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46화 (46/116)
  • 46화. 검은 코끼리

    “……하무경 씨.”

    남자를 향한 여자의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요원의 눈동자에 짙게 묻었다가 금세 또 자취를 감췄다.

    후우-.

    비스듬하게 문 담배를 볼이 움푹 팰 정도로 깊숙이 빨아들인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슬쩍 틀어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메시지 못 받았어요?”

    바닥에 담뱃재를 툭툭 무심하게 털면서 무경이 물었다.

    “받았어요.”

    요원은 자전거와 함께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대답했다.

    “받았는데 왜 씹지? 왜 씹어요?”

    “바빴어요.”

    한 발짝 더 앞으로 걸어 나온 무경이 담배꽁초를 발 앞에 툭 던져 꽁초를 발로 짓이겼다.

    “뭐 하느라.”

    바닥에 가 있던 시선을 추켜올린 무경이 요원을 빤히 쳐다보다가 눈썹을 한 번 치뜨며 되물었다.

    “응? 뭐 했는데요, 채 순경님.”

    “밥 먹었는데요.”

    생각보다 싱거운 여자의 답변에 무경은 김빠진 웃음을 연기처럼 흘렸다.

    “그럼 밥 먹는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나 혼자 영화 찍었잖아요.”

    “영화요?”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아탔어요. 그런데 그 기사님이 길을 많이 헤매시더라고. 나는 마음이 한시가 급해 뒤지겠는데 말이에요.”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입에 문 무경이 라이터를 탕, 위로 올려 불을 붙이려다가 멈칫했다.

    비흡연자인 요원 때문이었다.

    “채 순경에겐 언제 답이 올까.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택시 안에서 내내 핸드폰만 바라봤어요.”

    담배를 중지와 검지 사이에서 톡, 가볍게 부러트린 무경이 요원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며 상냥한 빛으로 웃었다.

    “그렇게 내가 아주 등신처럼 말이에요, 채요원 순경님.”

    즐거워서 웃는 미소는 절대로 아니었다.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하고 눈싸움만 존나 지겹게 하다가 말이에요. 캐리어를 글쎄 택시에 두고 내렸네?”

    킥, 남자가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부러트린 담배를 옆으로 던진다.

    “그때부터 사람 환장하는 거죠. 내가 택시 기사 번호를 알아요, 아니면 차량 번호를 알아요. 시골 택시라 서울처럼 핸드폰으로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가방은 찾으셨어요?”

    “찾았겠어요?”

    “정확히 어디에서 타셨는데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요원이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채 순경.”

    “네.”

    “채요원 씨.”

    “네.”

    “이 말의 요점은 지금.”

    “네.”

    “가방이 아니잖아.”

    평소와는 다른 섬뜩한 목소리에,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던 요원이 눈을 슬며시 올려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요점이 뭔데요?”

    “나는 채 순경이.”

    “네.”

    “존나게 보고 싶었다고.”

    남자의 보고 싶었단 말에, 핸드폰을 터치하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도 바짝 커다란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채 순경은.”

    무경의 뻗어진 손이 요원의 뺨을 잡으려는데 요원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그 손을 피했다.

    “아니었나 봐.”

    그런 요원을 보며 무경은 상처받은 사람처럼 눈썹을 한번 찡그렸는데.

    “난 채 순경 한번 보겠다고 미친놈처럼 죄다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음성엔 묘한 웃음기가 배어있어 아이러니했다.

    한쪽은 뜨거운 열병을, 또 다른 한쪽은 차디찬 의심을 시작한, 이 두 사람처럼.

    “캐리어는 사실 찾았습니다.”

    허공에서 굳어있던 무경의 손이 다시 요원에게서 멀어지며 남자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들려왔다.

    “그러니 괘념치 마시라고.”

    “죄송해요.”

    “뭐가요.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여자의 싸늘한 답변에 남자의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가 갔다.

    아주 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 무경의 잇새에서 기가 찬 웃음이 비집고 흘렀다.

    하하. 아까보다 조금 더 호쾌하게 웃은 무경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 이마를 잠시 문질렀다.

    “꼭 그런 기분이네. 나는 사랑한다고 절절히 고백했는데 상대에게서 고맙단 말로 답을 받은 기분.”

    무경이 주머니를 뒤적여 멘톨 틴케이스를 꺼냈다. 담배를 태운 뒤에 멘톨 사탕을 먹는 것은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거절당한 것보다 더 비참하잖아요?”

    그가 멘톨 사탕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낮게 웃었다. 기분 좋아 웃는 표정은 또 아니었다.

    “그건 하무경 씨의 경험담인가요?”

    “나 지금 까인 건가?”

    “지금 고백하신 거예요?”

    무경의 말문이 막혔다.

    순간, 쌍팔년도의 유치한 드라마가 머리를 스쳤다. 날 이렇게 대하는 건 네가 처음이야, 라고 말하던 그런 유의 드라마.

    그런데 하필이면, 그 쌍팔년도의 상황이 지금 무경과 딱 들어맞아 어이가 없는 거다.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여자는 네가 정말 처음이라.

    “…….”

    고요한 미소를 띤 채 요원을 바라보던 무경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아까부터 저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에서 어딘지 모를 생경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품에서 좋다고 몇 번이나 더 해달라 매달릴 땐 언제고, 더 세게 해달라, 더 빠르게 해달라 주문할 땐 언제고.

    지금은 아예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경계를 심하게 풀지 않는 모습이니.

    가만있어 봐. 우리가 지금 잠자리 이후에 처음 만나는 거 아니야?

    잠자리 이후에 여자의 눈빛과 태도가 묘하게 변한 거니까. 혹시, 나와의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나? 막상 자고 나니 이 새끼 이거 별거 없네, 뭐 그런 마음을 가졌나?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가? 설마, 진짜. 그런 건가?

    나는 안고 나니 더 뜨거워졌는데, 이 여자는 나에게 안기고 나니 차게 식었나.

    미치고 환장하고 존나 뒤집어지겠네. 아무 여자나 붙잡고 나 잘하냐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늘 빠르게 돌아가는 무경의 비상한 머리가 처음으로 녹슨 것처럼 삐거덕거린 순간이었다.

    “그 시계 말이에요.”

    이런 남자의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마음도 모르고, 요원은 무경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메탈 시계를 턱짓했다.

    지금 너는 이 상황에서 존나 이깟 시계가 중요하냐고 따져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무경은 한숨까지 억눌렀다.

    “내 시계. 내 시계가 왜.”

    “얼마예요?”

    “왜 묻는데.”

    “예뻐서요. 저희 아버지 사드리고 싶어서.”

    하? 냉소적인 웃음을 터트린 무경이 미간을 긁어 올리면서 비아냥대듯 혼자 중얼거렸다.

    “아주 효녀 납셨네.”

    제 손목의 시계를 잘그락, 푼 무경이 이젠 그 시계를 요원의 앞에 내밀었다.

    “이걸 왜 절 주세요?”

    “채 사장님 드리세요. 아버지 사드리고 싶다며.”

    “제가 사드릴 건데요.”

    “채 순경은 이 시계 못 삽니다. 이제 못 구할 거거든.”

    “왜요?”

    “더 안 나오는 모델이니까.”

    “비싼 건가 봐요. 한정판 뭐, 그런 건가?”

    “기억 안 나요.”

    “기억해 보세요.”

    “심문해요, 지금?”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시계가 되게 비싼 거면. 그땐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요.”

    남자가 픽, 매혹적으로 웃으면서 장난스러운 어조로 대꾸한다.

    “채 순경 땡잡았네? 하겠지.”

    그런 무경을 말없이 잠시 올려다보던 요원이 그대로 손을 뻗어 시곗줄을 잡아챘다.

    이 시계를 감정원에 보내 보면 어떨까. 정말 8억짜리가 맞는지.

    성준의 말대로 이 시계가 대한민국에 딱 다섯 개만 들어온 거라면, 이 시계가 세무 조사를 받을 만큼 그렇게 대단한 거라면, 내 앞의 이 남자가 대체 누군지, 여기엔 왜 온 건지, 조금은 실마리가 잡히진 않을까 해서.

    “하무경 씨.”

    요원은, 시곗줄을 힘 있게 잡은 채로 무경에게 물었다.

    “하무경 씨는 제가 알고 있는 그 하무경 씨가 맞는 거죠?”

    맞기를 바란다. 앞으로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러한 열병과도 같은 감정을 갖기는 힘들 것 같으니.

    “채 순경이 알고 있는 그 하무경은 어떤 사람인데요.”

    무경이 홀린 듯 요원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백수여도 누구보다 자신감 하나는 충만한 사람이요. 그래서 더 있어 보이는 남자요. 언젠가 꼭 성공할 것만 같은 남자요.”

    달빛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너무도 맑고 아름다웠으니.

    “또.”

    무경이 여자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물었다.

    “표현은 비록 거칠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심은 깊은 사람이요. 그래서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을 진정성 있게 대해요.”

    다시, 한 걸음 더.

    “누굴 속일 줄을 몰라요. 거짓말도 몰라요. 그런 진솔한 사람이에요, 제가 아는 하무경 씨는.”

    요원의 바로 앞에 무경이 우뚝, 장승처럼 곧게 멈춰 섰다.

    “그런 사람이 맞는 거죠?”

    무경에게서 대답이 없자 요원은 대답을 강요하듯 재차 되물었다.

    “하무경 씨. 맞아요?”

    요원을 극명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무경이 느리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맞아요.”

    남자에게서 확실한 대답을 들은 그제야, 시곗줄을 꽉 붙잡고 있던 요원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그래. 믿어보자. 남자가 맞다고 하니. 한번 믿어보자.

    “그럼…… 됐어요.”

    쥐고 있는 시계를 무경의 바지 주머니 안에 다시 쑥, 집어넣으면서 요원은 미약하게 미소 지었다.

    “믿을게요.”

    여자의 미소는 참으로 예뻤다. 저 하늘의 달보다, 별보다 더.

    “이거 진짜 큰일이네요.”

    그래서 무경은, 환상적인 장면을 보는 사람과도 같은 표정을 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채 순경 너한테.”

    이번엔 거짓이 아닌.

    “완전히 감겼으니.”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무경의 큼지막한 손이 요원의 두 뺨을 순식간에 뒤덮었고, 고개를 사선으로 비틀며 다가간 그가 그녀의 입술 역시 한입에 집어삼켰다.

    “…….”

    굳게 닫힌 요원의 입술을 혀로 갈라 벌리는 남자의 찡그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요원은, 서서히 제 눈꺼풀을 닫았다.

    그날 밤.

    무경은 요원의 눈을 보며 제대로 대답했어야 했다.

    나는 사실, 네가 알고 있는 그 하무경이 아니라고.

    그랬더라면.

    어쩌면 요원은 무경을 용서해줬을지도 모른다.

    그토록이나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으니.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다는 것을, 무경은 그때 정말로 몰랐었다.

    *검은 코끼리: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면서 해결하지 않는 문제를 의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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