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43화 (43/204)
  • 0043 / 0204 ----------------------------------------------

    사마택

    구름 뒤로 달이 숨어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둠을 등에 업은 그림자가 황궁에 스며들었다. 지리가 익숙한지 거침없이 움직이던 그 인영이 한 처소의 지붕위에 내려앉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누워있던 사마택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궁 내에서 기척을 숨기며 돌아다니는 자의 대범함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처소에 들어선 자의 저의도 의심스러웠다. 천천히 몸속의 기운을 끌어올리면서 준비를 마친 사마택이 다가오는 자와의 거리를 재면서 침상을 박찼다.

    순식간에 늘어난 그의 몸이 안으로 들어선 자의 정면으로 들이닥쳤고 그 모습에 놀란 사내가 다가온 사마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굴 앞으로 다가선 그자의 주먹을 쳐낸 사마택이 남은 왼손을 뻗었고 그 움직임을 눈치 챈 사내도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타다닥.

    순식간에 수초를 교환한 두 사람이 서로의 실력에 놀랐을 때, 갑자기 빨라진 사마택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분뢰공을 펼친 그의 손이 뒤늦게 막아서려는 상대의 오른손을 쳐내면서 침입한 자의 목을 잡았다.

    "누구냐?"

    싸늘하게 묻는 사마택의 목소리에 침을 '꿀꺽'삼킨 낯선 자가 눈짓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에 낯선 자의 혈도를 점한 사마택이 그가 눈짓하던 가슴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서찰과 함께 명패가 딸려 나왔다. 그 서찰을 마주한 사마택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그가 무릎을 꿇으면서 예를 다했다.

    점혈 된 황제의 밀사를 본 그가 뒤늦게 혈을 풀고 서찰을 받아들었다. 천천히 서찰을 읽는 사마택의 눈이 크게 떠졌고 이내 약속이나 한 듯 조용히 사내의 뒤를 따랐다.

    '폐하께서 이 늦은 시간에 몰래 나를 찾으시려는 이유가 있는가? 설마 이전에 무고에 침입한 놈들 때문이던가?'

    사내 뒤를 따르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해져 오는 사마택이었다. 이렇게 은밀하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보면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절로 말라오는 입술과 함께 긴장감을 삭혀보려 노력해보지만 밀려오는 긴장을 쉬이 떨쳐낼 수는 없었다. 축축하게 젖어오는 두 손을 닦아내면서 연신 입술을 깨무는 사마택이었다.

    앞장 선 사내의 은밀한 발걸음이 중화전 앞에서 멈춰섰다. 이내 조심스럽게 주변의 기감을 살피던 사내가 중화전의 문 앞에 서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폐하, 그자를 데려 왔사옵니다."

    "들여 보내거라."

    안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사마택을 이끌었던 사내가 그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눈빛을 받은 사마택이 몸을 숙이면서 조심스럽게 중화전 안으로 들어섰다. 사마택이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은 사내가 재빨리 전각 위로 날아올랐다. 모습을 감춘 그가 주변을 살피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자를 대비해서 주변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한 중화전 내부는 매우 어두웠다. 그 어둠속에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마택이 깊게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 문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네가 사마택이더냐?"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종종걸음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선 사마택이 머리를 조아리고 부복을 했다. 황제를 보고 계수(稽首)를 올리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제를 향해 답을 하는 사마택이었다.

    "예, 폐하. 소신 사마택이라 하옵니다."

    "고개를 들어라. 내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따로 불러들인 것이다."

    영락제의 말에 사마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늠름하게 앉아 있는 영락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중압감이 온 몸을 휘감아 왔고 그 중압감은 오롯이 영락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를 숙이는 그였다.

    "네가 무고를 지키고 있다 들었다. 그래, 무고에는 별일이 없느냐?"

    갑작스런 황제의 질문에 사마택의 몸이 멈칫했다. 이미 별다른 일이 없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구태여 이 일을 다시 꺼내는 황제의 진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전에 있었던 일의 책임을 물으시는 것인가? 어떻게 답을 해야 하지?'

    "무고에 별일이 없냐고 물었다."

    "예. 폐하. 아직까지…… 별다른 일은 없었사옵니다."

    흔들리는 사마택의 대답에 영락제의 얼굴에 조그마한 조소가 흘렀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되묻는 영락제였다.

    "그래? 별 일 없었다? 지금 네 놈 앞에 서 있는 짐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뜬금없는 하문에 당황한 사마택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면서 더욱더 몸을 숙였다.

    "폐하…… 지금 제 앞에 계신 분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신, 대명의 군주이신 황제폐하이시옵니다."

    "헌데, 그런 나를 속이려 하는 것이더냐! 내 이미 얼마 전에 무고에 잠입한 자들의 소행을 익히 알고 있거늘."

    영락제의 호통에 당황한 사마택의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은밀히 덮었다고 생각했던 일을 영락제가 어찌 알고 있는 것인지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사마택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약간의 소란이 있기는 했으나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사옵니다. 별다른 일은 없었기에……"

    당황한 사마택이 자신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면서 황제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그의 말을 끊은 황제가 다시 물었다.

    "대수롭지 않았다? 그래 그 배후는 밝혀냈느냐?"

    "폐하, 송구하오나 그 배후라 할 만한 것도 없었사옵니다. 그저 소신의 깜냥이 부족하여 일어난 일이었을 뿐이옵니다."

    짐짓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는 사마택의 말에 웃어보이던 황제가 표정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물어왔다.

    "정화가 시킨 일이더냐?"

    "……."

    "무고에 침입했던 일을 숨기라던 자가 정화였느냐?"

    "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모든 일은 오롯이 제가 처리한 일들이옵니다. 정화 태감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옵니다. 모두가 소인의 부족함으로 생긴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하하하하."

    갑자기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황제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사마택이 머리를 더욱 바닥에 붙인 채 불안한 눈을 굴렸다. 그리고 그의 귀로 다시 황제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꽂혀들었다.

    "왜 정화가 네 놈을 그리 믿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만인지상이라 불리는 내 앞에서도 감히 그런 거짓을 고할 수 있다니…… 대범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놈이라…… 참으로 탐이 나는 인사가 아닌가!"

    "……."

    갑자기 바뀐 황제의 분위기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마택이었다. 이미 무고에서의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한 황제였지만 꾸중은커녕 자신의 성정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머리를 조아린 사마택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모두들 물러나라."

    황제의 외침에 중화전에 적막이 감돌았다. 곳곳을 지키던 기운들이 사마택의 기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물러섰고 어느새 중화전에는 황제와 사마택 단 두 명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정확히 자신의 감각이 미치는 곳의 끝부분까지만 물러선 자들의 행태에 마른 침을 삼키는 사마택이었다.

    "무고에서의 일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내 오늘 너를 은밀히 부른 이유는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다."

    "……."

    "자고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지 않더냐? 한 번 숨어든 놈들은 다시 숨어들 생각을 가질 것이다. 비단 그놈들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놈들이 존재할 터. 괜한 분란을 남기는 것이 꺼림칙하구나."

    "……."

    "무고의 비급을 옮겨야겠다."

    황제의 마지막 말이 사마택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따로 자신을 은밀히 불은 황제의 의중을 대충이나마 눈치 챈 사마택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그 일을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구나. 아무래도 은밀히 그 일을 행할 자는 너밖에 없는 것 같다. 믿을만한 놈이 없구나."

    "……."

    "이 일을 맡겠느냐?"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하명에 사마택의 얼굴이 굳어졌다. 잘게 떨리던 그 몸이 어느새 멈춰졌고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절로 그의 음성을 떨리게 만들었다.

    '지금 황제는…… 내 목숨을 원하고 있다! 은밀히 진행하라는 말은 그 누구도 무고가 옮겨진 사실을 알 수 없게 하라는 말이 아닌가? 무고를 옮긴 나까지도……'

    정화의 손에서 구함을 받고 황궁으로 들어왔지만 이런 일을 겪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마택이었다.

    "왜 답이 없느냐? 싫더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영락제의 되묻는 말에 고개를 조아리는 그였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답을 못하는 사마택이었지만 그런 사마택의 의중을 간파한 듯 영락제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마택…… 사마택이라…… 사마 씨더냐?"

    영락제의 말에 사마택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애써 덤덤한 척 표정을 감춰보려 했지만 이미 그 표정을 읽은 영락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이대로 황제를……'

    불경한 마음을 가진 사마택이 황제를 바라봤다. 여유로워 보이는 그 모습과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전신에 꽂혀들었다.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마택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였다.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던 자가 암중에서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사마택은 침음을 삼켜야만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르고 폐주를 도왔던 사마가는 역적의 가문이 되었지. 그런 가문의 후손이 어찌 조정의 녹을 먹을 수 있단 말이냐? 그것도 가까이에서 나를 보필하는 환관의 복장을 한 채로…… 혹여 정화의 도움이 있었더냐?"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황제의 하문에 입술을 깨문 사마택이 손사래를 치면서 극구 부인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정화 태감은 아무 것도 모르옵니다. 그저 소신이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서 성을 바꿔서 들어왔을 뿐이옵니다. 정화 태감에게 죄가 있다면 그런 소신을 믿어준 것 밖에는 없사옵니다. 모두 소신의 계책이었을 뿐 정화 태감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사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정화를 두둔하는 그 모습에 황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이번 일을 맡기기에는 꽤나 아까운 인재였다. 하지만 그만큼 믿을만한 사내였고, 역시나 이번 일에 제격이었다.

    "그래. 내 잘 알고 있다. 정화는 그런 사내지. 한번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하면 끝까지 그 사람을 믿어주는…… 그래서 내가 정화를 가까이 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그래서 내 너를 따로 부른 것이다. 정화가 믿는 사람이니 나 또한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

    "……."

    "네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네가 별 탈 없이 이 일을 끝내면 내 친히 사마 가의 역모를 사해주마. 더 이상 '사마'라는 성 앞에 '역모'라는 글자가 따라다니지 않도록 해 주겠다."

    황제의 제안에 사마택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역모의 죄를…… 사해준다고? 내 목숨과 가문을 맞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찮은 내 목숨이야 가문을 위해서라면 열 번이라도 내 놓을 수 있지만…… 하지만…… 내가 이리 가버리면 정화 태감은 어찌하신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원정을 떠나셔서 그 입지가 불안해지려는 찰나에……"

    고심하는 사마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외통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불려지고 중차대한 일을 들은 자신의 목숨은 이미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미 황제의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다. 내가 하지 않겠다면 다른 누군가를 찾겠지만…… 이미 이 이야기를 들은 내 목숨은 내놓아야만 한다. 허면 그 정도 실리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다만 정화 태감은……'

    "그래, 어찌 하겠느냐? 이 일을 맡겠느냐?"

    위엄 있는 영락제의 목소리에 결심을 굳힌 사마택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굳은 결심을 본 황제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예, 폐하. 소신 최선을 다 하겠사옵니다. 허나……"

    "허나? 하하하. 그래, 뭔가 원하는 것이 있더냐?"

    "…… 지난 번 무고와 관련하여, 그리고 소신의 입궁과 관련하여 정화 태감은 아무런 연관도 없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모두가 소신의 잘못이옵니다. 정화 태감은 단지 이 극악한 놈을 믿어준 것뿐이옵니다."

    "흐음. …… 네 뜻은 잘 알겠다. 나 역시 정화를 버릴 수는 없음이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바닥에 머리를 찧는 사마택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지막까지 정화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황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