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창-29화 (29/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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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력자들

    정화의 만남은 아삼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내력의 증진이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수련을 했던 또래들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이인학과 방태옥, 송상호 등의 아이와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아니 그들보다 더한 내력을 얻은 아삼이었다.

    사마택의 도움으로 자화란을 흡수 할 수 있었던 아삼은 그동안 벌어진 간극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규화보전이라는 희대의 비급을 입문할 수 있을 가능성을 엿보았다.

    규화보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50년 이상의 동정이 필요했고, 정화의 말 중에서 알 수 없는 양기가 온몸을 가득 채웠다는 소리를 들은 아삼은 지난 삶의 37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만약 그 50년 이상의 동정이 이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면?'

    2년이 모자랐다. 이제 11살인 아삼과 지난 이명철의 37년을 합하면 정확히 50년에 2년이 모자랐다. 그리고 그 2년이 지나면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는 50년이 채워진다고 생각하는 아삼이었다.

    정화의 그 말 한마디가 아삼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때가 되어서 규화보전을 익힐 수만 있다면…… 그때는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아도 될 거야. 그토록 바라던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결심을 굳힌 아삼의 두 눈이 빛났다. 처음으로 막연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 아삼이었다.

    남은 시간 동안 기본이 될 무공들을 수련해 나가는 아삼이었지만 지겹고 힘들었던 수련들이 그다지 힘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줄 밑거름이란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수련에 임할 수 있었다.

    어느덧 추적술의 수련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서당에 들어선 조삼보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은 추적술의 고급 기술 중 하나인 야백안(夜白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야백안(夜白眼)은 밤이 되어 어두운 환경에서도 밝게 볼 수 있는 지안술을 말한다. 이 야백안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특수하게 처리한 약품이 필요하고 그 과정도 상당히 까다롭다. 우선은 그것을 대처할 무언가를 깨닫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말을 마친 조삼보가 옆에 서 있던 훈육 환관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내서당 전체에 검은 휘장을 두르고 촛불이란 촛불은 모두 끄는 훈육 환관이었다. 어느덧 내서당 전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두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지금 너희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허나 누군가를 추적하는 상황에서 깜깜한 밤에 그것도 숲에서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어둠속에서 너희들의 눈이 되어줄 것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여라. 이 이후에 야백안에 대한 수련을 이어가겠다."

    조삼보의 말을 끝나자 갑자기 조용했던 내서당에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넘쳐났다.

    퍽. 따악.

    "아! 윽……"

    뭔가에 맞은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긴장한 아삼이 두 손을 굳게 쥐었다.

    '뭐지? 지금 상황은…… 누군가 공격을 하고 있는 건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이거야 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이렇게 갑갑하니.'

    답답한 마음에 두 눈을 크게 떠보는 아삼이었지만 새카만 어둠만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어둠속에서 눈이 되어줄 걸 찾으라고? 뭘 찾으란 말이지?'

    조삼보의 말을 떠올리던 그때 아삼의 귀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고통으로 신음하는 듯한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아삼이 더욱더 귀를 기울였다. 그때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삼이었다.

    '그렇군. 소리야!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 두 눈은 소용없을 거야. 그렇다면 소리다. 둔탁한 소리와 신음소리…… 이것들을 듣고 피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아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어둠 속에서 눈이 되어줄 것은 다름아닌 '귀'였던 것이다. 어차피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을 두 눈을 감은 아삼이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그때, 아삼의 귀에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미미한 심장박동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아삼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온다?'

    근처로 다가오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바람에 스치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 챈 아삼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아삼의 등에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뒤에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서 조심스럽게 바닥을 기는 아삼이 '살수지무'에서 읽었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기척을 지워나갔다.

    '헉! 뭐지?'

    순간 조삼보가 아삼의 기척을 잃어버렸다. 익히고 있던 야백안으로도 그의 모습을 놓치자 당황한 조삼보의 눈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아이가 누구였지?'

    조금 전에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린 조삼보는 그 아이가 처음 자신을 따라서 주저앉았던 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소를 지어보였다. 그날 이후에 별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어느덧 그 아이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린 그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쉽게 생각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조삼보였다.

    어느새 내서당을 가득 채웠던 둔탁한 소리와 신음소리가 그쳤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내서당에 쳐진 검은 장막이 걷어지자 내서당 안으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져있던 아이들은 갑작스런 들이치는 환한 빛에 얼굴을 찌푸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팔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반면에 몇몇의 아이들만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기다란 목검을 든 조삼보의 모습이 보였다.

    '응? 저 아이는?'

    엉거주춤한 모습을 보이는 아삼이 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눈치를 살피더니 팔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아이의 영악한 행동에 눈을 빛낸 조삼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아이에게 줬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꽤 현명한 아이가 아닌가? 아니지. 상당히 영악한 놈이로군. 눈여겨봐야겠어.'

    괜찮은 재질을 가졌다고 판단하던 아이들이 유일하게 서 있었다. 그 모습에 고소를 지어보이던 조삼보는 서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래 어둠 속에서 너의 눈이 되어준 게 뭐더냐?"

    조삼보가 꼿꼿이 서 있는 이인학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귀'였사옵니다. 어둠 속에서는 '귀'만이 저의 눈이 되어주었사옵니다."

    이인학의 대답에 조삼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옳다. 바로 그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그 소리가 너희들에게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조삼보의 시선이 서 있는 아이들에게 향했다.

    '역시 황궁이라 그런가? 눈에 띄는 아이들이 상당히 많구나. 이 짧은 시간에 그 이치를 깨닫다니…… 이거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구나. 특히 저 아이는……'

    교일지십(敎一知十)이라 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제자를 둔 스승의 기쁨을 알게 된 조삼보였다. 그리고 아삼이라는 아이의 행태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그였지만 일부러 내색하지는 않았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삼을 돌아보던 이인학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하하하. 그러면 그렇지. 팽가에서 보인 모습에 내가 너무 긴장을 하고 경계를 한 건가? 저런 놈을 호적수라고 여겼다니.'

    바닥에 앉아서 팔뚝을 문지르는 아삼의 모습에 이인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간단한 것조차 깨닫지 못한 아이에게 팽가에서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인상이 구겨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인학을 보면서 고소를 지어보이는 아삼이었다. 이인학과 방태옥 그리고 송상호를 비롯한 열댓 명의 아이들의 얼굴엔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규화보전을 필사하던 아삼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사마택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황자마마께서 너를 꽤 마음에 드셔하시는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필사한 것을 네가 직접 가져오라고 하신다. 앞으로는 필사가 끝나면 아삼 네가 직접 가져다 드리도록 하거라. 내 노파심에 이른다만 행동거지 하나하나 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짐짓 엄하게 이르는 사마택의 하명에 아삼이 길게 읍을 했다.

    "뭘 그리 엄하게 대하는가? 그리 이르지 않아도 총명한 아이이니 알아서 잘 처신할 것인데……"

    갑작스런 정화의 등장에 당황한 사마택과 아삼이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특히 사마택의 놀람이 컸는데 고수라고 칭할 수 있는 자신도 정화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공공, 어인 일이시옵니까?"

    "무료하여 자네와 바둑이나 한 수 둘까 해서 이리 왔네. 혹여 내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신의 실력이 미비하여 공공의 상대가 될련지 모르겠사옵니다."

    "자네의 바둑 실력이야 내가 잘 알지 않나? 어떻게 한 수 배워볼 수 있겠나?"

    너털웃음을 짓는 정화의 모습에 송구스럽다는 듯이 사마택이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가서 바둑판을 가져 오겠사옵니다."

    사마택이 황급히 무고를 나섰다. 사마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화의 시선이 상 위에 널부러져 있는 종이로 향했다. 필사된 종이를 집어든 정화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점점 네 필체도 다듬어지는 구나. 좋아, 아주 좋구나. 황자마마가 너를 부르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정화의 모습에 황공하다는 듯 더욱 더 고개를 숙이는 아삼이었다. 그런 아삼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올해 몇 살이더냐?"

    정화의 물음에 아삼이 두 손가락을 쫙 펴고 손가락 하나를 더 펴보였다.

    "11살이더냐?"

    놀란 듯한 정화의 물음에 아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11살? 이제 고작 11살이라?…… 필체만 봐서도 나중에 크게 대성할 놈이지만 이상하게도 네 몸에는 양기가 많이 보이는구나. 이제 갓 10살이 넘긴 사내아이가 가질 양기가 아닌 듯 한데…… 그렇다고 딱히 네 신체가 특별해 보이지도 않은데 이거 참 기이한 일이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는 정화의 말에 아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양기가 많아 보인다고? 지난번에 봤을 때도 비슷한 말을 건넸었는데 그렇다면 전생에서 유지했던 동정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정화의 말에 확신을 가지게 된 아삼이었다. 긴가민가했지만 사마택조차 화들짝 놀라는 모습으로 봐서 훨씬 더 윗줄의 고수라고 생각되는 정화의 말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정화의 말이 맞다면 앞으로 2년 후면 규화보전을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삼이었다.

    규화보전만 익힌다면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듯이 두근거리는 아삼이었지만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려는 그였다.

    규화보전…… 그 위력적인 무공이 아삼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낼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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