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45화 (45/116)
  • 45화. 백야마을의 열 번째 가구

    혼란스러운 표정을 간신히 지운 민수가 동기에게 물었다.

    “사진에 락이 왜 걸려? 상무님에 대한 보안을 뭐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해? 진짜 차기 수장이 상무님이야?”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아는 건 공식적으로 내려온 지시뿐이야.”

    “그게 뭔데?”

    “상무님 홍보 중지.”

    “왜?”

    “모르지.”

    “왜 몰라? 너 홍보팀이잖아.”

    “넌 감사팀 내부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죄다 알아? 꿰고 있어?”

    민수가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도움 못 줘서 미안하고. 정 급하면 상무님 비서실이라도 한번 찔러보든지.”

    “잘릴 일 있어?”

    “왜 잘려? 너 하 상무님 라인이라며?”

    “장난치지 말고. 진짜 방법이 없겠냐? 나 상무님 사진 정말 필요해서 그래.”

    동기가 빨대를 입에 다시 물면서 작게 웅얼거렸다.

    “정 급하면. 신입사원 교육 끝나고 돌아오는 대로 아무나 붙잡고 부탁해 보든지. 오늘 상무님 일정 중에 신입사원 환영 인사 있었거든.”

    “그래?”

    “사진 찍은 애들 백 프로 있어. 늘 그랬잖아.”

    동기가 손을 까딱 흔들며 그대로 뒤돌았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동기야!”

    다시 자동문을 통해 팀 내로 사라지는 동기의 뒤통수에다 대고 크게 외친 민수가, 난처한 얼굴로 제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요원에게 간결한 메시지를 보냈다.

    -요원 씨. 저희 하 상무님 사진 구하는 거 말이에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래요? 제가 반드시 구해다 드릴게요.

    ***

    저녁 8시경, 요원은 성준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팔각정을 찾았다.

    성준은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고 요원 역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채 순경. 지금 어디예요.

    두 시간 전쯤, 무경에게서 받은 메시지였다.

    그 밤 이후, 남자에게서 처음 받은 연락이기도 했다.

    요원은 답장하지 않았고 무경에게서 들어온 메시지도 더는 없었다.

    -채 순경. 지금 어디예요.

    같은 메시지를 몇십 번이고 반복해서 읽던 요원은 이제 몇 번의 터치로 민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액정에 띄웠다.

    -요원 씨. 저희 하 상무님 사진 구하는 거 말이에요.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래요? 제가 반드시 구해다 드릴게요.

    내가 하무경 씨 사진을 찍어서 역으로 보내볼까? 이 사람이 동녘 그룹의 상무인지 확인해 달라고?

    검지로 테이블 위를 툭툭툭 두드리고 있는데, 성준이 핸드폰 액정을 톡톡 터치하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냐?”

    “예?”

    “채 순경 요즘 표정 안 좋은 거 알지? 꼭 차인 사람처럼.”

    성준은 핸드폰 액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요원이 머뭇거리다가 그를 불렀다.

    “경장님.”

    “어.”

    “하무경 씨 말이에요.”

    “어.”

    “이상한 거 못 느끼셨어요?”

    “성격? 아주 이상하지.”

    “아니요.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뭐?”

    “뭔가 수상쩍다거나…….”

    “수상쩍어?”

    뒷말을 흐리는 요원을 이상하게 생각한 성준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두며 눈을 빛낸다.

    “왜. 수상한 놈이야? 서울에서 범죄라도 저지르고 온 것 같아? 전과 조회 한번 해볼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요.”

    “그럼 뭐?”

    “경장님이 먼저 대답해 보세요. 사람 잘 보시잖아요.”

    “뭘 대답하라고?”

    요원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가 제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조금 더 당겨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경장님이 보시기엔 하무경 씨 좀 수상하지 않아요?”

    “음. 수상하지.”

    “수상해요?”

    팔짱을 낀 성준이 의자에 몸을 기대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아주 많이 수상해.”

    “정확히 어떤 점이요?”

    “시계.”

    “시계요?”

    “채 순경도 잘 알겠지만 내가 엄청난 시계 광이잖아. 사지는 못해도 매달 카탈로그는 챙겨본다고.”

    성준이 제 아래턱을 문질렀고 요원은 그의 말에 온 집중을 쏟았다.

    “하무경 씨가 차고 있는 그 모델이 8억짜리거든.”

    “8억이요?”

    “국내에 딱 다섯 개 들어왔다고 해서 내가 그 모델을 정확히 기억해.”

    “국내에 다섯 개요?”

    “그 시계 사면 세무 조사 들어간다는 말도 돌았었고.”

    “그러니까 지금 경장님 말씀은, 하무경 씨 시계가 8억이라는 거잖아요.”

    “아 물론 하무경 씨 건 짭이지. 짭인데. 그 8억짜리 짭을 대체 어디서 구했냐고. 중국이라도 다녀왔나? 그게 참 수상하단 거지. 가품 구매자는 처벌도 안 되는데. 츳.”

    분명, 성준은 웃자고 던진 농이었는데 요원은 웃지 않았다. 되레 더욱 진지해진 낯빛으로 묻는다.

    “만일 그 시계가 진짜라면요?”

    “뭐?”

    당황한 성준이 눈을 한 번 깜빡거렸고, 요원은 마치 제게 확신을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8억짜리 시계를 찰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프로나 될까요? 그런 시계는 어떤 사람들이 차는 걸까요? 경장님 생각은 어떠신데요? 8억짜리 시계를 찰 수 있는 부류는 어떤 부류인 것 같은데요?”

    “뭐 뻔하지 않겠냐?”

    흥미가 떨어진 성준이 다시 핸드폰 속 영상을 재생시키며 대답했다.

    “돈 잘 버는 세계적인 운동선수나 뭐, 재벌가 정도겠지.”

    “재벌가요?”

    “그치. 8억이 껌값인 애들. 졸부도 그 시계는 사기 힘들어. 손 떨려서 사겠냐, 어디.”

    “동녘 그룹 자제 정도면요?”

    “동녘 그룹?”

    성준이 코웃음 쳤다.

    “동녘 그룹 자제면 8억짜리 시계뿐이겠냐. 걔들 작년 영업이익이 얼만데.”

    “얼만데요?”

    끼익, 그들의 바로 뒤편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즈음이었고.

    “한, 6,177억쯤 될걸요?”

    두 사람의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도 그때였다.

    어느새 같은 라인에 앉게 된 요원과 성준은, 반대편의 남자를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자신을 백야마을의 열 번째 가구 주민이라고 소개한 젊은 남자를 말이다.

    남자는 오늘 새벽에 이사를 왔다고 했다.

    우리가 왜 몰랐지? 어떻게 우리가 모를 수가 있었지?

    당황한 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저는 작가예요. 시골 풍경과 사람들이 주된 소재라 잠시 머물게 되었어요. 사투리도 알아야 하고 해서, 겸사겸사요.”

    아, 작가님이시구나. 성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차. 제 이름은 김도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순경님들.”

    도현이 요원을 정시한 채 눈을 휘어 생글 웃었다.

    요원이 순간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 미소에서 불시에 누군가를 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반대편의 김도현이란 작가는 하무경이란 남자를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근데 참 신기하네.”

    성준이 짬뽕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며 별 뜻 없이 중얼거렸다.

    “십 년간 잠잠하던 백야마을에 어떻게 한 달 새에 두 명의 젊은 총각이 동시에 들어와?”

    “저 말고 젊은 총각이 또 있는 모양이죠?”

    도현은 자장면을 비비면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성준은 단무지 쪽으로 젓가락을 쭉 뻗으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이사 오신 분이 또 계시거든요. 백야마을 아홉 번째 가구 주민 하무경 씨라고.”

    도현이 자장면 그릇에 가 있던 시선을 서서히 올려 다시 요원을 직시하며 씨익 웃었다.

    “언제 한번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겠네요.”

    부드러운 인상이라고만 생각했지, 요원은 도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호텔에서는, 요원은 만취 상태로 흐린 눈을 하고 있었고 도현 역시 최대한 그녀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자신을 김도현 작가라고 소개한 이 남자는 사실은 말이다.

    하무경의 그림자이자, 충성심 높은 개로 키워진 무경의 영원한 조력자, 이제는 요원의 또 다른 적이 될 동녘 家의 하도현이었으니.

    아마 지금 무경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무경은 허를 찔린 얼굴로 박장대소했을지도 모른다.

    ‘곧 저흰 다시 보게 될 거예요, 형.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의외의 장소에서요.’

    호텔에서 들었던 그 말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선.

    ***

    깊은 밤, 요원이 자전거와 함께 멈춰 선 곳은 무경의 집 앞이었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니 그가 백야마을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가운 감정이 마음속에 연기처럼 꽉 들어찬 것은 맞지만, 굳게 닫힌 철제문을 바라보는 요원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냉랭하게 식어 있었다.

    그냥 속 시원히 물어볼까? 당신이 동녘 그룹 하무경 상무가 맞느냐고. 그런 대단한 분이 백야마을에 온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아니다. 아니야.

    요원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돌렸다.

    아직 심증만 있는 상태이니 물증을 어느 정도 손에 쥐고서 묻는 게 순서다.

    정말로 그가 백야마을에 온 다른 목적이 있다면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

    그는 거짓에 능한 것 같으니.

    끼이익. 쿵.

    요원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새에 굳게 닫혀있던 철제문은 열렸고.

    “!”

    그녀의 눈앞에 불현듯이 등장한 남자를 바라보는 요원의 눈동자는 의지와는 달리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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