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44화 (4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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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택

한동안 멍한 상태로 무고에 앉아있는 사마택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근심이 어린 그의 모습에 간단한 내용을 필사하던 아삼이 사마택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저 모습은 마치……'

저번 생의 마지막 날을 떠올리던 아삼이 머리를 저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떨쳐냈다. 정화가 없는 지금 사마택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삼이었다. 괜한 오지랖으로 걱정을 하느니 지금 필사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

처음에 필사를 할 때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비급을 외우려고 노력했지만 여우 같은 사마택이 중요한 비급을 건넬 리는 없었다. 그 조차도 진가를 몰랐던 '살수지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비중이 없는 책들이었고, 그나마 제대로 된 무공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규화보전과 분뢰공, 황자에게 전했던 쾌검술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통째로 외우려고 했었다니.'

새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쓴웃음을 짓던 아삼이 이내 표정을 지우고 필사에 집중했다.

늦은 시간, 평소라면 무고에 남아있지 않을 사마택이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장 천호가 자리를 지키면서 그를 바라봤다.

이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 사마택이 글을 적던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진 것은 술병과 함께 두 개의 잔이었다. 그 모습에 의아해 하던 장 천호였지만 이내 들리는 사마택의 목소리에 더 놀라야만 했다.

"같이…… 한 잔 하겠는가?"

"……."

"어떤가. 장휘? 잠깐만 내려오시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장 천호가 그의 앞에 앉았다. 무심한 눈빛으로 앞에 앉은 사마택을 바라보던 그가 평소와 다른 모습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의 눈빛을 느낀 사마택이 잔에 술을 따르면서 입을 뗐다.

"자네와 나,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

뜬금없는 사마택의 질문에 장 천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장 천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던 사마택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자네를 벗(友)이라 생각했네.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결코 적지 않았고 서로 꽤나 많은 일들을 겪지 않았는가?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 이렇게 살벌한 궁에서 벗(友)을 사귈 생각을 다 하다니……"

긴 한숨을 내쉬는 사마택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는 장 천호였다. 그의 긴 속눈썹 아래 그늘진 얼굴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이는 것 같았다.

"자네는…… 폐하의 사람이었던가?"

몇 잔의 술을 연거푸 들이키던 사마택이 담담하게 물어왔다. 그의 갑작스런 물음을 들은 장 천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고 그 표정을 눈치 챈 사마택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 나왔다.

"내 불찰이었네. 자네도 어쩔 수 없었을 테지. 나 역시…… 자네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

"그래도 난 자네를 벗으로 여기고 싶네."

갑작스런 사마택의 행동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장 천호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고맙네. 아니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 자네 덕에…… 염원하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사마택의 행동에 장 천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사마택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그였기에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그를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특히나 술잔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줘야만 할 것 같았다.

"자네와의 술자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군. 자네에게 나는 벗인가?"

"……."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장휘였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마택과의 관계를 정의한다면 벗이라는 단어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흐릿한 미소를 지은 사마택이 다시 술잔을 채우면서 말을 이어갔다.

"친구로서 내 부탁 하나만 하겠네. 그래도 많은 시간을 동고동락했던 정이 있으니 쉬이 물리치지 말아주게. 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정화태감이 폐하께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는…… 폐하의 사람인 자네가 잘 알거라 믿네. 앞으로도 정화태감의 일을 잘 봐주길 바라네. 그리고 혹여 여력이 남거든 아삼이란 아이도 챙겨주게나. 지금껏 그 아이를 봐왔으니 그 아이에 대해서 자네도 잘 알거라 생각하네. 내 마지막 청이니 꼭 들어 주게나."

"……."

쓸쓸한 미소를 보이는 사마택의 모습에 장휘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의 눈을 바라보는 장휘의 눈빛에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던 사마택이 그를 바라봤다.

답답한 마음에 복면을 내린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워냈다. 그리고 그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짓던 사마택이 술병을 들면서 그를 바라봤다.

"자, 내 잔 한 잔 받게나."

술병을 내미는 사마택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장천호가 두 손을 내밀며 공손히 잔을 받아 들었다.

"첫 잔은, 황제폐하를 위하는 잔일세."

무고를 크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쭈욱 들이키는 모습에 장휘도 술잔을 들이켰다. 그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사마택이 다시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번째 잔은, 정화 태감을 위한 잔일세."

다시 외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을 들이키는 사마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잔은…… 남겨진 자들을 위한 잔이네."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이킨 사마택이 '탁'하고 탁자에 잔을 내려놨다. 어느새 그의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휘의 눈도 붉어졌다.

"고맙네. 뒤를 부탁함세."

말을 마친 사마택이 일어서려 했고, 그의 손을 붙잡은 장휘가 비어진 그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마지막 잔일세."

"……."

"이 잔은…… 오롯이 자네를 위한 잔일세."

"…… 고맙네."

한동안 잔을 바라보던 사마택의 눈에 착잡함이 흘렀다. 이내 한숨에 술잔을 털어 넣은 그가 몸을 일으키며 무고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휘가 돌아선 사마택의 뒤에 대고 포권을 하면서 예를 표했다. 거대했던 사마택의 뒷모습이 어쩐지 작아 보이는 것 같은 생각에 한동안 그 자세로 움직임을 멈춘 장휘였다.

'이제 그 아이만 만나면 되겠구나."

무고를 나선 사마택의 두 눈이 허공을 향했다. 유난히도 밝은 달빛과 함께 밝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던 그의 눈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름을 떠올리면서 이내 회한에 잠긴 듯한 사마택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열심히 붓을 놀리던 아삼이 무고로 들어서는 사마택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예를 표하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늦게 무고에 들어선 모습에 의아해 했지만 이내 다시 붓을 잡는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삼을 향해서 사마택이 나직이 말했다.

"붓을 놓고, 이리 와서 앉거라."

사마택의 명에 아삼이 붓을 놓고 재빨리 그를 향해 다가갔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공손히 놓고 자신의 앞에 앉은 그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던 사마택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잠깐만 자리를 좀 물러주겠나? 내 이 아이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전음을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내뱉는 사마택의 말에 무고를 지키던 장휘가 머뭇거렸다. 이내 결심을 굳힌 그가 수하들을 향해서 전음을 보냈다. 무고의 곳곳에서 느껴지던 기척들이 멀어졌고 그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사마택이 천장을 향해서 고마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 눈빛을 접한 장휘가 바닥으로 내려서면서 그를 바라봤다.

"고맙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장휘가 포권을 해 보이고는 그대로 자리를 비켜줬다. 그 모습이 미미한 웃음을 보이던 사마택이 불안해하는 아삼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주위를 모두 물리는 거지?'

잔뜩 긴장한 채 사마택의 입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삼이었다. 어린 아이의 흔들리는 눈빛에 사마택이 짐짓 농을 건네며 말했다.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니 그리 긴장할 필요는 없다. 내 너에게…… 해줄 이야기도 있고 또 부탁할 것도 있어서 따로 불렀다. 나는 너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황궁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사람은 너 밖에 없는 것 같구나.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착한 네놈이야 말로 내 청을 들어주기에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지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너 밖에 없다. 너무 착했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사마택이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정화태감을 따라 이 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구나. 그동안 많이 일이 있었지. 내 본래의 성은 사마 씨다. 너도 귀가 있으니 들어봤겠지? 건문제를 따르다 역적의 가문이 된 사마가를……"

'사마 씨라고? 역적의 가문?'

뜬금없는 사마택의 고백에 당황한 아삼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눈빛을 받던 사마택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당시에는 내게 힘이 없었다. 이미 승패가 판가름 날정도로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지만 가문의 어른들은 충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지금의 황상과 맞섰지. 그리고 패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곳에서 정 공공을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우리 가문을 구할 방도를 찾을 수 있었다."

"……."

"내가 황궁으로 들어온 이유다. 가문의 대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스스로 양물을 자르고 정 공공을 모시게 되었다. 내 결단에 공공께서 많은 힘을 쓰셨고, 충의를 지킨다던 사마가의 어른들의 목으로 남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설마?'

긴 한숨을 내쉬는 사마택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삼이었다. 이곳의 역사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역모라는 무게를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 거세를 택하면서 살아남은 사마택의 고단한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환관의 모습에 쓰게 웃던 사마택이 품에서 두 개의 서찰을 꺼냈다.

"자, 이걸 받거라."

"……."

"하나는 정 공공에게 드릴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마은령이라는 아이의 것이다. 살아 있다면…… 지금쯤 어엿한 여인이 되어 있을 테지. 아비로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서찰을 그 아이에게 전하고 싶구나."

"……."

"곧 역모의 죄가 없어질 것이다. 언젠가…… 이 서찰을 은령이라는 딸아이에게 전해 줬으면 좋겠구나. …… 아직 어린 아이인 너를 볼 때마다 그 아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네놈을 양자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씁쓸한 미소를 보이는 사마택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아삼이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모종의 일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그가 쓸쓸해 보이는 사마택을 바라봤다.

"크흠. 내가 어린 네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싶구나. 해서 그 대가를 준비했다."

사마택의 말에 고개를 흔들면서 서찰을 갈무리하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흡족해하던 사마택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 노파심에 너에게 마지막으로 충고를 하나 하마. 이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절대 다른 사람을 믿지 말거라. 설령 네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더라도 네 전부를 내보이지 말란 말이다. 지금껏 네가 해왔던 것처럼 드러내지 말고 진면목을 숨기면서 살아야 한다."

걱정이 묻어나는 사마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마택이 무고의 빈 곳으로 걸어가더니 아삼을 불렀다.

"이곳에 돌아앉아서 가부좌를 틀거라."

"……."

갑작스런 사마택의 말에 영문을 알지 못하던 아삼이 머뭇거렸고 그런 아삼을 보고 호통을 치는 사마택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알아봤자 좋을 것은 없으니 너만이 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비장감이 감도는 사마택의 말에 머뭇거리던 아삼이 가부좌를 틀고 돌아앉았다. 그리고 그의 등에 장심을 가져다 댄 사마택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이것 밖에 없는 것 같구나. 늦은 나이에 다시 쌓은 공력이라 미미할 테지만,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지금부터 내 내공을 전해줄 터이니, 정신을 집중하도록 하거라."

사마택의 말에 놀란 아삼이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 아삼의 손을 급히 붙잡은 사마택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거라. 곧 없어질 내공이다. 미력하나마 내 마지막 청을 들어주라는 의미니 거부하지는 말아다오."

확고한 사마택의 태도에 아삼이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아삼의 뒤에 앉은 사마택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작된 그 움직임이 아삼의 등에 맞닿은 손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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