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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과백야-7화 (7/116)
  • 7화. 나는 정말 쉬워

    요원이 소속되어 있는 파출소는 백야마을과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작은 시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교통수단은 자전거.

    차를 타면 10분이면 가겠지만 자전거 생활이 익숙한 요원에겐 자전거가 더 편했다.

    주로 식사는 파출소에서 때우지만, 백야마을에서 볼일이 있을 땐 간혹가다 집에서 먹기도 한다.

    “할머니. 저 밥 주세요.”

    “이잉. 왔냐잉?”

    제집 마당 한편에 자전거를 세워둔 요원이 엉덩이를 탁탁 털며 대청마루 위 밥상으로 향했다.

    이미 밥상 위에 준비된 세 개의 국수 그릇을 보고 요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두 개의 그릇엔 국물만이 남았고 요원의 그릇만이 새것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릇이 세 개예요? 아버지께서도 집에서 드시고 가셨어요?”

    과수원을 운영하는 요원의 아버지 채일섭은, 대부분의 식사를 과수원 내에서 해결했기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총각이 먹었재.”

    “총각이요? 누구요?”

    “이 마을에 총각이 하나밖에 더 있냐잉? 이사 온 총각 말여!”

    “하무경 씨요? 할머니 하무경 씨 만나셨어요?”

    “이잉. 이름이 그거당가?”

    “그래서 국수 먹이고 보내신 거예요?”

    “아직 안 갔어야.”

    “어디 있는데요?”

    “밥값 하고 있제.”

    “밥값이요?”

    “뒷마당에 가봐라잉.”

    젓가락을 황급히 내려둔 요원이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본채의 뒷마당으로 타탁 타탁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갑순이 자르라는 나무 한 그루를 서늘하게 응시하던 무경이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피식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재밌네. 재밌어. 이 동네 아주 재밌어.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무경이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상무님. 전화 받았습니다.]

    “차 실장님. 식사는 하셨어요?”

    [맛있게 먹었습니다. 상무님께선 식사하셨습니까?]

    “먹었고. 내가 지금 나무를 좀 잘라야 되는데요.”

    [예?]

    “어떻게 하죠? 톱은 들고 있는데.”

    [톱…… 나무…… 대체 누가 상무님께 그런 일을…….]

    “어떤 마을 어르신께서.”

    무경의 잇새에서 자꾸만 의미 없는 웃음이 흘렀다.

    “국수 한 그릇 먹여놓곤 밥값을 하고 가라 하시니까. 이거 참 난감하게 됐어요.”

    [상무님. 돈을 좀 드리시면 어떨까요?]

    “말도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지폐 내밀었다가 숟가락으로 처맞을 뻔했으니까.”

    태호에게선 한동안 들려오는 말이 없었다.

    웃고 있는 것은 아니고 태호는 진심으로 놀란 것이었다.

    하긴. 동녘 그룹의 하무경이 밥 먹다가 처맞는 그림을 감히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나.

    하 회장이 무경을 어떻게 키웠나. 금이야 옥이야. 어화둥둥 내 새끼. 막내아들이라면 도가 지나칠 정도로 물고 빨지를 않았나.

    “차 실장님?”

    [예, 예, 상무님.]

    “나 기다리고 있는데요.”

    [아, 예. 어…… 나무요. 그렇죠. 나무를 자르셔야 하는데. 우선 톱을 들고 계시다는 거죠?]

    “네. 들고 있습니다.”

    [그럼 그 톱으로 이렇게…….]

    “이렇게?”

    [슥삭슥삭…….]

    “슥…….”

    무경이 말을 하다 멈추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태호도 제 대답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아는 눈치다. 불안정하게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리는 것을 보니.

    “차 실장님.”

    [예, 상무님. 죄송합니다. 제가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무경이 한마디 하려다 말고 체념했다.

    하긴. 나와 같은 서울 태생인 차 실장이 이걸 어떻게 알겠나. 차 실장이 만능 박사도 아니고. 중간에서 불쌍하기만 하지, 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괜히 바쁜 사람 붙잡고 심란하게만 했네.”

    [아닙니다. 상무님께서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제 마음이 안 좋습니다.]

    “고생은 무슨. 이 짓거리 2개월만 하면 동녘이 다 내 건데. 내겐 오히려 기회죠.”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다른 건 됐고. 이번 주 토요일에 갤러리아 예약 좀 잡아두세요. 오후 1시쯤 간다고. 두 시간 정도 쇼퍼 필요하다고.”

    [예, 상무님.]

    “또 통화합시다.”

    [예, 상무님. 고생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무경이 제 주머니에 핸드폰을 찔러 넣던 때였다.

    “저기, 선생님?”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무경이 고개를 돌리자, 멀끔한 순경복을 잘 매만지는 여자가 저를 향해 한 발 두 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채 순경님?”

    요원의 뜻밖의 등장에 무경은 눈을 치떴다.

    “안녕하세요.”

    “순경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여기가.”

    고저 없는 음성이었지만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혹시 저 어르신이.”

    “네. 저희 할머니세요.”

    “저분이.”

    “네. 그거 이리로…… 저 주세요.”

    어느덧 무경의 곁으로 바짝 다가선 요원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톱을 제 손으로 부드럽게 앗아갔다.

    순간적으로 스친 손끝이 뜨거워서 무경은 제 텅 빈 손을 잠시 비스듬히 깔아봤다가, 다시 올라온 시선의 끝이 여자의 말간 얼굴에 잠시 머무른다.

    요원은 오늘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가슴께를 뒤덮고 있는 머리카락은 구불거렸다.

    여리여리한 몸과 희고 말간 얼굴에 어울리는 스타일.

    사슴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하고.

    직업에 대한 색안경일 수도 있겠으나, 강인한 이미지의 순경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다가 문득, 미국의 애니메이션 하나를 떠올렸다. 토끼가 경찰이었던가?

    꼭 이 여자 같은데.

    “제가 나중에 하면 되는데 왜 할머니는 굳이 이걸 선생님께…….”

    “순경님은 나무도 자르시나?”

    “선생님은 못 하시죠?”

    “나는 솔직히 해본 적이 없네요.”

    “그럼 못 한다고 하시지 왜…….”

    “내가 안 했을까요? 순경님이 더 잘 아실 텐데?”

    무경이 핵심을 정확히 짚었고 요원은 상상할 수 있었다.

    나무를 못 자른다는 무경과 뭔 사내새끼가 나무 하나 못 자르냐고, 그래서 밤에 남자 구실이나 하겠냐며 구박했을 갑순의 모습이.

    “할머니도 참.”

    요원이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그를 비웃은 건 아니었으나 무경의 눈매는 이미 찡그려진 뒤다.

    이 여자가 지금 날 비웃는 건가?

    무경은 아까보다 더 정색하며 요원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봤다.

    그의 이런 반응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 누가 동녘 그룹 상무의 면전에서 이렇게 대놓고 그를 비웃을 수가 있겠나.

    얼마 전 일만 해도 그렇다.

    분명 집무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몰상식한 짓을 한 사람은 무경이고 비흡연자 직원은 단지 그 매캐한 연기를 견디지 못하여 본능적으로 기침을 터트린 것밖에는 없는데, 무경이 가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죄송하다 고개 숙여 사과하지 않았나.

    그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무경이다 보니, 백야마을에서 겪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국수는 맛있게 드셨어요?”

    무경의 기분이 언짢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원은 아까보다 더 상냥한 낯빛으로 물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분명 분통은 터지는데 화는 못 내겠네.

    이래서. 옛말 하나 틀린 거 없다니까.

    “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국수 되게 잘하시죠?”

    “네. 뭐.”

    “저희 할머니가 한땐 국숫집을 운영하셨거든요. 단골이 많았어요.”

    손목에 걸었던 머리끈을 앞니로 꽉 문 요원이 풀어헤친 머리칼을 하나로 잡아 갑자기 묶기 시작했다.

    요원의 머리 묶는 모습을 무경은 어느덧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요원은, 머리를 묶으면서도 무경을 계속해서 힐끗거렸다.

    그는 양반처럼 뒷짐을 지고 서 있었는데, 후드티 차림이어도 처음 하천에서 보았던 그 날렵한 이미지와 고귀한 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참 오묘한 분위기의 남자다.

    요원은 저의 뜨거워진 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파마했었구나. 왜 몰랐지, 싶어서.”

    “저를 계속 밤에만 보셨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눈썰미가 있는 사람인데.”

    “꽉 묶으면 잘 몰라요.”

    “풀지 그래요? 푸는 게 더 어울리는데.”

    “근무 중엔 묶는 게 더 편해서요.”

    “그거 히피펌인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 무경이 다시 본채로 넘어가기 위해 요원을 등지고 걸었다.

    느리지만 단호한 걸음. 절대로 숙이지 않는 꼿꼿한 자태. 절제된 몸짓. 우월한 분위기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어떻게 아셨어요? 남자들은 원래 잘 모르던데요.”

    요원이 그의 뒤를 냉큼 쫓으며 물었다.

    “그냥. 딱 보니 알겠는데.”

    무경은 무던한 얼굴로 대답했다.

    요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점차 멀어지는 무경의 뒤태를 가만 응시했다.

    어제는 분명 그의 취조하는 듯한 대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은 또 대화를 하다 보니 꽤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어제는 아무래도 첫날이어서, 낯설어서 그랬던 것일까?

    경계가 벌써 해제되나. 나는 정말 쉬워.

    요원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웃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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