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30)화 (30/96)
  • 30. 저는 세자빈입니다

    잡힌 어깨가 부서져 떨어지는 기분이다. 사림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읏, 훈련을 하다가.”

    “거짓!”

    솔직히 말하라고 낮게 윽박지르는 세자의 눈빛이 진정으로 분노했다는 것을 사림은 알 수 있었다.

    “…대비마마십니다.”

    “많이… 상했느냐?”

    자신 때문에 분신과도 같은 사림이 해를 입었다.

    ‘젠장! 네게 미안하구나.’

    다른 이도 아닌 할마마마이기에, 자한은 괴롭다. 늘 제 편이던 분께서 좌의정과 가깝게 지내시더니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인을 강요하시고, 결국 그 뜻을 이루셨다.

    모든 것은 훗날 왕위에 오를 때, 더욱 힘을 실어주시려고 좌의정과 손을 잡으셨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

    당장은 힘이 될지언정 종국엔 독이 되어 자신을 옭아맬 것이다. 결국, 왕권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좌의정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손을 옭아매지 마십시오, 할마마마. 누구보다도 사림을 아끼는 것을 알면서 부러 문초까지 하셔야 했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세자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챈 사림은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어넘겼다.

    “보십시오, 별것 아닙니다. 그럼,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저하.”

    빠른 몸놀림으로 사라진 사림을 보며, 자한은 몸을 홱 돌이켜 서쪽의 높다랗고 화려한 궁을 차갑게 응시했다. 마침 두화를 돌보던 맹지가 잰걸음으로 걸어와 아뢰었다.

    “저하, 아가씨가 깨어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그만 가서 쉬어라.”

    자한은 서둘러 침소로 향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두려워하는 두화에게 성큼 다가가 그대로 품에 안았다.

    “…저하.”

    “안 깨어나서 걱정했다.”

    “…”

    “어디 보자, 좀 괜찮으냐?”

    두화의 얼굴을 잡아 요리조리 세심하게 살폈다.

    “예, 한데 이곳은 어디예요?”

    “나의 침소니라.”

    “…!”

    두 눈이 커다래질 만큼 놀란 두화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시큰 욱신거리는 발목에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냉큼 그녀를 부축했다.

    “일어나지 말래도 그런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저하. 하니, 가야 해요.”

    “그 또한 아니 된다.”

    단박에 안 된다고 말하는 무서운 눈빛에 두화는 놀라 그를 불렀다.

    “저하!”

    “일단 쉬어라. 몸부터 회복한 다음에….”

    “아니요. 스님도 아이들도 그리고 무영 오라버니도 걱정되고, 장군님도… 앗.”

    와락 끌어안는 세자 때문에 두화는 놀라 낮게 비명을 흘렸다.

    두화의 입에서 도헌이 언급되자, 자한은 알 수 없는 시기심이 제 가슴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절대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 하여 쉬이 생각한 적 없다.

    제 마음을 이리 움직인 여인은 두화가 처음이다.

    해맑게 웃고, 감히 세자인 제게 무례할 만큼 언행이 거칠어도 그 또한 제 눈엔 자유분방한 순수한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좋았다.

    가식적인 가면을 쓴 속내를 알 수 없는 궁 안 여인들만 보아온 저로서는 너무도 솔직한 두화 곁에 있을 때야말로, 마음이 평온해짐을 알기에 누구에게도 이 아이를 내 줄 수 없다.

    끝까지 불허한다는 말만 하는 세자의 고집 때문에, 두화도 결국 한발 물러났다.

    ‘그래,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만 머물자. 그 후에 나가면 돼.’

    밤새 곁에 있을 작정인가 보다.

    부러 잠든 척 눈을 감고 있지만, 벌써 반 시진째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없다.

    필시 저를 보고 있을 테지.

    ‘어찌해야 하지? 다들 괜찮은가? 무영 오라버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무사할 테지. 하아, 이게 다 무슨 일 이래… 설마,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놈들 짓인가?’

    혼란스러운 상황과 알 수 없는 자객의 정체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답답하기만 한데, 왜 이리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잠들지 않으려고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봐도 어느새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고 말았다.

    잠시 후 두화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자한은 붙들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서슴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몸이 회복되기 전엔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야.”

    자한은 밤새 두화의 곁에서 몸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는지 날을 새며 지켰다.

    ***

    동이 트자 세자궁에 낯선 여인이 들었다는 소문이, 지저귀는 새들보다도 더 빠르게 궁 안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누구보다도 세자빈, 설련하는 자신에게 쌀쌀맞은 지아비가 세자궁 침소에 여인을 들였다는 소문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라고 지아비를 믿으면서도, 설마 하는 의구심은 이내 시기가 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만약 헛소문이라면 입을 함부로 놀린 것들에게 지엄한 궁의 법도를 똑똑하게 알려줄 것이다. 하나, 사실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경국지색을 지닌 여인인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초아야, 지금 저하께 갈 것이다. 앞장서거라.”

    “예, 마노라.”

    지아비께 가는 이 길이 절대 길지 않으나, 오늘따라 유독 길게 느껴진다. 지아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미 제 마음 깊숙하게 자리 잡은 의심은 자신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세자궁 앞에 섰다.

    초아가 길을 뚫어 들어가려 하자, 앞을 지키는 궁인들이 저지하였다. 제 뒤에 있는 윗전을 믿고 초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감히 뉘 앞을 막는 게요? 이분이 뉘신지 몰라 이러는 게요 지금?”

    궁인들은 소리치는 초아가 보이지도 않는지, 련하를 향해 예를 갖추고는 세자의 말을 전하였다.

    “저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저희는 그저 명을 따를 뿐이옵니다.”

    꿈틀, 련하의 고운 이마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련하는 앞으로 나와 방금 제 기분을 상하게 만든 궁인의 뺨을 내리쳤다.

    “이 몸이 아무나이더냐?”

    “…아니옵니다. 하오나, 저하께서!”

    “네 이년! 내가 화월국 세자빈이니라.”

    궁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다.

    그 모습에도 련하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리되면 저 문 너머, 그분의 침상에 낯선 여인이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인정해야 한다.

    ‘정말 싫어, 그건!’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한다.

    이를 으득 간 련하가 궁인을 밀쳐내고 막 문턱을 넘어서려는 그때, 팔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제 앞길을 막았다.

    “감히 누가 날 막느냐? …저하!”

    련하는 냉큼 고개를 숙이고 지아비에 대한 예를 올렸다.

    “이리 이른 아침부터 세자빈이 예는 무슨 일입니까?”

    여전히 차갑디차가운 지아비의 말투에, 조금 전까지 화로 가득 차 빨리 뛰던 심장이 이상스레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제가 오지 못할 곳을 왔습니까, 저하?”

    “내,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 아랫것들에게 명을 내렸는데, 어찌 세자빈은 이를 무시하는 겁니까?”

    타인도 아닌 지아비의 입에서 자신이 아무나가 되어 버린 지금이 더 수치스럽고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련하는 입 안쪽을 꽉 깨물고는 부러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저하의 반려이자 세자빈이옵니다. 간밤 침수는 어떠하셨는지, 또 조반이라도 함께 들까 하여….”

    자한은 그런 그녀에게 한발 가까이 가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제야 눈빛을 마주친 세자빈의 얼굴에 홍조가 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본 자한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소곤거렸다.

    “우리가 함께 조반을 들 만큼 언제부터 가까웠다고 이러십니까?”

    “예?”

    당황한 세자빈을 차갑게 바라봤다.

    “좀 솔직하지 그러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세자빈이 체통도 지키지 아니하고, 투기심에 달려온 것을 보면, 어느 입 싼 것들이 감히 이 나라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안 되겠군.”

    “저, 저하!”

    투기심이라 하여도 좋다.

    제겐 눈길 한번 다정하게 주지 않는 분이다. 평생의 반려인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이… 그런 분이 여인을 들였다는데 눈이 돌아가지 않을 부인이 어디 있겠는가!

    “왜요? 아, 혹 그 소문을 낸 입 싼 것들이 설마 세자빈의 사람들이오?”

    “…너무하십니다. 전 그저 조반이나 함께 들려고!”

    그저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러 온 것이건만, 저를 소문의 진원지라 장담하고 몰아간다. 분하고 억울해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마치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안쓰러움을 자아낼 정도다.

    “입만 열면 거짓말인 것도 참 집안 내력인가 보오. 어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 면전에서 거짓말을 이리도 잘하는지.”

    날카로운 칼날이 제 심장을 마구 저며놓는다.

    저미어 놓인 심장에 차갑게 뚝뚝 떨어지는 그의 말이 너무도 어이가 없고, 모멸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저, 저하!”

    “향후 더는 감시하지 마시오.”

    “저는 그게 아니라!”

    “그만 돌아가시오. 덕분에 아침부터 무척 피곤하오.”

    홱 돌아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사라지는 세자의 뒷모습에 련하는 비틀댔다. 하얗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세자빈을 초아가 부축했다.

    ‘저는 세자빈입니다, 저하.’

    맑은소리로 지저귀는 새들과 화창한 하늘이 너무도 평화로운 아침이다. 하나, 지금 련하에게는 그 모든 평온한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

    서러움이 꾸역꾸역 차올라 결국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진정 저를 평생 배필로… 세자빈으로 여기기는 하십니까? 제게 이러실 수 없으십니다, 저하.’

    초하의 부축으로 세자궁에서 다소 떨어진 곳까지 겨우 발걸음을 뗀 련하가 돌연 몸을 홱 돌이켜 세자궁을 노려봤다.

    ‘이런다고 제가 쉬이 물러날 듯싶습니까? 제게 모질게 하실수록 저도 이젠 더는… 참지 아니할 것입니다, 저하!’

    세자가 꼭꼭 숨겨둔 여인을 비록 보진 못하였으나,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제 연정을 이토록 짓밟아 뭉갠 세자에게 보란 듯이, 이 아픔을 세자궁의 그 여인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이젠 연정이고 뭐고, 세자도 저와 같은 아픔을 느껴보라지!

    ‘그래, 아버지 말씀대로 권력과 부가 최고야. 이 자리를 지켜 종내엔, 중전이 되어 모든 이들을 내 발밑에 두고 우러러보게 할 것이야. 꼭 그리할 것이다. 두고 보십시오, 저하!’

    세자에 대한 분노에 이를 악다문 련하의 눈이 실핏줄이 터져 붉어졌다.

    “초아야, 어마마마께 가자꾸나.”

    “중궁전에요?”

    “그래. 앞장서거라.”

    중궁전으로 향하는 련하의 얼굴은 평소 조신하고 부드러운 세자빈의 표정이 아니었다. 다른 때와는 다르게 차갑고 표독스러운 모습에, 아랫것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키었다.

    한편 한바탕 소란 끝에 침소로 돌아온 자한은 이미 잠에서 깨어, 주위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두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더 자지 않고?”

    “저하, 정말 여기가 궁이에요?”

    “그래. 어제도 말했듯이 여긴 궁이고, 또한 내 침소니라.”

    “…!”

    궁도 모자라 세자의 침소란다.

    꿈이었길 바랐던 두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버지 아시는 날엔 이제 죽었다.’

    큰일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모두 무사한지, 그게 걱정인데.’

    “안색이 좋지 않구나. 당장 어의를 들라 해야겠어.”

    일어나려는 그의 팔을 잡아 물었다.

    “저하, 어제 그곳에 남겨진 이들이 걱정이에요. 다들 무사한지 어떤지….”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아라. 이미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 일렀으니 곧 연통을 가지고 올 것이다.”

    “예. 한데 나가려면 어디로 나가야 해요?”

    “나가?”

    두화를 빤히 바라보는 자한의 이마가 잘못 들었다는 듯 구깃구깃해졌다.

    “예, 여긴 궁이잖아요?”

    “한데?”

    “아시면서 뭘 물으셔요? 제가 감히 여기 어떻게 있어요? 얼른 나가야지요.”

    “아니 된다.”

    정색하며 굳는 그의 얼굴에, 두화는 순간 보이지 않는 포승줄이 제 몸을 결박하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저도 모르게 두 팔을 문질렀다.

    “…다 낫기 전엔 못 나간다.”

    “아니요, 저하. 전 괜찮으니 지금이라도….”

    “어허, 아직 아니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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