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뒤바뀐 관계
차라리 누님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지금까지처럼 친한 누나동생 사이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날 좋아해주시는 누님께는 미안하지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쩌지 이거.
누님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을 때의 대응책은 미리 생각을 해둔 상태였지만, 정작 정말로 누님이 날 좋아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대비를 해두지 않고 있었던 나였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누님이 날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가.
"아, 크흠. 뭔가요. 그거. 구원씨. 지금 절 꼬드기는 건가요? 디아나님한테 이를 거예요?"
하지만 내가 어떤 리액션을 보이기 전에, 레이첼 누님이 먼저 헛기침을 하더니 그렇게 말해왔다.
이 반응은 설마…!
"네, 넷?!"
"하아…. 그래도, 구원씨가 나름 고민을 했다는 건 알겠어요. 저도 언제까지나 그런 일로 꽁해있을 수도 없는 거고.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해드릴게요. 정말로 특별이에요? 다음부턴 조심하셔야 해요?"
마치 화나기 전 레이첼 누님처럼, 누님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짝 윙크를 하고 그렇게 말했다.
"넵. 누님. 감사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그리고 누님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그 떡밥을 덥석 물었다.
아마도지만, 정말로 그냥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누님은 지금 나랑 밀당을 하고 있는 거다.
지금 여기서 내 사과를 그대로 받아줬으면, 누님 자신이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어버리니까.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미묘하게 대답을 회피한 거다.
내가 먼저 더 확실하게 들이대기를 기다리면서.
"네, 넷?! 네에…그, 그러세요."
그 증거로, 내가 바로 수긍하자 누님은 오히려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화났는지도 말 안하고 저런 식으로 넘어갔는데, 내가 그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바로 수긍해버렸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누님에게 미안하기는 했다.
누님의 의도를 대충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는 건, 누님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마찬가지랄까, 정확히 그대로지만.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누님이 나한테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미리 눈치 챘다고 해서 거절의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결국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죄송해요. 누님. 전 이 이상 쓸데없이 여자를 늘릴 생각은 없어요. 우리 애들을 위해서라도.
허락을 받은 이후로 오히려 정조관념이 더 강해진 기분마저 드는 난, 도저히 이 이상 여자를 늘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일단 이걸로 누님과 나는 전처럼 사이좋은 누나동생 사이로 지내게 될 거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그럼 누님. 전 이만…."
"아, 자, 잠깐만요!"
"네?"
"아, 그, 그게, 그러니까…으응…아, 그래. 조금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 뭐지? 설마 내가 무반응이니까 오히려 안달이 나서 누님께서 들이대려는 건가?!
그렇다면 각오를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누님을 거절할 각오를 말이다.
나란 놈도 복에 겨웠지. 이런 미인 누님을 차야 하다니.
하지만 우리 애들을 벌써부터 배신할 수도 없고.
젠장. 모처럼 친해진 누님인데.
다음부터는 다른 안내원을 찾아봐야 하나.
"저번 탐험에서는 1계층 텔레포트를 이용하시고 2계층 텔레포트로 귀환하셨던데, 혹시 뭔가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하지만 각오했던 것과는 달리, 누님은 지극히 사무적인 얘기를 해왔다.
일단 반사적으로 날 붙잡았지만, 할 얘기가 생각나지 않아서 그런 얘기라도 했다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일단은 누님과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누님이 지금 던진 질문은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기도 했다.
과연 길드 안내원 중의 에이스. 핵심을 찔러오는군.
"아, 실은 말이죠. 예전에 1계층에서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생각나서 조사를 하러 갔는데, 발견해버렸어요."
"네? 발견? 서, 설마?!"
"네. 2계층에 있던 개미굴과 비슷한 느낌의 소규모 계층을요."
어차피 소규모 계층의 존재는 이미 밝혀버린 상황이었고, 여기까진 공개하기로 미리 말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소규모 계층끼리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만 밝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으니, 나는 당당하게 사실을 밝혔다.
"와아! 대단하세요! 설마 전에 말했던 기대하라고 했던 게…!"
"아, 네. 뭐, 그렇죠."
안내 데스크 너머에서 몸을 뻗어서 내 손을 덥석 붙잡은 채 기뻐하는 누님을 보고, 나는 곤혹스런 표정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대답했다.
전 같았으면 그 커다란 가슴이 강조되고 있는 이 자세에 흥분을 금치 못했겠지만, 누님이 날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기 죄송스러웠다.
정작 누님이 고백해오면 거절할 생각이면서,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하겠어.
"후훗. 역시 모험가가 된 첫 날부터 성자 전설을 보여준다고 자신만만했던 사람답네요."
"하, 하핫. 뭐, 그렇죠. 앞으로도 기대하시라고요. 제 성자 전설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똑똑히 보여드릴 테니까요."
하지만 너무 곤혹해하면 오히려 의심받을 뿐이다.
나는 일단 겉으로는 최대한 전처럼 바보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2계층에서 나왔다는 건…벌써 그 소규모 계층은 답파가 끝난 건가요?"
"네. 뭐. 구석구석 완벽하게 돌아다닌 건 아니지만, 일단 1계층에서 2계층까지 이어지는 길은 알아놨어요."
"아무리 위쪽 계층이라도 꽤나 길었을 텐데…고생하셨네요. 그럼 지도를 그려주실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동안 내 안내원을 맡으면서, 누님은 내가 다른 모험가처럼 던전에서 지도를 그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다가 보고할 때 그려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제는 내가 말할 것도 없이 척척 지도를 그릴 종이와 펜을 준비해주셨다.
역시 안내원은 레이첼 누님이 최고야.
되도록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데 말이야. 지나친 욕심이려나.
"하지만 입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개미굴처럼 성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요?"
내가 지도를 그리는 동안, 고개를 들이밀고 열심히 지도를 바라보시던 누님이 살짝 고개를 들고 날 올려다보며 그런 질문을 던져왔다.
…젠장. 반사적으로 귀엽다고 생각해버렸어.
안되지 안 돼. 내게는 우리 애들이 있어! 정신 차려라 구원!
"아, 네. 오크의 성기가 열쇠에요."
"아, 다행이네요. 이번엔 흔히 구할 수 있는 열쇠네요. 개미굴의 입구는 열쇠가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힘들어서…."
…응? 뭐라고?
누님의 말을 듣고, 나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개미굴의 열쇠는 모기의 성기.
다른 모험가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나 말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물건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아직도 다른 모험가들이 몬스터 성기를 어떻게 얻는지는 못 봤지만 말이야.
던전 안에서 다른 모험가들을 만난다는 게, 좀처럼 없는 일이라서 말이지.
그래도 보통 모기의 성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잖아?
하지만 그렇다면 말이 안 된다.
요즘 개미굴은 2계층은 쉽지만 3계층은 버거운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핫 플레이스.
모기의 성기도 없으면서 그 많은 모험가들이 개미굴을 다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모험가들은 개미굴에 어떻게 다니고 있나요? 모기의 성기, 구할 수 없잖아요?"
"아, 구원씨는 모르시겠네요. 실은 그게 그렇지도 않아요. 물론 무척 힘들기는 하지만, 일단 구할 방법 자체는 있어요."
"네? 대체 어떻게…?"
"그, 그게…짜, 짝짓기 중일 때 덮치면 되요."
레이첼 누님은 조금 말하기 부끄럽다는 듯, 살짝 얼굴을 붉히고 대답해줬다.
그런 레이첼 누님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네?"
"그, 그러니까 짝짓기를 하고 있을 때를 노리면…."
"…모기가요?"
"…모기가요."
…진짜냐. 그렇담 뭐야. 모기떼에게 들키지 않게 졸졸 따라다니다가, 짝짓기를 시작하면 그 타이밍을 노려서 덮친다고?
아니. 지적할 부분이 너무 많잖아.
아무리 2계층의 모기들이 일반 모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다지만 말이야, 아마 수컷은 그 중에 한 마리라고?
수많은 모기들 중 그 한 마리가 짝짓기 하고 있는 모습을 대체 어떻게 보는 건데?
그것도 모기떼에 들키지 않게 거리를 벌리고 쫒아 다니면서.
그렇게까지 해서 모기의 성기를 얻는 거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완전히 극한 직업이잖아. 모험가란 거.
이럴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편하게 던전 탐험을 하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나는 꿈이 깨지는 기분도 들었다.
모험가들이 몬스터의 성기를 얻는 방법은, 당연히 제압해서 강제로 커지게 만들고…같은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현실이란 이렇듯 꿈도 희망도 없이 잔혹한 법이다.
"그, 그래도 모기가 특별 케이스에요. 다른 몬스터들의 성기는 더 손쉬운 방법도 있으니까요."
내 표정이 너무나 연민에 가득 찼던 건지, 레이첼 누님이 그렇게 위로의 말을 건네줬다.
아니. 위로의 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미묘한가.
위로라기보다는…다른 모험가들의 대변?
"그렇죠! 역시 그렇죠! 그럴 줄 알았어요!"
뭐, 나한텐 확실히 위로가 됐지만.
역시 우리 여신님이 만드신 꿈과 희망이 넘쳐흐르는 세계!
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고!
"여기요. 다 됐어요."
아무튼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나는 지도를 다 그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컷 코볼트가 있는 장소는 그려 넣지 않았다.
대신 거대 마석과 페이크 보스가 있던 곳에 친절하게 소계층의 주인이 있는 곳이라고 큼지막하게 표시까지 해줬다.
"아, 고마워요. 언제나처럼 보수는 다음에 건네 드릴 게요."
"넵. 아, 그리고 누님."
"네?"
"모험가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라면, 제가 가서 모기 성기를 더 얻어올까요?"
"네? 그래주신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하지만 그건…."
"괜찮아요. 실은 이왕 이렇게 된 거 3계층에서 이어지는 소규모 계층도 없나 찾아볼 생각이거든요. 어차피 개미굴도 3계층으로 이어져 있고, 조금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실은 이거, 순수한 호의로 하는 말이 아니거든.
당연하잖아. 내가 뭐라고 얼굴도 모르는 모험가들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겠어.
…성자 아니냐고? 성자가 무조건 남을 도울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라고!
아무튼 실은 내가 누님에게 그렇게 말 한 건, 연막작전이었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코볼트 동굴에서 개미굴로 넘어온 이후로 그냥 개미굴 입구를 통해 나왔단 말이지.
다른 모험가들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은 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넓디넓은 던전의 계층과 달리, 소규모 계층은 비교적 그 크기가 작은 만큼 다른 모험가와 만날 확률도 올라갈 테니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개미굴을 통해 나온 게 소문이라도 났어봐라.
길드도 이상한 점을 눈치 챘을 거다.
분명 1계층에서 코볼트 동굴을 발견했다는 애들이 개미굴에서 튀어나와?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연막작전이다.
이걸로 우리가 2계층부터 시작하는 것도, 개미굴로 들어가는 것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설령 던전에서 돌아온 다음 3계층에서 이어지는 소규모 던전을 보고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정말 난 어쩜 이렇게 머리가 좋은 걸까.
사라야. 보고 있냐? 이게 바로 네가 툭하면 바보라고 부르는 오빠의 본모습이란 말이지.
이 스마트한 작전을 보라고.
"구원씨…후훗. 혹시 절 꼬드기려고 멋진 모습 보일 생각으로 그러는 거라면, 소용없으니까요?"
…너무 스마트한 나머지 그만 레이첼 누님의 호감도를 더욱 올려버린 모양이었지만.
진짜냐. 아니. 누님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건 물론 보기 좋습니다만.
설마 이런 미인 누님이 날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런 기분이 드는 날이 올 줄이야….
============================ 작품 후기 ============================
쿠폰, 추천,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