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케이크 한 포크, 뽀뽀 한 조각. (5/19)

4. 케이크 한 포크, 뽀뽀 한 조각.

간단한 수작질로 올리비아를 골탕 먹인 애니도 솔직히 올리비아가 지하 창고에 갇힐 줄은 몰랐다. 그녀도 그것까지 바랐던 것은 아니라 찜찜한 마음이 생겼지만 간단히 털어 버렸다.

올리비아는 구박받고, 혼나는 게 일상이다. 그 애는 그런 것쯤은 익숙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애니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언제나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최고로 중요했다.

애니는 올리비아의 무능력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본채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둔한 아이를 돌보며 이 드넓은 별채를 혼자 가꾼 거니까.

하지만 총관님이 오히려 그 점을 치하하며 별채를 담당하라 일러 분노에 치를 떨었다. 제 노력이 허사가 된 것이 짜증이었다. 불만 가득한 마음을 숨기고 별채에서 둘째 도련님이 오길 기다렸다.

도련님이 성질만 더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는데 집사님의 안내를 받아 걸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애니는 감탄을 삼켰다. 그건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분이 둘째 도련님인가 봐요.”

“어머, 되게 예쁘다.”

“남자 맞아? 와!”

작게 수군거리는 말에 애니도 동의했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생긴 남자는 처음이었다. 똑바로 바라보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홀리듯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슬쩍 무심한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애니는 심장이 뛰고 뺨이 달아올랐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젊고 예쁜 남자를 제 눈으로 보니 애니의 마음이 들떴다. 아무리 백작가의 골칫덩이라 해도 어쨌든 백작님은 둘째 도련님에게 별채를 내주었다. 그를 자식으로 인정은 한다는 소리였다. 완전히 내쳐지지 않는다면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는 인물이 둘째 도련님이다.

호색한의 늙다리 귀족을 상대하는 것보다 저 순진한 도련님을 꾀기가 더 쉬울지 몰랐다. 좌천되어 인생 더럽게 꼬이는 줄 알았더니만 황금 동아줄이다. 인생 역전의 기회가 제대로 왔다. 이러려고 개처럼 굴렀나 보다. 애니는 부푼 기대감을 가슴에 품었다.

가까이 다가와서 내려 보는 도련님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냉정했다.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시린 기운이었다. 애니는 지금은 저런 시선이 당연하다 여겼다. 노예를 따스한 눈빛으로 보는 귀족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곧 안달복달하게 해 주리라. 둘째 도련님은 7년 동안 공부만 한 샌님이었다. 어디 여자 경험이나 제대로 해 봤을까? 온갖 농락을 당하며 쌓아 온 기술로 순진한 도련님을 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애니는 자신 있었다. 자신의 엉덩이만 보면 발정 난 개새끼처럼 헥헥거리며 꽁무니를 쫓아다니게 해 줄 거다.

“이들이 에이든 도련님을 모실 겁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제게 언질을 주십시오. 인사들 해라. 에이든 도련님이시다.”

집사님의 명령에 별채 담당 중 최고로 선임인 애니가 제일 먼저 나섰다. 제 매력을 과시하면서 인사를 하려던 그녀는 몸을 움찔 떨었다. 아직 대화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도련님이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니는 당혹스러움으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다리가 덜덜 떨렸다. 어째서 저런 눈으로 보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7년간 어떻게 버텨 온 것일까?’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눈앞에 없다는 것만으로 이리 짜증 날 수 있는 게 놀라웠다. 머리 굴리는 것 하나로 살아온 그인데, 이성적인 생각보다 감정이 격하게 터져 판단을 흐리게 했다.

저 여자는 별채를 청소하는 내내 빈둥거리며 올리비아를 시켜 먹기만 했지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래라저래라 말도 명령조로 얼마나 재수 없게 하는지 에이든은 숨어서 지켜보다 튀어 나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하녀만 남아 있고 어여쁜 올리비아는 없었다.

‘다음 날 볼 거라고 하루 찾아오지 않았더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다니!’

에이든은 하녀의 뺨을 후려치고 올리비아를 어디에 숨겼는지 당장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에이든 도련님? 무슨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에이든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잭슨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늙어 탁하고 흐릿해진 눈이 에이든을 샅샅이 살폈다. 관찰당하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기서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올리비아를 원한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의 약점임을 알려서는 안 됐다. 늙은 생강이 매운 법이다. 에이든은 잭슨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을 잘 알았고, 그 욕심 때문에 자신의 옆에 올리비아가 있는 것을 용납 못 할 거란 것도 잘 알았다. 다른 이들의 욕망에 올리비아가 힘들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우선 들어가지.”

에이든이 움직이자 다들 조용히 뒤따랐다. 모실 분의 날카로움에 모두 숨을 죽였다. 첫날부터 이러니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응접실로 들어간 에이든이 큰 몸짓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를 준비할까요?”

“됐어.”

잭슨의 질문을 딱 잘라 냈다. 그리고 일부러 미간을 찌푸려 짜증을 나타냈다. 철부지 귀족 도련님의 투정처럼 행동했다.

“마음에 안 들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에이든은 고개 숙이고 있는 하녀들을 일부러 천천히 응시한 후 보란 듯이 혀를 찼다. 그 신호를 알아챈 잭슨이 되물었다.

“하녀들이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그래.”

즉답에 고개 숙인 하녀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혹 들어오실 때 자신들끼리 속삭인 걸 들켰을까? 아니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고 거리상 절대 들킬 일은 없었다. 그러면 어떤 행동에 심기가 거슬린 걸까?

각자 자신들의 기억을 되짚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도련님은 이미 불편함을 나타냈다. 이어질 도련님의 말을 다들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 잠시 하녀들을 바라본 집사가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못생겼잖아.”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뭐 이런 병신 같은 일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못생겼다는 말을 들은 하녀들이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자기가 여자보다 예쁘면 그만인가. 정상은 아닌 도련님이다. 이러니 백작님에게 버림받았지.

잭슨도 에이든의 말에 당황해 헛기침했다. 귀족들이 아랫것의 얼굴을 따지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대부분 침실 노예나, 귀부인을 따라다니는 전담 시녀지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의 외모를 따지지는 않았다.

‘설마, 이들 전부를 침실로 불러들이려고 그러시는 건가?’

잭슨은 도련님의 기행에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별채를 청소하는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들입니다. 외모는 중요치 않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보다 못생긴 이들의 시중을 받으라는 거야?”

하지만 한 점 부끄럼 없는 에이든의 당당한 질문에 다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말투에서 어찌 사람이 못생길 수 있지? 라는 의문이 드러나는 것 같아 하녀들은 열불이 터졌다.

귀족들의 정신이 이상하단 건 알았지만 이런 기이한 인물은 또 처음이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자기 외모를 최고로 친다. 물론 도련님은 예쁘다. 아무리 예뻐도 예쁜 걸 알고 잘난 척하는 사람은 짜증이 났다. 이것만 봐도 앞으로가 고달파질 게 뻔히 보였다. 그리고 저런 말을 하는 저 재수 없는 도련님이 진짜 자기들보다 더 예뻐서도 화가 났다.

“크흠, 그럼 제가 다른 아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뚱한 에이든의 표정에서 그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알아챈 잭슨이 상황을 정리했다. 하녀들에게 눈짓을 해 우선 나가 보라 일렀다. 하녀들이 전부 물러나자 집사도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에이든을 떠보았다.

“그런데 전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응. 전부……. 아니다. 한 명 빼고. 붉은 머리에 눈 옆에 점 있던 하녀는 내버려 두고.”

잭슨은 에이든이 말하는 이가 애니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여우 같은 계집이 벌써 우리 도련님을 홀렸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도련님의 표정이 뚱하니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애니입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딱히 그건 아니고.”

이번에도 무성의한 음성이었고 잭슨은 도련님의 심기를 알기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개중에 제일 미색이 빼어난 하녀가 애니였다. 잭슨은 급격히 긴장되었다. 도련님의 눈이 여간 높은 게 아니다. 하녀 중에서도 정말 빼어난 이들만 데려와야 할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잭슨이 서두르는 티를 내지 않으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에이든은 마음이 놓였다. 필시 다른 하녀들을 데리러 간 터. 처음 데려오는 이들 틈에 올리비아가 없어도 계속 퇴짜를 놓다 보면 언젠가는 올 것이다.

이 우스운 방법이 통해서 정말 다행이다. 잭슨이 더 질질 끌었으면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에이든은 고민이었다. 하녀들에게 자기애에 빠진 괴이한 성격으로 찍히겠지만, 남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에이든은 상관없었다.

에이든이 애니를 남긴 것은 잭슨의 예상과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꼴도 보기 싫어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아예 처박아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옆에 두고 계속해서 괴롭혀 줘야 하녀도 후회하겠지 싶어서 남겨 뒀다.

“도련님 다른 하녀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에이든이 소파에서 빈둥거리는 동안 잭슨이 새로운 이들을 모아왔다. 잭슨의 뒤에서 슬쩍 앙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니가 거슬렸어도 무시했다. 벌써 괴롭혀서 아예 도망가면 재미없으니까.

새로 온 하녀들을 훑어보고 에이든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에도 올리비아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아이가 없습니까?”

“어.”

“전부요?”

“어.”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에이든의 반응에 잭슨이 다시 나갔다. 그게 몇 번 반복되었고, 에이든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이 정도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누가 보아도 올리비아는 예뻤고, 외모로 사람을 뽑을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위치였다. 세상에는 올리비아보다 예쁜 사람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일 미인인 그녀가. 딱 한 번만 더 기다려 보고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내고 말겠다. 약점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다른 이들이 올리비아를 괴롭히려 들어도 상관없었다. 온종일 자신의 옆에 올리비아를 끼고 있으면 되었다. 에이든의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에이든이 씩씩대는 동안, 밖에선 나름대로 난리가 났다. 도련님이 돌아온 첫날부터 괴상한 이유로 제대로 뿔내고 있었다. 하녀들을 통해 나름 예쁘다는 아이들만 골라서 데려오는데 갈수록 도련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덩달아 잭슨의 분위기도 험악해졌고 하녀들은 눈치만 보았다.

“나보다 같이 지내는 너희들이 더 잘 알겠지. 도련님 마음에 들 만한 아이를 말해 보아라.”

집사님의 물음에 하녀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못생겼다 평가된 것도 서러운데 대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도련님의 괴상한 취향 때문에 다들 일도 못 하고 눈치를 봐야 했다. 그저 그런대로 예쁘다 생각되는 아이들 다 퇴짜를 맞았다. 더 괜찮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들 고민하는 그때 벌서기 싫은 하녀 중 하나가 작은 목소리를 냈다.

“올리비아요.”

그걸 들은 애니가 목소리를 낸 하녀를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모른 척할 뿐이었다. 애니의 화풀이를 당하는 것보다 이러고 있는 게 더 싫었다.

“올리비아? 그러고 보니 그런 아이가 있었지. 그럼, 그 애는 왜 오지 않았지? 내가 다 데려오라 하지 않았느냐.”

집사의 질책에 애니가 곤란한 목소리로 답했다.

“현재 하녀장님의 명으로 벌을 받고 있습니다.”

“벌? 무슨 벌?”

총관과 하녀장이 직접 내린 벌이라 잭슨은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사람에게 벌을 줬다는 사실에 그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총관이고 하녀장이고 마님과 큰 도련님을 믿고 방만하게 구는 게 불만이었다. 이 집안을 돌보는 것은 집사인 자신의 일인데! 집사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물들자 애니는 긴장하며 설명했다.

“그 아이가 별채 청소를 하다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숙소 지하 창고에 갇혔습니다. 저희는 하녀장님의 허락 없이 그 애를 꺼낼 수 없습니다.”

“내가 하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위치더냐? 당장 데려와라!”

하녀장님의 허락 소리에 집사는 더욱 분노해 바로 데려오라 소리쳤다. 하녀들이 자신보다 하녀장의 눈치를 보는 꼴을 보니 화가 났다. 애니는 상황이 이렇게 된 게 짜증 났지만, 잘못 나섰다간 일이 커질 수도 있음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물러났다.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숙소로 걸어가면서 애니는 초조했다. 올리비아 그 계집애가 엉뚱한 소리 못 하게 입단속을 제대로 시켜야 했다. 그녀는 지하 창고로 가 자물쇠를 열었다. 문을 열면 뛰쳐나올 줄 알았던 올리비아가 보이지 않았다.

“야! 어디 있어?”

안쪽을 조금 둘러보니 어디서 다 낡아 빠진 모포를 구해 그 위에 누워 잠든 올리비아가 보였다. 밤새 울었는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저 상태로 도련님의 마음에 들려나 모르겠다.

아니다. 차라리 들지 않는 게 나았다. 저 계집이 옆에 있으면 될 일도 안 되니 그냥 도련님의 눈 밖에 나서 올리비아가 다신 별채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니는 발로 잠든 올리비아를 툭툭 건드렸다.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으……으음?”

“시간 없어 일어나!”

애니가 버럭 소리치자 올리비아는 번쩍 눈을 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서 정신이 멍해 보였다. 애니는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시간 없어 일어나. 집사님이 찾으셔.”

올리비아는 너무 울어 멍한 머리로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했다. 애니가 잡아끌어 따라나섰다가 햇빛을 보니 눈이 부셔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번뜩 사태가 파악되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저한테…….”

“조용히 해. 지금 비상사태야.”

짱알거리는 말이 듣기 싫은 애니가 올리비아의 말을 끊었다. 정색하며 비상사태 운운하니 멍청한 계집이 더 떠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사과할 생각도, 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올리비아 따위에게 사과한다고.

“비상사태라니요?”

비상사태가 터지면 백작가 전체가 들썩인다는 것을 아는 올리비아가 물었다. 집사님과 총관님도 화내고, 하녀장님도 심상치 않고, 시녀와 하녀들도 예민해졌다. 모든 사람이 날카로워지는 게 비상사태라 올리비아도 그 상황이 싫었다. 애니는 그냥 대충 설명했다.

“잘 들어. 진짜 비상사태야. 방금 둘째 도련님이 오셨어. 그런데 하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난리 쳐서 집사님이 화났어. 지금부터 둘째 도련님 앞에 갈 거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둘째 도련님한테 찍히면 큰일 나는 거야. 알겠어?”

다다다 쏘아지는 애니의 말을 올리비아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 도련님이 왜 화를 냈는지도, 알아서 뭘 잘 처신하라는 것인지도. 다만 마지막에 찍히면 큰일 난다는 위협적인 말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는 애가 멍청해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며 올리비아를 별채로 끌고 갔다. 도중에 수돗가에 들러 얼굴을 대충 씻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눈가가 퉁퉁 부어 운 티가 났지만 시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집사님 여기 올리비아를 데려왔습니다.”

잭슨은 꾸벅 인사하는 올리비아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았다. 꼴이 왜 이러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도 벌을 받았는데 상태가 괜찮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아 체념을 했다. 이거 데려가서 더 혼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일 다른 사람을 구해 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잭슨은 올리비아를 이끌었다.

“따라와라.”

올리비아는 그저 얼떨떨하고 긴장되어 어찌할 줄 몰랐다. 순식간에 지하에 갇히고 실컷 울다 깼더니 밖으로 끌려 나와 둘째 도련님한테 간단다. 그리고 미움받지 않게 조심하란다. 그냥 숨죽이고 눈치만 봤다. 집사님의 뒤를 아주 조심히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에이든 도련님 새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일 새로 구해 보겠습니다.”

올리비아는 집사님이 말하는 중에 흘끗 도련님을 살폈다. 어떤 분이기에 이렇게 난리가 났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올리비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저 사람은 강간범?’

둘째 도련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던 강간범이 있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지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놀라서 어쩔 줄 모를 때 강간범이 벌떡 일어났다. 화가 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에 강간범이라고 소리쳤던 걸로 혼나는 건가 싶어서 올리비아는 울상이 되었다. 그때 강간범이 뜻밖의 질문을 했다.

“너 울었어?”

어쩐지 굉장히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라 올리비아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울었어?”

다그치는 물음에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언가 덧붙이거나 우는소리 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상대가 불쾌감을 내보였을 땐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게 최고였다.

“울지 않았어요.”

“어딜 봐도 울었는데 울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

에이든은 머리가 터져 버릴 정도로 화가 났다. 눈이 퉁퉁 부어서 형태도 달라졌는데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한다.

‘누가 감히 저리 만들었단 말인가!’

씩씩거리며 에이든이 다가서자 올리비아는 주춤주춤 자꾸 물러섰다. 솔직히 올리비아는 강간범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전에 강간범이라 말한 부분이 아니라 울었다는 점에서 혼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오늘따라 많이 서러웠다. 자꾸 사람들이 제게 화만 낸다. 자신은 창고에 갇혀 있던 것밖에 없는데. 창고에 갇힌 것도 억울한데. 서러움이 강해지자 올리비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러자 잭슨이 나서서 에이든을 불렀다.

“에이든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어째 에이든 도련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녀 따위가 울었다고 저리 열을 내는 것이 이상했다. 진한 의문을 담은 잭슨의 목소리에 에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잭슨도 신경은 쓰이지만, 그보다 자신의 행동이 올리비아를 더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에이든은 느꼈다. 눈을 크게 뜨고 오들거리는 것이 겁먹은 토끼가 따로 없다. 이 와중에 예뻐서 입 맞추고 싶고,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이 귀여워 앙 물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겁에 질린 사람을 더 놀라게 할 순 없었다. 정신 차린 에이든이 다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뭐야? 백작가에서 사람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왜 하녀가 울면서 들어와? 우리가 사람을 핍박하는 가문인가? 남들이 보면 뭐라 그러겠어?”

방금의 불같은 태도가 거짓인 것처럼 에이든은 무심하면서 짜증을 담은 얼굴을 했다. 올리비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백작가의 명예를 지적했다.

“핍박이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잭슨이 강하게 부정한 후 깊게 허리 숙여 사죄했다. 에이든 도련님이 ‘우리’를 운운하자 그는 죄스러우면서도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든 도련님이 백작가의 위신을 신경 쓰는 모양새가 기뻤다. 확실히 에이든 도련님이 현자의 숲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성숙해진 모양이었다. 자신밖에 모르고 마냥 어리던 도련님이 그런 것도 신경 쓸 줄 알고.

“무슨 사정?”

에이든 도련님의 질문에 잭슨은 얼른 주제넘은 감정을 수습했다.

“하녀장이 내린 지시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무심한 척 떠봤는데,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올리비아 저 고집쟁이는 분명 제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텐데. 잭슨도 모르면 누구에게 듣는단 말인가. 에이든은 속에서 올라오는 불만을 삼키며 올리비아의 안색을 살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비아는 뒤늦게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다. 저 강간범이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강간범이 도련님이야?’

기함할 듯 놀라 심장이 폴짝폴짝 뛰었다. 큰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련님을 도둑으로 몰고, 마지막엔 강간범이라고도 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는 순간 더욱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었다. 어쩌지 못하고 그냥 눈치만 봤다.

걱정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올리비아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저건 조금 운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퉁퉁 부은 꼴이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을 것 같았다.

‘눈물 한 방울도 아까운데, 씨발. 어떤 새끼가…….’

다시 흥분하려는 마음을 에이든은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저 착한 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으면 저리 울었을까. 역시 절대적으로 옆에 끼고 있어야겠다. ‘천천히’라는 말은 개나 주라지.

“이 애로 하자.”

에이든이 선언했다.

“네? 무엇을요?”

잭슨이 에이든의 뜻을 이해 못하고 되물었다.

“내 전담 시중들 아이. 이 애로 하자고.”

전담 시중 소리에 잭슨이 긴장했다. 이건 말도 안 됐다. 도련님의 전담 시중을 드는 이를 하녀로 쓰다니. 보통은 숙련된 시녀를 쓰는 것이 맞았다. 합당한 예절을 배운 이야말로 귀족의 품위를 지키는 시중을 들 수 있었다.

“그건 아니지요. 이 아이가 뭘 할 줄 알겠습니까? 도련님 제대로 교육받은 시녀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 됐어. 저 애로 할래.”

“저 아이는 아둔하고 손이 느린 편입니다. 조금 더 똑똑하고 깔끔한 솜씨를 가진 아이가 어떨까요?”

에이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잭슨이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아이로 충분하다고 했어.”

이번에도 에이든은 단호했다. 잭슨은 답답했다. 사정이 급박하여 데려왔더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올리비아의 우둔함은 그도 익히 들었다.

허드렛일 외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 모자란 것이 도련님을 잘 보필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전담 시녀는 모시는 귀족의 옷차림에서부터 일상에 필요한 것까지 전부 준비해야 하는데. 왜 하필 도련님이 선택한 이가 저 부족하기로 소문난 아이인지 모르겠다.

“왜 저 아이를 뽑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잭슨의 질문에 에이든이 그를 빤히 보았다. 여러 말 하게 만드는 것이 참 귀찮았다. 에이든은 그 어떤 반박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예쁘잖아.”

엄청 진실한 얼굴로. 사실, 에이든의 입장에선 절대적인 진실이기도 했다.

잭슨은 속에서부터 욱하고 올라오는 불손한 마음에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7년은 적지 않은 시간이다. 장성해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아니면 단지 외모에 집착하는 특이점이 있는 것일까? 에이든 도련님이 돌아온 첫날부터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자꾸 하니 잭슨은 근심이 생겼다.

그러나 그 불경한 생각을 금세 지워 버렸다. 좋으나 싫으나 백작가의 정통 후계자는 에이든 도련님뿐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평민의 피를 이은 사람을 다음 대 백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정통성 있는 에이든 도련님을 백작가의 주인으로 만든다. 그게 그의 목표였다. 도련님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혹여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알려 주십시오.”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바로 올리비아를 내칠 생각을 하며 잭슨은 그리 말했다. 에이든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을 아니까. 잭슨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는 올리비아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네가 에이든 도련님의 시중을 들거라. 도련님이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하니라.”

“시, 시중이요? 전 한 번도 시중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올리비아가 파드득 놀라 대꾸했다. 잭슨에게서 역시나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렇다 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아이로 하는 것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괜찮아. 필요한 거 일일이 시키면 되니까.”

다른 귀족이라면 경을 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에이든의 태도에 잭슨은 포기했다.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조언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 느껴졌다. 직접 불편함을 겪어 보면 마음이 바뀌시겠지.

“도련님 말씀 들었느냐? 일러 주시는 것을 빼먹지 않고 행동해라. 네가 평소 둔하다 들었다. 정신 단단히 잡고.”

“네. 알겠습니다.”

집사님의 엄명에 올리비아는 고분고분 답하긴 했지만 속으론 울고 싶었다. 도련님이 왜 저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다. 늘 하던 일도 혼나는데 새로운 일을 하면 얼마나 구박을 받을지 걱정이었다. 시중을 들어 본 적이 없어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매일 일상이 고될 걸 생각하니 두렵다.

‘혹시, 벌주려는 것일까?’

주인을 몰라보고 범죄자로 몰아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강간범이라 불러서 불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헉! 곁에 두고 매일매일 괴롭히려고?’

답지 않게 올리비아의 머리가 빨리 돌아가 결론을 내렸다. 올리비아는 처음 침입자를 발견했을 때 먼저 도련님이냐고 물어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당연히 주인이니까 들어왔을 텐데, 그걸 왜 몰랐을까 자책했다.

“뭐 해? 잭슨은 그만 돌아가 봐. 바쁘잖아.”

“네. 알겠습니다. 혹 필요한 것 있으시면 꼭 저한테 연락 주십시오.”

대놓고 나가란 소리에 잭슨은 불쾌감보다 올리비아에게 일을 맡기고 간다는 점이 더 걱정되어 거듭 당부하고 본채로 가 버렸다. 속으로 시녀 중에 쓸 만하고 예쁜 아이를 얼른 준비해야겠다 다짐하며.

집사님까지 나가 버리자 올리비아는 쭈뼛쭈뼛 어찌할 줄 몰랐다. 제 실수 때문에 도련님이 무서워 죽겠다. 또 아까처럼 화낼까 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데 도련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히익!”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괴상한 소리를 냈다가 양손으로 입을 재빨리 막았다.

‘이것 때문에 더 혼나면 어떡하지?’

올리비아도 자신의 실수를 알았다. 울상 짓고 바라보자 도련님이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련님은 뺨을 실룩샐룩하더니 퉁명스럽게 말하고 지나쳤다.

“따라와.”

다행히 도련님이 큰소리치지 않아 안도하며 얼른 뒤따라 쪼르르 걸었다. 응접실 밖으로 나가니 하녀 셋이 더 서 있었다. 애니, 캐서린, 샬롯이 별채에서 일하기로 정해진 이들인 듯싶었다.

도련님이 대기하고 있는 이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속 따라가야 할까? 여기 하녀들과 같이 기다려야 할까?’

올리비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눈치를 봤다.

그때 애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쏘아보았다. 제 새끼를 빼앗긴 어미 고양이처럼 앙칼지고 분노 가득한 표정에 올리비아의 마음이 좋지 않았다. 또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사람들이 다 불만만 품고 사나 보다. 왜 이리 자꾸 화를 내고 툴툴거리기만 하는지.

“안 와?”

“네! 가요.”

도련님이 계단 중간에 멈춰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올리비아가 답하며 쫓아갔다. 가만히 서 있는 하녀들을 지나쳐 도련님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는 성큼성큼 3층으로 올라섰다. 별채에서 제일 볕이 좋고, 넓은 침실 문을 열고 도련님이 들어갔다.

감히 침실에 들어가도 되는지 머뭇거리던 올리비아가 조심히 뒤따랐다. 도련님은 침실에 딸린 쪽문 앞에 서 있었다. 빤히 응시하는 것이 기다리는 것 같아 도련님께 다가갔다.

“앞으로 네가 사용할 곳이야.”

쪽문 안쪽엔 침대와 옷장, 협탁이 들어가는 작고 아늑한 침실이 딸려 있었다. 바로 옆 침실을 사용하는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붙어 있는 전담 시종의 숙소였다. 갑자기 독방을 배정받게 된 상황에 올리비아가 놀랐다.

“하녀 숙소가 아니라요? 제가 여길 써요?”

정말 이 좋은 곳을 저 혼자 써도 돼요? 좋아서 눈을 빛내는 올리비아를 향해 에이든이 크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하녀 숙소에서 머물면서 내 시중을 어떻게 들겠다는 거야? 그냥, 앞으로 여기 머물면서 내가 부르면 언제든 와. 알겠어?”

올리비아의 귀엔 처음에 답한 ‘그래’ 소리밖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생에 처음으로 갖는 독방이었다. 이곳을 청소한 이가 자신인데 모르겠는가. 침대도 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시트도 새것이었다. 새 물품을 쓰는 일이 처음이라 넘치는 기쁨을 감당하지 못했다.

부르면 언제든지 와야 한다는 말도 괜찮았다. 도련님 시중들기가 어려울 거란 걱정도 사라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휴식 시간이 보장되지 않아 더욱 일이 늘어나는 상황이지만, 올리비아는 마냥 좋았다. 그저 자신의 방이 생겼다는 점에 기뻐 방방 뛰었다.

“네!”

올리비아가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마냥 좋아하자 에이든도 흐뭇했다. 해맑은 미소를 보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평생 저리 미소만 지었으면 좋겠다.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기뻐하는 것 말고도, 그녀와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상황에 더 들뜨기도 했다. 독방이 생겼다는 사실에 올리비아는 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바로 옆방에서 같이 자는 거다.

침실과 침실이 연결된 문도 허술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에이든은 음흉하게 올라오는 생각을 저지했다. 아직 3주 가까이 남았다. 참아야 했다.

“따라와.”

“네!”

독방이 생겨 신난 올리비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련님을 뒤따랐다. 에이든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올라가기 전에 대기하라 말한 대로 하녀 셋은 꼼짝도 못 하고 응접실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에이든은 그녀들 앞으로 올리비아를 밀었다.

“네가 정해.”

“무엇을요?”

하녀들과 올리비아가 마주 본 상태로 서로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에이든은 차갑게 웃었다. 자기 손으로 복수할 기회 정돈 줘야지.

“이들이 여기서 할 일. 네가 각자 맡을 일을 정해 줘.”

“제, 제가요?”

에이든이 던진 말에 올리비아가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연둣빛의 큰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순식간에 등장하길 반복했다. 어린 여아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도 저렇게 예쁘지는 않겠다. 만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주먹을 쥐었다. 에이든은 조바심이 생기는 마음과 반대로 나긋하게 행동했다.

“그래. 새롭게 꾸린 일원이잖아. 앞으로 이 별채에서 각자 할 일을 정해 줘야지.”

‘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원래 일의 분담 지시는 집사님이나 하녀장님 같은 윗분들이 했다. 그도 아니면 그 무리 중에서 최고 선임자가 하는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어려서 막내인 편에 속했고, 한 번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도련님 실례지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실례인 거 알면 하지 마.”

보다 못한 애니가 살며시 나섰다가 에이든 도련님에게 단칼에 잘렸다. 하지 말라는데 어쩌겠는가. 애니는 합죽이가 된 만큼 눈을 사납게 떴다. 에이든 도련님이 올리비아와 자신에게 말할 때 확연하게 다른 태도라 거슬리는데 대놓고 무시까지 한다.

이 상황을 다른 하녀들이 속으로 비웃을 것 같아서 애니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무슨 꼴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예상했던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처음 도련님이 입구에서 째려봤을 때 그저 성격이 까칠하구나 하고 넘겼던 게 잘못이었다. 응접실에서 도련님이 집사님에게 헛소리할 때는 생긴 것만 말짱한 미친놈이라 다 텄구나 싶었다. 그런데 하녀들을 밖으로 다 내보내고 집사님과 도련님이 둘만의 대화를 나누더니 밖으로 나온 집사님이 그랬다.

“애니 너는 별채 담당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다 새로 뽑을 거다. 외모가 빼어난 이들로 데려오너라.”

처음 선택됐던 하녀들은 모두 퇴짜 맞고 그녀만 남았다. 자신보다 못생긴 애의 시중을 받지 않겠다 지랄하던 도련님이 그녀는 괜찮다 여긴 거다. 애니는 뿌듯함을 숨길 수 없었다. 벌써 도련님의 눈길을 끌었다는 생각에 들떴다. 도련님의 성격은 문제가 조금 있지만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충분히 꼬실 수도 있을 거라 여겼다.

그 뒤로 몇 번 더 하녀들이 응접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중에서도 통과한 아이는 없었다. 보는 앞에서 못생겼다 평가된 하녀들의 표정이 뭐 씹은 것처럼 변해 나올 때마다 애니의 코가 하늘을 찔렀다. 침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끝이다. 드디어 인생이 필 거라 환호했다.

그런데 웬걸? 마지막까지 진상을 부리던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택했다. 그녀가 전담 시중을 들 거란다. 시녀도 아니고 하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멍청이 올리비아가!

그것도 열받는데 지금 도련님의 행동은 별채의 하녀 중 올리비아가 제일 높다고 선언한 것이다. 앞으로 올리비아의 지시를 받으라는 명령에 애니는 미칠 것 같았다. 분노가 점차 차올랐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올리비아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전 잘 모르는데요. 그런 거 해 본 적 없어요.”

“괜찮아.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이 애가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머뭇거리는 올리비아를 에이든은 다정하게 다독였다. 그리고 콕 찍어 애니를 가리켰다. 지명당한 애니도, 물음을 당한 올리비아도 긴장했다. 나긋나긋 웃고 계시지만 어쩐지 어려운 도련님과 자신을 죽일 듯 쏘아보는 애니. 올리비아는 울고 싶었다. 이렇게 벌주는 건가 싶어서 기쁘던 마음이 우울해졌다.

“애니 언니는 뭐든 잘해요.”

어차피 일은 다 비슷비슷했다. 그중 자신이 꺼리는 일을 시키면 될 것을 줘도 못 먹는다. 이리될 것을 예상했지만 속상했다. 얼마나 수동적인 삶에 익숙해졌으면 저럴까. 에이든은 더 몰아세우는 것이 오히려 올리비아를 괴롭히는 일이 될 거란 걸 알았다.

정말 차분히, 느리게 가야겠다. 제 성질대로 사는 게 익숙한 에이든에겐 답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상대가 올리비아인걸.

“그럼 내가 정해야지. 그래, 그게 좋겠구나. 너는 청소를 잘하게 생겼어.”

“네. 청소라면 자신 있습니다. 전 깔끔한 것을 좋아하니까요.”

도련님의 말에 애니는 자신 있게 나섰다. 올리비아의 명을 듣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그 밝은 얼굴을 보니 에이든은 심사가 더욱 뒤틀렸다. 가증스러운 것.

“그리 깔끔하다니, 넌 앞으로…….”

* * *

올리비아는 자고 나온 흔적이 역력한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힘주어 당겨 주름지지 않게 만든 후 잘 접어 마무리한다. 팡팡 먼지를 털어 베개의 숨을 살려 놓고, 흐트러진 이불도 탈탈 털어 정리했다. 무의식적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바로 잡고 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닿는 시선이 너무나 따가워 버티기가 힘들었다. 뒤통수에 구멍이 날 것 같다. 발끝이 들썩였다. 조마조마해서 못 살겠다. 자꾸 헛손질하고 있었다.

“도련님,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세요?”

결국, 참지 못하고 올리비아는 몸을 돌려 저를 주시하고 있는 도련님을 불렀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통에 올리비아는 일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벌써 도련님을 모신 지 나흘째였다. 그동안 도련님은 과할 정도로 그녀를 감시했다.

차라리 버럭 화를 내거나 애니처럼 벌을 주면 나을 텐데,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주시하기만 했다. 언제 혼날지 모른다는 게 올리비아는 더 긴장되고 무서웠다.

“내가? 없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보세요.’

올리비아는 정말 울고 싶었다. 화내시는 건 아닌데 에이든 도련님은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자신을 주시했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도 소용없었다. 그녀가 자리라도 비울라치면 도련님은 뒤쫓아 오거나, 얼른 오라고 종을 시끄럽게 울려 댔다. 종일 도련님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저런 눈빛을 받으려니 정말 죽겠다.

예전과 비교하면 올리비아가 하는 일은 정말 줄어들었다. 도련님은 일거리를 만들지도 않았고, 딱히 어려운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실수한 것이 없는 건지, 있어도 그냥 넘어간 건지 모르겠다. 가끔 퉁퉁거리긴 해도 한 번도 크게 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련님과 함께하니 다른 사람의 일을 떠맡지도 않았다. 최근엔 근육통이 생기지도 않았다. 몸은 정말 편해졌단 소리다. 그런데 왜일까?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몸은 엄청나게 편해졌는데 날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었다.

“정말 하실 말씀 없으신 거죠?”

“없다니까.”

“그럼, 편히 쉬고 계세요. 저 서재 좀 정리하고 올게요.”

감시의 눈길을 피하고 싶어 다른 곳을 청소한다고 일렀다. 일부러 편히 쉬라 말하기까지 했다. 걸레를 챙겨 들고 침실 문을 여니 도련님이 몸을 일으켜 뒤따라왔다.

‘다, 다른 곳으로 가시는 거겠지?’

도련님이 서재로 가는 건 아닐 거라 여기면서도 올리비아는 자꾸 뒤쫓아 오는 인기척이 신경 쓰였다. 모른 척 재빨리 걸어 서재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 했더니 턱 하고 문을 잡는 것이 아닌가.

“사람 들어가는데 왜 닫아?”

그러고 뻔뻔하게 이리 말한다. 에이든 도련님 성격이 나쁘다더니 참말이다. 피하려 했더니 쫓아와 감시하려 하는 게 얄미웠다. 도대체 언제 화내시려고 저러는지 올리비아는 조마조마해서 못 살 것 같았다. 관대한 듯하면서 참으로 어려운 도련님이다.

“서, 서재에 가시려던 거였어요? 전 또 바람 쐬러 나가시는 줄 알고……. 아하하하.”

올리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지나가라 비켜섰다. 도련님이 쌩 안으로 들어가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도련님을 피하려고 했던 건데 다시 같은 장소에 있게 된 상황에 올리비아가 어설프게 걸레질을 했다. 밉보이고 싶지 않아 다른 곳을 먼저 청소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에이든은 비죽비죽 올라오는 웃음을 책으로 숨기며 올리비아가 청소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는 행동이 귀엽다. 이리저리 도망가려는 꼴이 보여 화날 때도 있지만 눈앞에 있으니 화가 풀려 버린다.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동안 이 행복을 몰랐다는 점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올리비아를 향한 에이든의 갈증은 더 심해졌다. 막연한 상상을 할 때보다 더 아름답게 자라 있었다. 불쑥 성욕이 솟구치면 다정히 대해 줘야 한다는 생각도 잊었다. 옆방에 올리비아가 있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눈 돌아간 짐승 새끼가 되지 않으려 밤마다 허벅지를 찔러야 했다.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다. 지금도 까치발을 들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낑낑거리며 닦는 모습이 위태로우면서 예뻐 심장이 뻐근했다. 잡아먹고 싶다.

‘날름 삼키고 싶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핥아 내고 싶어.’

저렇게 두려워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황홀경에 빠져 울먹이는 얼굴을 보고 싶다. 음란한 상상을 한번 시작하니 멈출 수 없었다. 에이든이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저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채서 품에 안아 볼까? 입을 맞춰 봐?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의 욕망에 반응해 에이든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막 손을 움직이려는 찰나. 작은 동전 하나가 에이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는 동전을 에이든이 주시했다. 흥분되던 마음이 차게 식는다. 시기가 참 뭣 같았다. 욕구 불만으로 뒈져 버릴 것 같았다.

흠칫흠칫 올리비아가 몸을 떨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소름이 돋아 도망가고 싶었다. 가끔 도련님이랑 있으면 이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매번은 아니고 저렇게 도련님의 눈빛이 무서울 때. 올리비아는 빨리 청소하고 다른 장소로 가려고 손을 바삐 했다.

“올리비아.”

“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 답한다. 올리비아가 과장되게 놀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에이든의 표정이 더욱 썩어 들어갔다.

“아까 침실 청소하다 말지 않았어?”

“네? 네…….”

그걸 눈치채고 있었단 말인가.

‘혹시 청소를 덜했다고 혼내려고 하시나?’

올리비아가 어깨를 움츠리고 에이든의 눈치를 봤다.

“가서 침실 청소 먼저 해.”

“네. 알겠습니다!”

이제 감시는 끝난 것일까? 잠시 눈치를 보던 올리비아가 알겠다고 답하고 쪼르르 침실로 사라졌다. 저리 좋을까. 발걸음이 통통 튀어 다니는 것을 보니 짜증이 난다. 올리비아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줘서 속상하기도 했다. 서재 문이 닫히고 침묵이 감돌자 에이든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래서 왜?”

“종일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십니까?”

커튼 뒤에서 한 남자가 나오며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의 이죽거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에이든은 느긋하게 소파에 드러누우며 발을 까닥였다.

“그러는 케일럽은 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잖아? 너랑 나랑 다를 게 뭐야?”

케일럽은 불만을 토로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데 비아냥거림까지 들으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쪼잔한 놈. 저놈도 불쌍하긴 하지. 에이든은 케일럽을 살짝 동정하면서도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오래 대화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용건이 뭐야?”

케일럽의 손이 품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어지간한 귀족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에이든에게 공손히 내밀어졌다. 에이든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의 주인을 극존경하는 태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분이 편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귀찮게 무슨 편지래?”

고생이라곤 해 보지 않은 가는 에이든의 손가락이 편지 봉투를 슬쩍 잡아 들었다. 거칠 것 없이 밀봉을 뜯고 편지를 읽는 에이든의 모양새에 케일럽은 속이 터졌다.

남들은 한번 받으면 영광이라고 생각될 이의 편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화가 났다. 도대체 그분은 왜 저런 무례한 이를 귀히 여기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똑똑하고 쓸 만하면 뭐 하나 인성이 저리 썩었는걸.’

아차, 저 인간을 너무 오래 따라다녔나 보다. 그래서 저 인간의 저속한 말투가 옮아왔나 보다. 케일럽은 험한 말투를 떠올리게 된 상황에 혼자 좌절했다.

“흐음, 별 내용 없네.”

재빠르게 쓱 훑어본 에이든이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했다. 편지를 대충 접어 봉투에 넣더니 휙 던져 버렸다. 그에 케일럽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저게 어떤 분이 주신 건데! 저런 방종한 행동을 하다니! 평생 가보로 모셔야 하거늘!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편지 또한 그분의 의지이십니다.”

“그냥 종이 쪼가리거든?”

의지는 무슨 개뿔. 그냥 종이지.

“그걸 주신 분은 그냥이 아니십니다. 고귀하신 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힘주어 말하는 모양새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대 칠 기세였다. 에이든은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려 웃었다. 솔직히 저런 과잉 충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따를 수 있지? 하사한 물건에도 극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정상은 아니다. 무슨 세뇌 마법이라도 걸어 놨나? 아니면 종자 자체가 무식한 기사라서 그런가?

어느 이유든 이런 간섭을 듣는 건 짜증이 났다. 그리고 저리 말하면 반발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심사가 단단히 꼬인 에이든을 건드리는 것은 잘못된 짓이다.

에이든이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갔다. 서랍을 뒤적거려 성냥을 찾아냈다. 성냥을 켜 초에 불을 붙였다. 크게 손을 흔들어 성냥의 불을 껐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 재떨이에 성냥개비를 버리고 편지를 들었다. 일부러 느리고 번거로운 행동을 했는데 케일럽은 이 행동의 의미를 눈치도 못 챘다. 기겁하게 해 줘야지.

“그분은 내가 이리 행동해도 이해하실 분인걸?”

에이든이 손에 들린 편지를 보란 듯이 흔들고 초로 가져다 댔다. 모서리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고 불길은 화르르 종이를 태워 갔다. 반쯤 타 버린 종이를 유리 재떨이에 버리자 편지는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렸다.

케일럽은 에이든이 저지른 행동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채 꺽꺽거렸다. 그에 에이든은 빙긋 웃었다. 아까 제 어깨를 맞고 튕겨 나간 동전을 그는 잊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게 어떤 물건인데! 어떤 분이 내린 편지인데! 케일럽의 처절함이 담긴 목소리에 에이든은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무슨 짓이지? 말했잖아. 그분은 이런 것 이해하실 거라고.”

책상에 걸터앉아 비죽비죽 웃는 꼴이 얄미웠다. 그리고 반박하지 못할 말이라 화가 났다. 다른 이에겐 몰라도 에이든이 하는 행동엔 한없이 관대하신 분이었다. 편지를 태웠다 전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실 거다. 다 이유가 있다고 하며 합리화하실 거다.

‘도대체 왜 저따위 인간을 총애하시는 것이란 말인가!’

황실 기사단의 촉망받는 인재인 자신이 저런 인간의 호위를 하는 것도 짜증 났다. 저놈은 분에 넘치는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여길 줄을 몰랐다.

앞길 창창한 남의 인생을 망쳐 놓고! 자신은 제국 수도에 있는 황성에서 일해야 할 몸이었다. 이런 작은 왕국 촌구석 영지에서 저런 방만한 인간을 호위할 사람이 아니었다. 저 인간을 더 상대했다간 감정 조절을 못하고 분노를 표출할 것 같아 짧게 물었다.

“그래서 답은 어찌 됩니까?”

“모른다고 기다리라고 해. 아직 약속한 기일까지 많이 남았잖아.”

‘억, 억! 불경에도 정도가 있지! 감히 기다리라고 하라니! 정중한 서신도 아니고 저리 건방진 말투로!’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간 기가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케일럽은 지병이 있는 사람처럼 심장을 움켜쥐고 신음했다. 단련된 튼튼한 신체임에도 혈압 상승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나중에 딸이 결혼할 상대로 불한당을 데려온다 해도 이리 혈압이 오르진 않을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격한 숨을 토해 냈다.

그런 케일럽의 반응을 보며 에이든의 감상은 간결했다. 극단에 들어가도 되겠다. 처음엔 저 사람도 저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과묵하고 진중한 기사의 표본이었는데. 어쩐지 갈수록 이상해진다.

“어쨌든 그리 전해. 그리고 편지 좀 쓸데없이 보내지 말라고도 전해 주고.”

“어억!”

케일럽이 이번엔 아예 뒷목을 잡았다. 시간도 넉넉한데 재촉에 짜증이 난 에이든이 무성의하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충격에서 빠져나오면 알아서 가겠지. 얼른 올리비아나 찾으러 가야겠다.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의 생일이 딱 2주 남았지.’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언제 그 예쁜 아이를 품을 수 있을까. 에이든은 고뇌 아닌 고뇌를 하며 침실에 도착했지만 올리비아가 없었다.

와락 짜증이 났다. 침실 청소를 시켰는데 그새 어디를 갔단 말인가. 눈에 안 보이는 사이에 올리비아가 또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있을까 걱정되어 바삐 3층을 돌았다. 없고, 없고, 없고, 에이든은 옷방에 도착해서야 올리비아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불쌍하게 쪼그려 앉아 졸고 있었다. 정리 중이었던지 옆에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꾸벅꾸벅 조는 게 귀엽기도 했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피곤했나?’

에이든은 조심히 올리비아의 옆에 앉았다. 딱 붙어 안고 싶지만 아직 강간범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 직접 닿은 적은 없었다. 그놈의 강간범. 올리비아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혹시 올리비아가 날 볼 때마다 흠칫흠칫하는 이유가 강간범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조는 올리비아를 관찰하며 말을 걸어 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움찔하는 사이에 작은 머리가 에이든의 허벅지에 툭 떨어졌다.

에이든은 숨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쪼개질 정도로 강한 심장 박동이 계속되었다. 느리게 침을 꿀떡 삼켰다. 올리비아는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코끝이 찡해진 에이든이 옆에 널린 옷을 주워 올리비아의 어깨에 조심히 덮어 줬다. 진짜 좋아서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다.

올리비아의 얼굴을 마음 놓고 감상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조심히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그래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 용기를 냈다. 조금 더 올라가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슬쩍 스치는 피부의 감촉이 좋아 손가락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단꿈을 꾸는지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예쁜 올리비아. 그렇게 달콤한 꿈만 꾸자. 그리고 내게 오렴. 그럼 꽃길만 걷게 해 줄게. 내가 더러운 시궁창에 처박혀야 하더라도 너만은 웃게 만들어 줄게.

에이든은 더욱 용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평화로움이 에이든에게 전염되었다. 느긋하게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고 훼방꾼이 등장했다. 에이든의 표정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옷가지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서던 애니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에이든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올리비아를 보고 소리치려는 모양새에 재빨리 검지를 입에 댔다.

그리고 방해하지 말고 나가 보라 손짓했다. 잠시 응시하던 애니가 입구 쪽에 들고 온 물건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섰다. 달콤한 순간이 지켜졌단 기쁨에 에이든이 올리비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다시 둘만의 시간이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며 애니는 방금 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멍청한 계집을 전담 하녀로 쓴다고 했을 때 진작 짐작했어야 했는데.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어떤 패악질을 부려도 풀리지 않을 분노가 온몸을 감쌌다. 미친년처럼 악을 쓰고 싶은 걸 참았다.

어째서 그녀가 아니고 올리비아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팔자 한번 고쳐 보겠다고 어떤 짓을 해 왔는데! 개처럼 굴며 그 모욕과 치욕을 전부 견뎌 왔는데! 그 더럽던 욕망을 다 받아 왔는데! 창녀들도 하지 않는 행동까지 해 왔는데!

그 더러운 개똥밭을 굴러온 자신은 계속 시궁창에 있는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은 행복을 넘어서 거대한 것을 가져갔다.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보던 눈빛을 잊지 못하겠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다정해서 충격적이었다. 귀족이 하녀를 그리 살갑게 보는 시선은 처음이었다.

품에 안겨 욕망을 받아 내는 순간조차 차가운 눈길을 받아 왔던 애니였다. 몸은 뜨겁게 탐할지언정 귀족들의 눈엔 경멸이 담겨 있었다. 한데 아무런 노력 없이 올리비아는 전부 가졌다.

이래서 올리비아가 싫었다. 반반한 낯짝으로 언젠가는 그녀가 제 앞길을 막을 것이 뻔히 보였었다. 순진한 척, 착한 척하며 세상 편히 살겠지. 자신이 겪었던 비참함은 겪지도 않을 거고. 낯선 사내의 몸에 짓눌려 울부짖으며 그만해 달라 빌어 본 적 따위 없겠지!

자신이 이런 구질구질한 일을 맡은 것도, 다 올리비아가 수를 쓴 걸 수도 있겠다. 별채 일을 분담할 때 올리비아가 도련님과 제일 가까운 3층을, 샬롯이 1층, 캐서린이 2층을 나눠 맡았다. 홀로 남은 애니는 화장실과 외부 담당이 되었다. 매일 똥물을 퍼다 나르고, 정원의 벌레를 잡았다. 그런 벌 같은 일이 제게 주어진 걸 처음엔 이해 못했는데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바로 저 계집 때문일 거다.

용서 못했다. 애니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독기로 똘똘 뭉친 얼굴로 다짐했다. 절대 행복하게 지내도록 두지 않을 테다. 자신이 겪었던 비참함과 처절함을 똑같이 겪게 만들어 줄 테다. 애니는 보이지 않는 문 너머를 응시하며 손톱이 부러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벽을 긁었다.

* * *

살짝살짝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길이 점차 대범해지고 있었다. 에이든은 잠든 올리비아의 뺨을 꾹 눌러 보았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어 말랑말랑하니 폭 들어갔다. 아씨, 얜 왜 이렇게 다 좋은 거야.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일부러 투덜거렸다.

“밤에 잠을 못 자? 왜 이렇게 단잠을 자?”

“으응……. 잘 자…….”

올리비아의 대꾸에 에이든이 화들짝 놀랐다. 그냥 잠꼬대인 듯 일어날 기미는 없어 보였다. 이런 버릇을 알면서도 겪을 때마다 놀란다. 에이든은 느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만히 있던 중 번뜩 궁금증이 떠올랐다. 비겁한 행동 같지만 호기심이 생기니 물어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잠든 올리비아의 등을 작게 토닥이며 물었다.

“에이든 도련님이 좋아?”

기대감에 에이든의 입가가 헤벌쭉 벌어졌다. 반칙인 것을 알면서도 듣고 싶어서 미치겠다. 얼른 어여쁜 대답을 해 달라 작은 입술을 주시했다. 꿈틀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도련님 싫어…….”

순식간에 벼락 맞았다.

‘뭐? 싫어? 씨발! 왜!’

정확한 거절에 에이든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럴 순 없었다. 자신이 그녀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성질도 부리지 않고, 일부러 어지르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손대지 못하게 감시와 보호도 철저히 해 줬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몰라도 아니고 싫다니! 배신감에 에이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방금까지 달달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에이든은 분노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은 죄다 퍼 주고 있는데, 이 못된 계집애가 싫단다. 기억 못하는 것도 봐줬는데.

‘나쁜 계집애! 나는 이렇게 좋아하는데!’

시근거리며 잠든 올리비아를 보던 에이든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코!”

쿵, 하고 머리를 바닥에 찧은 올리비아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일어섰다. 그러다 씩씩대고 있는 에이든을 발견하고 어찌할 줄 몰라 했다.

“도, 도련님? 무슨 시키실 일 있으세요?”

“일도 하지 않고 자니까 좋아?”

버럭 외치는 에이든 도련님의 심상치 않은 기색에 올리비아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습니다.”

“너!”

악쓰는 부름에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순진한 눈동자를 보니 뱃속이 더욱 뒤틀렸다. 하지만 욱하면서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니 막상 쓰디쓴 말이 쏟아져 나오지 못했다.

“앞으로 절대 졸지 마! 너 두고 볼 거야!”

버럭 외친 에이든이 발을 쿵쾅거리며 방을 나섰다. 갑자기 화를 내시는 도련님의 행동에 올리비아는 울상을 지었다.

멍청하게 왜 잠들었을까? 요즘 그리 피곤하다 느끼지 않았는데 햇살이 따사롭고 새 옷의 냄새가 좋아 잠깐 쉰다는 게 잠들어 버렸다. 물론 잠든 건 잘못한 게 맞는데. 여태껏 좋게좋게 넘어가시던 분이 저리 화내시니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그날부터 올리비아의 수난 시대였다.

“이런 어질러 버렸네.”

에이든 도련님이 책을 죄다 바닥에 던져 놓고 한 소리였다.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던져 놓고.

“이거 정리해.”

화병을 깨뜨리고 한마디 툭 던졌다.

“손이 미끄러졌어.”

시트가 주스로 얼룩져 있었다. 이건 일부러 뿌린 게 확실하다. 어딜 봐도 미안해하지 않는 심술 맞은 얼굴이었다.

최근 올리비아는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아랫사람으로서는 손이 많이 가고 곤란한 도련님의 날벼락을 죄다 받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심술부리기로 작정하셨는지 틈만 나면 방을 뒤집어 놓으셨다. 게다가 말을 걸라치면 버럭 소리치기 일쑤였다.

오늘도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올리비아는 한숨을 삼켰다. 그 비싼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흩뿌려 놓았다. 화병은 벌써 몇 개째 깨 먹었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다. 물품 보급 담당자님한테 진짜로 혼나겠다. 더 손실품이 생길 시엔 집사님과 총관님의 귀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또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혼날 텐데.

다행히 도련님은 방에 계시지 않았다. 어쩐지 요 며칠 도련님을 뵙기 힘들었다. 방을 이리 어지르는 걸 보니 외출한 것은 아닌데 직접 만날 일이 별로 없었다. 올리비아는 도련님의 얼굴을 안 보니 마음은 편했다. 졸졸 쫓아다니며 괴롭혔다면 아주 죽고 싶었을 거다.

우선 바닥에 흐트러진 종이를 전부 치우고 화병 조각을 바깥에 내버렸다. 젖은 물기를 닦고 보니 오늘도 일부러 쏟아 놓은 게 뻔한, 차로 얼룩진 침대 시트를 벗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또 쏟으셨어?”

2층을 담당하던 캐서린이 시트를 들고 내려오는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안쓰러워하며 물었다.

“네. 빨래터에 다녀올게요. 언니 혹시 도련님이 저를 찾으면 알려 주세요.”

“그래. 수고해.”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올리비아를 보며 캐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저 애도 참 딱하다. 갑자기 돌아온 둘째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직접 전담 하녀로 뽑았다. 처음엔 품에 끼고 예뻐하는 줄 알았다. 사람을 뽑을 때 외모 운운해서 더 그렇게 여겼다. 올리비아가 미인인 건 확실하니까.

그런데 웬걸? 요즘 하는 꼴을 보아하니 마치 괴롭히려고 올리비아를 선택한 것 같았다. 며칠 사이에 싹 태도가 달라져 도련님은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댔다. 조금 유치하지만 악의적이라고 느껴지는 행동들을 연달아 하셨다.

“혹시 큰 실수 한 거 있어?”

“……전에 잠든 것을 들킨 뒤부터 그래요.”

얼마나 대단한 일로 찍혔는지 물었더니 올리비아는 저리 답했다. 잠깐 졸았다고 저리 집요하게 괴롭힌단 말인가. 요즘 올리비아는 정말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했다. 꾀를 부리는 것이 아님에도 자꾸 도련님이 일거리를 만들어 내서 그리해야만 했다.

본채도 아니고 이런 별채는 으레 넉넉한 일정이었다. 특히 모시는 분이 한 분이라면 더 여유로웠다. 출세를 바라지 않는다면 적당히 눈치껏 쉬어 가면서 일할 수 있는 장소라 선호하는 이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올리비아에게는 최악의 일자리가 되었다.

처음부터 에이든 도련님이 정상적인 성격은 아닐 거라 느껴졌는데, 요즘 하는 짓을 보니 또라이도 이런 또라이가 없었다. 손찌검하며 위협적으로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골칫거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하기 귀찮게끔 자꾸 어지르고 다닐 뿐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매일 청소하는 사람에게 자질구레한 일거리가 끊임없이 생기는 일이 얼마나 큰 귀찮음인지 일하는 사람이 아니면 몰랐다.

다행히 캐서린에겐 문제가 없었다. 도련님이 아래층에 잘 내려오지 않아서 그런지 장난질은 주로 3층에서 이루어져 괴롭힘은 전부 올리비아가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실제로 같이 일해 보니 올리비아는 그렇게 일을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조금 맹한 면이 있어서 답답하기는 해도 일만은 빠릿빠릿하게 잘하기에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챙겨 주고 싶어도 도와줄라치면 도련님이 도끼눈을 뜨는 통에 그것도 하지 못했다. 도련님이 올리비아를 아끼려는 건지, 괴롭히려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귀족 나리의 변덕이란. 그냥 도련님이 지칠 때까지 내버려 두는 수밖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캐서린은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올리비아가 건물 밖으로 나가고 캐서린이 사라지는 것을 위층에서 내려다보던 에이든은 그 어느 때보다 심기가 불편했다. 그리 눈치를 줘도 제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올리비아 때문에 화병으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자꾸 에이든을 옹졸하고 치졸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였다.

힘들다 사정이라도 하면 어여삐 여겨 넘어가 줄 텐데 묵묵히 일을 처리해 버리니 자신만 더 꿍해지고 있었다. 혼자 감정을 삭이는 것으로도 죽을 것 같은데, 막상 앞에서 알짱알짱대는 예쁜 얼굴을 보니 욕구 불만은 더욱 커져 속이 타들어 갔다.

이래도 화나고 저래도 화난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 더 조급증이 치밀었다. 눈앞에 없을 땐 환상으로 아른거리더니 눈앞에 있으니 만지고 싶어 미치겠다. 자신이 싫다는 계집인데도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갈증은 더 심해져 갔다. 그래서 이젠 올리비아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도 못 하고 있었다. 자칫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칠까 봐 이리 피하고 있었다.

열 살 때도 하지 않았던 유치한 짓이란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행동을 하는 이유에는 욕구 불만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나한테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신호해도 올리비아는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달력에 하루하루 표시해 가며 간절히 올리비아의 생일을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참지 않을 거다. 눈치도 없는 올리비아.

모시는 상전의 심기가 불편하면 풀어 줄 생각을 해야지 시키는 일만 한다. 사람의 기분을 맞출지도 모르는 정말 둔하기 짝이 없는 계집 때문에 속이 뒤집혔다. 에이든은 다시 차오르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거센 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미친놈처럼 서재의 책을 마음껏 내던지고 나서야 에이든은 진정할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빨래를 마치고 허겁지겁 별채 주방으로 향했다. 벌써 저녁 식사 시간이라 도련님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직접이라고 해도 실제 요리하지는 않았다. 도련님의 식사는 특이하게 준비되었다. 별채에 거주하는 인물이 적어 주방장을 따로 두지 않고 본채 주방장님이 요리해서 이쪽 주방으로 보내 주었다. 올리비아는 다 차려진 음식을 시간 맞춰 도련님에게 내어 가기만 하면 되었다.

요리를 챙겨 도련님이 있을 서재로 향했다. 도련님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경우가 적었다. 올리비아가 직접 가져다주면 그곳에서 먹었다. 가끔도 아니고 매번 그러는 것은 귀족가의 예법에 맞지 않았지만 무지한 올리비아는 그러려니 했다. 정확히는 본인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에이든이 지적을 하지 않으니 했던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방문 앞에 도착해 노크했다.

“도련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들어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 일렀다. 올리비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또 기분이 나쁘신가 보다. 옆에 트레이를 고정하고 테이블 위에 식기를 준비했다. 도련님이 털썩 의자에 앉자 준비된 순서대로 음식을 내었다.

보기만 해도 황홀한 전채 요리에 올리비아는 침을 꿀떡 삼키고 내려놓았다. 음식을 타박하는 도련님은 아닌데 그렇다고 맛있다고 여기지도 않는 듯했다. 늘 뚱한 표정으로 의무적으로 음식을 입에 담았다.

포크질이 멈춘 것을 확인한 올리비아가 도련님의 눈치를 보고 주요리인 스테이크를 꺼냈다. 아직 김이 나며 맛있는 냄새를 풍겼다. 도련님이 식사를 마치면 얼른 식당에 내려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올리비아는 식사하시는 도련님을 구경하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스테이크를 다 비워 마지막 접시를 도련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올리비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 후식은 무려 케이크였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영롱해 보이는 케이크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올리비아는 아주 어릴 때 종종 케이크를 먹는 호사를 누렸었다. 지금은 꿈에도 맛볼 수 없는 케이크를 보니 예전에 맛보았던 그 황홀한 달콤함이 떠올라 부러웠다.

고기보다 케이크가 더 부럽다. 진짜 먹고 싶어. 올리비아의 얼굴에 탐난다는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포크를 막 들던 에이든이 그 숨김없는 표정을 발견했다. 올리비아의 넋 놓은 모습에 피식 웃었다. 어릴 때와 반응이 똑같다.

단것. 특히 케이크만 주면 올리비아는 껌뻑 죽었다. 포크로 한번 케이크를 뜨자 올리비아의 눈이 더욱 몽롱해졌다. 가져다 대면 입을 벌려 넙죽 받아먹을 기세였다.

“먹고 싶어?”

기습적인 질문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크에 홀렸던 터라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답하고 나서야 감히 귀족의 음식을 탐냈다고 도련님의 기분이 상했을까 화들짝 놀란 올리비아가 뒤늦게 눈치를 봤다.

그 귀여운 모습에 에이든의 건조해졌던 마음에 훈풍이 불었다. 이런 얼굴을 계속 보여 준다면 성질도 덜 부릴 텐데 말이지. 케이크만 준다면 뭐든 할 것 같은 올리비아의 행동에 어릴 때 기억이 떠올랐다.

“뽀뽀해 주면 한 입 줄게.”

에이든이 제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들기며 올리비아에게 장난을 쳤다. 어릴 때 이렇게 그녀에게 몇 번 뽀뽀를 받았었다. 다 큰 만큼 통할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부린 작은 심술이었다. 특히 싫은 사람에게 뽀뽀 따위를 할 리 없지 않은가.

제 무덤을 팠다. 맞다. 올리비아는 그를 싫어했다. 자기가 떠올리고 자기가 상처받은 에이든이 자괴감에 속으로 울며 냉소 지으려 할 때, 풋풋한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뺨에서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진 입술에도 에이든의 경직 상태는 풀릴 줄을 몰랐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눈뜨고 졸았나? 믿지 못하는 에이든의 귀로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케이크 먹어도 돼요?”

순진한 그 얼굴이 현실임을 일깨워 줬다. 에이든이 멍하니 올리비아에게 포크를 넘겼고 그녀는 야금 케이크를 먹었다. 케이크의 단맛에 황홀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올리비아는 행복해 보였다.

‘나 지금 뽀뽀당한 거야? 올리비아가 내게 뽀뽀한 거 맞아?’

씨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에이든 그는 참 쉬운 남자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