그곳에 있었다.

    우리 마음씨 고운 천사님은, 오늘도 천사님 같은 분위기를 뿜뿜 내뿜으며 내 양옆의 쓰레기들한테까지도 곱게 인사해줬다.

    "하핫. 안녕하십니까."

    그런 레이아의 인사를 넉살 좋게 받아 마주 인사하는 그렉과 달리, 쓰레온과 듀크는 살짝 기죽은 것 같은 표정으로 구석에 찌그러졌다.

    둘 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한테 약하니까 말이야. 높으신 사람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나가 있으니, 자연히 기가 죽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왜 거기서?"

    그건 그렇고 얘들이 왜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오지?

    내가 정찰하고 오는 동안 구미호 마을에 있는 거 아니었어?

    "음. 저택에서 조금 가져올 물건이 있어서 말일세."

    그렇게 말하고, 디아나는 내게 반지를 하나 건넸다.

    "이건?"

    "이전에 자네가 4계층에서 행방불명됐을 때부터 개발한, 장거리 통신용 장비일세."

    오오! 역시 디아나! 이런 것까지 만들어낸 거야?

    그야 통신 마법 자체는 나도 교황님한테 쓰는 걸 몇 번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신전에 있는 장치는 분명 이런 반지보다 한참 큰, 방 하나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장치였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까지 소형화하는 것에 성공하다니.

    "문제는 아직 개발 도중의 것을 조금 전에 급하게 마무리 지은 물건인지라 불완전한 점이 많아서 말일세. 통신이 가능한 것은 음성뿐. 그리고 거리에 따라 달라지겠네만, 보통 하루에 3분 정도밖에 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될 걸세."

    "그게 어디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그렇게 말해주니 개발한 보람이 있구먼."

    내 말에 기쁘다는 듯, 디아나는 활짝 웃으며 내 건틀렛을 벗기고 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하지만 이거 때문에 갔다 온 거면 사라랑 레이아는 왜?"

    "우리도 할 일이 있으니까 갔다 왔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사라는 퉁명스럽게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야 그렇겠지만, 그 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뭐냐고.

    그렇게 물어보려던 순간, 사라와 레이아가 양옆으로 한 발씩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또 한 명의 파티원,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그, 그게······어울립니까아······?"

    평소와 달리, 남자 같은 차림새를 한 채로.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4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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