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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2화 (946/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2화 >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심각했던 분위기를 깨버린 덕분에 내 협박은 상당히 무의미해져 버렸지만,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더 좋은 일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서로 만담이나 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구미호도 심각하게 반응했던 게 허무해졌다는 듯 경계를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구미호 소녀의 몸에 남아있는 성자 스킬의 기운까지 몰아내어 완전히 경계심을 지워버리자, 우리는 드디어 구미호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날 공격한 이유부터 들어볼까?"

    "······당신이 전쟁을 멈춘다고 했기 때문이에요."

    아까의 그 경계심 넘치던 어투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말투가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구미호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응? 너희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쟁이 싫은 것 아니었어?"

    전쟁이 싫어서 이런 곳에 숨어있는 것이라는 우리 짐작이 틀렸던 건가?

    결국 구미호 역시도 마신의 종족인 건 마찬가지라서, 본능적으로 전쟁을 좋아하는 건가?

    잠깐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구미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싫어요. 하지만 필요해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쟁은 싫지만 필요하다니.

    "······과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디아나는 그것만으로도 대충 사정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음. 물론 추측에 불과하네만······."

    옆에 사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굳이 추측뿐인 이 몸의 말을 들어야 하겠는가?

    아주 잠깐 그런 표정을 지었던 디아나였지만, 그래도 설명하는 게 싫지는 않다는 듯 디아나는 바로 자신의 추측을 말해줬다.

    하여간 설명하는 거 참 좋아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일부러 디아나한테 말을 건 거지만.

    아무튼 디아나의 얘기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구미호는 마신의 종족이지만, 사용하는 능력은 섹스와 관련된 능력이다.

    즉, 능력만 놓고 보면 마신의 종족 쪽보다는 오히려 여신님의 종족 쪽에 가까운 능력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여신을 증오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마치 여신의 종족과도 같은 힘을 쓰는 구미호는 멸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는 이미 한 번 디아나가 말해준 내용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여신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곳의 전쟁은 일시적으로 한 번 멈췄던 적이 있었다.

    바로 사라의 할머니,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에 의한 무력 통일로.

    그리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구미호들에게 전해졌다는 얘기다.

    자기들끼리 전쟁을 하고 있을 때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막상 전쟁이 멈추고 나니 사람들이 좀 쑤시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싸울 대상을 찾아 나선 거다.

    애초에 힘과 전쟁을 신봉하는 무리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싸움을 멈출 리가 없었다는 얘기지.

    그리고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여신의 힘과 비슷한 능력을 지닌 구미호였다.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구미호들은 오히려 더욱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되어버린 거다.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전쟁이 멈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여신의 사명을 받고 온 사무엘 아우덴이 전쟁의 최종 승자이자 마지막 남은 용사인 리리안 플리투스를 꼬셔서 지상으로 떠나버렸고, 구심점이자 억제력을 잃은 남은 자들은 다시 자신이 모두의 위에 서기 위해 들고 일어나 전쟁을 시작한 거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 시작된 덕분에, 구미호에게 집중되던 증오의 불길은 다시 사그라졌다고.

    "어떤가? 이 몸의 추측에 틀린 점이 있는가?"

    거기까지 자신 있게 설명을 마친 다음, 디아나는 구미호를 바라보며 사실 확인을 요했다.

    그리고 그 구미호는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디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홀리는 건 구미호의 역할일 텐데 말이지.

    뭐, 우리 디아나가 머리가 많이 좋기는 하지.

    저 표정을 봐서는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군.

    "과연. 그래서 다시 전쟁이 멈추면 곤란하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날 처리하려고 했다고."

    "······그래요."

    그래도 대뜸 죽이려고 했던 것에 양심의 가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 구미호는 살짝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어. 우린 딱히 그 마지막 용사님처럼 무력으로 전쟁을 멈추려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방금 그 몸으로 내 힘을 톡톡히 느꼈잖아? 그런 식으로 전쟁을 멈출 거야. 다들 섹스에 눈이 돌아가게 되면, 딱히 구미호만 싫어할 이유도 없어지잖아? 오히려 구미호의 테크닉을 한 번이라도 맛보고 싶어서 애걸복걸하게 되는 거 아니야?"

    "읏?!"

    내가 아직도 옷 위로 유두가 서 있는 게 보이는 구미호의 가슴을 힐끔 바라보며 말해주자, 구미호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떤 몰골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듯 황급히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말에서 미약한 희망을 느끼기는 했는지, 구미호는 간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아무리 그런 힘이 있어도 사람들의 인식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뭐, 그야 선뜻 믿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미 실적이 있거든. 그것도 이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부류에 들어갈 녀석을 상대로.

    "훗. 그것 역시도 쓸데없는 걱정이야. 난 이미 그 마지막 용사의 후손을 이 힘으로 쾌락에 절여버린 전적이······으아악?!"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업적을 말하려고 했던 그때, 갑자기 옆구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젠장! 하필 갑옷을 벗고 있어서!

    "사라 네 얘기 한 거 아니야!"

    "나도 알아 이 바보야!"

    그럼 왜······하, 하긴. 생각해 보니 미리엘 얘기라도 기분 나쁜 건 똑같겠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얌전히 옆구리의 고통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또다시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되어버린 우리였지만, 이번에는 구미호도 그런 우리를 보고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할 정도로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는, 턱을 덜덜 떨면서 사라를 바라봤다.

    "요, 요, 용사님의······후손······?"

    "응? 맞아. 얘가 그 손녀야. 보시다시피 용사의 힘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쓸데없이 무식하게 센······."

    "누가 무식하다고?!"

    "으아악!? 미안! 죄송합니다! 말이 헛나왔어요!"

    다시 한번 옆구리에 습격하는 사라의 손을 이번에는 간신히 피하면서, 나는 사라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그리고 나 말고도 사라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자가 있었으니.

    "히이이이익! 모, 몰라뵈어서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용사님!"

    바로 어느샌가 세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서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오체투지한 구미호였다.

    심지어 성숙한 구미호뿐만이 아니었다.

    내 성자 스킬이 풀린 직후 바로 수풀로 숨어들었던 구미호 소녀까지 슬금슬금 기어 나와서는, 자기 이모 바로 옆에 똑같이 오체투지하고는 사라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용사가 모습을 감춘 지 꽤나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이곳에서 용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새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라야. 봤냐? 네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장난도 상황 봐가면서 해."

    "넵. 죄송합니다."

    사라는 힐끔 노려보는 것으로 가볍게 날 제압한 다음, 사라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구미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일어나세요. 저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용사라고 해도 직업뿐이고, 여기 일은 전혀 모르는걸요."

    "그, 그렇······습니까?"

    사라의 그런 말에도 곧장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고, 구미호는 살짝 고개만 들어서 사라의 안색을 살폈다.

    왠지 지금까지 얘기 좀 들어보려고 했던 행동들이 전부 헛짓거리가 된 기분이 드는데.

    그냥 처음부터 사라를 앞에 내세우고 "구미호! 용사의 후손이 여기 왔다! 와서 사정을 고해라!"라고 했으면, 진작에 마을로 모셔져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런 건 사라가 싫어했을 테니까 이걸로 된 건지도 모른다. 결국 잘 풀리기도 했고.

    그 후로도 사라는 구미호 둘을 달래는데 꽤나 고생을 해야 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사라의 진정성이 통하기는 했는지 구미호 둘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을 기회 삼아서, 나는 은근슬쩍 요구사항을 더 늘려보기로 했다.

    "아무튼 너희한테 더 좋으면 좋았지 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할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 계속 여기서 이러고 얘기하는 것도 조금 그러니까, 마을로 가서 이곳의 대략적인 정세라도 들려주지 않겠어? 아무래도 뭘 좀 알아

    야 구체적인 계획을 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네, 네에······."

    사라 때문에 기가 죽은 덕분인지 마을로 안내해달라는 요구도 곧장 받아들여져서, 우리는 드디어 이 결계를 뚫고 구미호들이 모여 사는 산 정상으로 향하게 됐다.

    결계를 이리저리 헤쳐가야 했기 때문에, 산 정상으로 향하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러는 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늦었지만 간단하게 통성명을 하면서 대화를 시도했다.

    성숙한 구미호가 로엘. 구미호 소녀가 리사라는 이름이라는 모양이다.

    "마을에 여자밖에 없다고?"

    "네. 구미호는 여성밖에 존재하지 않는 종족이랍니다."

    그쪽 파티에도 구미호가 있는데 몰랐냐는 듯이, 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줬다.

    어쩐지 처음에 리사가 말끝마다 남자 남자 하면서 태도가 이상하더라니. 진짜로 남자를 처음 보는 거였냐.

    참고로 말하자면 그 리사는 아까부터 쭉 말이 없었다.

    단순히 사라한테 겁먹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내가 남자라는 것도 한몫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러면 아이는 어떻게? 설마 혼자서 낳는 거야?"

    "아뇨. 남자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말을 흐리는 로엘을 보고, 나는 대충 어떤 사정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진짜냐. 내 생각이 맞다면, 완전히 아라크네 클랜 MK. 2 같은 녀석들이잖아. 남자의 정기를 골수까지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앗! 로엘님. 리사 아가씨는······나, 남자?!"

    아무튼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겨우 산 정상에 도착하자, 경계병인 건지 늘씬한 구미호 두 명이 창을 손에 쥐고 우리를 바라보며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 손님이에요. 창을 거두세요."

    "네! 실례했습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로엘과 리사 둘 다 구미호들 사이에서 은근히 높은 직위에 있는 건가?

    로엘의 말 한마디에 가볍게 통과된 우리는, 드디어 구미호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면서 로엘에게 들었던 대로, 마을은 온통 여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앞에 ‘미’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사람들로만.

    미녀, 미소녀, 미숙녀.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온통 미인들뿐. 남자를 홀리는 것에 특화된 종족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남자가 이렇게 당당히 마을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보기 드문 건지, 스쳐 지나가는 구미호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혀 있어서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에 맨 처음 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때보다 미인에 대한 내성은 한참 더 올랐을 텐데도 이런 느낌이라니. 구미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만큼, 특유의 매혹과도 비슷한 힘을 가진 마나가 대기 중에 녹아있는 걸까?

    "······야. 구원."

    "제 눈에는 아리따운 네 명의 아가씨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좋아."

    물론 옆에서 꽉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구미호들을 감상하면서 헤벌쭉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여기입니다. 들어오시지요."

    어느샌가 리사는 자취를 감추고 있어서, 우리는 로엘의 뒤를 따라 제법 큰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입구에서 생각했던 대로, 역시나 로엘은 구미호들 사이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략적인 정세에 관한 얘기였죠. 저희도 웬만해서는 이 결계 안에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자세하지는 않습니다만······."

    사라가 아예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겉보기만큼 성숙한 로엘은 금방 정신을 다잡은 모양이다.

    아까처럼 기죽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로엘은 천천히 이곳의 현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2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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