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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없다.
온 저택을 뒤집어엎고 나서야 얻은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저택 안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방을 하나씩 구경하다가 잠들었으리라고, 다음에는 정원에 있으리라고, 마지막 순간에는 잠시 산책을 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고.
도저히 인정하기 힘든 상황을 맞닥뜨린 자들이 흔히 그러듯,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도 않은 채로.
멍청하기도 하지.
그는 스스로를 비웃듯 이죽거렸다. 작정하지 않고 이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저택은 몇 겹으로 군인들과 용병들이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었고, 드나드는 사람은 하녀 하나와 식료품을 옮기는 남자 한 명을 제외하면 오로지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심지어 이 저택의 존재를 단테와 루카스에게조차 함구했다.
‘처음부터… 사라질 생각이었던 걸까?’
머리로는 차라리 그게 더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엄중한 감시를 뚫고 엘레나를 납치해 갔다고 믿는 것보다는.
아니면, 그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걸까? 폰페라다 궁에서 점점 선명해지는 환각에 홀려서 ‘이벨린’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내고, 엘레나라고 믿어 버린 걸까? 그녀가 다시금 살아나서 말하고, 걷고, 웃고, 떠들고, 체온을 품고 있다고…. 그렇게 저 좋을 대로 착각한 걸까?
‘빌어먹을….’
차라리 그녀가 머물렀던 흔적까지 같이 사라졌다면 제가 미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완전히 버리고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가끔 돌아봐 달라고. 그 말에 웃음과 울음을 터트리던 네 마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붙잡고 묻고 싶어도 엘레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어디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그가 무엇을 놓쳤던 걸까?
“…….”
분노와 걱정으로 시시각각 미칠 것만 같다가도, 머리 한쪽은 선득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딱 절반만 미치광이가 된 기분이었다. 대체, 어떻게 기사와 하녀마저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었나. 혼자서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텐데….
그는 가까스로 냉정을 쥐어 짜냈다. 서늘한 눈으로 방 안을 천천히 다시 둘러보았다.
만약 엘레나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의 눈을 속이고 감시망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엔리케.’
비센테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떠는 하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 아가씨를 찾아온 사람이, 정말 없었다고.”
“없, 없었….”
“사태의 심각함을 모르는군.”
“제, 제발, 자, 잘못을….”
“아가씨가 함구시켰나?”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있던 하녀가 그 말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제가 맞게 짚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의 함구령이라 함부로 어기기도 애매한 명령이었으리라. 주인의 정보를 팔고 다니는 하녀로 소문나면 두 번 다시 귀족 가문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할 테니까.
“서른 중반쯤 된 남자가 찾아왔겠군. 갈색 머리에 초록 눈. 둘이 무슨 말을 했지?”
“저는, 전하, 정말로….”
“정말 몰랐다, 그 말로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목숨뿐이다.”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말에 하녀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스쳤다. 그 얼굴에 비센테가 차갑게 뇌까렸다.
“달리 말하자면, 네 목숨을 제외하고 모든 걸 다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지.”
하녀가 절망적으로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저 알량한 목숨이나마 살려 주려 결심한 것은, 은근히 여린 엘레나가 마음 상할 짓은 단 하나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게 쏟기에도 아까운 마음을 누구와 나누려고.
몇 가지의 약속과 협박 끝에, 비센테는 제가 원하던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기실, 하녀는 그 대화의 대부분을 놓치거나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단 하나만큼은 정확히 떠올렸다.
“화, 황태자에게 투, 투항하라고… 분명히, 그렇게, 드, 들었습니다.”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뒷골이 당기며 소름이 돋는다는 걸 그제야 처음으로 알았다. 분노가 들끓는 와중에도 몸에 밴 침착함이 그를 인내하게 했다.
비센테는 앉아 있던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 툭 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세력의 대부분을, 그의 사촌에게 넘기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엔리케. 빌어먹을, 엘레나 데 카스타야….’
그는 엘레나의 모든 면을 사랑했지만, 자신을 도구처럼 여기는 태도만큼은 버거웠다. 가끔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행동하면서 늘 그녀 자신을 다치게 하니까. 그런 태도가 그녀 자신의 마음을 더 병들게 한다는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뒤틀려 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는.
그가 그녀처럼 할 차례였다.
***
“전하.”
엘레나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카스트로를 우아한 예법으로 맞았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 방을 가로지른 그가 엘레나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아 입 맞췄다.
“잠은 좀 잤어? 불편하지는 않았고?”
“푹 쉬었어요. 그런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오전엔 귀족원 회의에 참석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 취소했어. 지금은 줄 게 있어서 들렀고.”
줄 것? 엘레나는 의아한 시선을 카스트로의 등 뒤로 던졌다. 그의 손짓에 방 안으로 하인들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다 양손 가득 상자를 든 채였다. 하나, 둘씩 쌓이던 것이 스무 개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무엇인가요?”
“내 대관식에 네가 그럴듯한 옷 한 벌 없어선 안 되지. 열어 보고 뭐든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 더 마련해 줄 테니까.”
엘레나는 그녀의 키만큼 높이 쌓인 상자 더미들을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런 더미가 모두 다섯 개나 되었다.
“이건… 너무 많아요, 전하.”
그녀의 당혹이 못내 즐거운 것처럼 카스트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에스페다의 황후가 될 여자라면 검소함도 지나치면 흠이 돼. 이쪽으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