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8화 (28/204)
  • 0028 / 0204 ----------------------------------------------

    조력자들

    계속되는 수련은 아삼을 강하게 만들어갔다. 차곡차곡 쌓이는 내력과 함께 점점 성취를 더해가는 살수의 무공.

    가장 성취가 높은 것은 바로 몸 안에 있는 기운을 조절해서 안으로 기운을 감추는 전대 살왕이 남긴 비급의 무공이었다. 특별한 검술이나 보법 등이 적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비급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고, 아삼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무공이었다.

    영묘하게도 쌓이는 동자공의 내력을 고수인 사마택까지 속일 정도로 갈무리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살왕의 무공이었다. 최소한의 내력만 드러내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아삼이었지만 언제까지 그 일이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그렇게 수련을 해나가던 몇 달 후에 갑자기 황궁이 떠들썩했다. 황궁뿐만 아니라 명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다.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앞세우고 당당히 황궁으로 들어선 사내 하나가 영락제 앞에 부복을 하며 고했다.

    "폐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사내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에서 반가움이 묻어났다. 이내 부복하고 있던 사내에게 다가간 황제가 손수 사내를 일으키면서 그를 반겼다.

    "오호, 이게 얼마만인가?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가?"

    "황공하옵니다. 폐하. 폐하의 은덕으로 무사히 원정을 마칠 수 있었사옵니다."

    손수 일으켜주는 황제가 황송한 듯 남자가 더욱더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사내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영락제였다.

    "여봐라, 정화 태감에게 의자를 가져다 주거라."

    "폐하,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어찌……"

    "대원정에서 심신이 얼마나 피로하겠나. 내 마음이니 부디 사양치 마시게. 뭣들 하느냐? 어서 의자를 대령하지 않고?"

    황제의 재촉에 환관 하나가 재빨리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정화의 앞에 의자를 갖다 놓았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마지못해서 의자에 앉는 정화였지만 의자에 앉은 정화의 두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정화를 바라보는 대신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황제를 알현하고 있는 사람은 정화였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원나라의 세력하에 있던 윈난성을 공격할 때, 소년이었던 정화는 붙잡혀 거세됐고 환관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주체(朱棣)에게 헌상되었다. 주원장 사후 영락제(주체)가 제위를 찬탈한 정난의 변(靖難之變) 때 정화는 공적을 세워,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란 성을 하사받았고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다. 그리고 정화는 지금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남쪽 바다에 대한 대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는가? 뱃길은 안전 하던가?"

    황제의 하문에 정화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폐하. 대원정에서 마주한 여러 나라가 저희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으며 이것들은 그들이 폐하께 보낸 진상품들이옵니다."

    정화가 당당한 얼굴로 가져온 물건들을 가리켰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진귀한 물건에 황제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그간 원정으로 피로했을 터이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 쉬도록 하라."

    "네. 폐하."

    태화전을 나서는 정화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런 정화의 뒷모습에 대신들의 시기어린 눈빛이 따라왔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던 그는 더 당당히 걸어서 대전을 빠져나갔다.

    "잘 지냈는가?"

    환한 미소로 무고로 들어서는 정화의 모습에 사마택의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이내 부복하며 사마택이 말했다.

    "정공공, 송구하옵니다. 소신이 이 무고에 매인 몸이라 정공공을 마중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마택을 향해 정화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사사로이 자리를 비울 수 있겠는가? 자네의 잘못이 아니니 고개를 들게. 내 자네를 만나러 이리 발걸음을 하였는데 자네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내가 여기로 온 이유가 사라지질 않겠는가?"

    밝은 미소와 함께 사마택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정화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아삼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지? 누구인데, 사마택이 저렇게 예를 표하는 거지?'

    황족을 제외하고는 당당하던 사마택이었다. 관직은 알 수 없지만 어지간한 자들은 모두가 그의 눈에 들기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봐왔던 아삼인지라 새삼 앞에 선 환관의 모습에 호기심이 동했다.

    "원정을 무사히 마치셨다 들었사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내가 누군가? 천하의 정화가 아니던가? 내 이리 튼튼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호탕하게 웃는 정화의 말에 아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정화라고? 저 사람이 그 정화란 말인가?'

    자신의 얕은 지식이 맞다면 일곱 차례나 대원정을 떠났던 그 환관이었다. 환관하면 정화라고 불릴 만큼 대표적인 역사 속 인물이 지금 자신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아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화를 바라보던 아삼의 눈이 고개를 돌린 정화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아삼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면서 읍을 했다.

    "헌데 저 아이는 누구인가?"

    무고에 있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던 정화가 읍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삼을 바라보면서 사마택을 향해서 물었다.

    "아삼이라는 아이인데 이번에 새로 황궁으로 들어온 어린 환관이옵니다. 벙어리에 필체도 좋아보여 이곳에서 필사를 돕고 있사옵니다."

    "벙어리?…… 필사를 돕고 있다?"

    정화의 눈이 상위에 어지럽혀져 있는 종이로 향했다. 필사된 종이를 집어든 정화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이…… 비급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아이가 필사하고 있는 책은 바로 규화보전이었다. 어떤 연유로 한낱 어린 환관 따위가 이런 귀한 비급을 필사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정화였다. 규화보전도 규화보전이지만 필사된 아이의 필체에 또 한 번 놀란 정화가 아삼을 바라봤다.

    "규화보전이 아닌가? 저 아이를 버릴 참인가?"

    계속해서 웃음을 보이던 정화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사마택을 바라봤다. 그 눈빛을 접한 사마택이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황자마마의 명으로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허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그 아이에게 그 비급은 그저 한낱 오래된 책일 뿐이옵니다. 그 아이의 깜냥으로 절대 익힐 수 없사옵니다. 하물며 입문하기 까다로운 비급이 아니옵니까?"

    정화의 눈빛을 눈치 챈 사마택이 변명하고 나섰지만 사마택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삼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정화였다.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삼을 훑어보고 있었다. 자신을 꿰뚫는 듯한 정화의 눈빛에 아삼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벙어리에 명필이라…… 그리고 저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이 기(氣)는? 설마 사마택을 속이고 있다는 말인가? 깜냥이 되지 않는다니? 사마택의 무공 또한 만만치 않는데 그런 사마택을 속였다라…… 예사롭지 않은 아이구나.'

    정화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한 번 원정을 떠나야만 했다. 조공을 바쳤던 각국의 사절들을 돌려보내야만 했고 아무래도 그 임무를 맡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황궁에 머물지 못하는 자신의 권력을 탄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자기 사람을 황궁에 심어놔야만 했다. 생각보다 심계가 깊고 영악해 보이는 이 아이는 환관이 되기에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삼이라 했더냐?"

    정화의 하문에 아삼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금 필사하고 있는 이 책이 무슨 책인 줄 아느냐?"

    속으로 놀란 아삼이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모습에 정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놓치지 않는 아삼이었다.

    "규화보전이라는 비급이다. 네놈의 목숨은 이 비급을 필사한 이후로 사라졌다."

    "……."

    정화의 말에 무고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연히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아삼도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누구도 그 아이를 책망하지는 않았다.

    "공공, 저 아이는 그저 제 명으로……"

    "저 아이를 내칠 생각이 아니었더냐?"

    "아니옵니다. 소인은 저 아이를 양자로…… 공공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

    다급한 사마택의 말에 만족할 만한 웃음을 짓는 정화였다. 자신의 측근으로 있는 사마택이 그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리가 없었다. 한번 떠봤던 정화였지만 생각보다 아삼이라는 아이를 높게 평가하는 그의 말을 듣고 확신을 얻은 그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 환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의 몸에 양기가 가득하구나.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네놈 스스로도 알지 못 하는 양기가 온 몸을 채우고 있다. 단전에 갈무리 된 내공 또한 범상치 않아 보이는구나."

    "……."

    자신의 기운을 눈치채고 있는 듯한 정화의 발언에 급기 고개를 조아리는 아삼이었다. 만약 그 상태로 있으면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정화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예리했다.

    '내가 기운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거야. 알지 못하는 양기가 온 몸을 채우고 있다고? 설마?'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혹여 정화가 다른 생각을 가진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불안해하던 아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정화가 불안해하는 아삼을 향해서 무언가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사태감의 양아들이 될 아이라. 그렇다면 죽일 이유가 없지."

    "공공. 소인은 그저."

    "되었네. 나도 이 아이가 마음에 드네. 받아 들거라. 내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

    "이제 내 사람이 될 아이니 잘 챙겨야하지 않겠더냐? 자 받거라."

    정화가 내민 약재를 조심히 받아든 아삼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불경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어린아이의 맹랑한 태도에 웃음을 흘리던 정화가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화란(紫花卵)이다. 곤륜산의 자화초가 십년에 한번 맺어내는 열매로 아주 귀한 약재지. 그걸 복용하면 미비해 보이려는 네놈 내공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확실히 앞에 있는 정화라는 환관이 자신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끌어들이려는 모습을 확인한 아삼이 그가 내민 것을 소중히 받아들면서 정화를 향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사마택에게 아삼에 대해서 물어보는 정화의 모습에 아직까지 고개를 들지 않던 아삼은 지금 상황에 대해서 고심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이런 약재를 주는 이유는 뭐지? 이제 정화라는 유명한 환관을 등에 업은 건가? 내가 잡을 동아줄이 바로 이것인가?'

    고개를 들지 않는 아삼을 보던 정화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지어졌다. 많은 사람을 만나봤던 그였고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고수의 반열에 있는 정화였다. 눈앞에 보이는 어린 아이의 행동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사마택을 속일 정도의 영특함과 짧은 시간에 저 정도 성취를 이뤄냈다면…… 충분히 옆에 두고 볼 인재겠지.'

    "그동안 고생했네. 무고에 처박혀서 놀고만 있지는 않았구만. 저런 아이를 끌어들이다니……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어. "

    "송구하옵니다. 공공."

    읍을 하는 사마택의 눈빛이 빛났다. 자신을 속이고 무공을 숨긴 아삼이 괘씸했지만 이미 자신의 사람으로 들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오히려 그 점이 기특하게 여겨진 그가 피식 웃으면서 아삼을 흘겨봤다.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에 든 자화란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