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1)

2.

햇살이 얼굴에 닿자,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밤새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이 떠지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보았으나 역시 움직여지지도 않았고 몸 깊은 곳의 낯선 통증에 작은 신음이 거친 목으로 새어나갔다.

힘들게 눈을 떴을 때 집이 아닌 곳의 천장. 아 여기가 어디더라……, 지난밤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순식간에 온몸에 오한과, 몸 깊은 곳의 낯선 통증이 느껴졌다.

“깼어요?”

하는 낯선 목소리에 순간 고개를 돌리니 옆에서 남자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지난밤에 그녀의 온몸을 스쳐 지나간 긴 손은 신문을 쥐고 있었다.

“아직도 아파요? 일단 약은 발라뒀는데.”

아직 잠이 덜 깨 어리둥절하고 간밤의 공포가 밀려들어오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아…….”

몸이 얼어붙어 도망치려 해도 도망조차 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전라인 걸 알자 남자에게서 숨겠다는 듯 검정색 시트를 끌어서 몸을 최대한 가리려 했다. 어떻게 해도 남자에게서 자신을 방어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보고 승규는 슬쩍 웃었다. 그 순진한 모양새가 얼마나 고혹적이고 남자를 유혹하는지는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부모가 그 모양인데 딸은 제대로 잘 키운 모양이었다. 나이에 비해 가냘프기도 했고 순진한 편이었다. 스물여덟이면 요즘 세상에 남자 친구 한 번 사귄 적 없는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밤으로 볼 때 앞으로 몇 달은 심심하지 않을 듯싶었다.

그런 신혜의 움직임을 남자가 쳐다보더니만, 벗은 어깨를 턱으로 쓱 문질렀다. 낯선 온기의 까끌한 것이 어깨를 스치자 등에 솜털이 설 정도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피부가 좋아.”

그러나 여자는 답이 없었다. 햇살에 하얀 피부가, 목의 핏줄이 보일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그 하얀 목에 저속하게 자신이 만들어놓은 보라색으로 변해 가는 자국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양심에 눈을 감은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는 믿으려 했다.

신혜가 그를 살짝 뿌리치면서 벗은 몸을 이불을 둘러 가리려 했다. 둘러봐도 옷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거실에서 남자가 찢다시피 벗겨버렸으니 거실 바닥에서 뒹굴고 있겠지.

“물이라도 마시지 그래?”

그가 유리컵을 쥐어주자 여자가 양손으로 받아 어린아이처럼 얌전하게 목을 축였다. 그리고 컵을 그에게 돌려주는 대신 침대 옆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물에 젖은 붉은 입술, 어제 그가 거칠게 키스해서 터졌던 그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고 작은 피딱지가 앉혀 있었다. 석류처럼 붉은 입술. 짓이기고 터트려버리고 싶다.

그가 살짝 얼굴을 들이밀자, 그녀가 주춤하며 옆으로 피하려 했다. 그의 억센 손길이 잡아당기더니만 순식간에 다시 그가 그녀의 몸을 깔아버렸다. 이불을 쥐고 있는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우악스런 힘에 놓쳐버렸다. 그대로 하체를 눌러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봉해졌다. 그리고 느긋하게 얇은 천을 치우고 그 아래 드러나는 가슴을 한가득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었다. 쏘아보는 듯 날카로운 눈빛에 헤드라이트 앞의 작은 짐승처럼 주박이라도 걸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미 지난밤의 가혹한 행위로 여린 살이 쏠려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그걸 다시 짓이기듯 깨물고 빨자 신혜가 작은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틀려 했다.

“제1 수칙 알려주는데요. 절대 반항하지 말 것. 반항하면 당신만 다쳐.”

남자는 웃는 듯했지만 눈에 담긴 흉포한 욕망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의 말마따나 다치는 것은 그녀일 뿐이었다. 그녀가 한 행동 모두 의미없는 반항이 되는 걸 부모님에게서 제대로 보지 않았던가. 그렇게 체념했고, 그래서 순순히 남자에게 몸을 내줘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언제나 세상은 그녀에게 불리했다.

다친다고? 반항이란 게 뭔데 도대체?

그러니까 2억 4천 대신 4년 동안 자신의 정부로 살라는 남자의 말. 자기는 합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일을 진행시켜버렸다. 뭘 믿고 당신이 어떤 인간인 줄 알고 누구 맘대로?

이렇게 유린당했다는 게 믿겨지지도 않았고 무서웠고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체념도 없잖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박차고 일어나서 경찰에 강간으로 고소라도? 법정까지 가서 온갖 모욕 다 당해 가면서 형사사건으로 끌고 가더라도 어떤 이득이 있단 말인가? 2억 4천의 빚이 제해질 리도 없었고 그녀가 강간당한 게 사라질 리도 없었다.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점점 맑아졌다. 신혜가 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더러 당신 노예라도 되라는 건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sex slave라도 될까. 나이 드니까 색다른 자극이 필요하더라고. 보아하니 남자도 제대로 사귄 적도 없는 듯한데 가르치는 즐거움이 좀 있겠네.”

유들유들한 남자의 말에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지지 않았다. 지난밤에 폭력에 무너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안다고!”

신혜가 고개를 바싹 쳐들고 그를 노려보며 답하자, 그가 피식 웃더니 줄줄 읊기 시작했다.

“유신혜, 나이 28세, 교대부속 초등학교, 미림여중, 미림여고, 한국여대 영문학과 졸업, 신흥물산 대리, 남자친구 전무, 아마도 처녀?”

부들부들 떨면서도 분노로 그를 노려보았다.

“연봉 삼천 삼백, 회사에서 대출한 돈 삼천, 어머니 최미선과 단둘이 삼. 아버지 유경택, 대학교 3학년 때 사망 이후 어머니가 여기저기 사기 당하면서 집안 완전 폭삭 망함. 내가 여기서 더 알아야 할 정보라도 있는 걸까?”

여기 오기 전에 자기에 대해 이미 다 조사했겠지. 이미 거미줄이 사방에 처져 있고 거미처럼 파리인 자신을 노리는데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연봉 삼천삼백으로 대출 겨우 갚고 있는 차에 이억 사천이라니, 엄마 목을 비틀고 싶을 정도의 급작스런 분노가 솟았다. 엄마 때문에 내가 간밤에 무슨 일을 당했는 줄 알아요?

“민승규 씨라고 하셨죠? 제가 민승규 씨에 대해서 뭘 알고서 믿고서 제 몸을 맡기죠? 이것조차 사기면 전 뭐가 되는 건가요?”

“나를 알든 믿든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닌가?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유신혜 씨인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얘기는 어제 했어야지.”

승규의 말이 옳았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신혜지 그가 아니었다. 만약 남자가 조폭을 동원해서 갚으라고 그녀 목줄을 쥐게 되거나, 더한 금융기관에 넘겨버리면 지옥을 보게 되는 건 다른 사람 아닌 자신.

이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남자의 손은 신혜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인가 그녀의 가슴을 쓸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얘기할 기회는 주었고요?”

“아, 그 점은 좀 미안하네. 근데 어제 맞을 매 오늘 맞는다고 덜 아프진 않잖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지만 가슴을 만지는 손은 떼지 않았다.

“좀 마르긴 했어도 가슴은 그래도 좀 있네요.”

남자의 충격적인 말과 그 치욕적인 행동에 신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파렴치하고 염치없는, 체온이 다른 손이 가슴을 쥐었다. 그리고 가슴의 정점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유두가 그의 차가운 손에 긴장해서 단단해지자 그것을 손톱으로 슬쩍 긁어내렸다. 손질이 잘된 손톱이 유두를 훑자 전신에 소름이 확 돋았다. 그는 보드라운 살의 감촉을 음미하듯 느긋하게 가슴을 어루만졌다.

“밀린 이자 냈다고 생각해요.”

남자는 그런 상처받은 얼굴을 보며 한 마디 덧붙일 뿐이었다. 대신 눈물을 한 방울 떨군 신혜가 노려보는 걸로 대신했다. 그가 그런 신혜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럴 권리가 없었다. 단지 돈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도 않았고 남자도 엄마도 용서가 안 되었다. 그러나 얼어붙어서 얼어붙어서 싫다라고 거부조차 못하는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도 미웠다.

다시 가슴에 와닿는 뜨뜻한 입김에 등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작은 유두를 핥나 싶더니만 그대로 부드러운 살을 욕심껏 한 웅큼 베어 물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행동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가슴에 느껴지는 강한 압력과 통증에 여자가 고통에 가냘픈 신음을 내었다. 그러나 남자는 빨고 있던 유두에 이를 세워버리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양쪽 가슴을 괴롭혔는지 입술을 떼었을 때 유두는 빨갛게 부어 있었고 양쪽 가슴 다 벌건 자국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치욕을 견뎌낸 얼굴은 하얗게 창백하게 되어 있었고 말간 눈망울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좋아, 제대로 선택할 기회를 주지. 돈을 바로 갚을지, 아니면 내 정부가 될지 지금 결정해! 나는 이미 유신혜 씨 어머니에게 2억 4천만 원 빌려줬고, 그 이자 하나 제대로 못 받아냈거든. 금전적 손실을 어떻게 메워줄지 유신혜 씨가 결정하던가!”

“도, 돈은 천천히 조금씩 갚을게요. 시간만 주시면 제가 회사에 나가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여기저기 빚진 것만 해도 꽤 되던데 그 이자랑 원금 갚고 회사에서 빌린 돈 갚고 나면 내 돈 갚을 여유는 있습니까? 그리고 고작 푼돈 백만 원 받아서 뭘 어쩌라고? 일시불로 바로 주던가, 아님 내 제안대로 하던가.”

“그럴 수는 없는 거 아시잖아요.”

승규는 이제 본격적으로 울 것 같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올려다보는 눈에는 이미 촉촉해진 습기가 가득했다. 커다란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져 절망적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할지 결정했냐고 물었는데?”

신혜가 간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 간절한 의도가 담긴 눈길을 그는 별거 아닌 양 바라보며 시원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가지런한 하얀 이빨이 마치 초식동물의 목줄기를 따기 전의 그것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더 이상 도망갈 구석조차 없었다. 그냥 통장 들고 회사도 나가지 말고 지방으로 튀어볼까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남자가 찾기라도 하면? 지방에서 먹고 살려면 하다못해 식당에서 설거지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남자 눈을 피할 수 있을까. 만약 잡히기라도 하면 더 험한 꼴을 당할 텐데.

숨어살 수도 없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없다. 어차피 집 앞에는 남자가 보낸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신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는 듯했고 회사를 갈 때도 따라왔고 회사 앞까지 진치고 있었다. 혹시 누가 알아챌까 무섭기만 했다.

처음부터 결론이 하나였고 아무리 고민해 봤자였다. 세상에 무수히 발버둥치고 운명에 끌려가지 않게 노력해 봤자, 언제나 지는 건 그녀였지 않은가. 그냥 체념해 버리자.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자.

“당신 입으로 말해. 어떻게 할지.”

그는 끝까지 잔인했다. 본인 입으로 하는 항복을 듣고 싶어했다.

“원…… 하시는 대로 하겠어요.”

제발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맹수의 웃음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껄껄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거의 가구가 없다시피한 넓은 방에 그의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퍼졌다.

“훗, 원하는 대로 하겠다라?”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거친 웃음이었다. 한참 웃고 난 남자가 질린 표정의 신혜를 바라보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난 결혼은 하고 싶지도 않고 부인도 당연히 필요하지 않아. 내가 필요한 건 오로지 당신 몸뿐.”

신혜는 아무렇지 않게 난 네 몸을 이용하겠다고 기계적으로 말하는 남자의 인정머리없음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저 몸만 주고받을 뿐인 관계…….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냥 시간만 지나면 이 남자를 자기 인생에서 싹 잘라낼 수 있으니까.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밖에 나가더니 서류를 하나 갖고 돌아왔다. 그걸 침대에 누워 있는 신혜 앞으로 던졌다.

“계약서야. 미리 계약서로 만들어놨으니까 읽어봐.”

순간 신혜는 남자가 덫이라도 놓듯 자신을 함정으로 밀어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민승규는 자기와 만나기 전에 이미 계약서를 만들어놓았다는 것은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았다는 증거였다. 왜?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이유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건 알지만 머리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다시 폭탄을 던졌다.

“계약서는 사인하는 즉시 효력을 발휘하니까 잘 생각해 봐요. 무를 기회는 없으니까.”

그건 마치 고양이 쥐 생각하는 듯,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라도 있다는 듯 선심을 베푸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선택지란 처음부터 단 하나였지 않은가.

“아, 그리고 회사는 바로 그만둬요.”

“회사 그만두려면 당장 삼, 삼천만 원 융자받은 거 갚아야 해요. 당장은 안 돼요.”

신혜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삼천 내가 빌려주는 걸로 하죠. 당신이 이 집에 들어와서 사는 동안 당신 생활비와 용돈 등도 내가 책임지고.”

어머니한테 2억 이상을 빌려준 사람에게 삼천은 껌값인 모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냥 그의 말에 순응해야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도망갈 핑계를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만약 민승규 씨한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거나 결혼하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자 그가 히죽 웃었다.

“그럴 일도 없고, 혹시나 그럴 일이 생길 거 같아서 계약서에 관련 조항 몇 개 넣어놨어요.”

그리고 그가 그녀 앞에 떨어져 서류 쪽으로 손짓했다.

“읽어봐요. 그리고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 여기서 질문하고. 가급적 빨리 읽어주고 사인을 하든가 말든가 했으면 좋겠는데?”

남자가 내민 계약서에 항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처럼 계약기간은 4년, 빚을 대신해서 4년을 동거한다, 그는 그녀에 대해서 일절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둘은 결혼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 등 세밀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남자가 내민 종이뭉치의 첫 장 첫 문단에서 신혜는 숨이 턱 막혀왔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 계약서가 뜻하는 것은 단 하나.

<을은 갑이 원할 시에 언제나 그 요구에 부응한다. 그 요구에 부응하지 않거나 불성실하게 부응할 경우에는 갑이 그에 해당하는 페널티를 줄 수 있다.>

일방적으로 남자에게 유리한 계약서였다.

그가 그녀에게 빚을 받아낼 다양한 방법 중에 유독 몸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 그녀가 눈에 띄는 미인인 것도 아니고, 그냥 발에 채는 흔한 20대 여성에 불과한데.

승규는 서류를 넘기는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무덤덤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미래의 먹잇감을 보는 듯한 맹수의 시선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살피고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저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었다. 자그마한 귀 뒤로 넘긴 긴 머리카락, 가느다란 하얀 손까지 그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신혜는 옆에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난해한 용어가 난무하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갑과 을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던 중 계약서에서 충격적인 부분을 발견했다.

아이가 생겼을 경우에 민승규는 책임지지 않으며 강제유산을 시킨다고 규정한 항목이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자각도 제대로 못하다 방금 깨달아버렸다. 그에게 몹쓸 짓을 당해 놓고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리버리하게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던 거다.

“아이가 생기면…….”

순간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스친 것은 비애였다. 미묘한 그 슬픈 표정에 신혜는 조금 놀랐다. 이 남자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비정하고 차갑고 냉정하고 온갖 악당을 위한 단어를 늘어놓아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도 저런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단지 아이, 라는 단어 하나로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표정을 끌어내었다.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면 저렇게 되는 걸까.

“수술해야죠. 나쁜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필요 없거든요. 아이가 갖고 싶었으면 진작 제대로 좋은 집안 여자랑 결혼해서 낳았겠지. 그리고 당신이 임신할 일도 없을 거야. 진작 이상한 생각하는 여자들 때문에 정관수술 받았거든.”

그 말에 남자가 짓는 표정을 보고 신혜는 그대로 무릎걸음으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어졌다. 여태 보였던 광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옥에서 온 듯한 남자의, 한겨울의 들판에 부는 바람보다 더 매서운 표정에 그대로 말을 잃었다.

그의 의도는 여전히 의문에 쌓여 있고, 그녀는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계약서는 눈앞에 놓여 있다.

그가 신혜에게 다 읽었냐고 묻지도 않고 펜을 건네었다.

신혜는 그가 쥐고 있는 펜과 계약서를 번갈아 보다 그대로 펜을 낚아챈 뒤에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그가 다시 펜을 가져가더니 자기 사인도 한 뒤에 그녀에게 한 부 건네주었다.

“유신혜 씨는 그래도 좀 스마트하네요. 어머님은 별로 그렇지 못한 듯싶던데. 어쨌든 말이 잘 통해서 그건 다행이군. 그럼 다시 하던 걸로 돌아가볼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뜨거운 손이 어느새 다가와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 그 아픔과 뜨거움에 놀라 입을 벌리기도 전에 승규가 입술을 점령했다. 낯선 온기가 자신의 입술을 감싸고 빨아들였다.

마음의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그와 접촉하게 되니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밀어버리려 했다. 손에 닿은 부분은 벌어진 가운 중간의 맨가슴이었다. 단단하고 뜨거운 낯선 체온이 손에 닿자 흠칫 놀라 순간 힘이 슬쩍 빠져버렸다.

남자는 그녀의 미약한 반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입술 끝을 올려 비웃었다.

“그냥 룸살롱에 가든 개인 파산을 하든 내버려둘 걸 그랬나 보네?”

그것도 싫었지만 이것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어린애처럼 도리질을 치고 싶으면서 싫다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남자의 흉포한 눈에 사로잡혀 그런 거부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맹수의 눈에 홀린 초식동물처럼 가련하게 이 몸뚱어리를 바쳐야 할 뿐이었다.

“생명의 은인님에게 이런 것쯤은 좀 협력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당신 진짜 바닥까지 떨어져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싶어?”

바로 협박조로 말이 바뀌었다. 표면적으로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말꼬리가 짧아졌다. 이 남자가 자기 인생에 어떤 지옥을 갖고 올지 짐작이 갔다. 그래, 이 남자의 협박대로 더한 상황까지 갈 수 있는 거, 그나마 이 몸에 관심이라도 있으셔서 그런 상황까진 내려가지 않는다는데, 실상은 한 사람에게 몸 파는 것과 다수에게 몸 파는 것의 차이 정도에 지나지 않은가.

그가 목덜미 쪽에 얼굴을 박고 목 여기저기 키스하면서 살짝살짝 깨물기 시작했다. 목에는 자국이 남을 텐데…….

“자, 잠깐만요.”

신혜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목에서 얼굴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왜요?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요? 있으면 빨리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난 좀 급하니까.”

이미 온몸이 그의 무게에 깔려 있었다. 신혜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아니 정확하게 잡아먹으려 하는 남자의 눈은 다급해 보였다.

“잠시, 잠시만요.”

그러나 남자가 얘기를 끊어버렸다.

“얘기는 나중에 하지. 나도 남자다 보니 몸이 급해져서…… 미안한데 부드럽게 안기는 힘들 거 같네요.”

라고 말하던 남자는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 머뭇거리면서 입술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남자의 입술에 눌려 사라져버렸다.

남자의 단단해진 몸이 허벅지에 와 부딪치고, 다시 허벅지를 가르며 여성에 쐐기가 와서 박히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겁고 단단하며 맥동치는 그것이 몸을 가르며 들어오는 순간 간밤의 상처가 벌어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타인에 의해 자신의 몸이 사용된다는 것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끔찍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몸에 더한 열상을 만들어내며 점점 더 깊숙이 들어오고 나갔다 다시 들어올 때마다 상처가 벌어지고 더 쓰라림이 커져만 갔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세상에 대한 분노,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원망, 모든 것에 대한 증오, 그리고 체념.

입에서 절로 앓는 신음이 새어나갔다. 한 번 신음이 나가자 앓는 소리가 났다. 그의 거친 움직임에 계속 흔들리면서 살이 퍽퍽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악몽보다 더욱 끔찍했다. 이것이 기한이 정해져 있는 악몽이라는 점이 더욱 끔찍했다.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보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를 제지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계속 혹사당하는 다리 근육에 쥐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슴에 대서 밀어보았자 계란에 바위치기일 뿐, 그는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오히려 허리를 쥔 손에 더 힘을 가했다. 배가 계속 눌려 압박감에 숨쉬는 것도 어려웠다.

그냥 눈을 꼭 감고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그가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고 당연히 고통은 더 커져만 갔다. 빨리, 빨리 그가 끝내주기만 기다린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신음을 흘리고 그녀 위로 푹 쓰러졌다. 땀이 흘러내려 얼굴에 떨어진다. 그러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몸을 일으켰다. 씻으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드레스룸으로 들어가기 직전 몸을 돌리고 아직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신혜에게 말했다.

“당신 처녀성은 예상 밖의 즐거움이었으니까 뭔가 값을 치러줘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야 거래가 거래다워지니까.”

그가 드레싱 룸에 가서 뭔가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 멍하니 이불을 두르고 앉아 있는 그녀에게 던졌다. 하얀 종잇조각들이 나풀나풀 날아 이불 위에 떨어졌다. 백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이었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린 그녀가 차가운 이불로 가슴을 가린 채 멍하니 수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팁. 간만에 아주 즐거운 밤을 보내서 말이죠.”

남자는 수표를 한 장 더 그녀 앞에 던져둔 채 남자는 욕실로 들어가버렸다. 문이 딸깍 닫히는 소리와 함께 곧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종잇조각, 그게 뭐라고 모욕당한 치욕감에 몸이 떨려왔다. 눈물이 맺히려는 걸 초인적인 노력으로 참았다.

곧 물소리가 그치고 남자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그는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는 그녀를 보더니만 뭔가 생각났는지 드레스룸의 붙박이장의 문을 열더니만 하얀 뭉치를 툭 던졌다.

“입고 나와요. 아, 욕실에 칫솔이랑 필요한 거 준비해 놨으니까 씻어요.”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옷이 아니었다. 그의 하얀 셔츠였다. 어제 입고 있던 블라우스는 그가 찢어버렸으니 위에 걸칠 게 없었다. 블라우스뿐만 아니라 브래지어도, 스타킹도 찢겨 나갔다. 스커트 역시 후크가 뜯겨져서 입어봤자 줄줄 내려오겠지.

마치 자신의 신세와 같았다. 처량한, 이제는 헌것이 된 옷들. 블라우스는 나름 좀 비싸게 주고 사서 아끼는 거였는데. 이제 회사에 뭘 입고 나가야 하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밖에선 그가 기다린다. 만약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어떤 잔혹한 행위를 하게 될지 몰랐다. 일단은 그의 뜻대로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는 게 현명할 터였다.

몸을 움직여서 억지로 한쪽 발을 바닥에 디디고 일어서자 다리 사이에서 뭔가 끈적거리는 게 흐르는 느낌이 났다. 순간 눈을 감았다. 현실을 무시하려 해도 무시할 수 없다. 몸이 간밤에 일어난 일을 증거하니까.

어서 씻자, 씻고서 뭘 어쩌지? 어쩌긴 그냥 살아야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인형처럼 4년 살고 끝내버리자. 그 뒤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살아야겠지.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남자 비위나 맞춰가면서 4년 바닥에서 굼벵이처럼 구르는 게 노숙자도 아니고 인생 끝난 것도 아니니…….

그러나 왈칵 뜨거운 것이 올라오려 했다. 여기서 울기 시작하면 끝이었다. 이제 시작인데, 아직은 아직은 좀 더 참을 수 있다.

욕실에 들어가 김이 서려 있는 거울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눈이 퉁퉁 부어 있고 입술에는 피딱지가 앉혀 있었다. 그리고 목덜미와 가슴 부분에는 흉측할 정도로 붉은 자국이 그득했다. 몸 여기저기에 다 그렇겠지. 무엇보다 움직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몸속 깊숙한 곳의 고통들.

그 익숙하면서도 칼에 베인 듯 아린 듯한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팠다. 이 세상 혼자로 칼날처럼 차가운 북풍에 맨몸으로 서 있는 듯했다. 아직 참아야 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앞으로 사 년이라니…… 그 사 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아무도 그걸 알려주지 않는다.

다행히 샤워하고 나왔을 때 그는 방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가 준 셔츠를 입고 쭈삣쭈삣 밖으로 나가자, 부엌 쪽에서 그가 뭔가 하고 있는지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는 그가 정리해 놨는지 그녀의 옷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커피 마실 건데 마실 거예요?”

이상하게 정중한 듯 존대를 하는 남자의 말이 귀에 거슬린데 말은 못하겠고 그냥 살짝 인상을 썼다.

“네.”

그러자 그가 큰 대리석 테이블 한쪽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캡슐을 넣고 잔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뜨거운 김이 나면서 고소한 커피향이 퍼져나갔다. 승규가 잔에 받쳐 커피를 건네고 자신은 좀 더 큰 잔에 두 잔 정도 더 뽑는 것이었다.

“난 서재에서 일할 거니까, 냉장고에서 대충 뭔가 찾아 먹던가 해요.”

그 말을 한 그가 그녀를 내버려둔 채 서재인 듯한 곳으로 들어가버렸다. 멍하니 테이블에 혼자 남겨진 신혜가 커피를 마신 뒤에 싱크대에 갖다놓으러 움직이자 몸속의 낯선 부분이 아려서 걷는 것도 그렇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식욕도 없어서 뭔가 먹고 싶지도 않고 그냥 멍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남자 허락 없이 이 집을 나가면 안 되겠지. 입고 나갈 옷조차 없는데. 오늘은 다행히 토요일이었다.

어쩌나 싶어서 그냥 거실의 텔레비전을 켰다. 그리고 멍하니 채널을 돌리다 동물 다큐에 채널을 맞추고 사자가 가젤을 잡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레이터가 건조한 목소리로 세렝게티 고원, 사자, 가젤 새끼, 사냥 등의 단어를 떠들었다. 멍하니 사자가 가젤 새끼의 뒤를 좇아 목줄기를 따버리는 것을 보다 인상을 쓰고 화면을 돌렸다. 가젤 새끼가 마치 자신과 비슷한 듯해서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그제 밤에도 잠을 못 잤고 어제도 새벽녘에나 겨우 잠이 든 듯했다. 계속 시달린 몸이 피곤한지 졸음이 몰려왔다. 늦은 봄 오후 햇빛은 좋았고 신세는 처량했고 몸은 아팠다. 몸속 깊은 곳의 통증이 그녀를 괴롭혔고, 저 벽 너머 어딘가에 있을 남자의 존재가 정신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그냥 남자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움직여서 비위를 맞추어서 빚을 해결하는 것, 그거 외엔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반항해 봤자 다치는 건 그녀였다. 시키는 대로 대충 살면 4년 금세 흐르겠지. 그때까지 참아보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후 햇살에 나른해졌다. 어떤 상황에서든 낙관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긍정적으로 4년 흐르면 놔주겠지. 시간 잘 가잖아.

*

무언가 가슴을 만지는 게 불편해서 신혜는 몸을 비틀어서 돌아누우려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 몸도 무거웠고 가슴을 괴롭히는 그것 역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아예 작은 돌처럼 단단해진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어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갑작스레 정신이 확 드는 듯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단 하루 만에 자신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킨 그가 옆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녀가 누워 있는 킹사이즈 침대에 같이 있었다. 노트북으로 뭔가를 보면서 장난이라도 치듯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요한 손길에 소름이 오싹 돋을 것 같았다.

그냥 약간 평균보다 큰 편이라고 생각했고 거추장스럽기만 한 가슴이었다. 브래지어 살 때 신경 쓰이고 누군가 쳐다보는 게 싫어서 몸에 딱 붙는 옷을 잘 입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게 누군가의 성적 대상이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승규는 신혜의 숨소리가 바뀐 걸 보고 잠에서 깬 걸 알고 있었다. 무심히 일부러 쳐다보려 하지 않고 계속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정말 여자는 벗겨봐야 안다고 그냥 가냘프기만 할 줄 알았던 이 몸에 이렇게 부드럽고 푹신한 살덩어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모양도 예쁘지만 가슴 끝의 연한 분홍빛을 띤 유두까지, 정말 이런 걸 잘도 감추고 살았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 조심스러운 성격상 이걸 만진 건 자기밖에 없을 걸 알기에 오는 만족감이 더 컸을지도 몰랐다.

멍하니 눈을 뜬 신혜는 옆을 돌아보자 남자가 눈을 뜨고 그녀를 안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셔지지 않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 역시 또 놀랐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어떻게 이런 여리고 소심한 여자가 나온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은 지켜봐야 아는 것. 그녀가 과연 그가 처음 본 대로가 맞는지는 앞으로가 알려줄 터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의 계획에 전혀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손이 다시 주저하던 가슴을 그대로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이미 지난 밤 동안 괴롭혀진 가슴은 멍이 없는 데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유두의 얇은 피부 표면이 벗겨져서 남자의 거친 혀 놀림에 쓰라려왔다.

“아…….”

신혜가 얕은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의 육중한 몸이 하체를 짓눌렀다. 맨다리에 남자의 근육질의 다리가 닿았다. 남자의 크고 단단하고 길쭉한 몸 때문일까 같은 인간일 텐데도 자신과는 전혀 다른 동물인 듯했다.

남자는 여전히 신혜의 가슴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 안쪽 살을 만지나 싶더니만 역시 연약한 안쪽 살을 가르며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건조한 그곳에 살짝 눈시울을 찌푸렸다. 남자가 물고 있던 그녀의 가슴을 뱉었다.

“익숙해져요. 안 그러면 당신만 다치니까.”

그 말을 하고서 다시 남자의 길고 마디가 두툼한 손이 그녀의 몸속 깊숙이 들어왔다. 그래도 어제 또 약이라도 발라뒀는지 생각보다 빨리 아무는 듯했다. 어제처럼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이물감에 괴로웠다. 연약한 살을 가르며 들어온 그곳은, 감히 만지기조차 수줍을 정도의 그 여린 살을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좁고 건조한 통로를 넓히려 하는 듯 보였다.

남자가 마침내 그녀의 온몸을 채우며 끝까지 들어와버렸다. 그냥 고통 이외의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때 남자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녀 가슴에 관심을 놓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려서 가슴을 베어 물고 한참 그 끝을 괴롭혔다. 그냥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뜨거워진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복잡한 다른 감정들로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아프다, 아프다. 그런데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자의 동작은 점점 더 커지고 거칠어지고 빨라졌다. 나중에는 얕게 치는 것이 부족한지 그대로 허리를 쥔 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 다시 입을 구해 왔다. 가뜩이나 호흡곤란으로 헉헉거리다 남자가 입술을 덮치자 완전히 숨쉬기 힘들어져버렸다. 그대로 온 숨을 훔쳐가기라도 하듯, 입술을 가르며 들어온 것이 온 입안을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뭔가 숨겨놓은 것이 있나 찾기라도 하듯, 강한 힘으로 요리조리 왔다갔다 했다. 작은 혀를 뒤쫓기라도 하다, 그대로 얽어매었다.

겨우 그 입에서 풀려났을 때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남자는 그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허리를 쥐고 빠른 속도로 점점 더 깊숙이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뜨겁고 단단한 것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유린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머릿속이 용광로에 녹아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열기에 완전히 눌려버린 듯했다.

결국 남자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마지막으로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몸속에 묻어 있는 남자의 단단한 몸이 줄어들었다. 뜨거운 것이 몸속에 퍼지는 듯했다. 그리고 남자가 거친 숨을 들이쉬면서 몸을 그대로 그녀의 몸 위에 뉘여버렸다. 온몸에 육중한 몸의 체중이 그대로 실렸다. 가뜩이나 숨쉬기 힘들었는데 더 힘들게 되어버린 꼴이었다. 다행히 잠시 뒤에 남자가 몸을 일으켜 그대로 빠져나가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시 후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배스가운을 들고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당신도 씻어.”

일단 씻어야겠지.

최대한 빨리 몸을 씻고 싶었다. 그러나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저속한 모습에 신혜는 눈을 감아버렸다. 뜨거운 뭔가가 눈에 고이려 했다. 그대로 유리문을 열고 샤워부스로 들어가 뜨거운 김이 아직 차 있는 그곳에서 물을 틀어버렸다.

머릿속으로는 방금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었다.

불과 하루인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팔 다리 목, 어디 할 거 없이 다 멍이 없는 곳이 없었다. 손목은 어제 그가 거세게 쥐어서 그런지 완전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슴 쪽은 차마 봐줄 수가 없었다. 빼곡하게 밤새 빨렸던 자국들, 목은 잘근잘근 씹었던 자국이 그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도 상기되어 있던 얼굴과 목. 그 눈에 담긴 것은 정욕.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여기서 어떻게 도망가지? 아니 저 정신병자에게서 도망을 가더라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다. 또 도망가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여기보다 더 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은 넓고 정신병자는 많지 않은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옷을 차려입은 그에 비해 수건 하나 두른 자신이 초라하다.

“머리 말리고 나갈 준비 해요.”

“네?”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나갈 준비 하라고. 집에 가서 짐은 갖고 와야 할 거 아냐?”

“옷…… 찢어져서…….”

신혜가 머뭇거리면서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제야 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네?”

“사이즈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잖아.”

그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빨리 질문에 답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55요.”

“기다리고 있어요. 나가서 옷 사갖고 올 테니까.”

그 말을 한 그가 재킷을 챙겨 입고 지갑가 차 키를 들고 나가버렸다.

어제 입고 있었던 그의 셔츠를 입고 드레싱 룸에 있는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렸다. 제법 길게 내려온 머리. 하얀 셔츠 위로 나온 목에는 그가 괴롭힌 자국들이 이제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햇빛 한 번 받은 적 없는 하얀 허벅지에 그가 쥐었던 손자국이 시퍼렇게 나 있는 게 들어왔다.

어제 아마도 그에게 시달리다 정신을 잃었는데 요 며칠 피곤한 게 한 번에 몰려들었는지 먹은 것도 없이 계속 잠만 잔 걸 알았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한 잔 마셨다. 빵이 있던데 샌드위치라도 만들어야 하나? 이 상황에서 사람이 먹을 거 걱정하다니, 정말 속좋다 유신혜.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와 하얀 셔츠로 비춰 보이는 분홍빛 유두의 흔적에 눈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잠시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것은 욕망이었다. 그는 그걸 그다지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대로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와 가슴에 손을 대었다.

천을 사이에 두고 가슴 끝을 쓰다듬는다. 이틀 밤을 괴롭혀졌으니 이제 쓰라리기까지 한 그 끝을 그는 지치지 않고 건드리려 했다.

“아파요.”

그 말에 그의 차가운 눈이 그녀와 거울 속에 마주쳤다.

“참아요. 이 정도는…… 그렇게 아프지도 않잖아요.”

얼마나, 어디까지, 당신은 나를 고통스럽게 할 생각인가요.

그는 셔츠 속에 손을 넣어 가슴을 좀 더 만졌다. 힘을 주었다 풀었다 하는 그 손에 신혜는 눈을 감아버렸다. 등 뒤로 그의 크게 심호흡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남자는 이상하게 자신의 가슴에 집착해서 계속해서 만지려 했고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지치지 않는 집요한 애무에 점점 몸이 반응하는 게 더 두려웠다.

곧 손이 빠져 나갔다.

“옷 갈아입어요. 같이 나가게.”

그 말에 뒤를 돌자 남자가 쇼핑백을 내밀고 그대로 자기 서재로 들어가버렸다. 뭔가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침실로 들어가 쇼핑백을 열어보니 그녀가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고가의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남자는 취향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지 그가 백화점에서 막 사온 검정색 원피스는 소매가 없이 몸에 그대로 달라붙어 몸선을 드러내었다. 다행히 길이가 아주 짧지는 않아서 무릎 바로 위에까지 올라왔다.

쇼핑백에는 옷만 들어 있지 속옷이나 스타킹은 없었다.

“저기, 저 속옷은…….”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맞다. 당신이 속옷 입은 걸 본 기억이 없어서 깜빡했네.”

그 말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입고 왔던 카디건을 걸치니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게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속옷을 제대로 못 갖춰입으니 왠지 벗은 듯한 느낌에 불편했다.

밖에 나가니 그가 소파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옆에 서류가방이 있는 걸 보니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서류에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잘 어울리네.”

여자는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봐요.”

그녀가 그의 손짓에 그의 앞에 와서 섰다.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옆에 앉으라는 듯이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조금 거리를 두고 신혜가 앉았다.

“오늘 난 갈 데가 있으니까, 유신혜 씨는 집에 돌아가서 짐 챙겨서 내일 저녁에 퇴근 후에 이리로 와요.”

그 말에 신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와 4년을 같이 살기로 이미 계약했다.

“그리고 회사는 얘기했던 대로 사표, 바로 내요.”

“네? 그럼 회사에서 빌린 돈을 먼저 상환해야 하는데요.”

“돈 입금해 줄 테니까, 그걸로 갚아요.”

“그래도……!”

“내가 원하는 건 말이지. 당신이 이십사 시간 나를 위해 사는 거야. 매일매일 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위해 사는 거야.”

신혜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어깨 위에 다정하게 둘러져 있었다. 손이 점점 더 밑으로 내려와 옷 위로 가슴을 살짝 쥐었다. 얇은 니트 카디건 위로 유두가 살짝 도톰하게 내비추자 그걸 조금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그리고 갑자기 놔주더니 벌떡 일어났다.

“나갈 준비 다 했어요? 집에 태워다 줄 테니까 같이 나가요.”

이제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한 5월 초, 화창한 일요일 오후가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집 앞에 그의 은색 아우디를 세우고 그녀가 내리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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