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누구의 목숨을 노리는 건가?
차라리 정확한 답이 있는 질문을 해주면 좋겠다.
이건 뭐 연정에 관한 젬병이니, 이런 상황에 어떻게 거절해야 하고,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욱신거린다.
“장군님, 저는….”
그때 마침 들려오는 인기척에, 팽팽하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세자가 근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예서 뭐 하는 건가?”
두화는 마침 불편하기만 한 상황에 세자의 등장이 퍽 고맙게 여겨졌다.
도헌이 세자에게 예를 갖추며 아뢰었다.
“두화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았습니다.”
“할 말이라는 것이 뭐지?”
도헌도 이번만큼은 세자에게 물러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바로 말하였다.
“…남녀 간의 일이니, 저하께서 개의칠 일이 아니옵니다.”
남녀 간의 일?
순간 자한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지다 펴졌다.
두화도 차갑게 바뀌는 세자의 얼굴을 보았다. 차갑다 못해 무섭게 변한 자한이 뭐라 한마디 하려던 그때, 앞마당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날카로운 비명에 도헌은 직감적으로 좋은 의도로 찾은 이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급한 대로 굴러다니는 대나무 하나를 발로 밟아 적당한 길이로 부러뜨리고는 세자와 두화 앞에 섰다.
“조심하십시오, 저하. 그리고, 너는 저하 곁에서 꼼짝하지 말고 예 있거라.”
자한은 좀 전까지 저와 신경전을 벌이던 도헌의 듬직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적이 아닌 제 사람이 되면 제게 날개를 달아줄 자다.
한데도 곁에 있는 두화 앞에서만큼은 제게 적의를 드러낸다.
‘거슬려 역시….’
자한 또한 몽둥이 하나를 들어 도헌 옆에 섰다.
“저하?”
“어찌 자네에게만 맡기겠는가. 이래 봬도 내 몸 하나는 간수 할 수 있네. 하니, 지금은 힘없는 백성들 먼저 구하도록 하지.”
세자의 말이 옳다고 여긴 도헌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먼저 나가 길을 만들었다. 뒤따라온 자한과 두화는 할 말을 잃었다. 검은 복면을 쓴 자객들이 힘없는 백성을 향해 칼부림하고 있었다.
그때 두화의 눈에 제 또래 여인이 작은 아이를 안고 장독대 뒤에 숨은 것이 보였다. 다행이라 여겼건만, 찰나 얼기설기 엉성하게 만든 울타리 너머에 있던 자객의 검에 제 또래 여인이 힘없이 피 흘리며 쓰러졌다.
두려워 우는 작은 아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 하는 자객을 본 두화는 급한 대로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들어 던졌다.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자객이 뒤로 나자빠져 보이지 않자, 두화는 칼부림이 나는 마당을 뚫고 장독대로 돌진해 아이를 안았다.
‘두 분이 계셔서 다행이지만, 무영 오라버니는 이럴 때 어디 간 게야?’
놀란 아이는 진정이 되지 않는지 몸부림을 쳤고, 그 와중에 좀 전 돌멩이를 맞은 자객이 살기를 띠며 공격해 왔다.
능숙하게 피하려는데, 아이를 안고 사방을 경계하며 바로 앞 자객까지 신경을 쓰다가 돌부리에 걸려 그만 넘어졌다. 순간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몸을 옆으로 휘릭 돌리는데, 지면과 거리가 너무 짧았던 탓일까?
찰나 뒷머리에 충격이 느껴지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아, 아이를 구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정신을 잃은 위기의 두화를 본 도헌이 재빨리 달려가 안으려 할 때, 지척에 있던 자한이 자객을 공격하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도헌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뒤를 부탁하네, 백 장군.”
“…예. 두화를 잘 부탁드립니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정신을 잃은 두화도 백성도 구해야 한다. 세자의 앞길을 막는 자객들이 세자의 발길질에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두화를 안은 채, 자객을 상대하는 동작 하나하나 예사 몸놀림이 아니다.
‘저하 또한 무예가 출중하시구나.’
세자 또한 강한 실력을 숨기고 있었으니, 지금으로서는 다친 두화 곁에 세자가 있는 것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대여섯 남은 자객을 본 도헌의 눈빛에 살기가 실렸다. 대나무에 묻은 피를 제 발아래 죽은 자객의 옷 위에 쓱 닦고는 살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겁 없이 이리 날뛰는지 모르겠군.”
도헌의 말에 자객 중 하나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네놈이 누군지 알 필요 없고, 이곳에 천한 거지 년이 있는 걸 안다. 그년만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주마.”
거지라 하면 두화를 일컫는 것일 터!
자객들이 노리는 자가 세자가 아니면 저일 것이라 여겼건만, 이건 생각도 못 한 답이었다.
‘한데 두화를 왜 노리지?’
혹 다른 관리의 저택을 털어 쫓기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자객의 목소리가 사내치고는 가늘다는 것을 느꼈다.
‘저런 유의 목소리라면 설마!’
자객의 배후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자의 정체가 사내이되 사내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끝까지 숨긴다면 네놈의 목숨은….”
분명 꽤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목에 대나무를 들이댄 도헌 때문에, 나머지 자객들 또한 당황하였다. 마치 자신들의 적수는 없다고 여겼는데, 눈앞의 강한 상대에게 어찌할 줄 모르는 그런 반응이다.
그런데도 상대는 하나이니 승산이 있을까 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공격해 온다. 하나, 자객들은 죽은 동료의 처지가 더 낫다는 것을 1각 후에나 깨달았다. 죄 쓰러진 자객들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나, 오장육부가 상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도헌은 개중 처음 자신을 겁박했던 자객의 복면을 벗겨버렸다. 수염조차 없는 매끈한 턱만 봐도 도헌은 자신이 처음 추측한 것이 맞다 생각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윽! 내가 말할 것 같으냐?”
쿨럭, 피를 토하면서도 자객은 제 주인을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상관없다. 네놈이 내시인 이상 네놈의 배후는 필시 궁 안 사람일 터! 하면 네놈의 이름만 알면 배후가 누군지는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누구기에 천한 것 때문에 그분과 대적하는 것이냐?”
검 끝을 만지는 도헌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서렸다.
“항간엔 나에 대해 이런 소문이 돈다지? 적을 대할 때는 검 끝에 사정을 두지 않고, 흐르는 피 위에서 미친 듯 칼춤을 춘다고 말이야. 아, 그런 나를 두고 백성들은 화월국의 살인귀이라 하더군.”
“…!”
은밀하게 키워져 대비전에 들어온 지 겨우 다섯 해가 됐다. 잔인하도록 손속이 맵고, 인정을 모르는 방 내관은 대비의 명에만 움직이느라 조정의 일도 유명 인사도 모른다. 그저 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개와 같았다. 하여 도헌에 대한 것은 풍문으로만 들어 얼굴을 알지 못했다.
이제야 도헌의 정체를 알았는지, 이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한데 두려움과 별개로 의아한 점에 도헌을 유심히 바라봤다.
‘살인귀라 불리는 장군이 왜, 무엇 때문에 거지 년과 동행했을까?’
이제야 저를 보고 두려움에 떠는 모습에 도헌은 피식 조소를 지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한 눈이군.”
자객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수 쓱 닦아, 천천히 그의 눈두덩이에 눌러 문질렀다.
“편히 갈 수 있게 네놈에게 기회를 주었건만… 이젠 제대로 놀아 보자꾸나. 그러지 않아도 근자에 몸이 아주 찌뿌드드했거든.”
몸은 핑계였고, 세자가 두화를 안고 사라진 그때부터 심기가 꼬이고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다. 정신을 잃은 두화가 걱정되는 한편, 저와 같은 눈빛으로 두화를 보는 세자의 집요한 눈빛이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종일 불편하고 미칠 것 같던 마음을 풀 상대가 필요했는데, 마침 제품으로 뛰어든 자객들이 지금은 고마울 지경이다.
***
자한은 정신을 잃은 두화를 안고 궁으로 향했다. 저 혼자였다면 늘 드나들던 곳의 담을 타고 넘으면 그만이지만, 정신을 잃은 여인을 데리고 담을 넘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궁 정문에 선 세자는 궐문 수위에게 자신의 황금 호패를 내밀었다.
세자의 얼굴을 알아도 세자임을 상징하는 황금호패까지 확인한 숙위군은 그제야 몸을 낮추고 문을 열었다.
세자가 여인을 데리고 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질 테지만, 지금은 정신을 잃은 두화를 먼저 챙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세자궁으로 향하는 자한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세자궁에 들어서자마자 맹지를 찾아 어의를 몰래 불러오라 일렀다.
맹지는 놀랐지만, 낯선 여인이 누구이기에, 저하의 침소에 그것도 저하만이 누울 수 있는 금침에 눕혀지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추후 일어날 사태에 대비할 수 있기에, 용기를 내어 여쭈었다.
“나의 여인이다. 또한 네가 모셔야 할 웃전이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맹지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이내 어의를 부르러 다급히 내의원으로 향했다.
굳어진 얼굴로 두화를 내려다봤다.
‘대관절 누가… 누구를 공격한 것인가? 세자인 날 제거하려고? 아니면 백 장군을?’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에, 자한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자신과 백 장군 두 사람 중 하나 때문에, 두화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마음에 품은 여인 하나 지키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화가 났다. 정신을 잃은 두화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신 좀 차려 보아라, 두화야.”
잠시 후 세자궁을 담당하는 어의가 들었다. 예를 갖추고 고개를 들던 어의는 방 안, 상황에 놀라는 듯싶다가 이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하, 진료를 받으실 분이 혹….”
“맞네. 신 어의, 이 여인을 살펴주게.”
“…예. 분부 받자옵니다.”
왕족만 치료해야 하는 어의지만,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세자의 명이다. 신 어의는 두화를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몇 개의 침을 놓고 잠시 후 침을 수거한 신 어의는 침착하게 고하였다.
“일단 급한 대로 불안정한 혈만 치료했나이다, 저하. 조반 후에 드실 탕약을 올릴 터이니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옵니다.”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는가?”
“예. 다행스럽게도 뭇 여인들과는 달리 뼈가 옹골차, 멍든 곳 주위로 부러지거나 상한 것이 없고, 뭇 여인들처럼 부드러운 살이 아닌 탄력이 좋은 피부라 큰 상처는 피한 것 같사옵니다.”
“그래? 한데 어찌 의식이 없는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 다친 것인지 몰라 정확하게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사옵니다. 하나, 우선 외향적으로는 크게 다친 것이 없으니, 조만간 깨어날 것이옵니다.”
자한은 자객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을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누가 누구를 공격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제 주위 모든 것들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여겼다.
“돌부리에 걸렸는데 뒤로 넘어갔네. 아무래도 머리가 다친 듯싶은데.”
신 어의는 이내 두화의 머리 부분을 살펴봤다. 조심스레 들어 뒷머리까지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 다행스럽게도 뒷머리에 혹이나 혈이 고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당시 놀란 것 때문에 혼절하여 그런 듯싶사옵니다.”
“그래? 다행이로구나.”
“뭇 여인들은 그리 뒤로 넘어지면 필경 손목이 상해 몇 달은 고생하는데, 이 낭자는 참….”
“어찌 그러는가?”
신 어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하였다.
“뼈도 옹골차지만,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 웬만한 사내들보다 낫습니다. 하니, 너무 염려 마시옵소서. 의식이 들면 미지근한 물부터 천천히 먹게 하고, 조반 후에 제가 올린 탕약을 먹으면 금세 호전될 것이옵니다.”
신 어의가 물러가고 맹지가 따뜻한 물과 천을 가져와 두화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그동안 자한은 밖으로 나와 사림에게 백 장군이 무사한지, 무사하다면 그곳 상황이 어찌 되었는지 알아보라 명하였다.
“저하, 대비궁에서 출궁하신 것을 아셨습니다.”
“…짐작했던 일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자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한이 사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순간 사림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자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할마마마께서 널 문초하셨더냐?”
“…아닙니다.”
“그래?”
자한은 조금 전 툭툭 친 사림의 어깨를 꽉 잡아 돌렸다.
“윽!”
“하면 널 이리 만든 자가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