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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464화 (44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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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바뀐 관계

    아무튼 오랜만에 기분좋은 미소를 보여주신 레이첼 누님께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는 우리 애들과 합류했다.

    "…상당히 오래 걸렸네."

    뒤에서 보기엔 레이첼 누님과 시시덕거리면서 수다나 떨다 온 것처럼 보였겠지.

    특히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원래 간단히 인원 보고만 하고 출발하니까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라는 살짝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평소 같으면 괜한 오해를 받았다고 억울해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사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허락을 해준 직후니까 말이다.

    내가 다른 여자와 대화할 때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나는 그런 사라의 사도 인장 부근을 톡톡 손바닥으로 두드려주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코볼트 동굴 얘기 보고하고 왔어. 덤으로 우리가 2계층으로 가는 이유도 핑계를 만들어놨고."

    나는 레이첼 누님과 했던 대화내용을 대충 요약해서 우리 애들에게 전해줬다.

    물론 식사 때의 일을 사과했던 내용은 빼놓고 말이다.

    "호오. 과연. 자네가 웬일로 머리를 썼구먼."

    내 말을 들은 디아나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해줬다.

    모습만 보면 오히려 기특한 건 너다.

    그리고 굳이 후드에 손 넣어서 쓰다듬지 마라. 얼굴 보이면 어쩌려고.

    "야. 웬일로는 너무하지 않냐. 너조차 신경 못 썼던 부분을 신경 써준 건데."

    아니. 파티장으로서 원래부터 내가 신경 써야 되는 게 맞기는 하지만 말이야.

    "무슨 소리인가. 이 몸이 신경을 안 썼을 리가 없지 않은가?"

    "…뭐?"

    "개미굴에서 빠져나올 때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마법을 쓰고 있었네. 결국 헛수고였지만 말일세."

    "…진짜냐."

    "엣헴. 이 몸은 자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많은 걸 하고 있다는 말일세!"

    디아나는 가슴을 쭉 펴고 자랑스럽게 외쳤다.

    뭐, 그래봤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소극적인 가슴은 전혀 존재감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 그래. 우리 대마법사님 최고다."

    "음. 자네도 핑계거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잘 한 걸세. 매법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일이니 말일세."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디아나는 내 머리를 더욱더 휘젓듯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런 고로 2계층으로 텔레포트를 탄 우리는 곧장 개미굴을 향해 이동했다.

    레이첼 누님과의 약속 때문에 중간 중간 모기떼를 잡기 위해 멈춰선 것만 제외하고는, 그냥 걷는 것과 마찬가지의 속도로 개미굴에 도달할 수 있었다.

    뭐, 모기떼에 멈춰선 것도 잡는 것보다 해체 작업에 시간이 걸려서 그런 거지만 말이야.

    그리고 개미굴에 도착해서, 우리는 곧장 여왕개미가 있던 방 근처로 향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수컷 개미가 있는 곳은 대충 짐작이 갔다.

    사람의 허를 찌르는 숨겨진 장소.

    그리고 대놓고 거대 마석을 드러내서 존재감을 뽐내는 페이크 보스의 존재.

    심지어 우리가 보스 룸에 들어가기도 전에 여왕개미가 습격해왔던 걸 생각해보면….

    "수컷 개미는 바로 여기. 여왕개미가 있는 곳 근처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여왕개미의 방 앞까지 도착한 나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점점 목소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아, 참고로 통로 너머로 보이는 보스 룸에 여왕개미는 없었다.

    여긴 마법사 협회 사람들이 거대 마석을 조사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거대 마석에는 여전히 마법사 협회의 인장이 새겨진 로브를 두른 마법사 몇몇이 조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중에 아는 얼굴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각 학파의 장들이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누님들은 진작에 다들 우리 저택으로 돌아왔고, 여기 있는 건 적당한 실력의 마법사들이다.

    대충 들은 바로는 몇몇 그룹이 돌아가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중이라는 모양이다.

    뭐,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이 근처라고 해도…코볼트 때처럼  위쪽에 통로는 없어 보이네."

    우리 중에서 제일 눈이 좋은 사라가 천장 쪽을 쭈욱 훑어봤지만, 이렇다 할 통로는 없는 모양이었다.

    "뭐, 매번 똑같은 수법을 쓰진 않겠다는 거겠지. 실은 난 개미 알들 사이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이게 웬걸. 전부 없애는 게 불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벽을 빡빡하게 메우고 있던 개미 알들은 완전히 그 흔적을 감춘 상태였다.

    아니. 여기 여왕개미의 방은 전에 조사하러 왔을 때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여기뿐만이 아니라 여기까지 오는 내내 거의 모든 방의 알들이 처리되어있었다는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싹쓸이했잖아. 대체 모험가란 족속들은…아니. 나도 모험가지만 말이야.

    "흠. 그래도 이 근처에 있을 거라는 자네 생각은 타당하다고 생각하네만 말일세."

    "하지만 이곳은 다른 모험가분들도 다른 곳보다 더 면밀히 살펴보지 않았을까요?"

    "그야 그렇…아, 혹시."

    머리를 맞대고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중,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허를 찌르는 장소라면 설마…라는 생각이 든 거다.

    "어디 또 짐작가는 대라도 있어?"

    "응. 확실하진 않지만 확인해볼 가치는 있을지도. 뭐, 일단 가보자. 만약 아니면 구석구석 다 뒤져보면 되지."

    그렇게 말하고 내가 일행을 이끈 곳은 바로 3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여기는 거대 마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마한 길이 뚫려있고, 그 길을 따라 빙글 돌아가면 두 길이 만나는 지점 한 가운데에 3계층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구조였다.

    나는 3계층오로 향하는 통로를 내려가는 일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그대로 좁은 통로를 빙 돌았다.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행이도, 통로를 걷던 도중 위쪽에 다른 곳으로 연결 된 것처럼 보이는 구멍이 하나 보였다.

    그래. 사람은 자신이 찾던 걸 눈앞에 뒀을 때 가장 방심하는 법이다.

    이곳에 오는 모험가들의 목표. 그것은 바로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거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다른 곳은, 심지어 코볼트 동굴에서도 다음 계층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냥 평범하게 뚫려있었는데, 여기만 유독 이렇게 비밀 통로처럼 만들어져있었으니까 말이다.

    예전에 여길 지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갔지만, 이렇게 진상을 알고 보니 이것 역시도 수컷 개미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한 트릭이었던 거다.

    "와아! 역시 구원씨에요! 굉장하세요!"

    "헤헷. 좀 더 칭찬해주셔도 돼요. 천사님."

    "후훗. 잘했어요. 잘했어요."

    내 뻔뻔한 말에도, 레이아는 쿡쿡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왠지 이 몸이 쓰다듬어 줄 때보다 기뻐 보이는구먼."

    "그,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손이 움직일 때마다 눈앞에서 거대한 가슴이 진자 운동을 하는 게…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난 디아나의 가슴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해. 암. 그렇고말고.

    "레이아도 너무 그렇게 응석을 받아주면 안 돼요. 이 바보는 끝도 없이 기고만장해지니까."

    "아니. 사라 너야말로 가끔은 좀 칭찬해줘라. 넌 너무 칭찬에 인색하다니까."

    "딱히 그런 건…."

    "이번엔 나 잘 한 거 맞지?"

    "그,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사라 넌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지? 칭찬했었나?"

    "우읏…미, 미안."

    평소에 맨날 받아주던 내가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자 당황했는지, 사라는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뭐, 사라도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나랑 장난치려고 그런 거였다는 건 나도 알지만 말이야.

    그럼에도 난 이번만큼은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니. 용서 못해. 나한테 ‘오빠아. 사라가 너무너무 잘못했져요.’ 라고 말하기 전까진."

    "오빠…하?"

    반사적으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했던 사라였지만, 아쉽게도 상당히 이른 타이밍에 사라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나도 정색하는 척 하면서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 진짜 바보 아니야?!"

    "진심인데. 말하기 전까지 진짜로 용서 안 할 거야."

    "누가…!"

    "그럼 잘 했다는 거야?"

    일단 화난 척 하면서 사태를 무마해보려는 사라였지만, 거기에 당할 내가 아니지.

    나는 은근슬쩍 미소 지어지려는 뺨 근육을 단단히 붙잡고 정색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우읏…지, 진짜로?"

    "응. 진짜로."

    "하, 하지만 여긴 던전 안이고, 얼른 탐험을…."

    "여긴 몬스터도 안 나오는 곳이야. 내 말대로 사과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탐험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도 실패한 사라는 당혹스런 눈초리로 주변을 살펴봤다.

    아무리 그렇게 살펴봤자 지금 여기 네 편은 없다.

    쿨 뷰티의 대명사 사라에게 그런 대사를 시키고 있는 거다. 오히려 다들 기대에 찬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나 디아나는 능글능글 웃으면서 사라에게 얼른 하라는 듯 손으로 보채고 있기까지 했다.

    완전히 즐기고 있군. 혹시 전에 사라한테 말싸움으로 진 거 속에 담아두고 있었니?

    "으읏…."

    여기에 자기편이 없다는 걸 깨달은 사라는 침음성을 흘리더니, 갑자기 내 팔을 붙잡고 일행과 조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여기서 안 하는 겐가? 이왕이면 이 몸들에게도…."

    "디, 디아나는 시끄러워요!"

    놀리는 디아나에게 새빨개진 얼굴로 일갈한 사라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부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 오빠아…사, 사, 사라가 자, 잘못…해, 해쪄요…큭."

    음. 그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 훌륭하구나 사라야.

    하지만 아직 멀었어.

    "말투."

    "뭐, 뭐어…?!"

    "말투도 똑바로 다시."

    "이, 이게 진짜…!"

    "다시."

    "으윽…오, 오빠아…사라가…잘못해쪄요오…."

    내 강압적인 말투에 못 이겨서, 결국 사라는 이를 한 번 뿌드득 갈더니 안 어울리게 엄청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솔직히 객관적으로 들어 봤을 때 귀여운 목소리인지 어떤지는 확신을 못하겠지만.

    쿨한 허스키 보이스로 귀여운 목소리를 억지로 짜낸 거니까 말이지.

    적어도 나한텐 귀여웠으니까 아무 문제없다는 걸로.

    뭐 아무튼 사라는 내 요구를 제대로 들어줬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긴 좀 아쉬운데. 모처럼 이니까 조금만 더 놀려볼까.

    "표정도…커헉!"

    "진짜…! 진짜 이게…! 진짜 이 바보가…!"

    하지만 내가 놀리기도 전에, 사라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내 등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아야! 아파! 아파 사라야! 여기 던전!"

    "몬스터는 안 나오는 거잖아?! 이 바보가 진짜!"

    아, 넵. 죄송합니다.

    나는 사라의 등짝 스매시를 피해서 황급히 우리 애들에게로 다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가? 제대로 사과했는가? 이 몸도 사라양의 귀여운 목소리를 한 번…."

    "크헉. 디아나! 그만! 그만 놀려!"

    네가 놀리면 사라가 그만큼 날 때리잖아.

    아니. 대체 어떻게 된 손바닥이 내 갑옷을 뚫고 데미지를 주는 거야.

    혹시 발경 같은 거라도 쓰니?

    "사, 사라야! 너도 그만 진정해! 괜찮아! 귀여웠어! 귀여…크헉!"

    결국 나는 사라가 진정할 때까지 그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껴안고 말릴 수밖에 없었다.

    "후우. 설마 던전에서 몬스터도 아닌 같은 편한테 생명의 위협을 느낄 줄이야."

    그리고 겨우 사라가 진정된 다음에, 나는 천사님의 손길로 치유를 받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흥. 엄살은."

    아니. 그야 생명의 위협이라고 표현한 건 엄살이 맞지만 말이야, 농담 아니라 진짜로 아팠거든?

    뭐,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라는 교훈으로 삼자.

    아예 놀리질 말라고? 그건 안 돼지. 내 인생의 낙인데.

    아무튼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진정되고, 우리는 드디어 위쪽의 구멍을 향해 암벽등반을 했다.

    참고로 디아나는 내가 업었다.

    구멍은 아니나 다를까 좁은 통로 같은 형식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너머에는 또 다시 거대한 공동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여왕개미보다도 한 층 더 거대한 개미가 한 마리 자리 잡고 있었다.

    코볼트 때 이미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페이크 보스보다 수컷이 강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 크기는 아니잖아.

    크다고 무조건 센 게 아니라고. 좀 작아도 괜찮잖아.

    안 그래도 무식하게 큰 여왕개미보다 더 크다니.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레이첼과 어떻게 될지는 거의 완벽하게 떡밥이 다 나왔습니다.

    떡밥들을 조합해서 이미 예상을 하고 계신 분들도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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