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8화 (8/116)
  • 8화. 절대 쉽지 않아

    “벌써 다 했냐?”

    대청마루 위에 털썩 앉는 무경을 향해 주방에서 나온 갑순이 물었다.

    “아니요, 어르신. 손녀분께서 하시겠다고 하네요.”

    습관처럼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리고 앉은 무경이 두 손으로 대청마루를 짚고선 정면을 주시했다.

    자신이 거주하는 폐가와는 차원이 다른 마당이라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정화되는 알록달록한 화단하며, 연분홍 꽃이 주렁주렁 열매처럼 어여쁘게 매달려 있는 큰 나무하며.

    따뜻한 온기가 물씬 스며들어 있는 곳이 아닌가.

    “야이 오사랄 놈아! 내가 시방 너한테 시켰지 울 손녀한테 시켰냐!”

    그 평화를 깨는 갑순의 뾰족한 목소리에 무경이 제 근처에 있는 요원을 향해 물었다.

    “순경님. 내가 설마 설마 해서 묻는데. 오사랄 놈이 혹시 욕인가?”

    “네, 뭐. 그렇다고 봐야죠?”

    어느덧 무경의 곁으로 다가온 요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회장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욕설에 무경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내가 진짜 살다 살다, 별.

    제 머리칼 안쪽에 손을 찔러넣은 무경은 갑순을 매섭게 돌아보았지만,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점잖은 어투를 뽐냈다.

    “어르신. 제가 한평생 나무를 잘라본 적이 없는데 저걸 어떻게 합니까?”

    “오메. 그 나이 처먹도록 나무도 안 잘라보고 뭐 했댜. 니 톱은 쓸 줄 아냐?”

    “제가 톱을 왜 쓰죠. 쓸 일이 없는데요. 톱 안 쓰고도 여태껏 잘만 살았는데요.”

    “니 멋하다 온 놈이여?”

    “제가 설명해 드린다 한들 어르신께서 무슨 일인지 아시는지.”

    “이잉. 딱 봐도 백수구마잉.”

    “말씀을 좀 심하게 하시는 경향이 있네요.”

    “너 잔말 말고 내일부터 우리 과수원서 일 잔 해라잉.”

    “제가 과수원에서 일을 왜 하죠.”

    “니도 인자 백야마을서 밥벌이를 해야제!”

    “제 밥벌이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어르신께선 신경 끄시죠.”

    “옴마? 얼굴은 허여멀건 허니 잘생겨가꼬 *느자구는 참말로 없다잉.”

    “느자구는 또 뭔데요. 그것도 설마 욕이에요?”

    “자자.”

    동네에서 싸움이 터지면 가장 먼저 말리러 가는 백야마을의 지킴이답게, 요원이 무경과 갑순 사이에 껴서 진정하라는 듯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두 분. 우선 진정들 좀 하시고요.”

    “진정은 순경님이나 하시고.”

    무경이 요원을 향해 긴 팔을 뻗은 건 찰나였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대청마루 쪽으로 휙 단숨에 끌어당긴 것도 아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국수나 드세요. 다 불었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대청마루 위에 털썩 주저앉은 요원의 입술이 작게 떨어졌다.

    그의 손이 스쳐 지나간 제 손목이 지릿지릿 울리는 것이 꼭 전기에 감전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용무가 아직 남아서.”

    “백수가 뭔 용무가 있댜.”

    대청마루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무경이 뒷짐 진 채로 돌아서서 갑순을 잠시 가만 내려다봤다.

    저 어르신, 참.

    무언가 한마디 하기 위해 입술을 들썩였다가 이내 다시 굳게 다문다.

    “어르신. 국수 맛있게 잘 먹고 갑니다.”

    그가 허리를 45도 각도로 숙였다. 칼같이 정확한 각도였다.

    “그랴. 어서 들가보더라고.”

    갑순은 자신이 언제 무경에게 화를 냈냐는 듯 인자하게 눈을 휘어 웃으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무경의 검은 시선이 이젠 대청마루 위의 요원에게로 옮겨간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나무도 잘 자르시고.”

    “예? 아, 예. 들어가세요.”

    무경에게 꾸벅 묵례한 요원이 젓가락을 들고 국수 면을 휘휘 저어 풀 때였다.

    “아. 그런데 말이에요, 순경님.”

    다시 대청마루 위에 몸을 털썩 앉힌 무경이 화단에 피어있는 주홍빛꽃을 검지로 가리키며 묻는다.

    “저 꽃, 양귀비 맞나?”

    요원이 국수를 한 젓가락 후루룩 입안으로 빨아들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요. 양귀비.”

    “가까이 가서 봐도 돼요?”

    “그럼요.”

    대청마루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남자가 성큼성큼 화단 쪽으로 걸어간다.

    그의 비율 좋은 뒤태를 힐끗거리면서 요원은, 계속해서 국수를 후루룩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허리를 굽혀 양귀비를 가만 바라보던 무경이 다시 허리를 세우고는 마당을 고요한 눈으로 휘 한번 살폈다.

    “마당이 참 예쁘네. 집도 예쁘고. 특히 이 화단. 꽃이 참…….”

    고개의 각도를 측면으로 튼 무경이 국수를 먹고 있는 요원의 옆태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예쁘네.”

    가느다랗고 하얀 목선이 특히, 참.

    “화단이요?”

    젓가락을 내려둔 요원이 대청마루 위에서 조금 급하게 내려와 무경의 곁으로 훌쩍 다가왔다.

    바짝 다가온 얼굴이 저 꽃보다 더 화사하게 웃으며 무경을 올려다보는데, 햇볕에 반사된 얼굴이 눈이 부신 건지. 여자의 얼굴 자체가 너무도 새하얘서 눈이 부신 건지.

    참 맑네, 맑아. 더럽히고 싶게.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무경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찡그리며 혀를 츳 짜증스레 찼다.

    요원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굳이 궁금하지 않은 부분을 들려주었다.

    “화단은 저희 어머니 작품이에요.”

    그 말엔 무경이 별 감흥 없는 얼굴로 아, 하고 탄식했다.

    “하필 또 어머니야?”

    “하필이요?”

    “채요원 순경. 내가 참.”

    “뭐요. 유감이라고요?”

    여자가 아무것도 모르고 웃는다.

    “선생님은 뭐가 그리도 유감이세요?”

    웃음기 밴 목소리에 가시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저를 경계했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 경계는 금세 허물어지고 해제되어 있었다.

    단 하루 만에.

    어휴. 이렇게나 착해 빠져선.

    무경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다시 멀쩡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그냥 다 유감이네, 나는.”

    요원의 얼굴을 제 눈에 각인시키듯이 샅샅이 뜯어보면서 무경은 물었다.

    “혹시 자장면 좋아해요?”

    “자장면이요?”

    “시내에 맛집 하나 있다던데.”

    “팔각정을 말씀하시는 건가?”

    “뭐. 그랬던 것 같네요.”

    “맛있죠. 그 집.”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왜요?”

    “방금 물었잖아. 자장면 좋아하냐고. 이게 뭐 같은데.”

    “같이 저녁 먹자고요?”

    “잘 알면서 되물어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자신을 금세 이런 생각들로 합리화시킨다.

    젊은 피를 먼저 공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금 경계가 무너진 상태이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온전한 제 편으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어찌 보면 마을 내에서 가장 젊은 이 여자가 복병이 될 수도 있다.

    공략이 가장 쉽거나 어렵거나. 합의가 가장 쉽거나 어렵거나. 말이 가장 잘 통하거나 아예 통하질 않거나.

    하필 또, 이 마을을 지키는 순경이라잖아?

    눈앞의 이 여자는 모 아니면 도.

    그러니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무슨 수를 써서든.

    잠시 머뭇대던 요원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한다.

    “좋아요.”

    시원시원하시네.

    “파출소 앞으로 데리러 가죠. 몇 시 퇴근?”

    “오늘은 저녁 7시 퇴근이에요.”

    “번호 줘요.”

    무경이 요원의 앞에 핸드폰을 비스듬히 내밀었다.

    “번호요? 제 핸드폰 번호요?”

    “그럼 뭐, 중국집 번호를 달라고 할까?”

    “근데 왜 선생님은 자꾸 말씀을 그렇게 하시죠?”

    “내가 말을 어떻게 했죠.”

    “꼭 싸우자는 것 같아서요. 시비조 같아서.”

    “내가 그랬어요?”

    “원래 말투가 그러신 건가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말투를 지적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으니 당연했다.

    “좋게 말씀하셔도 다 알아듣는데, 그러실 필요가 있어요?”

    나 하무경이 받아칠 말이 없어.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아. 이것 참 존나 골 때리네.

    무경이 즐겁지 않은 얼굴로 볼 안쪽을 의미 없이 혀로 찌를 때, 요원은 이미 그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꾹꾹 눌러 저장까지 하곤 그 핸드폰을 무경에게 넘기며 생글 웃고 있었다.

    “제 번호요.”

    이 여자 말이야. 보면 볼수록 강적이야. 절대 쉽지 않아.

    그래도 여전히 유감이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고, 여태껏 나보다 더 센 사람을 만난 기억조차 없으니.

    그래서 난 유감이야.

    “채 순경님.”

    무경이 불순한 생각을 머릿속에 담은 채 상냥한 미소로 말했다.

    “볼수록 되게 매력 있네.”

    “네?”

    “작업 아니고 칭찬이니 오해는 마시고.”

    무경의 농염한 웃음에 요원의 귓가가 순식간에 벌게졌다.

    “오해한 적 없습니다.”

    무경은 순간 여자의 얼굴이 순백의 도화지 같다 생각했다.

    물감을 뿌리면 뿌리는 대로, 먹칠을 하면 하는 대로, 그 감정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다 드러났으니.

    무경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른 여자다.

    무경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기본 두 개다.

    자신을 숨기고 포장을 할 때와 민낯을 보여야 할 때를 잘 안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 하나 숨기지를 못하는 이 여자는 참, 이걸 재밌다고 해야 할지, 너무 순수해서 답답하다고 해야 할지.

    백야마을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재미있는 곳이 아니던가.

    “…….”

    “…….”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가운데에 하나 두고 서 있다.

    ***

    해가 산턱에 걸쳐있는 느지막한 오후.

    백야마을 입구 앞에 멈춰 선 포터에서 무경이 훌쩍 뛰어내렸다.

    손엔 어울리지 않는 시장표 검은 봉지도 들려있다.

    “박재현 실장님.”

    “사, 상무님.”

    그의 호출을 받고 내려온 동녘 그룹 내 사업부, 점포개발 상권분석팀 박 실장이 그의 앞에서 냉큼 허리를 꺾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상무님이 부르시는데 어디든 못 오겠습니까.”

    허리를 바로 세운 박 실장은 어느 정도 이야기를 전해 듣고 왔음에도 당혹스러운 얼굴을 쉬이 감추지 못하였다.

    천하의 하무경이 포터라니. 천하의 하무경 손에 검은 봉다리라니,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차태호 실장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어 잘 알리라 생각합니다. 회장님이 내게 따로 주신 사업 건입니다. 이거 무조건 성공시켜야 돼요.”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박 실장은 하무경 라인 중 한 사람이었는데, 능력이 출중하기로 알아줬다.

    동녘 그룹 내에서 하무경 라인에 속하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워낙 출중한 사람들만 있다 보니 웬만히 뛰어나지 않고서야 무경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

    무경은 이제 박 실장과 함께 백야마을 내를 가늠하듯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눈대중으로 보고 잘 한번 분석해보세요, 박 실장님. 이 마을 밀고 아웃렛 깔려면. 얼마나 걸리겠어요?”

    “생각보다 부지가 꽤 넓네요, 상무님.”

    박 실장이 매의 눈으로 사방을 휘 살피다가 정중하게 물었다.

    “제게서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상무님.”

    “최대 8개월. 그 답 외론 안 받습니다.”

    절대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나 또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방법은 다 존재한다. 인력을 몇 배로 늘려서라도 하면 된다. 하무경 상무를 수장 자리에 앉힐 수만 있다면.

    하무경 상무를 향한 하무경 라인의 충성도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대단했기에 박 실장은 비장한 표정으로 흡족한 답변을 내놓았다.

    “최대 8개월 정도 걸리겠네요.”

    그때까지 무경은 정말, 모든 게 다 쉬울 줄로만 알았다.

    죄다 쉬워 보였다.

    *느자구없다 : 싹수없다의 전라도 방언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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