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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5화 (94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5화 >

    남장이라고 말은 했지만, 가녀린 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내 눈에는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까 해결책을 제시할 때 실비아의 입에서 남장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고, 실비아의 머리가 짧아져 있으니까 남장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게 아니었다면 남장이라고 눈치도 못 챘을 거다.

    그래. 실비아는 지금 평소보다 머리를 짧게 자른 상태였다.

    몸을 자주 써야 하는 기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평소에도 단발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실비아였지만, 평소의 머리 스타일이 보브컷이었다면 지금은 숏컷이라고 할까?

    보통 저런 머리 스타일을 하면 중성적인 매력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비아는 워낙 외모가 여려서 저런 머리를 하고도 그다지 중성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몸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 두꺼운 갑옷까지 입고 있는데도.

    물론 엄청 예쁘게 생긴 남자로 통하지 않을 것도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거, 남장이라고 한 거야?"

    "우으······네에······."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감정을 담아서 던진 질문에, 실비아도 어색하다는 듯 허벅지를 살짝 오므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아니. 실비아야. 그런 행동을 하면 남장을 한 보람이 전혀 없잖아.

    "그거라고 하지 마. 열심히 꾸몄으니까."

    과연. 사라 너랑 레이아가 코디한 거였냐.

    그리고 이렇게 다들 합심해서 실비아만 남장을 시켰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서 실비아만이라도 데려가라는 의미겠지.

    네 명이 전부 남장을 하고서 나랑 다녀봤자 아무도 남자라고 안 믿어주겠지만, 이렇게 진짜 남자 파티 사이에 한 명만 남장하고 껴있으면 저런 미모를 가지고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생길 테니까 말이야.

    실비아가 선택된 건 여러 의미가 있을 거다.

    만에 하나 전투가 벌어졌을 때 따로 보호가 필요 없는 준수한 딜탱. 게다가 기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도 다른 애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마 이게 제일 큰 이유겠지만. 원래부터 제일 빈약한 몸매에 두꺼운 갑옷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서 남장이 제일 용이하다.

    그러니까 실비아가 대표로 선택된 거겠지.

    사라가 아까부터 살짝 퉁명스러워 보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상대가 왠지 우리 애들 사이에서도 제일 귀여움 받는 포지션인 실비아다 보니 질투까지는 아니겠지만, 자기가 나랑 같이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어때요? 목소리도 제대로 남자 같죠?"

    실비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옆에서 레이아가 그런 말을 해왔다.

    응? 그러고 보니 아까 목소리 톤이 실비아치고 묘하게 낮았던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니, 실비아는 갑옷 아래에 레깅스와 비슷한 재질의 목을 완전히 감싸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쫄쫄이에 감싸인 목 앞쪽이, 마치 남자의 목울대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그거?"

    "그게······디아나 님이 이런 것을 만들어주셔서······."

    그렇게 말하면서 옷을 살짝 뒤집어 새하얀 목을 보여주는 실비아. 그리고 그 목 앞에 목울대 모양으로 조그마한 마법구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과연. 저런 식으로 만들고 옷으로 감추는 건가. 머리 잘 썼네.

    그리고 이제 와서 자세히 들어보니, 확실히 실비아의 목소리 톤이 평소보다 낮은 것이 느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평소의 실비아치고 낮았다는 얘기로, 그래 봤자 얼핏 들으면 남자 목소리인지 여자 목소리인지 헷갈릴 수준까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데려갈 필요 있어?"

    그야 이 쓰레기 삼인방이 못 미더운 건 나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얘들이 이래 봬도 전투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만한데. 그러니까 나도 이 쓰레기들을 데리고 가려는 거고.

    "필요 있어."

    하지만 내 질문에, 사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너무도 단호한 태도에, 나는 뭔가를 직감했다.

    서, 설마. 못 미더운 건 이 쓰레기들이 아니라 나라는 얘기야?

    살짝 동요할 뻔했던 나였지만, 다행히도 그 전에 레이아가 내 표정을 읽고는 고개를 저어줬다.

    "아니에요. 다만 당장은 정찰뿐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어떤 일이 생겨서 귀환이 늦어지실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구원 씨는 성자니까 그······너무 쌓이시면······."

    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런 얘기도 했었지. 나도 서큐버스인 펠리시아와 비슷하게, 성자의 힘에 의한 반동으로 성욕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고.

    그걸 걱정해서 날 붙여줬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엄한 여자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감시역을 붙인다는 의미도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레이아의 저 말이 거짓은 아닐 거다.

    그리고 나도 양심이 있으니까 우리 애들이 걱정하는 것쯤은 이해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실비아가 엄청 위험해질 텐데."

    "괘, 괜찮습니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죽으면 곤란하다고 이것아."

    "아으······!"

    그래도 불안감을 내비치는 내게, 실비아는 드물게도 주먹까지 불끈 쥐고 열정을 내비쳤다.

    내가 이마를 가볍게 딱밤을 먹이자 바로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움츠러들었지만.

    "하아. 뭐, 알았어. 그 만에 하나가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열심히 지켜주면 되지."

    "아,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구원님을 지키······!"

    "말이나 더듬지 말고 말해라 이것아."

    "햐으?!"

    실비아가 걱정돼서 최대한 튕겨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아니.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좋기만 했다.

    이 쓰레기 삼인방이 줄 피로를 실비아 테라피로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크나큰 이득이었으니까.

    "그럼. 그 뭐냐. 다녀올게."

    일단은 단순한 정찰을 가는 것뿐이지만,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나는 나도 모르게 한참을 못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하고 말았다.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루에 한 번. 연락을 빠트리지 말게나. 자네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이 몸이 먼저 연락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어디 다쳐서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하지만 우리 애들 역시도 내 인사에 딱히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저마다의 방법으로 날 걱정하며 배웅해줬다.

    "그럼 갈까."

    그렇게 땀내 트리오 세 명과 실비아를 데리고, 나는 산에서 내려가 사파······아니. 바프라로 향하게 됐다.

    등 뒤로는 우리 애들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배웅해주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애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시점에서, 지금까지 디아나한테 쫄아서 조용히 있던 쓰레온이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젠장. 우리 애들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목소리만 듣다가 이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새삼 귀가 썩는 기분이군.

    "야. 아까 그 대화는 뭐야?"

    "뭐? 보면 모르냐? 사랑하는 사람과 잠깐의 이별을 앞두고 나눈 아름다운 대화······아, 넌 지금까지 그런 관계가 된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구나. 미안."

    "그,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마, 새끼야!"

    진심으로 울컥했는지, 쓰레온은 살짝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부정을 못 하는 점이 뭐라고 할까······응. 솔직히 진심으로 조금 미안해졌다.

    "괜찮아. 언젠가 너도 좋은 사람이 생길 거야."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일단 빈말이라도 위로해주자.

    "정말 그럴까? 언젠가 나한테도······이! 그게 아니야!"

    어지간히 간절했는지, 쓰레온은 그런 빈말에도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 모양이었다.

    도중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또 돼지 멱따는 소리로 꾸엑댔지만.

    뭐야 저 새끼. 사람이 기껏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주면서 위로해줬더니.

    "그럼 뭐?"

    "아까 너희 대화! 뭔가 이상하잖아!"

    "우리 대화가 뭐? 아니. 너 사랑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거냐? 그러니까 네가 아직 여자친구가 없는······."

    "시, 시끄러워! 말 돌리지 마! 뭔가 이상하잖아! 우리 구미호 마을에 가는 것 아니었어?! 아까 그 대화는 뭔데?! 왜 네 여자들이랑 같이 가지 않는 건데?!"

    쳇. 눈치챘나. 머리도 별로 좋지도 않으면서 쓸데없는 곳에서 눈치가 빠르기는.

    "구미호라는 건 말이지, 서큐버스랑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특징이 있어."

    "뭐? 그게 뭔데?"

    "섹스에 특화된 기술을 가졌다는 건 서큐버스와 비슷하지만, 구미호는 마신의 종족. 그 특화된 섹스 기술로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어 죽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지. 그리고 그 말을 뒤집어 말하면, 남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섹스를 할 수 없는 여자를 상대할 때 더

    애를 먹는다는 말이지. 그럼 생각해봐. 구미호가 남자와 여자를 각각 어떻게 대할지. 네 그 멍청한 머리로도 대충 짐작이 되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쓰레온 상대로 단 한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쓰레온이 내 말을 듣고서 ‘구미호는 여자를 더 경계한다. 그래서 구미호에게 접근하려면 남자가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미호의 능력은 남자에게 치명적이어서, 우리가 맡은 구미호 마을 교화 임무는 한없이 임무가 될 거다.’라는 식으로 착각한다고 하

    더라도, 절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으니까.

    "뭐?! 그, 그럼?!"

    "각오 단단히 해둬라."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쓰레온의 말에 긍정하는 대신, 나는 의미심장하게 그런 말만 해줬다.

    나중에 진실을 깨닫고 길길이 날뛰겠지만, 자기가 날뛰면 뭐 어쩔 건데?

    그렇게 우리는 각자 다른 의미로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채로, 주변을 경계하며 산에서 내려갔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러 가는지 제일 잘 알고 있는 나나 실비아가 긴장하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여기서 섹스에 제일 약한 쓰레온은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까부터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계속해서 혼자 뭔가를 중얼거렸다.

    대충 들어보니 "괜찮은 건가.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가? 하지만 진심으로 날 좋아해 주는 미인을 만나서 제대로 애정이 담긴 섹스를 할 수 있다면 그대로 죽더라도······."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모양이었다.

    저 녀석은 가끔 보면 진짜 불쌍해서 괴롭히기 미안해질 때가 있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단 용사니까 우리 사라를 본받아서 조금은 당당하게 있어봐라.

    그리고 듀크 역시도 묘한 긴장감에 휩싸여있었는데, 아무래도 쓰레온과 같은 이유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뭐, 저래 봬도 일단은 6계층까지 갔던 남자 모험가다. 이제 와서 섹스가 무서울 이유가 없겠지.

    그럼 저 녀석이 긴장하고 있는 건······아, 실비아한테 기죽어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제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실비아를 희롱하는 줄 알고 구해주려고 했었지.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저 녀석도 모험가다. 이제는 실비아가 백작가의 영애이자 왕실친위대 출신의 기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자기보다 높은 사람, 특히 자기보다 강하고 높은 여자를 무서워하는 저 녀석한테 실비아의 존재는 그야말로 상극이라는 얘기였다.

    그나마 그렉 혼자 긴장한 모습도 없이 평소처럼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팀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노력했다.

    뭐, 부르는 노래가 또 이상한 내 찬양 노래였기 때문에, 우리 사기는 더 떨어지면 떨어졌지 전혀 올라가지 않았지만.

    저 이상한 노래로 음유시인 특유의 버프는 또 제대로 거는 게 더 신기하단 말이야.

    분명 듣기 괴로운데, 몸에는 활력이 넘치는 이상한 기분. 이 기분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거야.

    아무튼 안 그래도 체력이 좋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우리 파티는 그렉의 저 묘한 노래 버프 때문에 더욱 이동 속도가 빨라져서, 조금만 더 서두르면 완전히 밤이 되기 전에 이 산에서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이 점점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아직 산에서 내려가려면 두어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할 것 같은 때쯤 제일 앞장서서 걷던 쓰레온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뭔가 들리지 않아?"

    귀를 기울여 보니, 확실히 멀리서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스터······는 아닌 것 같군요."

    확실히. 그랬다.

    물론 7계층이라고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던전 밖에도 몬스터는 확실히 존재했고, 우리도 내려오면서 숲에 사는 몬스터들을 마주쳤으니까.

    다만 그 몬스터들은 전부 1계층에서나 볼법한 짐승형 몬스터였다.

    물론 강하기는 1계층 몬스터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했지만, 적어도 저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상대는 아니라는 얘기다.

    "가볼까."

    다른 계층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테지만, 이곳에서 모험가는 우리밖에 없다.

    괜히 다른 모험가의 전투에는 끼어들어 전리품을 두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암묵을 룰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래 무협 하면 이런 사소한 이벤트부터 사건이 연결되는 것 아니겠어?

    아니. 여기가 무협 세계라는 건 아니지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5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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