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시중들어 드리겠습니다. (6/19)

5. 시중들어 드리겠습니다.

올리비아의 뽀뽀를 받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잠결에 싫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는데 희망이 있었다. 비록 케이크와 맞바꾼 것이지만 무려 올리비아가 직접 뽀뽀해 주었다. 에이든은 의자에 기대 감격에 젖어 들었다.

‘씨발, 진짜 좋아서 미치겠네.’

고작 뽀뽀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에이든은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살갗에 남은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을 음미했다.

에이든이 그러는 동안 케이크를 먹은 올리비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혀끝에 달짝지근한 단맛이 감돌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부드러움에 올리비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어쩌지 너무 맛있어!’

입안에서 금방 사라져서 아쉬웠다. 한 입 더 먹고 싶었는데 아까 도련님이 한 입만 준다고 그랬다. 도련님은 그만 드실 거 같은데. 혼나더라도 물어보기나 하자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도련님 더 먹어도 돼요?”

안 드실 거면 줬으면 좋겠다. 남은 케이크가 아까워 올리비아는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늘어져 있던 도련님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몽롱하니 정신이 없어 보였다. 무의식적인 반응 같지만 올리비아는 이때다 싶어 냉큼 포크질을 했다.

두 번째는 더 황홀한 맛이었다. 달콤하고 폭신폭신해 입안에서 사르륵 녹았다. 도련님은 참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케이크도 맛보게 해 주다니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올리비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야금야금 케이크 한 접시를 다 비웠다.

“도련님 치울게요.”

도련님이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귀족은 참 좋겠다. 마지막으로 입맛을 다신 올리비아가 식기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올리비아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의자에 기대 쓰러져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즐기던 에이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감격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 좋은 일을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었다. 벌컥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이리 나와 봐!”

허공을 보고 외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남들이 봤다면 미친놈 발광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이미 들뜬 에이든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쁘니까 빨리 나와. 빨리. 빨리.”

“부른다고 나와야 합니까? 전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에이든의 발광에 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케일럽이 튀어나오며 대꾸했다. 굳이 저렇게 숨어 있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남이 하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도 귀찮아 내버려 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케일럽의 행동이 아니다.

“실력 있는 주방장 한 명만 구해 줘.”

“제가 어떻게 주방장을 구합니까? 전 호위로 왔습니다.”

케일럽의 무능력한 발언에 에이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그런 것도 못해? 못 구하겠으면 위에 연락해서 보내 달라고 해.”

“도대체!”

“아! 주방장 솜씨가 마음에 들면 조금 일찍 돌아가 보는 것도 고려해 보지.”

에이든은 울분을 터트리려는 케일럽의 말을 싹둑 잘랐다. 빨리 돌아가는 건 케일럽이 간절하게 원하던 일이었기에 불만을 쏟아 내려던 입이 합 다물렸다. 고뇌하는 케일럽을 보며 에이든은 속으로 비죽 웃었다.

시키는 대로 일하기 싫다 여기면서도 결국 주방장을 구해 달라고 위에 연락할 거다. 케일럽의 소망은 어쨌든 이런 시골 촌구석을 벗어나는 일이니까. 저 정도 대가면 알아서 움직이겠지.

“참, 음식보다 케이크를 잘 만드는 주방장으로.”

“지금 뽀뽀받겠다고 주방장을 구해 달라는 겁니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본 케일럽은 이번 명령의 요점을 잘 파악했다.

“물론.”

“뽀뽀 하나에 감격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것 때문에 명령 내리지 마십시오! 사람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다만, 동의를 못 하고 분통을 터트렸을 뿐. 케일럽의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반응은 에이든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는 지금 뽀뽀 한 번 더 받겠다고 이리 굴고 있었다. 당연한 일에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 뽀뽀가 그만큼 중요하니까. 참, 잊지 마! 솜씨가 마음에 들어야 거래 성립이야. 어중이떠중이면 돌아가는 시기는 더 늦어질걸.”

이번 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경고했다. 차게 식는 케일럽의 얼굴을 뒤로하고 에이든은 창문을 닫았다.

“아, 진짜!”

창문 너머로 케일럽의 시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남의 불만을 받아 주는 성격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투정보다 올리비아의 뽀뽀가 훨씬 더 중요했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에게 미쳐 있으니까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케일럽의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에이든의 계산보다 훨씬 컸을까? 새로운 주방장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말하고 난 지 이틀 후에 왔고 백작가가 아닌 에이든에게 고용되어 별채 식사만 담당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잭슨이 사람을 고용할 거라면 자신에게 말씀하지 그랬느냐고 난리 쳤지만 무시했다.

그날부터 에이든을 위한 나날이었다. 끼니마다 후식으로 케이크가 나왔고 에이든은 케이크를 미끼로 올리비아의 뽀뽀를 받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녀는 뽀뽀라는 행위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좋았다.

오늘도 에이든은 재빠르게 스테이크를 마시듯이 다 먹었다. 한 손에 포크를 들고 반대쪽 손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들겼다. 사흘째 이어진 행동이라 올리비아가 자연스럽게 쪽 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촉촉한 감촉이 살 떨리게 좋았다. 헤벌쭉 절로 에이든의 입가가 벌어졌다.

“이제 먹어도 돼요?”

“그래. 먹어.”

에이든이 허락하며 포크를 건네자 흐드러진 미소를 지은 올리비아가 케이크를 냠 떠먹었다. 양 뺨을 감싸고 좋아하는 올리비아를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이제는 뽀뽀 가지고 처음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서 에이든은 밥 먹을 때마다 천국에 빠져 허우적댔다. 한 시간마다 밥을 먹고 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올리비아의 뽀뽀를 한 시간마다 받을 수 있을 텐데. 상상만 해도 좋았다.

올리비아는 그녀대로 행복했다. 이상하게 도련님의 기분이 계속 좋아서 짜증을 부리고 어지르지 않아서 기뻤다. 그리고 식사 때 나오는 케이크를 매번 양보해 주셔서 신났다. 왜 뽀뽀를 자꾸 해 달라는지 모르겠지만, 고작 뽀뽀랑 케이크를 바꾸는 걸 보면 도련님도 참 바보다. 이 맛있는 걸 포기하다니.

“맛있어?”

“네. 맛있어요!”

강하게 대답한 올리비아가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오늘은 레몬 맛이 강해 새콤하니 더욱 맛있었다. 냠냠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 접시를 전부 비운 그녀는 식기를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빨리 저녁이 왔으면 좋겠다.

‘저녁에도 케이크를 얻어먹을 수 있겠지?’

맛있는 것을 먹은 올리비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매일이 요즘 같기만 하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든도 올리비아도 소소한 행복으로 기뻐할 때 다른 한 사람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창문 너머로 그들을 보던 애니는 상황이 짜증스러워 손을 물어뜯었다. 그동안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그녀의 손가락은 상처 난 지 오래였다.

통증보다 짜증이 더 컸다. 둘이서 같잖고 멍청한 짓을 하는 꼴을 보아하니 속이 뒤집혔다. 저런 꼴 안 봤으면 좋겠는데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걸어가는 길목에서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올리비아를 치워 버리기 위해 수를 쓰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괴롭히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럼 그렇지, 라고 여겼다. 올리비아가 확실히 눈에 띄는 미녀라 처음엔 혹해도 저 멍청함에 금방 질릴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도련님은 툴툴대면서도 올리비아를 챙겼고, 좋을 땐 좋다고 저리 끼고도니 예전처럼 손을 쓸 틈이 없었다. 워낙 일하는 장소가 협소하다 보니 하녀들 사이에서 이간질도 쉽지 않았다.

“올리비아 고 계집애 둔해서 일도 제대로 못하지?”

“장난해? 시키지 않아도 잘해. 올리비아가 일을 못한다고 소문낸 애가 누구니? 혹시 너니?”

애니는 수작질을 위해 캐서린에게 올리비아의 험담을 하다가 핀잔만 들었다. 되레 소문낸 이가 그녀가 아닌지 의심하는 시선까지 받았다. 애니는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이곳은 외딴 섬과 비슷해서 본채 쪽의 친한 하녀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아으! 미치겠어! 짜증 나! 올리비아 따위 죽어 버렸으면!”

괴롭힐 방도가 없으니 더 분노가 치솟았다. 하녀들 틈에서 제일 잘나가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요즘 별채에서는 자신이 이런 처량한 신세라는 소문이 도는지 같은 방을 쓰는 동료들의 기색도 심상치 않았다. 다들 저를 비웃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났다.

멍청한 것들. 올리비아와 다를 것 없는 무지한 것들이 제 분수를 모르고 감히 자신을 비웃는단 말인가. 편하게 살려고 어울려 줬더니 같은 수준인 줄 아는 허접한 것들 때문에도 불쾌했다. 애니는 풀 곳은 없고 분노만 쌓여 가니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별채를 담당한 날부터 신경질적인 나날을 보내던 애니는 총관님의 부름을 받았다.

“오늘 밤 귀족을 모셔라. 본관 2층 오른쪽 끝 방이다.”

총관은 단순히 시중드는 것이 아니라 밤시중을 들라는 이야기를 냉정히 통보했다. 애니에겐 익숙한 일이었고,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에 깊게 고개를 숙이고 일찌감치 숙소로 향해 단장했다.

요즘 에이든 도련님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나는 네가 올리비아를 괴롭힌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별채에서 구박과 눈치를 볼 바엔 하루라도 빨리 다른 귀족의 첩으로 들어가는 게 나았다.

솔직히 이런 기회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다. 별채에만 처박혀 있어 본채의 일을 돕지 못해 선택받을 기회가 올까 걱정했다. 여태껏 총관의 비위를 맞춰 준 게 조금쯤은 효과가 있었나 보다. 제발 이번엔 쓸 만한 귀족 좀 걸렸으면 좋겠다. 뭐든 해 줄 수 있으니 자신을 첩으로 들여 이놈의 집구석을 벗어나게 도와줬으면 소원이 없겠다.

몸을 씻는 와중에 에이든 도련님이 하도 정원 일을 시켜 하얗던 피부가 까무잡잡해지고 있는 걸 발견해 속상했다. 외모가 자꾸 촌티 나게 변하면 더 기회가 없어질 텐데 이 무슨 짜증 나는 상황이란 말인가.

애니는 귀족의 시중을 들 때만 사용이 가능한 향유를 발라 몸단장을 하고 밤이 이슥해지자 본관을 방문했다. 몇몇 하녀들의 혐오감이 담긴 눈과 마주쳤다. 그들은 애니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지나갔다. 애니는 그따위 멸시는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 집구석을 벗어나면 제일 먼저 복수해 주리라 다짐하며 오른쪽 끝 방의 문을 두들겼다.

“들어오너라.”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인 듯싶었다. 모실 귀족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니는 눈을 내리깔고 조신하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클클거리는 웃음소리에 슬며시 눈을 들어 올리다가 낯익은 남자의 얼굴을 발견한 애니는 욕설을 삼켰다.

“오랜만이구나.”

“예. 나리.”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하는 상황에 기분 상했지만 애니는 한껏 공손한 어조를 냈다. 남자는 애니가 마지막으로 시중을 들었던 로저스 자작이었다. 할 것 못할 것 다 해 줬는데 별채로 처박아 버린 개새끼.

애니는 얼마 전 자신이 별채 담당이 된 사정에 어떤 귀족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올리비아의 수작질이 아니란 점에서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가 어떤 사람이 그런 짓을 했는지 다시 불쾌해졌다.

하지만 상대가 귀족이라면 생각해 보나마나 뻔했다. 마지막에 자신을 품은 이일 거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

‘별채로 처박아 놓을 땐 언제고 왜 다시 찾는 거람. 아니지. 혹시 저놈이 부른 게 아니라 총관이 머리를 썼나?’

애니의 심사는 벌써부터 뒤틀렸다.

“이리 와 엎드려라.”

이미 잔뜩 흥분했는지 로저스 자작의 눈동자가 벌겠다. 침을 질질 흘리는 모양새에 더 시간 끌 거 없이 옷을 벗고 침대에 엎드렸다. 상대가 개새끼라고 해도 애니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가길 빌었다.

전희 따위는 없었다. 끓어오르는 제 성욕을 풀겠다는 듯 로저스 자작은 바로 성기를 박아 넣고 움직였다. 뒤에서 치대는 움직임에 애니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로저스 자작은 저번보다 더 험하고 무자비한 몸짓으로 제 욕심을 차렸다. 애니는 의무적으로 교성을 흘리며 몸을 뒤틀었다.

뒤에서 헉헉대던 로저스 자작이 크게 신음을 흘린 후 쓰러지듯 옆으로 엎어졌다. 애니도 힘을 빼고 잠시간 쉬었다. 로저스 자작이 팔을 뻗어 그녀를 당겼다.

“네 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저속한 로저스 자작의 말에 그가 애니를 직접 지명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담 이해가 안 됐다.

‘자작이 벌을 주라고 한 게 아니었나?’

자신을 마지막으로 안았던 이가 로저스 자작이었고, 그 밤 이후로 바로 별채 청소를 명령받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별채로 보낸 줄 알았다. 지금의 말과 어쩐지 다른 거 같았다. 애니는 사정의 여운으로 물든 로저스 자작에게 조심히 물었다.

“나리, 제가 전에 모셨을 때 불쾌하게 만든 점이 있습니까?”

“그건 왜 묻느냐?”

“나리를 모시고 바로 별채 청소를 맡았었습니다. 혹여 제가 기분 상하게 한 점이 있으면 죄송합니다.”

이렇게 좌천시킨 것이 당신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로저스 자작은 클클 웃고 애니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주물럭거리며 그는 애니의 위로 올라타 가슴을 입에 담았다. 애니는 인내하고 기다렸다. 한참을 애니의 가슴을 입으로 희롱하며 놀던 로저스 자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불쾌라니. 놀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하면…….”

자작이 아니었나? 아리송해하는 애니를 보며 로저스 자작은 더욱 음충맞게 웃었다.

“만족스러워서 그렇지. 네년이 적잖게 남의 밤시중을 들어 왔다는 것을 안다.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게 안기면서 남의 손을 타는 것은 싫거든.”

이런 젠장. 똥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니는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러니까 종종 이렇게 시중은 받고 싶지만 첩으로 들일 생각은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안기는 꼴은 못 보겠다는 자작의 이기적인 욕심에 욕이 치밀었다. 기회라 여겼는데 욕심 많은 돼지한테 발목 잡혔다.

로저스 자작은 끌끌 웃으며 애니의 몸을 탐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면서 전부 비웃는 것이 느껴졌다. 인생이 점점 똥밭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에 미칠 것 같던 애니는 번뜩 기막힌 생각을 떠올렸다. 이 돼지도 떼어 내고, 눈엣가시 같은 계집도 치워 버릴 수 있는 환상적인 방법이.

애니는 팔을 들어 로저스 자작의 목을 감았다. 적극적인 반응에 의아함을 드러내는 로저스 자작에게 애니는 교활하게 속삭였다.

“혹시 아무의 손도 타지 않은 처음인 계집을 좋아하세요? 곧 생일이 다가오는 하녀가 있어요.”

애니의 나신을 지분거리던 로저스 자작이 이야기에 흥미가 동하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벌러덩 눕는 행동에 이번엔 애니가 자작의 허리에 올라탔다. 건방지다고 쓱 눈썹을 올리는 로저스 자작의 행동에 재빠르게 그의 물건을 잡아챘다.

물렁물렁한 기둥을 잡고 천천히 훑어 주자 올라갔던 로저스 자작의 눈썹이 내려왔다. 몸에 힘이 빠지는 것과 반대로 축 늘어졌던 물건이 점차 힘을 받았다. 애니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고 교태를 부리며 속살거렸다.

“약간 멍청하지만 외모가 빼어나요. 한 번 안기에는 그런 애가 딱이죠.”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애니는 올리비아가 이 짐승 같은 놈에게 안긴다면 만족했다. 로저스 자작은 음충맞고 저속한 구석이 있었다. 그라면 올리비아의 처음을 무자비하게 빼앗을 거다. 그러면 올리비아는 그 상실감과 비참함에 힘들어할 테고 그것만으로 애니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그 계집의 외모에 홀려 자작이 자신에게 관심을 끊는다면 그건 더 좋았다. 첩도 아니고 이렇게 필요할 때만 찾아와 성욕을 푸는 상대가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올리비아가 둘째 도련님의 품에서 행복하게 사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리 끼고돌면서 아직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제국법 때문에 생일이 지나 올리비아가 성인이 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멍청하긴. 귀족의 그 거만함 때문에 기회를 놓칠 거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선수 치면 되었다. 애지중지하던 올리비아가 다른 사람의 손을 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뒤늦게 본인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후회하겠지. 올리비아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에이든 도련님을 보는 것도 쏠쏠할 것 같았다. 그럼 모두에게 복수하는 짜릿한 결과다.

하지만 확 끌리는 것이 없는지 로저스 자작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 계집애 예쁘다니까요.”

애니는 그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툭 튀어나온 귀족적인 아랫배를 쓸고 더 내려가 방금 사정한 탓에 더러운 액체로 범벅된 성기를 망설임 없이 입에 담았다.

“으음…….”

로저스 자작의 손이 애니의 머리채를 잡아 눌렀다. 갑작스러운 압박에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애니는 행위에 열중했다. 뺨을 홀쭉이고 입술 끝을 오므리며 강하게 흡입했다.

“크윽, 정말 실력 하나는 좋다니까. 더 제대로 물어 봐.”

로저스 자작이 좋아할수록 애니는 더욱 열심히 혀를 놀렸다.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쩝쩝이는 소리를 냈다. 자작의 숨소리가 격해져 깊이 받아들이며 사정을 유도하려 했지만, 그는 애니의 머리를 사정없이 잡아채 강제로 떨어졌다.

무자비한 손길에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싫어할 게 뻔해 애니는 비명을 억누르고 자작을 응시했다.

“올라타 보아라.”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그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애니는 힘겨움을 드러내지 않고 곧바로 자작의 물건을 품었다. 저속한 미소를 짓는 남자 위에서 몸을 흔들었다. 뭘 얻으려 해도 자작이 만족해야만 들어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짓된 교성을 터트리며 황홀한 쾌락을 느끼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다리 사이를 채우고 있는 물건이 만족스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멈추지 않고 요분질 쳤다. 그렇게 한참을 헐떡거린 후 자작이 사정한 것을 느끼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출 수 있었다.

옆으로 쓰러져 늘어지자 로저스 자작이 손바닥으로 애니의 등줄기를 훑었다. 늘어져 있던 애니가 다시 몸을 세웠다.

“기회는 얼마 없어요. 그 애는 생일이 지나면 바로 남자에게 안길 거예요. 처음인 애는 관심 없으세요?”

노골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급하니 자꾸 재촉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애니의 행동에 로저스 자작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노회한 귀족들과 어울려 왔다. 이런 앙큼한 계집의 계획 따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하녀에게 굴욕감을 주고 싶은 거겠지. 하녀들 사이에도 알력이 있는 것을 안다.

같은 하녀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되어 있으니 더 큰 권력을 가진 이를 이용하려는 거다. 그리고 겸사겸사 그의 관심이 그 계집에게로 옮겨 가면 좋고. 고얀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에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계집의 말처럼 예쁘다면, 그것도 남의 손을 타기 전의 처녀를 맛볼 기회라면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예쁘더냐? 네년보다?”

본인의 미색에 자신이 있었는지 늘어져 있던 계집이 슬쩍 눈을 흘겼다. 하지만 금세 그 기색을 지우고 표정을 수습했다.

“예쁘긴 해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 예쁜 모양이구나.”

“그런 것보다 처음이란 점이 더 끌리시겠죠. 요즘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찾기 힘들걸요?”

“하긴, 너처럼 능숙한 아이도 좋지만 뭣 모르는 계집을 길들이는 재미도 있지. 그래도 생일이 안 지났다니 조금 그렇구나.”

며칠 차이지만 그 작은 차이 하나로 지탄받을 수도 있었다. 괜히 색욕을 과하게 부렸다가 귀족 사회에서 매장당하면 손해 아닌가.

“정말 며칠 안 남았어요. 일주일 정도 남은걸요. 괜히 미적거리다가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빼앗긴다니까요.”

일주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총관이 착각할 수 있는 적절한 날짜였다.

“그래. 그 계집의 이름이 뭐지?”

로저스 자작의 적극적인 반응에 그제야 애니는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달았다. 그의 가슴을 살살 긁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올리비아요. 별채 담당의 올리비아. 총관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만족스럽게 주무셨는지요?”

총관은 아침 식사를 마친 로저스 자작을 방문하여 직접 그의 기분을 살폈다. 애니 그 계집이 워낙 닳고 닳아 자작의 비위를 잘 맞춰 저번엔 흡족해했지만, 오늘은 또 다를 수 있었다. 그만큼 귀족의 기분이란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만족스러웠나 보다. 로저스 자작은 너그러이 웃고 있었다.

“총관 덕분에 늘 흡족하네. 내 그대의 수고는 기억해 두지.”

“기억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길게 끄는 로저스 자작의 말투에 할 말이 있음을 느낀 총관이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의 담담한 태도를 흘끗 본 로저스 자작은 멋쩍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성년이 되는 계집이 있다고? 그 계집이 꽤 반반하다던데…….”

하녀들의 나이를 일일이 챙기지 않는 총관은 자작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어디서 또 주워들었을까. 하여튼 욕심 많은 작자라니까. 총관이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사이에 로저스 자작의 표정에 불쾌감이 드러나자 그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죄송합니다. 저택의 아이들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해 잘 알지 못합니다. 혹여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올리비아라고 하던데, 별채에서 일하고.”

‘올리비아라면 그때 건성으로 일해 처벌받은 아이? 그 아이가 별채에서 일했나?’

총관은 애니가 수작질을 한 것을 눈치챘다. 그 계집은 다 좋은데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아서 탈이었다. 게다가 별채 아이라면 아무래도 둘째 도련님의 소관이라 함부로 불러들이기 어려웠다. 둘째 도련님이 아무리 저택 내에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백작가의 자제였다.

“힘든가?”

총관의 고민이 길어진 점에서 곤란한 기색을 읽은 로저스 자작이 퉁명스럽게 굴었다. 로저스 자작은 색욕이 많아서 그렇지 쓸 만했다. 상술이 좋은 편이라 백작가 재정 지원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보다 둘째 도련님의 화를 받는 게 나았다.

‘정 안 되면 큰 도련님과 마님에게 말씀드려 뒤를 봐달라고 하면 되겠지.’

재빠르게 계산을 끝낸 총관이 자신 있게 답했다.

“오늘도 머무시겠습니까? 그 아이를 들이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준비시키겠습니다. 오늘도 편히 머무시지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네.”

로저스 자작의 흡족한 미소를 보고 총관이 물러났다. 그는 재빨리 집무실에 가서 서류를 뒤적였다. 이미 확답은 했지만 혹여 문제가 생길까 올리비아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다. 서류를 보니 짐짓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작의 말대로 생일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침실에 밀어 넣기엔 아직 이른데. 잠시 저울질하다가 로저스 자작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녀 계집보다 귀족이 중요한 것은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조심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총관은 사람을 시켜 부르지 않고 직접 올리비아를 찾아 나섰다. 이 사실을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다.

별채를 어찌 들어가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때마침 올리비아가 시트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총총총 빨래터로 향하는 올리비아를 뒤쫓다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올리비아.”

부름에 무의식적으로 돌아보던 올리비아는 총관님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녀에게 총관님은 매우 무서운 사람이었다. 하녀장님과 함께 자신을 혼내고 처벌을 내리는 엄한 사람. 에이든 도련님은 짜증을 낼지언정 처벌하지 않아서 직접 벌을 내리는 총관님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초, 총관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올리비아가 들고 있던 시트를 놓치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에 총관도 언짢아졌다. 이래서 귀족의 시중을 제대로 들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직접 지명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을 찾아 보낼 수도 없었다. 저 정도 미색에 처음인 계집을 당장 구하긴 쉽지 않으니까.

“오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내 집무실에 들러라. 에이든 도련님에겐 알리지 말고.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부리부리한 총관의 눈빛에 올리비아는 바로 답했다. 잠시 못마땅하게 응시하던 총관이 휘적휘적 사라졌다. 총관이 사라지자 그제야 올리비아는 시트를 집어 들고 빨래터로 향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걱정이었다.

설마, 도련님이 깨 버리고 망쳐 버린 물품을 자꾸 신청해서 질책하려고 불렀나? 올리비아는 풀이 죽어 빨래를 했다.

혼날지 모른단 걱정으로 일과하는 내내 기운이 없었다. 저녁 식사 때 도련님이 주신 케이크를 먹을 때는 잠시 기운이 났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다시 우울해진 올리비아는 에이든 도련님의 잠자리를 봐 드리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캐서린을 찾았다.

“저 총관님이 부르셔서 본채에 다녀와야 해요. 혹시 도련님이 뭐 시키시면 대신 부탁 좀 드릴게요.”

딱히 총관이 직접 올리비아를 부를 일이 없었다.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에 캐서린이 인상을 구겼다.

“총관님이? 갑자기 왜?”

“모르겠어요. 혹시 최근 물품 신청이 많아서 그럴까요?”

“그건 집사님이 배정해 주시잖아. 그 일로는 아닐걸?”

생각이 없는 올리비아와 다르게 총관님과 집사님의 알력 다툼을 아는 캐서린이었다. 별채는 집사님이 직접 챙기는데 저 이유는 이상하다 싶었다.

“어쨌든 다녀올게요.”

“그래 다녀와.”

올리비아는 캐서린에게 일을 맡기고 본채의 총관 집무실을 찾았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안에는 총관님 혼자 있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

눈치를 보고 쭈뼛거리는 올리비아를 총관이 위아래로 훑었다. 일 못하는 아이는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확실히 그냥 하녀로 있기엔 아까운 외모였다. 오늘 이후로 로저스 자작이 한동안 이 아이만 찾을 게 벌써 보였다. 괜찮은 패가 생겼다.

“따라오너라.”

총관이 싸늘하게 말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한 방문 앞에 멈춰서야 올리비아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 이 안에 계신 귀족의 밤시중을 들 것이다.”

“제가요?”

말대꾸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올리비아가 소리 내 물었다. 손찌검할 것처럼 매서워지는 총관의 표정에 올리비아가 찔끔했다.

“하지만 전 아직…….”

“안다. 고작 며칠 차이 가지고 못 한다 할 것이냐? 어차피 언젠가는 할 일이니까 그냥 들어가서 잘 모셔라. 안에 계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면 혼찌검 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윽박질러 올리비아의 기를 죽인 총관이 노크 후 문을 열고 올리비아를 밀어 넣었다.

일부러 불을 켜지 않은 건지 방은 어둑해 으스스했다. 얼떨결에 방 안에 들어오게 된 올리비아는 침대에 기대 있는 남자를 보고 흠칫 놀랐다.

“진짜 미인인걸.”

남자가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흡족하게 웃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다가서는 남자의 행동에 올리비아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닫힌 문 때문에 더 물러날 곳이 없어서 올리비아가 떨었다. 남자가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살살 달래는 어조를 낸 귀족이 비식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귀한 경험을 겪게 해 주겠다.”

“앗!”

순식간에 다가온 귀족은 올리비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총관님을 생각하면 반항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무섭고 거부감이 생겨 본능적으로 팔을 잡아 뺐다.

하지만 남자의 단단한 손길은 풀리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비웃음을 단 자작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옥죄며 올리비아를 끌어당겨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꺄악!”

“이것 또한 네 일이 아니더냐. 그만 도망가고 이리 와라.”

귀족의 지적에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언젠간 겪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 경험은 없었지만 곧 이것도 빨래, 설거지, 청소와 다를 바 없이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 맞았다.

그게 하녀의 현실이었다. 에이든 도련님은 묘하게 자신을 조심히 대해서 이런 일을 걱정해 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이고 일거리를 만드는 등 괴롭히긴 했지만, 육체적 체벌은 없었다. 그는 뽀뽀 대신 케이크를 먹게 해 줄 때 빼고는 닿는 것조차 조심했다. 처음에 강간범이라 여겼던 것과 다르게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현실을 잊고 있었다. 알면서도 생기는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귀족이 다가와 올리비아가 다급하게 침대 위를 기었다. 두툼한 손이 올리비아의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제, 제발……. 하지 마세요.”

강제적으로 당겨져 치마가 말려 올라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출렁 침대가 흔들리고 귀족이 올리비아 위로 올라타 움직임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팔목이 잡혀 억눌린 상태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행동에 올리비아는 겁에 질렸다. 두려움에 눈물이 차올랐다. 커다란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순진한 얼굴에 드러난 공포심에 자작은 더 흥이 올랐다. 정말 손을 타지 않은 모양이었다. 처음이라고 해도 하녀라면 공동생활을 해서 이것저것 주워듣는 게 많아 이렇게까지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어설프게 아는 척을 하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이리 천진한 반응을 보이니 더 음심이 동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어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도 여물 만큼 여물어 풍만해 보였다. 얼른 옷을 벗겨 그 속을 보고 싶어졌다.

“말 잘 들으면 두고두고 예뻐해 주마.”

다가오는 자작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에이든은 심기가 불편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날까. 잠시 고민하다 보니 아직 올리비아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자리를 다 정리해 놓고 안 보이길래, 또 어디서 꿈지럭거리나 싶었는데 아직 안 들어왔다. 어딜 간 걸까? 멍청하게 구석에서 또 졸고 있나? 올리비아를 부르기 위해 종을 마구 울렸다.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노크를 하고 들어선 캐서린을 발견한 에이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왜 네가 와? 올리비아는?”

“본채에 갔습니다.”

까칠한 도련님의 태도에 캐서린은 최대한 조심히 답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도련님의 기운이 사나워졌다.

“누구 마음대로 내 전담 하녀를 본채에서 부르는 거야?”

“총관님이 부르셨다고 합니다.”

총관이 올리비아를 왜 부른단 말인가. 사실 올리비아의 손끝은 야무졌지만 이상하게 동료사이에선 평가가 박하단 것을 알았다. 일을 잘하지 못하는 별채 하녀를 일부러 불렀다? 갑자기 불길함이 강해졌다. 에이든은 침대를 뛰쳐나가 본채로 달려갔다.

“잭슨! 잭슨!”

본채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며 잭슨을 부르짖었다. 바로 총관을 찾아가도 되지만, 그래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집사를 뒤에 둬야 일이 빨리 진행되거나 수습이 편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잭슨!”

하지만 이 조금의 시간도 아까워 에이든은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소리치며 잭슨을 찾았다. 에이든의 난동을 발견한 시녀들이 재빨리 말을 옮겼고 일을 보던 잭슨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에이든 도련님? 도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에이든의 발광에 서둘렀는지 잭슨은 평소 단정하던 모습이 흐트러져 있었다.

“총관은 어디 있지?”

에이든은 다짜고짜 총관부터 찾았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좋지 않을 거라는 본능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잭슨은 과하게 흥분한 에이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왜 찾으십니까?”

“총관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씩씩대며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에이든의 모습에 잭슨은 시간을 끌면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을 느꼈다. 이렇게 밖에서 난리 칠 게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둘을 대면시키는 것이 낫겠다.

“지금쯤이면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서둘러.”

조급해하는 에이든의 기색에 잭슨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막 총관의 집무실에 도착해 노크하려는 찰나, 에이든이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아무리 적대하는 사이더라도 지킬 건 지키던 잭슨이었다.

황당해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선 그가 이어 하는 행동에 더 기겁했다. 에이든은 앉아 있다 일어서는 총관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제대로 맞아 퍽- 하는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든 도련님!”

봉변을 당해 정신없는 총관을 대신에 잭슨이 외쳤다. 에이든은 잭슨에겐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총관을 향해 독기를 드러냈다.

“내 하녀를 어쨌지?”

“작은 도련…….”

퍽,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두 번째로 울려 총관의 부름은 사라졌다.

“닥치고!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 내 하녀를 어쨌지?”

둘째 도련님이 들이닥치고 뺨을 맞는 순간, 총관은 자신이 잘못 계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이 묻기도 전에 그가 하녀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지 않게 도련님은 하녀를 찾아 댔다. 이렇게 냅다 뺨부터 맞을 줄은 몰랐지만.

둘째 도련님의 눈빛은 살벌했다. 두 번째엔 잘못 맞아 입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잠시 머리를 굴렸다. 하녀를 들여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을 끌어 끝나길 기다리느냐, 아니면 지금이라도 고해 치르고 있던 일을 중단시키느냐.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도련님의 주먹이 또 내리쳐 뺨이 화끈하고 고개가 또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 멍청한 머리 굴리지 말고.”

손을 털며 경고하는 도련님의 표정이 더욱 냉랭해졌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오연히 압박하는 도련님이 커 보였다. 돌아온 후부터 빈둥빈둥하기만 하고 학자라 비실비실해서 별 볼 일 없다 여겼는데 지금 이 순간은 노련한 고위 귀족의 앞에 선 것처럼 주눅이 들었다. 점차 감정이 사라지는 도련님의 표정에 오싹해져서 총관은 입을 열었다.

“2층 오른쪽 끝 방입…….”

에이든 도련님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휭하니 몸을 돌려 나갔다.

“허튼짓한 모양이군.”

경고 조로 싸늘하게 일별한 잭슨은 에이든 도련님의 뒤를 따랐다.

에이든은 불안감에 미친 듯이 뛰었다. 올리비아의 생일을 달력에 표시까지 해 가며 기다렸다. 당연히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을 거라 걱정하지 않았다. 생일 이후로만 조심하고 경계하면 될 줄 알았다.

이 집구석 사람들이 법을 지키리라 생각했던 게 오만하고 어리석었다. 자신들의 욕심이 제일 중요한 이기심으로 뒤덮인 사람들 천지란 것을 잊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보이는 광경에 에이든은 눈이 뒤집혔다. 올리비아가 한 남자의 아래에 깔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난입한 에이든 때문에 남자의 행동은 멈췄다.

“뭐야?”

“도련님!”

남자의 짜증스런 외침보다 그를 발견한 올리비아의 애절한 목소리가 더 크게 와닿았다. 에이든은 달려가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어이쿠! 누구냐? 너 뭐야? 이게 무슨 짓……억!”

남자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방해꾼에게 소리치는 순간, 에이든은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돼지 새끼의 배를 걷어찼다.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남자를 내버려 두고 올리비아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 화가 나 에이든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억지로 범하려 했는지 올리비아의 옷이 반쯤 찢어져 있었다. 에이든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어졌다.

“도, 도련님…….”

올리비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에이든의 가슴을 찢었다. 다급하게 시트로 올리비아를 감쌌다. 힘이 빠진 것인지 얌전히 앉아 있는 게 안타까웠다. 이 더러운 곳에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자.”

에이든은 올리비아를 들어 올렸다. 반항하지 않는 모습에 더 속상했다. 오늘따라 더 작게 느껴지는 몸을 껴안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뒹굴던 자작이 에이든의 발목을 잡았다.

“너! 허억, 감히 나를 때려? 감히 귀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남자가 아득바득 악을 썼다. 누구에게 맞아 본 적이 없는지 고작 발길질 한 번에 엄청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제가 당한 일에 대해 화를 냈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에이든은 발로 차서 남자의 손을 떼어 낸 후 그 손등을 강하게 짓밟았다. 감히 이 추잡한 손으로 손대기도 아까운 올리비아의 몸을 만졌을 것을 생각하니 인정사정없어졌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도착한 잭슨이 방 안의 몰골을 보고 물었다. 집사가 등장하자 로저스 자작은 더욱 악을 썼다.

“아이고, 나 죽네! 얼른 이 작자를 떼어 내라! 백작님에게 손님을 이리 굴욕적으로 대접했다고 항의……아악!”

에이든은 시끄러워서 발에 힘을 더 주었고 남자의 비명은 더욱 커졌다. 에이든은 차분한 시선을 잭슨에게 보내며 발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으득, 소리가 나고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아아악!”

“객이면 객답게 조용히 머물다 갈 것이지. 왜 주인 것에 과욕을 부리나? 주인 것을 탐한 대가는 치러야지.”

“아아아악! 네 이놈! 죽여 버리겠다! 뭐 하느냐! 당장 이놈을 떼어 내지 못하겠느냐!”

로저스 자작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당황한 집사가 말리듯 외쳤다.

“에이든 도련님!”

그제야 에이든의 정체를 짐작한 듯 남자가 악을 멈췄다. 백작가의 집사에게 도련님 소리를 듣는 인물이 누구겠는가. 백작의 혈육이겠지. 이것저것 경우의 수는 많았지만 로저스 자작은 고통이 너무 커 제대로 된 이성적인 사고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잭슨의 말림도 있었고 품 안의 올리비아의 떨림이 점점 더 강해져 에이든은 우선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알아서 수습해.”

잭슨에게 통보하고 에이든은 별채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씨발, 난 아까워서 손도 못 댔던 아이인데.’

다시금 남자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 해야 이 분이 풀릴까?

“도련님, 훌쩍…….”

“그래.”

에이든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족을 때리셨잖아요……. 큰일 나지 않을까요?”

역겨운 상황을 벗어났다는 안도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에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부조리함에 화를 내기보다 겁을 내는 것이 속상했다.

사실 일을 저지른 당사자인 에이든은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귀족을 건드렸다고 문제를 제기하면 이따위 집구석 떠나면 그만이었다. 방패가 되어 줄 이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랬기에 상관하지 않고 폭력부터 쓸 수 있었던 거였다.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래도 이 집안의 아들인걸.”

말하면서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과연 이 집안의 아들이라고 도와줄까? 이 기회에 내쳐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거짓도 술술 나왔다. 어떤 설명보다 이런 가식적인 말이 올리비아에게 위안을 줄 것을 알기 때문에 꺼낸 것뿐이다.

“정말요?”

드디어 고개가 시트 사이로 삐져나왔다. 눈물 젖은 속눈썹과 새빨갛게 변한 코끝에 에이든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저렇게 예쁜 아이를 울리다니. 에이든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그 남자를 파멸시키리라고 다시 다짐했다.

“괜찮을 거라니까.”

그러나 겉으로는 다정한 미소를 달고 올리비아를 안심시켰다.

“다행이다.”

안도하며 살짝 웃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에이든도 같이 안심했다. 기운을 쭉 빼고 늘어진 올리비아의 뒤엉킨 머리카락이라도 정돈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놀랐을 그녀를 생각하면 함부로 손을 뻗지 못했다.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에이든 도련님의 낮은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눈을 감았다. 안심이 되니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도 아까의 두려움이 남아 있어 심장이 크게 두근거리고 몸이 떨렸다. 말로 설명 못할 숨 막힘과 억눌림에 눈물을 터트렸을 때 등장한 도련님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그 남자를 떼어 내 주고 대신 화낸 것도 감사했다. 안아 들었을 때 보호받는다는 생각에 엉엉 울고 싶었다. 자신이 일을 제대로 못한 거라서 큰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크게 혼날지도 모르는데. 죄책감으로 불안감이 들었지만 머릿속을 비웠다. 도련님의 말씀을 믿고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너무 졸렸다.

‘그런데 난 언제부터 이렇게 도련님을 의지했을까?’

가물가물 올라오는 의문을 지우며 올리비아는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파들파들 떨리던 몸이 진정되고 올리비아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자 에이든은 어쭙잖게 짓고 있던 가식적인 표정을 집어 던졌다. 올리비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곤 하지만 스스로도 못 견딜 정도로 힘겨웠다.

아직도 멀었다. 이 작은 소녀 하나 챙기지 못하는 자신이 병신 같았다.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그놈이 야금야금 끝까지 파멸되어 가는 것을 봐야 할까? 아니면 올리비아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도록 순식간에 처리해야 할까?

전자는 원래 에이든의 취향이었다. 적이 고통받는 걸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벌레 같은 자식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었다. 조금 더 고민해 보자. 어차피 바로 행동하지도 못 했다. 그런 개새끼더라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에이든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올리비아의 옆에 누웠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쁘디예쁜 나의 올리비아. 순수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자신의 감정이 삐뚤어졌다는 것을 에이든은 잘 알았다.

그는 이 무지한 아이에게 완벽히 집착하고 있었다. 제 몸에 있는 애정을 밖으로 쏟아 낼 수 있다면 그 상대가 이 아이라 여겨져 온갖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에이든은 불운했다. 어머니는 아파 매일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는 어쩐지 늘 묘하게 거리를 뒀었다. 그리고 그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어떤 여인과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새어머니라고 소개했다. 충격적이게도 아버지를 똑 닮은 아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기까지 했다. 그때 에이든이 느꼈던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의 오랜 연인과 자식. 아버지와 새어머니 입장에선 열렬한 사랑의 결과였겠지만, 에이든과 그의 어머니에게는 배신이의 결과였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쌍했다. 결혼을 한 후부터 쭉 농락당하고 기만당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이든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할 줄 몰랐다. 있는 대로 그 분노를 표현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살벌해져 갔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의 태도가 에이든을 더 비참하게 했다. 자신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애정을 데리고 온 아들에게 쏟는 것을 느꼈을 땐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나중엔 그 상황이 웃기기만 했다.

이 집안에서 에이든이 있을 곳은 없었다. 태어나고 자라 온 저택이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수록 화목한 가정에 끼어든 방해자는 자신이라는 비참함뿐이었다. 믿었던 존재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묵인하는 것도 화가 났다.

에이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분노를 터트렸다. 타인의 모든 행동이 가식처럼 느껴져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같잖은 동정을 하는 것은 더 용납할 수 없었다. 에이든의 짜증이 늘자 처음엔 그를 안쓰럽게 여겨 다정히 대해 주던 식솔들도 나중엔 학을 뗐다. 이 넓은 저택에 그의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에이든은 갈수록 외로움에 사무쳤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했던 어린 나이라 그런지 그 감정에 더욱 빠져들었다.

“에이든 도련님은 정말 힘들어.”

“맞아. 나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새로 오신 마님이랑 큰 도련님이 훨씬 낫지.”

“그러니까 백작님이 예뻐하시지. 나 같아도 에이든 도련님보다 데이빗 도련님을 좋아하겠어.”

“에이든 도련님이 오죽 성격이 나쁘잖니.”

우연히 듣게 된 시녀들의 수다에 열이 뻗쳤다. 겉으론 친절한 척 웃더니 속으론 저리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감히 제깟 것들이 뭐라고 모시는 분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떤단 말인가.

특히 이복형이라는 작자를 칭찬하는 상황에 에이든이 눈이 뒤집혔다. 막 나가서 소리치려는 찰나, 작은 소녀의 빼액거리는 외침이 들렸다.

“에이든 도련님 욕하지 마!”

올리비아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시녀들을 향해 덤볐다.

“어머 어머! 너 왜 이러니?”

“에이든 도련님은 나쁘지 않아! 도련님을 욕하지 마! 나쁜 건 아줌마야! 나쁜 말하는 사람이 더 나쁜 거랬어!”

시녀의 허리에도 닿지 않을 작은 소녀였다. 쪼끄만 게 겁도 없이 씩씩대며 제 할 소리를 다 했다.

“뭐어? 아줌마? 너 이게!”

“그만해! 넌 꼬마애랑 드잡이하려고 하니? 그만하고 가자.”

올리비아의 발악에 화가 난 시녀가 손을 치켜들었지만, 다른 시녀가 말렸다. 시녀들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듯 자리를 떴고 혼자 남은 올리비아만 불만을 드러내며 발을 쾅쾅 굴렀다.

“도련님은 착해! 나쁜 아줌마! 어? 나비!”

그러다가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를 발견하고 올리비아는 언제 화냈냐는 듯 나비를 쫓아다녔다. 나비를 잡겠다고 폴짝폴짝 뛰는 멍청한 계집.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두 개를 까먹는 덜떨어진 계집. 케이크만 주면 좋다고 헤벌쭉 실없이 웃는 계집. 그녀만이 유일한 자신의 편이란 것에 무언가 북받쳐 올랐다.

그래도 누군가가 편을 들어 준다는 것에 목이 메었다. 에이든은 그날 어머니를 잃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우글우글하는 괴물들 사이에서 올리비아만이 사람이었다.

졸졸 쫓아다니기만 하는 멍청한 하녀 계집이, 자신의 사람이라고 인식된 순간이었다. 그 감정은 각인된 것처럼 절대적으로 박혀 버렸다.

* * *

올리비아는 한잠 푹 자고 눈을 떴을 때 편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무거운데도 이렇게 기분 좋게 잔 것은 처음이다. 이상하게 나른했다.

뒹굴 몸을 굴려 팔을 쭉 뻗던 올리비아가 뻣뻣하게 굳었다. 눈을 크게 깜빡이며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힉!”

에이든 도련님이 옆에 누워 있었다. 흠칫 놀라 몸을 떨다가 도련님의 침대 위라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째서 여기서 잠들었지?’

그러다 어젯밤의 사건이 떠올랐다. 손님에게 무서운 일을 당할 뻔했던 것. 그때 도련님이 와서 구해 준 일. 그리고 한숨 자라고 해서 눈을 감은 것까지. 그렇다고 진짜로 잠들어 버리다니!

감히 하녀가 도련님의 침대를 빼앗았다는 상황에 사색이 되어 일어났다. 허둥지둥 침대를 내려서는 올리비아의 귀에 에이든 도련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일어났어?”

움직임에 도련님이 깬 모양이었다. 잠이 가득 밴 목소리가 나른해 올리비아는 이상하게 오싹했다. 누군가 귓가에 바람을 분 것처럼 간질간질했다. 놀라서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러다 상황이 떠올라 뒤로 돌아 고개를 깊게 숙였다.

“도련님의 침대에서 자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것보다 고개 좀 들어 봐.”

올리비아가 민망함과 두려움에 얼굴을 들지 못하자 에이든이 직접 명령했다. 올리비아는 흘끗 고개를 들었다. 운 흔적으로 눈가가 발갰다. 에이든은 불만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계속 눈치를 보는 올리비아 때문에 표정 관리를 했다.

“울어서 눈이 부었다. 괜찮아? 어디 다른 데 아프지는 않고? 어제 혹시 맞거나 그러진 않았지?”

에이든의 말에 올리비아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맞지는 않았어도 도련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 있었을 거다. 올리비아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순간의 두려움이 생생했다. 많이 놀랐지만 다행히 맞지는 않았다.

“네. 아픈 데 없어요.”

“오기 부리지 말고, 아픈 곳 있으면 꼭 말해. 알겠어?”

“네. 그런데 진짜 안 아파요.”

자상한 도련님의 말에 올리비아는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씩 웃는 도련님을 보면서 올리비아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뒤늦은 걱정이 몰려왔다. 어제 도련님이 구해 주셔서 기뻤다. 도련님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귀족을 상하게 한 것이니 큰일이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도련님도 혼나시면 어떡하지?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도련님, 정말 괜찮을까요?”

올리비아가 머뭇거리며 묻는 게 무엇인지 에이든은 알아챘다. 불안으로 뒤범벅된 올리비아의 얼굴에 에이든은 안심하라며 웃어 보였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아니면 날 못 믿겠다는 거야?”

올리비아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짐짓 과장된 목소리로 묻자 올리비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난 어제의 도련님은 정말 멋졌다. 무조건 믿어야 했다.

“믿어요!”

올리비아가 열렬히 외치자 에이든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착하고 순진한 애를. 다시 어제 그 돼지 새끼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서늘한 감정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에이든은 올리비아에게 주의를 줬다.

“올리비아, 넌 내 전담 하녀이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의 명령은 듣지 마.”

올리비아가 곤란한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봤다. 원래 잡다한 일을 하던 그녀였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최근에도 하나둘 정도는 남의 일을 하고 있으니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에이든은 이제는 올리비아가 그리 이용당하는 것을 봐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거북해하는 것을 에이든이 모른 척 넘기자 올리비아가 작은 소리로 물어 왔다.

“하녀장님이나, 집사님이 시키시는 일도요?”

“그래. 내가 시킨 일이 있다고 하거나, 정 거절 못하겠으면 내가 불렀다고 하고 바로 나한테 와. 넌 내 명령만 듣는 거야. 알겠어?”

에이든이 강하고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올리비아는 주저했다. 일하는 게 당연한데, 일하지 말라는 도련님의 명령이 올리비아에게는 이상했다. 반면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순순히 답하지 않는 상황이 답답했다. 순진하면서 독특한 면에서 고집이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남들이 다 욕할 때도 자신의 편을 든 것이겠지.

“생각해 봐.”

꾸물거리는 올리비아의 주의를 끈 에이든이 또박또박 주지시켰다.

“넌 내 전담 하녀지?”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네가 딴 일을 하고 있으면 내가 시킨 일을 못 하지? 그러면 내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 그럼 네가 날 잘 못 돌본 거니, 일을 제대로 못한 게 되잖아.”

네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화를 낼 거야, 감정을 담아 부리부리한 눈길을 보냈더니 올리비아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엄청 다급한 일 아니면 순서대로 하면 된다는 말은 올리비아의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도련님의 이야기가 전부 맞는 것처럼 들렸다. 어쨌든 올리비아는 도련님의 전담이 맞았고, 제일 중요한 일은 도련님을 모시는 것이었으니까. 도련님의 말은 틀린 곳이 하나 없었다.

“알겠어요. 도련님 말씀만 듣겠어요.”

올리비아가 다짐하듯 제법 힘차게 말하자 그제야 에이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동안 올리비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작정이지만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다. 올리비아도 조심한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에이든은 올리비아의 당찬 음성을 듣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자, 이제 볼일 보러 가.”

“씻고, 금방 식사 챙겨 올게요.”

“그래.”

올리비아가 씻으러 총총 걸음을 옮겼다. 간단히 세수하고, 도련님의 아침 식사를 챙기러 주방으로 내려왔다. 올리비아를 발견한 별채 주방장님이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했다. 멍하니 기다리던 올리비아는 무엇인가 빠진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느낌.

찜찜한 기분으로 하나, 둘, 트레이를 채우는 음식을 보던 올리비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너무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도련님한테 감사 인사는 못 했다.

그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았다니, 이러니까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였다. 올리비아가 제 손으로 머리를 툭툭 두들기며 올라가면 꼭 도련님에게 인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제 많이 무서웠으니까. 진짜 고마웠으니까. 그냥 말로만 말고 도련님이 기뻐할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도련님이 좋아하실 일 뭐 없을까?’

도련님이 잘 웃고 다정하시긴 하지만 그만큼 화도 잘 내서 뭘 하면 좋아하실지 종잡기 힘들었다. 고민하느라 시무룩한 올리비아에게 주방장이 말했다.

“음식 식겠다. 얼른 들고 가.”

“아! 네!”

화들짝 놀라 답하며 트레이를 챙겼다. 음식을 들고 걸음을 옮기려던 중 눈에 띄는 케이크에 올리비아가 반색했다. 그 방법이 있었다. 정말 좋아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도련님이 제일 즐거워하던 그것을 하면 되겠다. 올리비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침을 들고 에이든을 찾아 걸었다.

* * *

올리비아가 침실을 나가고 에이든도 간단히 씻고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올리비아가 아침을 준비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창문을 열고 다급하게 외쳤다.

“나와 봐. 얼른.”

평소 몇 번을 외쳐야 나오던 케일럽이 오늘은 빠르게 나왔다. 어제 사건이 에이든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 돼지 새끼 조사 좀 해 와 봐.”

명령하지 말라고, 당신 부하 아니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케일럽이 답했다. 개기는 것도 해야 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고 해야 했다. 확실히 지금은 해서는 안 되는 때였다.

“어제 부탁해 두었습니다.”

싸늘한 냉기를 풀풀 날리던 에이든의 얼굴에 의외라는 기색이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빤질빤질하게 굴기에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눈치가 너무 빨라 그렇게 뻔질거렸나 보다. 케일럽의 눈치 빠른 행동에 에이든의 분노가 살짝, 아주 개미 눈물만큼 줄어들었다.

“어제 일, 보고했어?”

“부탁하려면 이유를 알려야 합니다.”

타당했기에 케일럽을 타박하지 않았다. 저쪽 정보 라인은 훌륭했다. 돼지 새끼의 인생을 탈탈 털어 빠르게 보내올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 줘야 할까? 아직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돼지 새끼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 서서히 피를 말릴까? 아니면 순식간에 세상에서 지울까?”

“전자가 처리하는 방식 아니십니까?”

“그렇지. 난 그걸 즐겨. 그런데 올리비아는 돼지 새끼를 상상도 하기 싫을 거란 말이지. 살아 있으면 소문을 듣게 될지 모르잖아. 그때마다 놀라면 어떻게 해?”

진지한 에이든의 고뇌에 케일럽은 욕설을 삼켰다. 별채에 가둬 두고 다른 하녀도 잘 만나지 못하게 하는 주제에 무슨 소문 걱정을 한단 말인가. 저 자기중심적인, 아니 하녀 중심적인 생각을 케일럽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식사 가져왔어요.”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케일럽은 재빨리 몸을 숨겼고 에이든은 사납던 표정을 숨겼다. 올리비아가 들어와 식사를 내려놓았다. 아침을 빠르게 비운 에이든이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를 올리비아를 향해 밀었다.

“먹어.”

사실 에이든은 뽀뽀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올리비아가 어젯밤의 일을 상기할까 두려워 말하지 못했다. 몹쓸 기억이 빨리 옅어지길 빌었다. 에이든이 뽀뽀를 요구하지 않자 올리비아는 선뜻 케이크에 손을 뻗지 못했다.

“괜찮으니까. 먹어.”

다시 한번 에이든이 말하고 나서야 올리비아가 야금야금 케이크를 떠먹었다. 세상을 다 얻은 행복한 표정이 올리비아의 얼굴에 떠올랐다. 에이든도 같이 웃었다. 평소와 똑같은, 그런 하루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올리비아가 케이크를 싹 비우자 에이든도 식사에서 아예 손을 떼었다. 식기를 챙기던 올리비아가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왜? 할 말 있어?”

재촉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에이든은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올리비아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에이든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그것보다 올리비아의 행동이 더 재빨랐다.

쪽, 하고 뺨에 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에이든은 경직되었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올리비아가 입을 맞췄어? 정말?’

갑작스러운 기습에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이성적인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올리비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제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짝 뺨을 붉히며 도망치듯 나갔다. 홀로 남은 에이든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올리비아가 자발적으로 키스한 것이 맞아? 물물 교환이 아니라 그냥 한 거 맞냐고!’

에이든의 몸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한 순간이란 말인가. 늘 받던 키스와 차원이 달랐다.

저 둔한 올리비아가! 먼저 키스를 했다! 대가성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키스!

에이든이 제 뺨을 감싸고 천천히 소파 위로 쓰러졌다. 말랑하고 달큰한 입술이 가슴을 눌러 심장이 짓무를 것 같았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어느새 돌아온 케일럽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격에 젖은 에이든을 일깨웠다. 못 볼 꼴을 본다는 시선이었고, 음성 또한 이죽거렸으나 에이든은 아무렇지 않았다.

“좋아서 미치겠어.”

에이든의 목소리는 황홀했다.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뻐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고작 뽀뽀 하나에 그리 좋아하십니까?”

“고작이라니! 올리비아가 직접 한 거야!”

에이든이 강하게 반박했다. 제가 증명한 세기의 이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 성토하는 것처럼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에이든의 행동에 케일럽은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은 깐죽거려도 될 때였다.

“하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 바쁘고, 뽀뽀 하나에 열광하며 꼬리를 흔드는군요. 아주 개가 따로 없습니다. 저 하녀가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케일럽은 어이가 없어 줄줄 쏟아 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좋아 죽으려던 에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꼴 보기 싫던 상황이 쌓이다 보니 자제하지 못하고 입을 털어 버리고 말았다.

케일럽과 에이든은 완벽한 상하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는 케일럽이 에이든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를 넘어선 빈정거림이었다. 케일럽이 실수에 자책하고 있는데 에이든이 그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나를 뭘로 본 거야?”

싸늘한 그 음성에 케일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긴장했다. 그때 에이든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가 짖기만 할 것 같아? 난 올리비아가 해 달라면 구르기도 할 수 있어.”

에이든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케일럽은 진심으로 느꼈다. 에이든은 성질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완벽한 개새끼였다. 미친놈 같으니라고.

* * *

에이든 도련님이 아무 일 없을 거라 장담을 하셨지만 올리비아는 언제든 불호령을 들을 각오를 했다. 평소와 같이 별채 일을 하면서 총관님이 찾아오셔서 역정을 내시지 않을까 걱정하며 지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더 흘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사실을 잊을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안 좋은 기억은 차차 올리비아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우웅, 햇볕 냄새. 좋아라.”

빨랫감을 걷으며 천에 밴 따스한 냄새가 좋아 올리비아가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빨랫감을 내려놓고 구르기라도 할 기세였다. 에이든은 위에서 창문으로 올리비아가 쫄랑쫄랑 돌아오는 것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그는 가능한 한 계속 올리비아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그런데 에이든도 놀랄 정도로 본채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인물이든, 새어머니든, 총관이든, 누군가는 나서서 항의할 줄 알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무반응이었다.

‘돼지 새끼가 아직도 저택에 머무르며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것 같던데, 어째서 아무런 일도 없는 것일까? 하다못해 불러서 사건의 연유라도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본채가 잠잠한 일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에이든은 먼저 찾아가지는 않았다. 사고를 쳤음에도 에이든은 자신이 아쉬운 쪽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돼지 새끼와의 혐오스러운 사건은 전부 잊은 듯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냈다. 끔찍한 기억이었을 텐데 해맑기만 했다. 아둔한 것이 이럴 땐 도움이 된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올리비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은 후로 다시 뽀뽀를 받지 못했음에도 에이든은 행복하기만 했다.

“멍청해서 참 귀여워. 그렇지?”

뒤에서 접근하는 케일럽에게 에이든이 물었다.

‘당신 눈엔 무엇인들 안 예쁘겠습니까? 코딱지를 파서 먹어도 사랑스러워 죽으려 하겠지요.’

남에게 취향을 강요하는 에이든의 행동에 케일럽은 질색을 했지만 참았다. 며칠 전 대화로 저쪽은 손쓸 수 없는 개새끼로 판명 나지 않았던가. 자존심도 없는지 당당하게 구르기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에 기가 막혔다. 미친놈이다. 미친놈은 그냥 미친놈으로 여기면 된다.

“여기 서류입니다.”

케일럽은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건넸다. 싱글벙글 멍청이처럼 헤벌쭉하던 에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사흘이라, 예상보다 빨라서 기뻤다.

‘어떻게 피를 말려 줘야 할까.’

에이든은 서늘한 미소를 보이며 문서를 받아 들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정보가 있어?”

“전 모릅니다. 다만, 저쪽에서 투입한 인원이 꽤 많다고 합니다. 종일 밀착 감시하느라 본채 쪽도 요 며칠 소란스러웠습니다. 못 느끼셨습니까?”

“그걸 느꼈으면 내가 기사였지.”

종이를 팔랑거리며 당당히 말하는 에이든의 태도에 케일럽은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했다. 진짜 대화하기 성질나는 족속이다. 그래서 케일럽은 침묵하길 택했다. 에이든이 천천히 보고서를 읽었다.

역시 이쪽의 보고서는 훌륭했다. 실망하게 하지 않을 정보들이 한가득했다. 현재의 비리, 부정, 돼지 새끼의 어린 시절 흑역사까지 전부 들어 있었다. 어느 하나를 터트려도 돼지 새끼는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거였다. 속칭, 쪽팔려서.

“하, 재밌네?”

도중에 웃기는 정보가 들어 있었다. 어쩐지 의심스럽더라니. 분명히 올리비아는 에이든의 행동반경 안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돼지 새끼가 올리비아를 눈여겨봤다면, 그런 돼지 새끼의 모습이 에이든의 눈에도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에이든이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허무하게 당할 뻔했다. 언제 돼지 새끼가 올리비아를 보았을까? 그에 대한 의문이 적혀 있었다. 애니. 그 주제도 모르는 하녀가 문제였다.

돼지 새끼가 어제 애니를 불러 푸닥거리를 했다고 한다. 네년이 나를 죽이려 이따위로 수작질을 부렸냐고 외치며 발악을 했단다. 얼마나 개처럼 맞았는지 애니는 지금도 앓아누워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귀족의 심기를 어지럽혔단 이유로 하녀 숙소 지하에 갇혔단다.

별채 소속이라 하녀가 없어졌으면 당연히 에이든이 알아야 했지만, 원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인물이었기에 에이든은 그녀가 없는지도 몰랐었다.

애니가 이미 돼지 새끼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해도 에이든은 봐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하녀 숙소 지하에 갇혀 있는 애니라는 계집 몰래 빼내 봐.”

“어디에 쓰시려고요?”

케일럽의 질문에 에이든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그 낯짝을 긁어 버리고 보는 곳에서 개처럼 굴리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은 참는 게 좋겠지.

에이든은 스스로가 인정한 개새끼라고 해도, 올리비아 앞에서는 착하고 멋진 도련님이고 싶었다. 최대한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처리해야 한다.

“헤일론 연락 닿지? 그쪽에 넘겨.”

에이든의 입가에 화사하고 요사한 웃음이 걸려 케일럽은 움찔했다. 이미 로저스 자작에게 뼈가 부러지도록 맞았는데, 에이든은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헤일론은 상인이었다. 일반적인 상인이 아니라 배를 타고 다니며 먼 대륙의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다. 그러다 보니 헤일론은 대부분의 시간을 배에서 지냈다. 당연히 그의 직원들도 육지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 헤일론에게 팔리면 애니는 다신 땅을 밟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망망대해 위의 배는 도망갈 곳도 없었다. 어리석은 수작을 부린 죄로 그 정도 벌은 받아야 했다.

“특별히 부탁한다고 전해 줘.”

에이든의 말에 케일럽은 잠시 애니에게 안쓰러움이 생겼지만 곧 지웠다. 이유가 과욕이든, 질투든 제 손으로 만들어 낸 실수였다. 동정할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빼돌리겠습니다.”

“그리고 돼지 새끼가 옆 나라랑 무역으로 돈을 버네?”

에이든의 손가락이 톡톡 불쾌하다는 듯 종이를 두드렸다.

“그건 위쪽에서 이미 손썼다고 합니다.”

비서도 아닌데, 왜 이리 답해야 하는지 아리송해하면서도 케일럽은 착실하게 답했다. 로저스 자작은 돌연히 옆 나라에서 거래를 금지하겠다는 통보를 받을 거다. 갑자기 물건을 사지도, 팔지도 못하니 상단이 망하는 것은 순식간일 거다.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처리하셨다니.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그렇지?”

케일럽은 에이든에게서 처음으로 모시는 분을 칭찬하는 말을 들었다. 원래 대단하신 분이라고, 네놈이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을 꾹 참았다. 솔직히 부탁하지 않아도 위에서 처리하는 점도 불만이었다.

‘이건 차별이고, 편애다! 꼭 건의할 테다!’

“어라? 웃기는 부분이 있네?”

에이든이 지적하는 부분을 확인하고 케일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꾸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에이든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돼지 새끼에 대한 분노와는 다른 불쾌감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이런 행동을 했다고 하니 석연치 않았다. 에이든의 상념을 방해한 것은 노크 소리였다. 에이든이 서류를 케일럽에게 넘겼다. 그가 몸을 감추는 것을 확인하고 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잭슨이었다. 뚱한 에이든에게 잭슨이 용건을 꺼냈다.

“그 일 말입니다. 백작님이 자작에게 적당한 금액을 주고 합의하기로 했습니다.”

방금 보고서에서 읽었던 내용이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의문은 어째서 아버지라는 인물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의 편을 들었냐? 이거다.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그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럼 그냥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보기에도 조금 웃겼다.

“그놈이 소란 피우지는 않았고?”

“백작님이 나서 주셨습니다.”

사실 잭슨이 이제야 에이든에게 보고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자작이 우겨서. 그가 에이든에게 꼭 직접 사죄를 받아야겠다고 난리를 치며 버텨서 일 마무리가 오래 걸렸다.

백작 입장에서는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었다면 에이든을 불러 형식적이나마 사과를 시키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백작은 에이든을 찾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찜찜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에이든은 그 일에 대한 관심을 껐다. 다른 게 더 중요했다.

“그럼 그놈 오늘 떠나겠네?”

“네. 방금 합의했으니 곧 떠날 겁니다.”

“알았어. 나가 봐.”

이미 케일럽의 보고서를 통해 다 알았기 때문에 에이든은 잭슨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돼지 새끼가 멀리 떠나기 전에 케일럽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어떤 고통을 줄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의 통증은 전부 주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에 빠진 에이든을 잭슨이 복잡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돌아섰다. 문을 닫고 나니 착잡했다.

집사 생활 수십 년이다. 모시는 분이 하녀를 여자로 보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처음 그 애를 전담 하녀로 쓴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하녀를 구하겠다고 귀족에게 발길질까지 할 정도면 확실했다.

하필 그 맹한 것이라니. 약삭빠른 계집이라면 돈 좀 쥐여 내보내면 될 텐데 올리비아는 그런 성격과 거리가 멀어 힘들었다. 잭슨이 시름에 차 한숨을 내뱉는데, 제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큰 물품을 나르는 올리비아가 그의 눈에 띄었다.

“이리 좀 와라.”

뒤늦게 집사님을 발견한 올리비아가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작게 말했다.

“저 도련님이 시키신 일 해야 하는데요…….”

머뭇거리고 눈치를 보면서 경계하는 태도를 잭슨도 이해했다. 저 어린 것이 총관의 명령을 따라 자발적으로 귀족의 침대로 뛰어들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에이든 도련님이 얼마나 애지중지 아껴 왔는지도.

“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만 하려는 거야.”

일을 시키지 않는다는 소리에 올리비아가 순순히 뒤따라왔다. 잭슨은 조용한 방 안에 들어서서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도련님의 전담 하녀 아니더냐. 일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 네가 정식으로 시중드는 법을 배운 적 없으니 내가 확인해야겠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나시면 식사를 가져다드리고…….”

집사님의 무서운 표정에 올리비아는 순순히 다 불었다. 무슨 일을 했는지 물어보는데 숨기는 것이 더 이상했다. 올리비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잭슨의 얼굴이 구겨졌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매끼를 챙기는 것 빼고는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도련님 옆에서 일하는 하녀와 다를 바 없었다. 거기다 숨기는 일이 있는 것 같아 다그치며 캐물었더니 케이크를 얻어먹는 대신 뽀뽀를 해 준단다.

한숨이 나왔다. 에이든 도련님이 이 아이를 얼마나 끼고도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챙기는 것을 보면 한번 품는다고 사그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도련님이 진지하시다면 차라리 이런 맹한 아이가 나을 수도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지는 않을 테니까.

“올리비아, 제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구나! 앞으로 내가 알려 준 일도 해라.”

잭슨은 억지로 둘 사이를 갈라놓기보다 도련님에게 붙여 놓기로 했다. 하녀 하나를 평생 품는 것은 흠이 아니지만, 어릴 적처럼 개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면 그건 가문을 이어받는 데 흠이 되었다. 잭슨은 올리비아가 도련님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주의를 시켰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은…….”

듣지 않으면 혼낼 것 같은 집사님의 말에 올리비아는 그냥 들었다. 그러다 집사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여태까지 자신이 도련님 시중을 제대로 들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고, 마지막엔 적극적으로 경청했다. 올리비아도 제대로 도련님을 보필하고 싶었다.

* * *

에이든은 기분이 좋았다. 싫다는 케일럽을 협박해 강도 짓을 시킨 터라 더욱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로저스 자작은 강도에게 습격을 당할 것이다. 그때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 로저스 자작은 다시는 성기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거다.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이란 말인가.

올리비아에게도 별일 없고, 집사의 보고만 조금 찜찜했을 뿐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도련님, 욕조에 물 받아 놨습니다.”

저녁을 먹고 잠시 책을 보다가 올리비아의 알림에 욕실로 향했다. 완벽한 하루이니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가 누우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이든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조 안에 들어갔다.

‘기사니까 제대로 터트리겠지?’

저쪽에 있을 재미난 일을 상상하느라 정신이 없던 에이든은 어느새 욕실에 들어와 있는 올리비아를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라 미끄러졌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빠지자 코로 물이 들어오고 정신이 혼미했다.

올리비아가 이 안에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잘못 본 거라 여겨졌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을 때 올리비아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살결이 비치는 얇은 올리비아의 옷에 에이든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왜 저런 자극적인 모습으로 있는 거지? 물 때문에 기침이 나오고 눈이 따가운 것은 뒷전이다. 당황한 에이든이 빽 소리 질렀다.

“야! 갑자기 왜 들어와!”

“왜긴요? 도련님 목욕 시중들어 드리겠습니다.”

방싯방싯 미소를 달고 있는 올리비아의 천진한 얼굴에 에이든이 입을 딱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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