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망치세요, 아가씨-20화 (20/100)

-20-

내 눈앞에는 죽었다고 믿었던 노아가 조금 초췌하지만 무사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모든 사정은 도망친 후에 설명해 주겠다고 말했다.

?

나는 멍하니 그가 나를 안아 드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이 상황이 각본이 있는 연극처럼 느껴졌다.

자꾸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불안했다. 노아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기분이 들지.

내가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을 본 노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곤할 거야. 눈 좀 붙여.”

?

이런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잠을 자서도 안 됐다. 하지만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눈꺼풀은 서서히 내 눈을 덮었다.

?

무의식적으로 노아의 가슴팍에 툭 머리를 기댔다. 그가 나를 힐끗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피곤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노아에게 의지한 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수수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 이곳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인 것 같았다. 노아의 품속에서 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잠든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더라.

멍하니 오두막의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는데, 옆방에서 노아가 걸어 들어왔다.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

“누나,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너는?”

목이 쉬었는지 입에서는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노아가 내게 따듯한 차를 한 잔 건넸다. 나는 차를 받아들고 따듯한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나도 괜찮아.”

“너…… 왜 그런 곳에 있었어?”

내가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묻자 노아가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러는 누나야말로.”

그렇게 말하는 노아는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보였다.

그는 깨어나 보니 이상한 곳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다행히 사지가 멀쩡히 풀려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주러 들어오는 사람을 공격해 탈출했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

?

그 후 노아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목까지 이불을 덮어 준 후에야 방에서 나갔다.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따듯한 수프가 올려져 있었다.

수프. 나는 그것을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소한 것들 때문에 자꾸 잊고 싶었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렀다.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며칠 동안의 힘들었던 기억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피곤하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며 눈을 감았다.

***

죽여 달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노아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방에서 나왔다. 방 안에서 스텔라가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그냥 그녀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공허하던 모든 게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을 죽여 달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만약 이러다가 스스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희망이 없다고 판단해서,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음을 선택해 버리면 어떡하지.

안 된다. 절대 안 돼. 그녀가 죽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노아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 스텔라, 그녀를 구해 낼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는 구해 내겠다는 생각이.

그러다가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냈다. 어떻게 하면 정체를 들키지 않고도 조금이라도 더 스텔라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노아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나 입던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스스로 몸에 자잘한 상처들을 냈다. 그는 애써 초췌한 얼굴을 만들어 스텔라가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

꿈을 꿨다. 나는 눈을 감았던 때와 같이 낡은 오두막 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살로스와 꿈에서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오묘하고 몽롱한 기분.

?

아니나 다를까,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던져서 깨트려도 노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달려오지 않았다. 이 꿈 안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침대에서만 생활해서 그런지 몇 번 휘청거렸지만 계속해서 걸었다.

방을 벗어나서 작은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막고 있는 나무문을 힘껏 밀었다. 밖에는 키 큰 나무와 풀들이 가득 자라나고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유일하게 키가 작은 나무 그루터기가 보였다. 그 위에는 어느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왜인지 익숙한 뒤통수였다.

“……살로스?”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자색 눈동자가 데굴 굴러 나를 향했다.

“안녕, 수녀님.”

그는 살로스였다.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더니 그가 만든 공간이었던 것이다.

살로스는 내게 인사하며 순박하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만약 살로스를 다시 만나게 되면 꼭 해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점점 다가오는 나를 보는 살로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의 바로 앞에 섰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살로스의 멱살을 잡았다.

“켁.”

살로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끌려왔다. 나는 그의 얼굴은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살로스의 얼굴을 가격한 주먹이 욱신거렸다. 주먹으로 뺨을 가격당한 살로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뒤늦게 고통에 차 신음하며 뺨을 감쌌다. 나는 그의 멱살을 툭, 놓으며 말했다.

“미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너무 짜증 나서 때려 버렸네.”

“원래 그 반대 아니야……?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게 아니고……?”

?

살로스가 가련한 척을 하며 울상을 지었다. 어우, 꼴 보기 싫어. 어디서 자기가 불쌍한 척인지.

?

이제 목적도 이뤘겠다, 나는 다시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애초에 살로스를 만나기 위해 오두막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말은 건 것도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의 얼굴에 주먹을 꽂는 것을 바라 왔으니 그것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맞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살로스의 머리에 뿔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뒤돌아 그를 보자 툴툴거리던 살로스가 다시 불쌍한 척을 하며 훌쩍거렸다. 그가 그러든 말은,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주욱 잡아당기며 물었다.

?

“너 뿔은 어디 갔어?”

그가 내 정기를 야금야금 먹고 실체화했을 때도 뿔이 없기는 했었다. 하지만 꿈에서의 살로스는 항상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마치 인간처럼 매끈했다.

그러자 살로스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며 외쳤다.

“이게 다 수녀님 때문이잖아!”

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그를 내려다보자 그는 길고 긴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수녀님 소원도 들어줬는데 수녀님은 나한테 성수나 뿌리고! 나 완전 서운했다고. 지옥에 돌아가니까 힘도 약한 몽마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었는지 알아?!”

그러고도 살로스는 약 5분 동안 내게 설명을 빙자한 푸념 쏟아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절반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그래서 결론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거의 안 들었다.

나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결론을 요구했다. 살로스의 긴 푸념을 다 듣기는 귀찮았다. 그냥 네가 요약해서 들려주면 되는 이야기잖아.

“그동안 공작이 수녀님 못 찾은 거…… 나 덕분이었는데…….”

살로스가 입을 내밀고 웅얼웅얼 말했다.

?

마치 개미가 말하고 있는 것 같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으며 똑바로 말하라고 협박하자 그제야 살로스는 또박또박 말했다.

“알…….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5년 동안 사람 한 명 못 찾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

물론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이제 나에 대한 알베르트의 흥미가 식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다시 만났을 때, 5년 동안 나를 찾아 헤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를 찾지 못했을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루터기 위에 앉아 있는 살로스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그는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살로스의 정수리를 세게 때렸다.

“뭘 웃어, 짜증 나게.”

“아야.”

몇 주 전의 기억을 더듬자 살로스의 몸이 갈라지던 것처럼 내 몸에서 투명한 막이 떨어져 나왔던 것이 떠올랐다.

?

아마 내가 예상한 것이 맞다면 살로스가 무언가 손을 썼기 때문에 알베르트가 나를 찾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알베르트가 나를 찾은 것은, 내가 살로스에게 성수를 뿌렸기 때문이고.

“무슨 생각해?”

살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뭘 물어.”

이곳은 살로스가 만든 공간이니까.

그런데 이 말을 하자마자 살로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리듯 중얼거렸다.

?

“어, 어어. 그렇지. 그랬었지.”

?

어딘가 수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능글맞음의 대명사라고 불릴 법한 살로스가 당황을 할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는 끝까지 내 시선을 피하며 먼 곳에 서 있는 나무를 쳐다봤다. 아까 내가 멱살 잡을 때 꼼짝도 못 하던 것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그렇다면, 설마.

“설마 너 지금 내 생각 못 읽어?”

“…….”

살로스가 입을 꾹 다물고 이리저리 내 시선을 피했다.

뿔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내가 그의 멱살을 잡을 때마다 반항하지 못하던 것도 그렇고. 꿈 속에서는 항상 그의 힘이 우위였는데. 물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살로스의 태도를 보니 내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그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생각 못 읽는 거 맞네. 그렇지?”

“…….”

“야, 대답해.”

그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버릴 것처럼 세게 살로스의 머리카락을 쥐자 그는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