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44화 (44/116)
  • 44화. 차디찬 의심

    요원이 대청마루 위에 한쪽 팔을 베고 누워 구름으로 가득한 청명한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1박에 2천만 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다.

    첫 만남에서부터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한 느낌이 들게 하는 남자임엔 분명했다.

    그랬는데, 분명 처음엔 경계했었는데, 점점 그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저 자신을 발견하면서 그를 경계하던 제 눈에 다른 색안경이 쓰인 건 순간이었다.

    수상하게 여기던 그 경계심이 남자를 알고 싶어지는 수줍은 마음으로.

    사람을 가식으로 대하는 것 같던 그 남자가 점차 상처 많은 남자로.

    그를 향하던 불편함이 커다란 설렘으로.

    그러다가 ‘2천만 원’이란 액수를 일시불로 결제했단 그 사실이 뒤통수를 다시금 후려쳤다.

    정신 차리고 남자를 다시 보라고 누군가가 제게 경고하는 듯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이제 다시 원점이다. 아니. 아예 원점으로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그와는 원점으로 갈 수 없다.

    아아, 나는 왜, 그에게 안긴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까.

    요원이 자신을 질타하듯 얼굴을 위아래로 세게 문질렀다.

    그래. 그랬지, 참.

    시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울 남자가 이 먼 촌구석에 들어온 것부터가 이상했지.

    물론, 누구나 시골에 내려와 살 수는 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왜, 굳이, 백야마을까지 와서 왜, 서울로 면접을 보러 다니는가.

    빚쟁이에 쫓겨 내려왔다고? 쫓겨 내려온 남자는 굳이 왜 또 서울에서 직장을 잡으려 하는가.

    ‘유감입니다. 유감이네요. 유감이에요, 채요원 순경.’

    남자는 뭐가 그리도 유감이고.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내가.’

    뭐가 그리도 미안한 것인지.

    남자가 혼절했었던 그 날이 머릿속을 자연스레 스쳤다.

    그래. 그 일도 잊고 있었지, 참.

    ‘네. 접니다. 바이탈 정상이고 호흡 정상이고 체온 또한 정상입니다. 위경련 맞습니다.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듯한 그 의사 선생 말이다.

    대체 어느 평범한 집안이, 이 먼 시골에까지 의사를 직접 보내 보고를 받을까.

    ‘요원 씨를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알려달라고 하셔서요.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이상하다는 거고요.’

    민수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반복적으로 떠올려보던 요원이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 포털에 접속했다.

    「하무경」이란 이름을 검색해보았으나 아무것도 뜨지 않음에 민수의 목소리를 회상했다.

    ‘저희 상무님이 원래 매스컴 타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긴 한데요. 그래도 사진 한 장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다가 요원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생각이 다른 전환점을 맞는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백야마을의 하무경 씨가 김민수 씨가 말하던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와 동명이인이 아닌 동일인물이라면.

    그다음엔 뭘 어떻게 할 건데?

    정체를 숨기고 백야마을에 들어온 게 뭐 그리도 큰 잘못이야? 가끔 백야마을에 내려와 평범하게 쉬는 걸 수도 있잖아.

    정말 그 남자가 재벌가의 자제가 맞는다면, 그의 삶이 참으로 고단할 테니.

    좋은 풍경을 보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좋은 사람들 곁에서, 평범하게 마음 놓고 쉬는 걸 수도 있잖아.

    요원이 핸드폰을 다시 대청마루 위에 올렸다.

    그래. 돈 많은 게 뭐가 문제야. 재벌가 자제인 게 뭐 그리 문제야.

    사람을 죽이고 이 먼 곳까지 숨어들어온 살인자도 아니고. 백야마을을 어떻게 하려고 들어온 나쁜 놈도 아닌데.

    그런데 만약…… 만약에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12억, 아니, 채요원 씨에겐 특별히 20억이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습니까.’

    ‘집 사서 서울이나 경기권으로 가요.’

    ‘떠나라고. 기분 좋게. 좋잖아요? 20억인데. 땡잡았지.’

    ……그런 놈이라면?

    딱히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딱히 손해를 끼친 일 또한 없는데, 자꾸만 저의 촉이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금 더 경계하라고. 조금 더 수상쩍게 봐보라고. 무언가가 있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로부터 삼십 분이란 시간이 조금 더 흘렀나?

    대청마루 위 핸드폰을 다시 조용히 잡아 올린 요원이 핸드폰 속 누군가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뚜우.

    얼마 신호음이 가지 않아 상대가 달칵,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요원 씨. 저예요.]

    사무실 안인지 상대가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민수 씨. 바쁘신데 전화드려 죄송해요.”

    [저, 잠시만요? 제가 사무실에서 좀 나갈게요.]

    타탁탁, 기계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곧 “요원 씨!”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밝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잘 지내셨어요?”

    요원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아니요. 저는 잘 못 지냈어요.]

    “왜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일이 있죠.]

    “안 좋은 일인가요?”

    [안 좋은 일이죠. 요원 씨를 볼 수 없는 이 현실에 하루하루 눈물을 흘렸으니까요.]

    죽일까, 요원의 고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가 다시 힘을 풀었다.

    지금은 그의 농에 장단을 맞춰줄 여력이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간파했는지 민수가 흠, 하는 민망한 헛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

    [아 참! 저 이번 주 토요일에 내려가려고 하는데요. 성준이 형이랑 얘기도 다 됐고요. 요원 씨도 그 날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하실래요? 시간은 많이 안 빼앗을게요. 십 분도 좋고. 아니 실은 십 분은 짧고요. 한 시간? 아니다. 두세 시간 정도? 너무 욕심인가? 그럼 한 시간 반도 저는 정말 괜찮거든요.]

    “그럼요. 오세요. 이번엔 제가 맛있는 거 대접할게요.”

    요원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은, 뭐라 대답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머리와 입이 따로 노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요원 씨가 밥을 왜 사요. 당연히 성준이 형이 사야죠.]

    지금 한 남자로만 꽉 들어찬 요원의 머릿속엔, 민수가 들어올 틈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사실 그 날, 요원 씨와 그렇게 헤어지고 정말 마음이 많이 쓰였거든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요원 씨.]

    “아닙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그 날 친구와…… 정말 즐겁게 놀았거든요.”

    정말이다. 정말로 그랬다. 친구라 표현한 남자의 품에서, 아주 즐겁게, 헐떡이면서, 몇 번이나.

    무경을 생각하니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나 정말 왜 이러지.

    핸드폰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이유 없이 답답한 가슴을 문질러보았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요원 씨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참 고우신 것 같아요.]

    그만 좀 해라, 요원이 생각하며 눈매를 설핏 찡그렸다.

    보기보다 무뚝뚝한 그녀는, 이런 말들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어쩌면 그래서, 무경의 화법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 생각에 어딘가가 또 욱신거려 이번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민수 씨.”

    찡그려진 눈을 서서히 감은 요원이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전화를 건 이유는, 사실은요.”

    [네, 요원 씨. 편히 말씀하세요.]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아 또 입을 움찔거리다가 다시 연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부탁이요?]

    민수가 한 박자 쉬고 얼른 대답했다.

    [그럼요. 뭐든 말씀만 하세요. 김민수가 뭘 들어드리면 될까요?]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린 요원이 하늘을 가만 바라봤다.

    저 구름이 순간적으로 형태를 바꾸어 다른 남자로 보여 정말 큰 문제였다.

    [요원 씨?]

    “민수 씨가 전에 말씀하셨던 동녘 그룹의 하무경 상무요.”

    더는 머뭇대지 않는 여자의 음성이 공기를 가르고 선선히 퍼진다.

    “사진 좀 구해주시겠어요?”

    차디찬 의심의 시작이었다.

    ***

    민수가 홍보팀 앞에서 제 동기를 기다렸다.

    “김 군. 어쩐 일이야?”

    동기가 팀 내의 자동문 사이로 걸어 나오자 민수는 쥐고 있던 테이크아웃 잔을 그녀의 앞에 내밀며 씩 웃었다.

    “아이스 캐러멜 라테. 네가 좋아하는 드리즐도 잔뜩 올렸어.”

    “웬일이야, 네가?”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든 동기가 수상쩍은 눈짓으로 민수를 쳐다봤다.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뭔데?”

    “하무경 상무님 말이야. 사진이고 기사고 뭐고 포털에서 죄다 지워졌던데? 심지어 사내 시스템에도 상무님 사진이 하나가 없다?”

    “그래서?”

    “동기야.”

    갑자기 제 동기의 손을 덥석 붙잡은 민수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상무님 사진 한 장만 좀 주면 안 되냐? 동기 좋다는 게 뭐야. 내가 진짜로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해서 그래.”

    “상무님 사진은 갑자기 왜?”

    “어? 아니 뭐 그냥…….”

    민수가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동경하니까?”

    “지랄하고 앉았네.”

    커피를 쭉 한번 빨아올린 동기가 빨대를 뱉어내며 말했다.

    “얼마 전에 하 상무님이랑 같이 식사했단 소문이 돌더니만. 그게 진짜인 모양이지?”

    “와. 나 벌써 유명인사 된 거야?”

    “진짜로 같이 먹었어? 하무경 상무님이랑?”

    “응. 우리 팀장님도 같이.”

    “네가 왜?”

    “몰라.”

    “몰라?”

    “아무래도 내가 상무님 라인이 되려나 봐?”

    “그러니까 네가? 하 상무님 라인이? 대체 왜?”

    하무경 상무 라인과는 전혀 결이 다른 민수를, 동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위아래로 쭉 한번 스캔했다.

    “뭘 또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 사람 상처받게.”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

    “사실은 나도 그래. 아무튼, 동기야.”

    동기의 손을 다시금 덥석 붙잡은 민수가 절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 사진 한 장만 좀 주라. 진짜 아무거나 괜찮거든? 흐릿해도 돼. 홍보팀엔 상무님 사진 많을 거 아니야.”

    “많지. 근데 못 줘.”

    “왜? 걸릴까 봐? 몰래 주면 안 돼? 내가 너한테 받은 거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거고 절대로 유출도 안 시킬 거고, 그리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깔끔하게 고개를 저은 동기가 말한다.

    “락 걸렸어.”

    그녀의 말에 민수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락?”

    사진에 락(lock)이 걸리다니.

    스케일이 남다른 보안에 민수는 또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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