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63화 (947/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3화 >

    "과연. 무슨 무협 세계관을 보는 것 같네."

    로엘에게서 대략적인 상황을 듣고 나서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감상은 이런 것이었다.

    "무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우리 애들에게 고개를 저어주고, 나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로엘이 설명해준 내용은 정말로 무협지가 떠오르게 했다.

    사라의 할머니, 리리안 플리투스가 모습을 감추고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그 세월 동안 이 세계도 격동의 시간이 흘러서, 통일 왕국이 막 분열됐을 때처럼 눈에 보이는 건 전부 죽이고 보는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정말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파벌로 나뉘어서, 내 방식대로 설명하자면 마치 춘추 전국시대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는 소규모 세력들은 전쟁으로 와해되거나 흡수 합병되어서, 크게 나눠 세 개의 세력이 전쟁을 진행 중인 상황이라고 한다.

    물론 그 외에도 소규모 세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그 세 개의 세력 안에서도 권력자들 사이의 알력 다툼은 있다는 모양이지만, 일단은 그 세 조직을 와해시키는 걸 당면의 목표로 삼아도 되겠지.

    그리고 그 세 개의 세력의 특징이 각각 이런 느낌이라고 한다.

    하나는 리리안 플리투스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자들로 이루어진 세력으로, 그나마 세 세력 중 가장 포용력이 강하고 멀쩡한 세력 플리투스.

    또 하나는 리리안 플리투스를 실패자로 분류하고, 무조건적인 힘의 논리를 숭상하여 약육강식, 약자도태 같은 논리를 같은 진영의 사람들에게도 가차 없이 적용시키는 반 리리안 세력 비스.

    마지막으로 싸움은 어떤 식이든 이기면 그만이라는 논리로 정면 대결 이외의 교활한 방법도 서슴없이 사용해서 전쟁의 승리를 꾀하는, 힘을 숭상하는 전쟁신의 교리와 미묘하게 어긋나는 생각을 가진 세력 바프라.

    어때? 정말로 무협이 생각나지 않아? 각각 정파, 마교, 사파 같은 느낌으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사라는 용사의 능력으로 저 레벨 때부터 마나를 응축해서 사용할 수 있었지. 그 능력도 지금 생각해보면 무협에서 말하는 강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같은 핏줄을 잇고 있는 미리엘도 볼 때마다 무협지 주인공 상이라고······아니. 이건 딱히 관계없나.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이 세계는 꽤나 무협지의 세계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여기 있는 구미호족들이 입고 있는 복장이나 화려한 머리색만 보더라도 무협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느낌이니, 평범한 무협을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일단 정파······아니. 플리투스 쪽에 가서 교화시키는 게 좋다는 건가."

    비교적 제일 멀쩡하다고 했으니, 그만큼 돌아다니기 편하겠지.

    하필 쓰레온의 성과 똑같은 명칭을 사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쓰레온의 성이 아니라 사라 할머니의 성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지만, 디아나는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흠. 이 몸의 생각은 조금 다르네."

    "응? 왜?"

    "어떠한 방식이든 이 몸들이 가서 여신님의 교리에 따라 교화시킨다면, 그 세력은 기존의 힘을 잃게 될 걸세.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힘의 중심이 무너진다면, 세력이 와해되는 것 또한 순식간이지 않겠는가. 전쟁만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이런 곳이라

    면 더욱 그럴 걸세."

    하긴. 싸움보다 섹스에 더 빠지게 하려는 거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전쟁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결국 우리가 가는 곳부터 무너지게 될 거라는 건가.

    그리고 그 무너지는 세력이 제일 멀쩡한 세력이 되어버리면, 나중 일이 더욱 복잡해질 거라는 계산이라는 거다.

    세 세력을 동시에 교화할 수만 있다면 그게 최고겠지만, 그런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그것도 그렇겠네. 그러면······바프라? 정면 대결이 아니라도 신경 안 쓴다고 했니, 내 스킬도 제압해도 쉽게 굴복······아, 그러면 구미호의 능력도 받아들였겠구나. 안 되겠네."

    만약 내 성자 스킬도 여신의 힘이라는 편견 없이 하나의 능력으로 인정해주는 거라면, 그보다 더 편한 것도 없을 텐데.

    어차피 약육강식의 세계다. 내 스킬은 사람 상대로 무적에 가까우니, 쉽게 최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할 거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인식을 바꿔나가면 그만큼 편해지는 점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뭐, 성자 스킬을 대놓고 쓸 수 없어서야 다 의미 없는 소리지.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우리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로엘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왔다.

    "아니요. 바프라라면 당신의 그 능력 역시 인정해줄지도 몰라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가능했으면 너희는 왜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여기에서 숨어지내는데?"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저희 구미호족은 여성밖에 존재하지 않는 종족이니까요."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게 왜?

    "전국을 통일한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가 마지막에는 사랑을 좇아 떠났다는 건 유명한 일화니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로엘은 살짝 사라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대답해줬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겠는데. 구미호가 여자밖에 없는 것이랑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랑을 좇아 떠났다는 게 대체 무슨 관계가······아, 설마.

    "네.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는 여자였죠. 그 여자 용사가 세계를 통일하고도 마지막에는 사랑을 선택해 떠난 것으로, 여성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별이라는 인식이 박히게 됐죠."

    즉, 이 세계에서 여자에 대한 인식은 무협지에 나오는 수준보다도 더 안 좋다는 건가.

    던전 밖에서는 남자보다 여자가 비교적 더 높은 위치를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진짜 뭐든 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세계였다.

    "그래도 리리안 플리투스의 계승 세력을 자처하는 플리투스는 상황이 괜찮다고 들었지만, 비스나 바프라에서 여성의 인식은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수준이에요. 그나마 바프라는 적대 세력의 요인 암살용으로 여성을 쓴다는 점에서 비

    스보다도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구미호는 여기에 모여 사는 거라고.

    여자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나은 플리투스는 여신의 힘과 비슷한 구미호의 능력을 혐오하고, 능력에 대한 차별이 없는 바프라는 여성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다.

    그리고 비스는 구미호의 힘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둘 다 개차반이니, 구미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차피 이곳 일대는 바프라가 장악하고 있으니, 당신의 그 힘이 받아들여지는지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봐요."

    내 힘에 한 번 당해봐서 희망을 품게 됐는지, 로엘은 그렇게 내게 조언까지 해줬다.

    과연. 어느 세력을 먼저 무너뜨릴지는 나중에 결정하더라도, 일단 바프라를 거치지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건가.

    그렇다면 은근슬쩍 내 힘을 써가면서 상황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좋아. 그러면······."

    어차피 이 세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얘기만 듣는 것보다 직접 부딪혀보는 게 더 확실하겠지.

    게다가 구미호족들은 결계 안에서만 생활하느라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다는 모양이니 더욱 그랬다.

    필요 최소한의 얘기는 다 들은 것 같으니, 슬슬 어디 한 번 직접 경험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만. 이 일대는 전부 바프라가 장악하고 있다고?"

    "네."

    "바프라는 여자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고?"

    "네."

    "혹시 길거리에서 보면 위험할 정도야?"

    "여자들은 특별 지구에 한데 모아서 따로 관리를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밭일과 군수품을 생산하고, 적령기의 여성은 자식을 낳기 위해서······."

    그게 뭐야?! 완전 사람이 아니라 가축 취급이잖아!

    그리고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우리 애들을 데려가면 위험해진다는 얘기가 된다.

    "괜찮아. 덤비는 놈들은 전부 해치워버리면······."

    안 그래도 나 이외의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저렇게 말했지만, 그런 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아무리 너라도 그렇지. 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게다가 리리안 플리투스 때문에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거다.

    사라가 제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이곳 사람들이 그걸로 칭송하고 따라줄 확률은 한없이 낮을 거라는 얘기다.

    젠장. 시작부터 이런 난관에 부딪혀버리다니.

    여신님! 여신님이 과거에 이방인들을 데려와 내린 명령 때문에 괜히 일이 더 꼬여버렸는데요?!

    "이 몸의 마법으로 모두의 몸을 투명하게 바꾸고 다닐 수 있기는 하네만······."

    일단 디아나도 해결책을 제시해보기는 했지만, 디아나 자신도 그게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는지 목소리에 언제나와 같은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250레벨을 돌파하면서 스탯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디아나지만, 그런 디아나라도 마나가 무한은 아니니까.

    투명 마법을 쓰고 돌아다니는 건, 마나가 떨어지는 순간 위기에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한 방법이다.

    "안 돼. 너무 위험해. 너희한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어.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 혼자······."

    "구원씨. 전부 혼자서만 하려고 하지 않으시겠다고, 저희랑 약속하셨죠?"

    무심코 튀어나온 내 말에, 레이아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

    그랬었지. 그것도 우리 애들을 엄청나게 걱정시킨 다음에 한 약속이었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나도 그냥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고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저희도 구원 씨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서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고 조용히, 하지만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는 레이아.

    "응. 미안."

    그런 레이아에게, 나는 사과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로엘의 말이 무조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신뢰도의 문제가 아니라, 구미호는 결계 밖에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고 하니까.

    막상 가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 정도 수준은 아닐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걸고 우리 애들을 데려가는 건, 역시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보내줄 생각은 절대 없는 모양이니까······.

    "저, 저기이······."

    고민에 빠진 내 귀에,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할 말이 있다는 듯 머리 옆으로 살짝 손을 든 실비아가 있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실비아가 할 말이 있다니.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떠오른 걸까?

    "그게······남장을 하는 건······."

    실비아의 얘기를 듣고, 나는 잠깐 실비아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봤다.

    남장. 남장이라. 남자치고는 얼굴이 심각하게 많이 예쁘기는 하지만, 가녀린 미소년 컨셉으로 가면 아슬아슬하게 통할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사라도 가슴은 붕대로 감으면 어떻게든······아니. 가슴을 억지로 어떻게 해본다고 해도, 저 멋진 골반은 그런 걸로 커버가 되는 수준이 아닌데.

    게다가 디아나에 이르러서는 레벨이 250이 넘어가면서 매력 스탯이 나보다도 더 높은 500이 됐다. 저정도면 레벨이 낮은 사람 상대로는 거의 자동 매혹이 발동되는 수준일 텐데, 아예 가리고 다니는 거라면 모를까 남장을 한다고 통할까?

    무엇보다 우리 천사님까지 가면······더 말이 필요해?

    "실비아야.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너희 외모를 생각해라. 그게 되겠니?"

    "자네, 지금 어딜 보고 얘기했는가."

    디아나 쟤는 또 마지막에 레이아 가슴 좀 봤다고 귀신같이 눈치채네!

    "어, 어딜 보고 말하기는! 너희 예쁜 얼굴 보고 말했지!"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라고. 애초에 제일 몸매가 빈약한 실비아부터 남장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자신이 없었으니까.

    하여간 너무 예쁘면 이런 게 문제라니까.

    "아, 아무튼 너희 얼굴로 남자라고 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 테니 소용없어! 아, 실비아야. 그렇다고 너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나이스 아이디어야. 앞으로도 좋은 생각나는 거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

    살짝 풀이 죽은 실비아에게 위로의 말도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나는 남장 작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건······."

    전쟁에 미친 마신의 추종자들의 여신님의 교리로 교화시키는 작전은, 시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예상외의 난간에 부딪혀 버렸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3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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