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60화 (60/116)
  • 60화. 나의 형, 하무경

    무경은 또다시 ‘현자 타임’을 맞은 얼굴로 바지와 드로즈 사이에 끼워져 있던 제 손가락을 서서히 거뒀다.

    ……그렇구나.

    “채 순경은 씻고 왔구나…….”

    대청마루 위에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제 뒷머리를 짜증스레 문지르던 무경이 열려있는 지퍼를 다시 올리고 벨트 버클을 조용히 채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무경 씨?”

    대청마루 위에 드러누워 있던 요원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 할 거예요?”

    “왜 큰일 날 소리를 해요.”

    대청마루 위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허리를 슬며시 굽힌 무경이 요원의 말간 뺨 위에 가볍게 입을 쪽 맞추며 농염하게 웃었다.

    “해야지. 나 오늘도 못 하면 응급실 실려 갈 수도 있는데.”

    “응급실에 왜 실려 가요?”

    “하도 못 싸, 아니, 하도 참아서 병 생겼으면 어떡해요.”

    “그런데 왜 안 해요?”

    “씻고 올게요. 안에서 기다려요.”

    “이 시간에 어디서 씻으시려고요?”

    요원이 무경의 옷깃을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김 작가네서요.”

    무경은 그 손을 겹쳐 잡으며 대답했다.

    “이 시간에요?”

    “그 친구 지금 안 잘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작가잖아요? 작가들은 원래 새벽 감성에 글 쓰지 않나?”

    “그냥, 여기에서 씻으시면 안 돼요?”

    “여기, 마당에서.”

    높낮이 없이 되묻는 무경의 눈썹이 사납게 한번 꿈틀거린다.

    “다 벗고. 이 시간에. 채 순경 보는 앞에서.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저 파란 호스를 내 몸에 대고 볼품없이. 하나도 안 섹시하게. 그렇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꾹 참으면서 요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되죠. 안 볼게요.”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요원을 보면서 그럼 그럴까? 싶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그것만큼은 하무경의 자존심이 절대 허락하질 않아.

    “들어가 있어요. 금방 다녀올게. 욕실 타령도 이제 마지막이니.”

    “마지막이요?”

    ‘마지막’이란 단어에 요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혹시 서울로 다시 가시는 건…….”

    “욕실 공사해요. 월요일에.”

    “아.”

    안심한 요원이 다시 무경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빨리 오세요, 하무경 씨. 저 오늘 사실 조금, 음, 그래요.”

    “응?”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무경이 눈썹을 한번 치떴다.

    “하무경 씨 표현법을 빌려 직설적으로 말해드릴까요?”

    “한번 해봐요.”

    요원은 덤덤해 보이는 무경이 갑자기 놀리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오늘 좀.”

    귓속말하듯 손을 입 옆에 갖다 붙인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꼴려요.”

    툭. 남자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겼다.

    펑.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터진 기분도 든다.

    “7분.”

    당장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여자를 간신히 등지고 뒤돌아선 무경이 반쯤 벌어진 셔츠 단추를 다급하게 걸어 잠그면서 도현의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무경의 집보다 언덕에 있는 도현의 집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놈의 욕실. 존나 다 불태워 버릴까. 저 씨발, 망할 놈의 시골집.

    속으로 백만 번 넘게 살벌한 욕을 씹어뱉으면서 말이다.

    ***

    작은 책상 앞에 노트북 하나를 켜두고 앉아있는 도현은, 맥주캔을 입가로 가져가며 아직 제목밖에 쓰지 못한 메일 창을 가만 응시하고 있었다.

    [회장님. 보고드립니다.]

    글자 하나 채우지 못한 본문엔 마우스 커서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다 비운 맥주캔을 손에서 와락 구긴 도현이 하아, 하는 커다란 한숨과 함께 맥주캔을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마른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위아래로 빠르게 문질렀다.

    과거 일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언제였던가.

    도현이 17살, 무경이 19살 때의 일이었던가.

    도현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하 회장은, 무경이 집에 없는 날이면 도현을 자신들과 겸상하지 못하게 했다.

    서서히 동녘 家의 개로 전락시킬 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영특한 도현이 하 회장의 의중을 모를 리 없었고, 너무 똑똑해서 제 주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그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도현은, 무경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밥을 먹는 날이 많았는데 무경이 예상보다 집에 빨리 들어와 제 방문을 벌컥 열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우리 도현이 밥 안 먹고 또 딸 치냐?’

    ‘혀, 형…….’

    더 늦을 거로 생각했던 무경의 난데없는 등장에, 책상에 앉아 밥을 먹던 도현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혀, 형이 왜 지금…….’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형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한다.

    ‘너 왜 밥을…….’

    상처받은 건 나인데, 자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서 있던 형의 얼굴을.

    ‘……그렇게 먹어?’

    문고리를 잡은, 부들부들 떨리는 핏줄 선 형의 손등마저도.

    ‘앉아.’

    도현을 우악스레 끌고 가 식탁 앞에 앉힌 무경과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도현.

    ‘야.’

    ‘…….’

    ‘야!’

    도현의 앞에 앉은 무경이 도현의 의자 다리를 발로 퍽, 세게 걷어차며 소리쳤다.

    ‘어, 어, 형.’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린 도현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무경을 직시했다.

    ‘그래.’

    무경은 그런 도현을 보며 고개를 정확하게 끄덕거렸다.

    ‘그거야.’

    그러고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넌 지금처럼 고개 뻣뻣하게 들고 살아. 그렇게 밥도 먹고, 계속 그렇게 살아.’

    아직 성인이 아님에도 그의 몸짓과 생각과 어투엔 남다른 품격이 배어있었다. 혼외자인 저와는 달리.

    ‘무갱아.’

    상황을 관망하고 앉아있던 하 회장의 나직한 부름에 무경은 매생이굴국을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비틀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도현이한테 이러세요. 도현이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철부지 애새끼처럼 여자에게 홀려 싸지른 건, 아버지 아니에요?’

    ‘하무경!’

    윽박을 내지른 건 하 회장이 아닌 30대의 하태경이었다.

    ‘아버지가 죄인이잖아요. 그럼 도현이한테 미안해하셔야죠. 그런데 왜 도현이가!’

    도현은 정말로 궁금했다.

    ‘왜 아무 죄 없는 우리 도현이가!’

    왜 형은, 혼외자인 자신을 자꾸 품에 끌어안는 건지.

    ‘죄인이 됩니까.’

    한숨처럼 터진 무경의 그 마지막 말엔 도현의 숨도 함께 멎었던 것 같다.

    ‘하무경. 지금 누구 앞이라고 언성을 높여. 아버지께 당장 사과드려.’

    그 당시, 젊은 하태경은 지금보다 얼굴이 더 날카로웠었는데 무경은 19세였던 그때에도 절대로 제 형에게 밀리지 않았다.

    ‘형. 도현이가 걸레 새끼면 우리도 다 똑같은 걸레 새끼야. 잊었어? 우리 같은 피 흐르는 가족이야. 그럼 형도 창놈 누나는 창녀 나도 창놈이어야지. 안 그래?’

    ‘야, 하무경!’

    ‘나이 처먹고 쪽팔린 줄을 알아야지, 이 천하의 잡놈 새끼들이.’

    걸레 밑에서 태어난 더러운 걸레 새끼, 라 자신을 멸시하던 하태경과 하가경을 똑같이 멸시해주었던, 형.

    나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준 나의 유일한 가족.

    나의 형, 하무경.

    그날 밤 도현은,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눈물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쏟아졌던 밤이다.

    갓난아기 때를 제외하곤 처음으로 그렇게 오열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무경에게 고마워 울었던 것인지. 제 상황이 비참해서 울었던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아마,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무경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은.

    내 모든 것을 태워서라도 무경을 반드시 동녘 그룹의 주인으로 앉히겠단 인생 목표를 세웠던 것은.

    형이 원하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니까.

    쾅쾅쾅쾅쾅! 쾅쾅쾅쾅쾅!

    갑자기 집 안을 울리는 커다란 소음에 도현이 움찔거리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쾅쾅쾅쾅!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난 도현이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안 자는 거 알아. 열어, 빨리.”

    지금껏 상상 속에만 있던 무경의 실제 목소리에,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는 도현의 눈동자가 잠시 잘게 흔들렸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고개를 휘저은 도현이 표정을 싹 굳히며 현관문을 열었다.

    “형. 어쩐 일이에요?”

    “욕실 좀 쓰자?”

    다짜고짜 자신을 지나쳐 급하게 욕실로 향하려는 무경의 팔을 도현이 덥석 붙잡아 세웠다.

    “오늘 여기 오시는 날, 아닌 거로 아는데요.”

    “내일 얘기해. 형이 지금 존나 급해.”

    무경이 도현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욕실로 빠른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여자랑 그 짓이나 하려고 오신 거예요?”

    무경의 앞을 다시 가로막아선 도현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 짓이나 하려고 이 시간에 오신 거. 맞아요?”

    조금 전까지 함께 나누었던 요원과의 달콤한 행위에 옅은 미소가 번져있던 무경의 표정이 아주 빠르게 식었다.

    “그 짓? 너 지금 나한테 그 짓이라고 했냐?”

    되묻는 무경의 목소리가 금세 살벌함을 만들어내고.

    “네, 형.”

    도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흠.”

    무경은 그런 도현의 태도를 어딘지 모르게 흡족하게 바라보며 제 아래턱을 문질렀다.

    “그 짓이라.”

    생각하는 척하던 무경이 태연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대답한다.

    “그래, 뭐. 대충 맞는 것 같은데?”

    “형.”

    “왜. 아버지한테 보고하려고? 그럼 이왕 하는 거 동작까지 좀 같이해줄래?”

    난데없이 양손을 들어 올린 무경이.

    “형이 백야에서 이거에 맛들여.”

    왼손 주먹 위에 오른 손바닥을 탁탁탁 치며 섹스를 저급하게 표현하는 손짓을 서슴지 않으며 짓씹었다.

    “아주 맛이 갔더라고.”

    “형!”

    “그렇게 보고하려면 하시라고, 김 작가님. 난 이제 별 상관없으니까.”

    절망스러워 보이는 도현을 무경은 찬바람과 함께 그대로 스쳐 지나갔고.

    쾅!

    거세게 닫힌 욕실 문을 바라보는 도현의 눈동자는 지금, 거대한 해일이 덮친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도 대단히 잘못 돌아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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