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11)

프롤로그

<저 유신혜라고 하는데요.>

떨리는 듯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에 남자의 얄팍한 입술 끝이 올라갔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인 걸까. 자기도 모르게 약간 긴장했는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에 땀이 배어나올 것만 같았다.

과연 잡으려고 노리던 새가 새장 안으로 순순히 들어와줄 것인가?

<……무슨 용건이시죠?>

일부러 평정을 가장한 듯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미선 씨 딸이에요. 어머니한테 보내신 서류 받았는데 자세한 설명 들었으면 좋겠어서요.>

여자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 앳된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작은 새가 지저귀듯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에는 거의 올라오기 직전의 흐느낌을 억지로 막으려 하는지 간헐적인 떨림이 있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유신혜 씨 어머님인 최미선 씨가 유신혜 씨를 보증인으로 해서 돈을 좀 빌리셨습니다. 근데 만기일이 되도록 이자도 안 갚으시고 원금도 안 갚으시고 해서 예정된 기한까지 갚지 않으면 소송에 들어가겠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한테 돈 관련해서 들은 얘기 없습니까?>

전화기 너머 조용한 거 보니 당연히 별 들은 얘기 없는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그녀에게 그는 일부러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저는 이 서류 오늘 처음 보았어요! 엄마가 제 이름으로 돈 빌린 줄도 몰랐어요.>

<최미선 씨가 미국으로 출국한 거 알고는 있습니까? 그거 이제 갚을 때가 되었는데 아가씨 어머님이 자꾸 미루시고 전화도 안 받으시더라고요. 그러다 오늘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더군요!>

여자는 여태 조금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출국했다는 얘기에 숨을 흡 하고 몰아쉬기까지 했다.

<아, 아뇨. 지금 막 알았어요.>

말까지 더듬을 정도였다. 남자의 미간 사이의 주름은 더 깊어만 갔다.

<전혀 몰랐던 모양이군요. 아무튼 유신혜 씨를 보증인으로 내세워서 빚을 각 개인들에게서 만들었고 그걸 제가 일체화시켰습니다. 계산해 보니 2억 4천 정도 나오는군요. 그런데 이자조차 제대로 안 갚으셔서 밀린 이자도 꽤 됩니다. 계산은 아직 정확히 안 해봤지만, 이제 이자 계산도 하고 뭐 그러면 꽤 늘어나겠지요?>

남자의 설명이 자세해지자 겁이 덜컥 났다.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전화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좀 더 알아봐야 하는데, 이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실제 서류도 보고 싶었다. 이런 복사본이 아니라.

<긴 얘기가 될 거 같으니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서류 원본도 봐야 하고…….>

여자는 침착하게 말하려 노력하지만 이미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좋아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만나는 걸로 하죠.>

내일은 주말이니까 평소보다는 회사에서 일찍 퇴근하기 좋을 터였다. 그런 것까지 안배해 둔 상태에서 서류를 목요일에 도착하게 보낸 것이니까.

<내일 몇 시쯤 어디서 뵐까요?>

낮은 목소리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써도 그 목소리에 떨림이 남아 있었다.

<제가 사는 집으로 오십시오.>

<네? 아무래도 밖에서 만나는 게…….>

여자 목소리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든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유신혜 씨, 전 시간당 돈 받는 사람입니다. 지금 아직 사무실이고 일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도 바빠서 11시는 되어야 시간이 나는데, 가뜩이나 일에 지쳐서 그 시간에 밖에서 사람 만나기도 피곤하고 하니 그냥 집으로 오십시오. 긴 얘기 될 거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한 얘기라도 들어야 하니까. 서류상의 숫자는 너무나 커서 비현실적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아, 그리고! 잘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뒤에 붙여놨으니까 나쁜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어머니처럼 야반도주라던가 뭐 이런 거요. 하하하하.>

그 말을 하고 핸드폰의 통화 종료 메시지를 눌러버렸다.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서류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상념들…….

여자에게 다른 선택지란 없었다. 자신에게도 역시.

처음 마닐라 파일 안에서 보았을 때부터 그의 시선을 끌었던 여자이다. 여자는 말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피부, 붉은 입술, 길쭉하고 쌍꺼풀이 없는 크고 맑은 눈. 얼굴이 작고 이모구비가 자그마해서 오밀조밀한 인상이었다. 연약한 듯하지만 작은 사진 속의 눈동자의 시선이 의외로 잡아끌었다. 무언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눈은 뭔가 호소하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사진을 보고서 최종적인 결정을 했다. 저 여자를 갖겠다고.

원했던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다 빠져나가버린 지금, 앞으로 살아갈 나날이 회색빛이라면 작은 즐거움을 위해서 저 여자 하나 정도는 가져도 될 것 같았다. 잠시 즐기고 사용하고 버리면 그만인 것.

이제 원하던 걸 갖는 순간이 왔다.

핸드폰의 폴더를 닫으면서 신혜는 눈을 감아버렸다. 불과 30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인생이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몰려온 충격으로 잠시 덜컹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2억 4천이라고? 지금 이 집 전세금만 해도 회사에서 빌린 거라 이자 나가고 원금 갚느냐고 죽을 거 같은데. 삼백 벌어서 빚 갚고 나면 한 달에 백 얼마 남는 걸로 어머니랑 같이 생활비 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지난 몇 년간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화장품도 샘플로 연명하면서 살았건만 지금 손에 만져보지도 못한 돈 2억 4천을 갚으라고!

전화기 너머 들리는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신혜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긴 했지만 그녀더러 ‘바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현실이 어떻게 변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한순간에 급변해 버린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렸다. 회사에서 평소처럼 퇴근해 왔는데 엄마는 야반도주했고 신혜는 빚더미와 함께 남아 있게 되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어두운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온 신혜는 현관의 자동센서로 불이 켜졌을 때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집이 비어 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같이 사는 어머니는 툭하면 집 비우고 밤늦게까지 놀러나가 있거나 쇼핑하러 가 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두운 조명에 언뜻 보이기에도 좁은 거실이 난장판이 되어 있고, 열려 있는 엄마 방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어수선했다. 황급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거실 불을 켜보았다. 혹시나 싶어 엄마 방에 들어가보니 옷장 위에 있던 큰 캐리어가 사라지고 없었다. 말도 없이 여행이라도 가신 걸까? 그러나 여행이라도 가신 거라면 가기 전에 신혜에게 말해서 얼마 정도 뜯어가는 게 정상일 상황이었다.

급하게 나갔는지 화장대 서랍이 반쯤 열려 있기까지 했다. 서랍을 보니 돈이 될 만한 귀금속류까지 싹 빼가버렸다. 혹시 도둑이나 들었나 싶었지만 도둑이 캐리어를 가져갔을 리는 없잖은가. 심지어 옷장에서 옷을 마구 빼냈는지 옷도 방에 마구 널려 있었다.

혹시나 싶어 신혜는 자기가 쓰는 작은 방을 열어보았다. 그 방 역시 엉망이었다. 분명 전날 밤에 정리해 놓은 책상 역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귀걸이 등을 넣어놓는 작은 나무함이 열려 있었다. 역시나 14K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귀걸이, 목걸이 같은 것도 싹 사라져 있었다. 아빠가 대학 갈 때 사주신 좀 비싼 목걸이랑 귀걸이 세트는 오늘 하고 나가서 그것만 무사했다.

무슨 일인 걸까. 도둑이 든 건지, 아니면 엄마가 들고서 도망이라도 간 건지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엄마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보니 역시나 꺼져 있었다.

그냥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고민이 될 만한 조짐이 보여도 사건 터지기 전까지는 걱정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큰 일이 벌어지다 보면 배운 것이 미리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말자였다.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이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니까. 대신 늘 일이 터지지 못하게 사전에 많은 걸 방비하자는 건 배웠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던 차에 마룻바닥에 마구 널려 있는 서류 뭉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류 앞에 있는 노란 마닐라 봉투에는 엄마 이름 최미선이 적혀 있었다. 엄마 앞으로 온 서류인 모양인데 무얼까.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구 널려 있는 클리어 파일들을 떨리는 손으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손이 어찌나 덜덜 떨리는지 한손으로 다른 손을 잡을 정도였다. 이런 서류가 언제나 기분 나쁜 소식과 함께 온다는 건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이었다. 읽고 싶지 않아도 곧 맞닥뜨려야 할 일,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어떻게든 할 것 아닌가.

내용증명과 차용증서 복사본이 다섯 개나 있었다. 내용증명 내용은 돈을 빌리고 약속된 날짜에 돈을 갚지 않아서 소송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알리는 내용이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삼천만 원이라는 돈의 숫자였다. 놀라서 떨리는 손으로 쥐고 페이지를 넘기니 마지막에 있는 엄마의 인감. 더 충격적인 것은 보증인으로 자신의 인감이 찍혀 있었다. 그런 문서가 하나도 두 개도 아닌 다섯 개가 있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그 숫자들을 더해 보았다. 2억 4천!

순간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숨이 턱하니 막혀 왔다. 숨을 쉬기도 힘들어서 크게 심호흡을 여러 번 해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귀가 멍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조금 정신을 차리니 눈에 뜨거운 것이 고일 것 같은 걸 억지로 눈을 깜박거려서 떨어내었다.

그동안 무시하려 했던 진실들. 재작년부터 엄마 용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헤퍼져 있었던 어머니 씀씀이를 생각하자, 순간 멍청한 자신에 화가 났다. 분명 수상하다 생각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엄마가 그냥 흘려 하는 말에 그 이상 신경 쓰진 않았다. 먹고 살기 힘들고 무엇보다 부정하고 싶었던 거겠지. 사채라도 빌리셨던 거야? 자기를 보증인으로 내세웠구나 싶었다. 혹시나 몰라서 인감을 감춰두긴 했는데 어느새 찾아서 꺼내 가신 걸까. 주민등록증은 언제 카피가 된 걸까.

그리고 봉투 위에 떨어져 있는 하얀 명함.

두툼한 아이보리 색 종이에 검정색 글씨로 이름과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어디에 들고 가도 바로 대접이 달라지는 종류의 그런 명함이었다. 봉투에 적혀 있는 이름과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