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
소송팀 국제 소송․중재
변호사 민승규
한때 판사 딸이었던 만큼 들은 가닥이 있었다. 아니 몰랐어도 그 이름 두 글자 정도는 회사 생활하면서 들어봤다.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로펌 중 하나가 아니던가. 거기 다니는 사람이 이런 걸 자기에게 보냈다면 이미 얘기는 끝난 거였다.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이라도 제대로 해봐야 했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지만 꾹 참고 전화번호를 누른 것까진 좋았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몰려오는 절망감은 해일처럼 온몸을 덮쳤다. 마치 세상의 끝에 있는 절벽 앞에 있는 듯, 막막한 대해에 혼자 떨어진 듯 막막하기만 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구원의 손길이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외로움과 절망감이 더 깊었다. 그리고 체념이었다.
오월의 따스한 늦은 봄, 신혜의 삶에 그렇게 북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1.
커다란 철문 앞에서 신혜는 망설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내리자마자 눈앞의 철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육중하고 거대해 보이는 문은 지옥문처럼 앞에 서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이대로 도망가버리느냐, 아니면 문을 열고 들어가버리느냐 망설여봤자, 자신에겐 선택의 여지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초인종에 손을 갖다대려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눈을 질끈 감고 누르자 딩동, 하는 소리가 나고 곧 문이 덜커덩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안쪽의 밝은 불빛이 환하게 얼굴을 덮쳤다. 환한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는 생각지도 못한 검정색 배스가운만 입고 있었다. 막 샤워하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회사 홈페이지에서 본 사진보다는 조금 젊어 보였다. 어젯밤에 혹시 사기꾼이 아닐까 싶어서 로펌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남자의 사진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세상이 흉흉하니까, 또 이런 채무 관계를 처리하기에 그의 명함이 너무 거창했다. 누군가 이 일을 맡기기라도 한 걸까.
남자치고 좀 하얗다 싶었지만 배스가운 아래에 드러난 길고 늘씬한 몸은 마치 변호사라기보다 운동선수인 듯 탄탄해 보였다. 남성다운 각진 턱선이나, 파르스름한 면도 자국, 넓은 어깨가 완전 맹수 같은 기운을 더욱 강조라도 하는 듯했다.
뿔테 안경 속의 홑꺼풀의 눈은 길쭉하고 서늘했다. 남자는 길게 찢어진 눈이 매서울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개구리를 노리는 뱀처럼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둘 데를 몰라 아래로 향했다. 배스가운 밑으로 나와 있는 남자의 근육이 잘 잡힌 맨 다리가 눈에 들어오자 황망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오랫동안 집안에 남자가 없어서 그런지 남자랑 말 한 마디 나누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이 아니던가.
“들어와요.”
그가 주저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가느다란 어깨가 그의 손이 닿자 가볍게 피해 버렸다. 지금이라도 문을 박차고 도망가버리고 싶은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 통조림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상복합 아파트의 고층으로 올라오면서, 그냥 내려가버릴까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더랬다.
“앉아요. 음료라도 드시겠습니까? 차나 커피 정도는 있는데.”
남자가 예의 바르게 청했다.
“아뇨. 괜찮아요.”
그가 이끄는 대로 거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검정색 가죽 소파에 앉으면서, 신혜는 딱 잘라 거절했다. 지금 숨 한 번 쉬기, 침 한 번 삼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물 같은 걸 마실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냉장고에 가서 맥주를 한 캔 가져왔다. 캔 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살짝 쏟아져 나왔다. 남자는 목을 쭈욱 빼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목울대가 꿀꺽꿀꺽 움직이는 걸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그가 다 마신 맥주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자 시선을 돌렸다.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성실하게 찾아온 것이었다. 승규는 앞에서 고집스레 입을 앙 다물고 앉아 있는 여자를 슬쩍 옆눈으로 보았다. 회사에서 곧바로 왔는지 연녹색 카디건에 하얀 셔츠, 검정색 A라인 스커트를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손질이 잘되어 있긴 했지만 스웨터는 보풀이 있는 거 보면 산 지 좀 된 듯했다.
“보내주신 서류 보았는데요.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침착하게 말하려 하지만 자그마한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창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보다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비해 더 어려 보였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순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탐욕스런 부모 밑에서 자란 여자치고 순진한 인상이었다. 크고 말간 눈, 마치 어떤 악에도 물들지 않은 듯 순진해 보이는 외모가 그의 욕망을 자극했다. 어떻게 그렇게 사악하고 탐욕스런 부모 밑에서 이런 딸이 나온 걸까. 그 인상을, 그 순진함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다. 새하얀 눈에 난 발자국처럼 그녀의 인생에 검은 발자국을 남기고, 평생을 그것에 몸부림치게 만들고 싶었다. 그 기억의 트라우마에 빠져 그처럼 절망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이미 철저하게 짜인 계획이었고 여자가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돈을 내고 정리를 하던가, 아니면 시키는 대로 하던가. 어차피 단 두 가지 선택사항만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여자가 돈이 없는 걸 알았기 때문에 명목상 끼워 넣은 옵션이기도 했다.
“물어보고 싶으신 거 있으면 편하게 질문하세요.”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갑작스레 신혜 옆에 털썩 앉자, 순간 긴장했다. 남자의 톡 쏘는 듯한 애프터쉐이브 로션 냄새가 코에 와닿았다. 사향 냄새가 섞인 진한 남자의 체취이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남자라는 데 가뜩이나 긴장되어 있던 몸에 소름까지 돋아버렸다. 냄새와 더불어 옆의 사람에게서 내뿜는 열기도 더욱 긴장을 가중시켰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단단한 팔을 소파 뒤로 두르자 배스가운이 올라가면서 근육이 잡힌 단단한 팔이 드러났다. 목덜미에 닿는 듯한 그 열기에 목 뒤의 솜털이 설 거 같았다.
신혜는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제 복사한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봤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사기 같지가 않았다. 사기였으면 엄마가 그렇게 도망가지 않았겠지. 그리고 엄마 화장대를 뒤지니 원본 계약서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다.
적금 깨면 나올 천 얼마, 집 전세 빼면 1억 3천, 이걸로 1억 4천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테니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나머지 1억을 그 이후에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시간을 좀 주실 수는 있으신지요?”
간절하게 바랐다. 어떻게든 시간만 있으면…… 그러자 그가 피식 하고 웃었다. 남자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미리 짐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하얀 목의 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그 순간, 그는 칼을 휘둘렀다.
“어머니가 돈 빌려 가신 게 2년 전이고 그동안 이자도 잘 안 갚으셔서 꽤 많은 돈이 쌓이셨거든요. 그런데 그걸 또 미뤄달라는 게 말이 되나요. 2억 4천은 원금만이고 이자는 계산 안 한 건데?”
남자가 냉정하게 받아치자 확 오기가 들었다.
“어머니가 제 주민등록증이랑 인감 훔쳐내서 보증인을 세운 건데 왜 제가 이걸 갚아야 하나요? 그냥 이대로 파산 신고를 하던가 하면 그냥 날아가는 거잖아요.”
신혜가 눈에 힘을 주고 받아쳤다.
“일단 유신혜 씨 어머니가 본인 허락 없이 보증인을 세웠다는 거면 이건 형사 사건으로 가는 거겠네요. 미국으로 도망간 어머니를 신고하시겠습니까? 아니 일단 그전에 어머니랑 아가씨가 짜고 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내세울 수는 있는 겁니까? 내용증명 보내면서 내 명함도 보냈는데, 내 명함에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맞다. 이 남자 변호사고 그런 만큼 법적인 문제는 처리 깔끔하게 했겠지. 이건 전적으로 신혜가 불리한 게임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범죄를 증명해서 미국으로 도망간 어머니를 고소라도 해야 할까?
“그리고 개인 파산은 아무나 하는 줄 압니까?”
그대로 할 말이 없어졌다. 엄마처럼 그냥 이대로 도망가버려야 할까. 회사고 뭐고 다 포기하고. 도망간다 해도 무얼 먹고 살지? 그냥 지방 어딘가 내려가서 학원 선생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저희 어머니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시죠?”
“최미선 씨가 골프 연습장에서 만난 양반들에게 돈을 좀 빌리셨죠. 근데 그게 한둘도 아니고 여럿이 되니까 저 아시는 분께서 일임해서 해결해 달라고 하신 거 어쩌다 보니 제가 다 떠맡게 되었네요.”
엄마의 취미생활. 분수에 맞지 않게 그런 데 다니면서 전에 살던 대로 살려고 했던 게 문제였을까. 그 정도 사치로라도 어머니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자신이 틀렸던 걸까.
“어떻게 저희 어머니가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걸 일체화시키신 거지요? 왜 그러신 건지 전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문서에 보면 이 사람 저 사람 빚이 모두 이 사람에게 하나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그럴 만한 돈이 있었습니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닙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만 원 빌려주듯 말하고 있었다. 현금 2억 4천을 큰 보증 없이 빌려준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한 것이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길래? 정말 몇백 억의 재산이라도 있는 걸까.
“돈이 그렇게 많으시다면 제가 빌린 돈 반만 갚는 것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을 테니 기간을 조금만 더 연장해 주세요.”
그러자 그가 껄껄 웃었다.
“돈은 많지요, 2억 정도는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다른 건데…….”
그 말을 하는 남자의 눈에서 번쩍거리는 안광에는 기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순간 신혜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한편으로는 화도 났다. 당신에게 그 별거 아니라는 돈을 왜 갑자기 갚으라는 걸까. 그에게 그녀는 언제라도 밟아버려 없앨 수 있는 개미에 불과했다.
“그 별거 아닌 돈을 왜 지금 꼭 갚아야 하나요? 약간만…… 조금만 시간 주시면 돈은 반드시 갚을게요. 제가 일단 가급적 빨리 이 집 전세금 빼서 1억 3천은 바로 드릴게요. 시간을 주시면 어떻게든 해결할게요. 조금만 더 시간을…….”
“시간은 이미 어머님께 충분히 드렸는데요. 전화도 안 받고 찾아가도 안 나오고 그러다 내용증명까지 보낸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남자는 냉정하게 말을 잘라버렸다.
“그분들께는 죄송하고 저도 저희 엄마가 나쁜 짓 한 건 알고 있어요. 저도 엄마가 저를 보증인으로 빌린 걸 전혀 몰랐다고요. 저는 지금 당장 갚을 능력이 없어요. 당장 전세금 빼봤자 1억 3천 드리는 거 외에는 어떻게 제가 갚을 수 있겠어요? 지금 당장 제 월급 차압해 봤자 이자밖에 안 나가요.”
당장 이 집에서 나가고 월급 차압이라도 당해도 고시원에 들어가서 살면 되겠지, 어떻게든 최소 생계비라도 벌 수 있다면…….
“흐음, 갚을 능력이 없다라…… 왜 갚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시죠? 아가씨 정도 되면 나이가 좀 많아도 화류계로 나가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돈 좀 벌 거 같은데? 정 안 되면 사창가라도 가거나 안마시술소라도 가면 되겠구먼. 그것도 못하겠으면 장기라도 떼어 팔면 얼마 버는지 알아요? 신장, 간, 피부조직, 골수이식, 뭐 다양하지. 그거 외에도 대리모라도 하던가 난자라도 팔던가 하면 천은 금방 나오겠는데?”
그 말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남자의 지독하게 날카로운 눈빛에 스며 있는 것은 광기였다. 유독 번쩍 빛을 발하는 듯한 그 눈빛에 신혜는 그야말로 꽁지 빠지게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엄마가 그녀 인생에 불러드린 이 남자는 사람이 아닌, 야수였다.
“돈 버는 법은 정말 많아요. 또 빌려준 돈 받을 방법 역시 얼마든지 다양하게 있다는 거지. 주로 몸으로 말이지요.”
순간 신혜가 바짝 말라붙은 입술에 침을 묻혔다. 분홍색 작은 혀가 살짝 나와 입술을 축이고 들어갔다. 남자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제 그녀의 불행에서 눈을 돌려버린 남자는 이제 자기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유신혜 씨 실제로 보니 사진보다 더 예쁘네요.”
남자의 뜬금없는 말 한 마디에 순간 생각에 빠져 있던 신혜가 고개를 휙 들었다. 여태 말했던 내용들도 심상찮았는데 남자가 자기 사진을 미리 봤다고? 이런 관심이 갑작스레 공포처럼 밀려왔다. 남자의 시선이 은밀해지고 등 뒤의 손가락이 어느새인가 어깨 위에 슬그머니 와 앉았다. 순간 움찔하면서 피하려 했지만 등 뒤의 손이 어느 순간 어깨에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빚…… 2억 4천! 그 정도는 내가 탕감해 줄 수 있지.”
그 말에 남자의 시선을 피하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신! 빚 2억 사천 대신 내가 유신혜 씨에게 요구하는 게 있는데……. 원래 세상엔 공짜라는 게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신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뒤에 무슨 얘기를 할지에 신혜의 인생이 달려 있었다.
“그 몸.”
“네에? 읍!”
그 말에 놀라서 그 뒷말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남자가 그대로 허리를 낚아챘다. 순간적으로 덮쳐온 남자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그대로 덮쳐버렸다. 뒷목에 대고 있는 손이 도리질을 치려 하는 것조차도 그악스럽게 막았다. 마치 육식동물의 눈빛에 기가 질린 듯, 눈도 감지 못하고 거친 입술을 그대로 받아냈다. 광기로 그득 찬 듯 남자의 거친 입술이 신혜의 입술을 거의 씹다시피 흡입했다. 남자는 매섭게 그녀를 몰아댔지만 신혜는 다문 입을 벌리지 않으려고 힘을 주어 버텼다. 그가 잠시 입술을 떼고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 벌려! 돈 당장 갚지 못할 거면 내가 시키는 대로 구르라면 구르고 벗으라면 벗어. 밑바닥 꼴 보지 않으려면! 반항해 봤자 당신만 더 다칠 뿐이라고.”
그의 낮은 말은 거의 으르렁거리다시피 튀어나왔다. 신혜가 고집스레 입을 꼭 다물고 그의 손을 턱에서 떼어내기라도 하듯 흔들었다. 그러나 꽉 잡혀 있는 턱에는 오히려 더 힘이 가해졌다. 턱을 목에서 뜯어내기라도 할 듯한 악력에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입을 벌릴 수는 없었다.
“왜? 벌리기 싫어? 내 키스가 그렇게 별로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유들유들한 남자의 말에 신혜는 계속 고집스레 입을 꼭 다물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가에 맺힌 맑은 눈물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돈은 갚을게요, 돈 갚을게요!”
신혜가 그를 밀어내며 소리치려 할 때 잽싸게 그의 입이 다시 도톰한 입술을 습격했다. 이제 자유롭게 입 안으로 들어온 두툼한 혀가 마구 휘저으며 숨 한 번 쉴 수 없게 몰아대었다. 무방비하게 남자의 품에 갇혀서 남자의 가슴을 밀어보려 했지만 그대로 단단한 성벽이라도 된 양, 전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계속 도리질을 치려 하는 신혜의 입술을 무리하게 좇다, 그만 연약한 입술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짭쪼름한 피가 입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동시에 눈에 뜨거운 것이 고이고 있었다.
승규는 신혜가 반항을 하려 하자 그대로 몸 위로 올라타버렸다. 팔다리 할 것 없이 남자의 몸에 눌려 옴쭉달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자의 손에 가볍게 잡힌 양손이 머리 위에 고정되고, 다른 한손이 그녀의 목을 쥐고 있었다.
“돈 당장 바로 2억 4천 현금으로 입금해 줄 수 있어? 내용증명 제대로 안 봤나 보군. 만기일이 언제인지 봤어? 그때까지 입금 안 해주면 제2 추심단체에 넘긴다는 내용을 잘 이해 못했나 본데, 그러면 사채업자에게 넘긴다는 소리야. 그 사채업자들이 당신을 어떻게 굴릴지는 생각해 봤어?”
누군가와 친밀한 접촉 한 번 해본 적 없는 신혜에게 이것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한 말 역시 공포였다. 그대로 공포에 질려 몸이 얼어붙었다.
“유신혜 씨,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어차피 여자랑 사귀어도 돈 나가고, 여자를 사도 돈 나가는 건 똑같거든. 어차피 정부 두어도 집 구해 줘야 하고 생활비 줘야 하고 가끔 명품백도 뜯기고 이래저래 돈 뜯기고 비위도 맞춰줘야 하거든.”
신혜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상처라도 냈는지 도톰한 아랫입술이 터져서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잘 생각해 봐. 당신이 아무리 애써봤자 그 빚 못 갚아. 집도 회사에서 빌린 돈 들어가 있지? 거기다가 당신 어머니가 빚 2억 4천만 지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은행에 매달 원금이랑 이자랑 해서 갚고 있는 빚도 따로 있잖아. 당신 평생 가야 이자 갚다 끝날걸? 룸살롱이라도 나가지 않는 한은 힘들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평생도 아니고 사 년만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그러면 빚은 제해 주지.”
한순간에 이렇게 나락까지 떨어져 지옥을 맛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머릿속으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22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6년 동안 계속 돈에 쫓겨 달렸다. 이런 최후의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만 더 느슨하게 살걸. 무슨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산 걸까. 언젠가는 빚 다 갚고 엄마 정신 차리면 평범하게 결혼해서 아이 낳고 가정 꾸리고 살 거짓 희망 같은 건 왜 또 가진 걸까. 그런 생각은 곧 남자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잊혀졌다.
얇은 옷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카디건과 블라우스의 단추가 타닥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 소리는 마치 꿈도 희망도 없는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옷자락을 움켜쥘 사이도 없이 그대로 찢긴 옷 사이로 속옷이 드러났다. 남자의 몸을 밀어내려 해봤자 될 턱이 없었다. 도와주러 올 사람도 없는데,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현실에서 잠시 눈을 감는 것, 이렇게 해서 자기생존을 하자. 다시 눈 떴을 때는 상황이 지나가고 밝은 세상이길 빌자.
언젠가는 다 끝난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요즘 계속해서 읊조리며 이게 곧 끝나기를 빨리 끝나기를, 그동안 자기는 잠들어 있기를 기도했다.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난폭하게 밀고 들어온 뜨거운 혀는 무엇보다 현실적이었다. 거칠게 자신의 온 입안을 휘젓고 도망가는 혀를 잡아 옭아매었다. 남자의 큰 손이 신혜의 작은 턱을 꽉 감싸 쥐었고 그 바람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남자의 단단한 몸이 그녀의 가녀린 몸을 눌러오기 시작했고 결국 푹신한 소파에 그대로 짓눌려졌다.
천을 사이에 두고도 뜨겁고 단단한 몸이 여린 살갗을 압박한다. 남자의 뜨거운 열기에 놀란 신혜가 반항하기도 전에 그가 가볍게 가느다란 양 손목을 거머쥐었다. 하체가 완전히 그의 몸에 눌린 채라 옴쭉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반항할 의지도 없었건만 그가 이미 찢긴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려는 듯 들썩거려보았다. 그러나 곧 그가 푹신한 가슴살을 한껏 움켜쥐고 거칠게 만지기 시작했을 땐 그냥 포기했다. 그는 브래지어가 거추장스러운지 손목을 놔주고는 등 뒤로 손을 넣어 후크를 풀려다가 잘 안 풀리니 그대로 잡아당겨서 질긴 천을 반쯤 찢어놓다 시피 했다. 그리고 옷을 활짝 벌리고 환한 빛에 드러난 풍만한 가슴을 눈으로 지켜보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가슴에 닿는 게 느껴졌다.
두툼한 손가락이 차가운 공기에 긴장하기 시작한 유두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연한 분홍빛을 띤 그것을 살짝 잡아당기자 그녀가 작게 헉 하는 소리를 내며 긴장했다. 곧 뜨거운 김이 다가오나 싶더니만 남자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가버렸다. 남자는 부드러운 가슴살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다른 쪽 가슴도 움켜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베어 문 가슴을 잘근잘근 씹다가, 작은 유두를 짓이기듯 깨물기도 했고, 세게 빨기도 했다. 왜 어린아이처럼 여자 가슴에 이러는지 이상한 생각도 들었고 가끔 아플 때에는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나오기도 했다.
잠시 후 남자가 가슴을 놓아둔 채 다시 입을 구하기 시작했다. 입 속을 차지한 혀는 또 제멋대로 다니면서 숨 한 숨 제 것인 양 다 빨아들여갔다. 그대로 온 입술을 헤집으면서 그녀의 숨을 모조리 훔쳐가던 그의 뜨거운 혀가 놔주었을 때,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남자는 집요한 키스로는 맘이 안 찼는지 다시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거의 씹다시피 거칠게 이빨로 잘근잘근 물기 시작했다. 가슴에 매달려 있는 남자의 머리를 자기도 모르게 뜯어내려고 잡아당겼다. 남자는 이빨을 세우는 것으로 답했다.
“악!”
신혜가 거의 비명을 지를 때쯤에서야 가슴을 놓아두고 다시 입술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입술을 짓누르고 이를 가르며 들어온 뜨거운 것이 자신의 온 입안을 뒤흔들듯이 요란하게 오가며 숨 한 조각까지 빨아들일 듯이 거세게 빨아들였다. 커다란 손은 가슴을 쥐고 찬 공기 중에 꼿꼿하게 선 유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샹들리에의 반짝거리는 빛이 눈에 따갑게 닿았다. 그리고 무겁게 짓누르는 남자의 몸, 익숙했던 몸을 유리하는 낯선 손, 낯선 체온. 눈을 감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감각은 좀 더 민감해지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대로 무릎으로 오므려진 다리를 강제로 벌려왔다. 다리를 붙이려고 신혜가 안간힘을 다했어도 그 힘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손이 다리를 오가더니만 어느새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어느새 치마 속으로 들어온 손이 거칠게 스타킹을 내리다 짜증이 낫는지 스타킹이 거친 손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찢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가슴을 쥐고 있던 손이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싶더니만 속옷 속으로 꼼질거리며 들어왔다. 도저히 이 치욕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환한 빛 아래서는.
신혜가 더듬거리면서 발을 버둥거리자, 길고 탄력 있는 근육에 쌓인 다리가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를 얽어매면서 그대로 눌러버렸다. 가냘픈 몸이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 숨쉬기조차 힘들어져버렸다. 그리고 때를 노린 듯 그의 기다란 손이 그녀의 비밀스런 곳으로 들어왔다. 고슬고슬한 음모를 만지고 잡아당기다 깊숙한 곳에 감춰진 그곳으로 바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꺅!”
신혜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기다란 손가락이 건조한 그곳으로 들어왔다. 온몸의 피부 중에 제일 부드러운 그곳의 살을 조심스레 벌리며 들어갔지만 워낙 건조해서인지 그가 원하는 대로 넓혀지지가 않았다. 다시 손을 움직이면서 억지로 통로를 넓혔지만 조급증에 다시 손가락을 하나 늘려보았지만 여전히 건조하기만 했다.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걸 머리는 아는데 결국 하반신을 직격하는 그 욕구에 그는 그대로 순응해 버렸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연약한 살을 가르며 침입한 그 순간에 이미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과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뜨겁고 단단한 게 허벅지에 닿자 온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몸을 비틀려고 해도 하반신이 완전히 남자의 다리에 얽혀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가 그대로 자신을 진입시키려고 몸을 맞출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그를 저지했다.
“잠깐만요.”
아무리 이런 게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을 하지 않은 걸 알고 있었다. 마구 발버둥치면서 그를 제지했다.
“피, 피임은요?”
남자의 목소리는 건조한 듯이 말하던 방금 전보다 더 낮고 거칠어져 있었다.
“정관 수술했어. 아이 가질 일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조급한 듯이 말한 그가 신혜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입술을 다시 덮치면서 그대로 자신의 남성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몸의 가장 여린 살이 있는 그곳을 흉기처럼 상처를 내면서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아직 부드럽게 움직이게 해줄 만한 어떤 액도 없이 건조한 그곳에 남자의 것이 들어가자, 머리만 넣었을 뿐인데도 좁은 통로가 벌어지면서 아파왔다. 작은 신음은 그의 입속으로 먹혀 사라졌다.
남자는 침착하게 계속 허리를 움직이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르작거리면서 남자의 진입을 막아보려 하자, 남자가 살짝 뒤로 빼는 듯싶더니만 그대로 깊이 사슴의 목덜미를 관통하는 창처럼 박아버렸다. 반항하듯 가로막던 얇은 막이 단숨에 찢어지면서 그대로 그의 남성이 깊숙이 들어와버렸다. 부드러운 살 속으로 잔인하게 뚫고 들어온 그것이 그녀의 내부를 채워나갔다. 죽어가는 초식동물처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부들부들 떠는 작은 몸을 그는 달래주려 했지만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혀버린 뒤였다.
동그란 눈이 커지면서 촉촉한 습기가 맺히더니 흘러내렸다.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것처럼 몸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이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행동을 늦추려고 몸부림을 치려 했지만 이미 가녀린 몸을 둘러싼 무거운 남자의 다리에 눌려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오히려 양손을 그가 틀어쥐고 자기 손으로 깍지를 끼어서 상체마저 제압해 버렸다.
뜨겁게 그를 꽉 조이는 부드러운 것에 황홀경에 빠진 듯 그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좁은 통로가 그의 남성을 감싸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살살 조금씩 왕복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몰려들기 시작한 쾌감이 그대로 필라멘트가 끊어지듯 이성이 나가버렸던 듯했다.
신혜가 작은 동물처럼 고통으로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작은 창백한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나 있었지만 그에겐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게 이성이고 자기절제고 남아 있지 않은 수컷은 그대로 허리를 흔들었고, 입술로는 계속 그녀의 여린 살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나갔다. 손과 입술이 지나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열렬하게 맛보고 핥고 빨고 씹었다.
그대로 통통한 하얀 엉덩이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 따뜻한 중심부에 다가가기라도 하듯, 불에 모여드는 부나방이라도 된 듯.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그녀의 여린 살을 약탈했다.
하반신을 토막내는 듯한 낯선 고통 속에서, 신혜가 가냘프게 몸부림을 쳤다. 몸에서 제일 여리고 보드라운 살에 그의 거친 음모가 닿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커다란 봉이 몸을 가르기라도 하는 듯이 깊숙한 곳을 계속 내리치는 듯했다. 남자의 탄탄한 허리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몸속에 계속 고통이 증가될 뿐이었다. 남자의 움직임은 계속 거세지고 어느 순간 낮은 신음을 흘렸다.
“흐읍!”
그녀의 통통한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거칠게 허리를 움직인 뒤 그대로 푹 쓰러졌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남자의 가슴과 거친 숨소리에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남자의 몸무게를 그대로 받으면서 몸이 더 소파 쪽으로 푹 꺼졌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게 이제 끝난 거겠거니 해서 신혜도 조금 안심했는지 모른다. 빨리 자기 몸을 놔주기만, 몸에서 나가주기만 기다렸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고 상체가 들리면서 몸을 떼었다. 순간 인간 같지 않은 파충류처럼 냉정해 뵈는 눈과 마주쳤다. 남자의 긴 손가락이 신혜 눈가의 눈물을 쓰윽 닦았다. 본인은 흘린 줄도 모르고 있던 눈물이었다.
“경험이 없는 것 치고는 꽤 괜찮네요.”
마치 근무 태도를 평가라도 하듯 냉정하게 평가하는 남자의 말에 순간 소름이 좌악 돋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가장 친밀한 행위일 이것을 이 끔찍한 남자와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연히 머릿속으로만 알던 게 몸으로 체화될 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침대도 아닌 가죽 소파 위에서 처음 치른 정사였다. 그리고 이것이 사 년 내내 반복될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것은 허벅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뜨끈미적지근한 것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몸 안에 사정했음을 알았다. 빨리 이 더러운 것을, 남자가 만진 모든 걸 벅벅 닦아내고 싶었다. 신혜는 사정을 했음에도 자신의 몸에서 나가지 않고 남자가 계속 허리를 누르고 있자, 살짝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시도했다. 남자는 어깨에 힘을 쥐어 더 강하게 구속하는 걸로 답했다.
“끝났잖아요? 씻고 싶어요.”
흐느끼듯 나오는 가냘픈 말에 남자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나 다시 평소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느긋하게 한 마디 던졌다.
“간만이라 그런지 한 번 더 하고 싶은데요?”
이미 상처가 난 몸이 아프다고 울부짖고 있는데 이 남자는 그런 걸 봐줄 이유가 없겠지. 그냥 단순히 즐기고 말 몸이니까. 자기에겐 인권이고 뭐고 없고, 사람이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 돈에 팔려온 노예지.
“어차피 삼십 분이면 끝날 테니 그냥 누워 있어요. 다리 벌리고 누워 있는 게 별로 어려운 일 아니잖아요?”
느물거리는 그 말에 신혜는 정말 배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곧 다시 자기 안을 채우기 시작한 흉기는 더 단단해지고 그녀의 몸속 깊은 곳까지 쐐기를 박듯 벌려왔다. 그러나 움직이려다 말고 갑자기 자신을 빼내는 것이었다. 쓰윽 하고 빠져나가는 것에 헉, 하고 얕은 신음을 흘렸다. 놔주는 건가 싶을 찰나, 그가 그녀를 가볍게 들어안았다. 당황해서 발버둥을 치려다 놀라 승규의 목을 안았다. 가뿐하게 그녀를 들어 안은 그가 방으로 들어가 내려놓았다.
“소파는 움직이기 불편해서 말이지.”
차라리 방은 어두워서 나았다. 등에 와닿는 차가운 시트에 벗은 몸이 살짝 오한이 들었다. 다시 남자의 뜨거운 몸이 자신을 덮쳐오고 그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버렸다.
계속 덮치듯 밀려오는 고통과 열기 속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남자가 몇 번을 사정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자신의 깊은 곳을 채우는 뜨거운 액은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새어나가 국부를 적시고 있었다. 울며 반항하기도 지쳐 이제 그저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기만 하는 가녀린 몸을 남자는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허리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신혜의 몸도 계속 흔들렸고, 허벅지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계속해서 같은 근육이 혹사당하다 보니 이제 하체에는 거의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다리가 저리다 못해 쥐가 나는 듯했다. 아프다라는 생각 외에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혼몽했다. 그리고 그가 사정을 했는지 또 뜨거운 것이 몸속을 적셨다. 그게 신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