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게 다 수녀님 소원 들어 주느라 이렇게 된 거잖아……. 어떤 두 놈이 수녀님을 엄청 집요하게 찾아다녔단 말이야. 그거 막으려다가 힘도 다 썼는데, 수녀님은 나한테 성수나 뿌리고.”
살로스가 우물우물 서운한 듯이 말했다. 결론은 내가 그에게 성수를 뿌렸던 게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건가.
?
그러고 보니 5년 전 쯤 그가 소원을 들어 주겠다며 나불대던 것이 기억난다. 그나저나 두 놈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를 찾던 것은 알베르트 한 명뿐이었는데.
?
“두 놈이라니, 그게 무슨…….”
“힘 좀 잃었다고 하급 몽마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나 슬퍼 죽겠어, 수녀님.”
?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얼굴로 살로스가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수녀님이랑 몇 번만 자면 금방 힘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결국 결론은 그거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로스를 밀쳤다.
분명 힘을 잃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세게 밀어도 그는 여전히 내 허리를 팔로 옭아매고 있었다. 하여간 거머리 같은 놈. 힘을 소진하고 성수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돌아오다니.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나를 강제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을 읽을 수도,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
이 상태로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살로스도 그것을 아는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응? 수녀님, 제발.”
이제 살로스는 간절하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힘을 잃어 하찮아진 살로스의 뺨을 감싸며 둥글게 웃었다.
키가 큰 나무 너머로 해가 뜨기 시작한다. 나는 살로스의 뺨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살로스.”
“응, 수녀님.”
“내가 너랑 잘 일은 없어. 그러니까 나 말고, 섹스 좋아하는 사람 찾아서 그 사람이랑 신나게 해.”
?
이전에는 섹스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게 굉장히 부끄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르겠다.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겪어서 덤덤해진 걸지도 모른다.
살로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나는 허리에서 그의 팔을 떼어낸 후 먼지 털 듯 허리를 탈탈 털었다.
“내 꿈에 찾아오지도 말고.”
“……어.”
“뭐라고?”
“싫어. 난 수녀님 안 떠나. 아니, 못 떠나.”
힘도 잃은 주제에 괜한 억지를 부리네. 내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살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녀님은 나한테서 못 벗어날걸.”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수녀님이 머무르고 있는 저 오두막, 저게 수녀님한테는 수렁이라는 걸 모르지?”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데, 그 말만큼은 귀에 박히듯이 들렸다. 노아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오두막이 내게 수렁이라.
?
“수녀님이 저 음습한 집에 더 오래 있을수록 내 힘만 더 강해질 거야. 부디 기대해.”
“…….”
“조만간 수녀님을 삼켜 버릴 테니까.”
음습한 건 저 집이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요. 살로스는 당당한 말투와 달리 몸을 잘게 떨며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었다.
산 위로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눈앞에 서 있던 살로스는 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대신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노아가 보였다.
“…….”
“아, 일어났구나.”
내가 깨어나기 전부터 쭉 나를 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자꾸만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노아는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웃더니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잔을 건네받고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컵에 그려진 화려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이었다. 이 잔, 꽤 비쌀 것 같은데.
이렇게 비싼 컵을 살 만큼 노아에게 돈이 많았었나?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를 힐끔 쳐다봤다.
뭐,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많았던 아이니까 성인이 되어 돈을 버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사치품을 살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
내가 빤히 컵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노아가 작게 웃었다.
“컵, 예쁘지?”
그 말을 듣는데, 문득 알베르트가 떠올랐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신기한 눈으로 마차를 살피는 내게 능글거리는 말을 건넸었지.
하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나는 이미 그에게서 도망쳤다. 왜 이제 와서 그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잊어버리자.
지금쯤이면 알베르트도 코르넬로부터 내가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나를 찾고 있지 않을까.
?
나는 오두막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을 바라봤다.
?
아직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노아는 내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며, 오두막에서 나가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
오두막은 어디인지도 모르는 울창한 숲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이라면, 알베르트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흘렀더라. 잠들고 깨어나고. 이것만 반복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전에는 살로스의 힘 덕분에 알베르트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에게서 나를 숨길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건, 이 오두막처럼 숲속에 집을 짓고 사는 것뿐이었다.
?
내가 어쩌다 이런 극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더니 노아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노아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쓸었다.
5년 전, 작고 부드럽던 소년의 손은 이제 크고 단단했다. 분명 노아가 나보다 더 동생인데, 똑같이 힘든 일을 겪었으니 내가 노아를 더 챙겨 줘야 하는데.
?
그런데 그 손길을 받는 것이 너무 안심이 돼서 나는 그냥 눈을 꾹 감고 그의 손을 받아들였다. 노아는 한참 동안 내 뺨과 머리를 어루만졌다.
?
“……고마워.”
나는 입술을 조금 벌리고 말했다.
“그 수렁에서 구해 줘서.”
내 말을 들은 노아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설마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걸까. 괜히 미안해져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수렁.”
“응?”
“맞아, 수렁. 수렁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지.”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한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노아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우고 노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상체를 살짝 숙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노아의 붉은 입술이 내 손등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분위기가 5년 전과 너무나도 달라져서.
우리는 그냥 친한 누나와 동생이 아니었던가. 그런 관계 사이에, 이런 행동이 정상적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푹 쉬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아는 방에서 나가버렸다. 넓은 그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노아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검은색 셔츠.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팔은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실제로 몸도 멀쩡했다. 다만 문제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것인지 건강해 보이는 몸과 달리 막상 걸으려고 하면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내 팔을 빤히 쳐다보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빵을 베어 물었다. 고작 며칠 정도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을 뿐인데 몸이 허약해졌다. 이런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른 다시 건강해져서 새로운 집을 찾아서 떠나자.
순간, 노아가 괜찮다고 말해 주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아도 슬슬 어여쁜 애인을 만들 나이니까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건 민폐겠지.
?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쿡쿡, 웃었다. 방금 뭔가 손자를 걱정하는 할머니 같은 생각이었어.
?
나는 빵 한 덩어리를 입에 욱여넣은 후 조심히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노아는 쉬라고 했지만, 침대에만 있는 건 너무 답답했다.
?
발이 차가운 나무 바닥에 닿았다. 두 발로 서자 다리가 잠시 휘청거렸다.
하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방문이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꿈에서의 경험을 제외한다면 이 방에서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화장실도 전부 방 안에 있었으니. 꿈에서 봤던 것처럼 이 방에서 나가면 작은 부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방도 하나 있었다. 작은 오두막치고는 꽤 효율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노아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오두막을 구경했다.
노아는 내가 방에서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부엌에 맛있는 음식들을 차려 놓고 갔다. 하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근사한 음식들이 아니었다.
부엌 구석에 위치한 방. 나는 천천히 그 방을 향해 다가갔다.
꿈속에서도 저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돌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었다. 꿈속에서도 열리지 않았던 방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아.”
하지만 역시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쇠 구멍을 얇은 막대로 마구 쑤셔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게 뭐야, 김빠지게. 나는 막대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자꾸만 열리지 않는 문이 떠올랐다.
노아가 돌아오면 저 방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
나는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졸린 건지. 아무래도 따듯한 빵을 먹은 게 그 원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