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월국애사 (28)화 (28/96)
  • 28. 답을 듣지 못하였다, 아직.

    무영은 진짜 보여줄 심산인지 대나무를 들고 눈을 부릅떴다.

    “지금, 당장 보여주랴? 이 오라비의 무서움을.”

    “알아, 우리 무영 오라버니 무예가 최고라는 거.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은 일도 정말 우연하게… 우연이 아닌가. 아무튼 그런 일이 생기더라고.”

    “무슨 말이야, 그게?”

    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오라버니의 그 무서움은 잠시 넣어둬. 저분들 놀라 까무러치면 어째?”

    ‘난 오라버니랑 오래오래 보고 싶어. 괜히 객기 부리다가 옥에 갇히기라도 하면 어쩌니?’

    두화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눈치챈 무영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그렇긴 해. 그래, 내가 너 봐서 참는다. 가자.”

    “어… 그래, 오라버니.”

    두화는 황당한 무영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앞서가고 있는 주지 스님에게 뛰어갔다.

    그런 두화를 보며 미소 짓던 무영이 뒤를 힐끗 바라봤다. 자한과 도헌을 바라보는 무영의 눈빛이 좀 전과는 다르게 예리하게 빛났다.

    잠시 후, 마을 어귀에 도착한 주지 스님은 보이는 백성마다 인사를 나누고는 한참 걸어 마을 변두리로 향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지만, 자세히 보니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곳이다.

    “스님, 예서 묵나요?”

    두화는 스님의 짐을 대신 들어 평상 위에 놓으며 물었다.

    “예, 여긴 가끔 제가 올 때마다 묵는 곳입니다. 전엔 사람이라도 살았지만, 지난해 가뭄 때문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더는 묻지 못했다.

    듣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있다. 두화도 스님을 따라 합장을 하고는 먼저 간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주지 스님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약재를 정리하여 평상 위에 늘어놓았다. 멀뚱하게 섰던 무영을 보며 작게 웃던 스님은 그의 앞으로 갔다.

    “보살님, 돕기로 하셨으니 하면 부탁드립니다. 저 솥에 물을 길어다 팔팔 끓여 주십시오.”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렇지 않게 그 무거운 솥을 한 손으로 들더니 개울가로 향했다.

    “아휴, 못 살아. 물동이에 길어다 부으면 될 것을… 꼭 저리 힘 자랑을 해요.”

    두화의 한숨 섞인 말에 주지 스님이 웃으며 염주를 매만졌다.

    “저리 하시는 보살님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그럼, 보살님께서는 저와 같이 마을을 돌아보시겠습니까?”

    “예. 좋아요.”

    활짝 웃은 두화가 스님을 따라가자, 우두커니 서 있던 자한과 도헌만 할 일이 없어 멀뚱거리며 두화의 뒷모습만 보았다.

    ***

    세자의 출궁을 알게 된 대비의 노함이 문밖까지 전해졌다. 서안 위를 내려친 주름진 손에 경대가 흔들렸다.

    “뭐라? 하여 지금 또 놈이 세자 대신에 자리를 지키고 있더냐?”

    “예, 대비마마.”

    “고약한지고! 그리 반듯하던 세자가 어찌 점점 한량 같아지는 것이야.”

    두통이 밀려와 손으로 머리를 괴고 앉았다.

    아무리 좌의정과 손을 잡아 권력 욕심이 있다 해도 세자가 먼저다. 어려서는 그리도 저를 잘 따르던 세자였건만,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없어지더니 세자빈과 혼인한 뒤로 더 차가워졌다.

    그래도 여전히 세자만 보면 그리 좋을 수 없다. 다만 조금만 세자빈과 잘 지내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자제했으면 좋으련만.

    그때 밖에서 누군가 다급히 들어와 아뢰었다.

    “대비마마, 분부하신 것에 대해 알아 왔나이다.”

    “그래?”

    심경이 복잡하던 대비의 눈빛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근자에 들어 출궁이 잦았던 이유가 뭣이라 하더냐?”

    “그것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대비의 주름진 이마가 더 좁혀지더니, 주름진 사이사이 노기가 서렸다.

    “어서 말하거라.”

    “근자에 출궁하시어 드나드신 곳은 기생집과 풍시전 그리고….”

    말을 아끼는 상궁이 답답하다는 듯 대비는 서안 위를 다시 한번 내려쳤다.

    “숨김없이 죄 말하거라.”

    “…거지촌이옵니다.”

    찰나 상궁과 대비의 눈이 허공에서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상궁은 자신이 고한 것이 맞는다고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멈춰 있던 시간이 풀린 것처럼 대비의 늘어진 눈꺼풀이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뭐, 뭐라? 거지촌?”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었던 대비가 당황하였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세자도 사내이니 기생집과 풍시전이라면 호기심에 그럴 수 있지.’

    하나, 거지촌은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호기심을 살 무엇도 없는 천한 것들이 북적거리며 냄새나는 소굴에 왜 귀한 세자가 드나드는 것인가?

    그것도 세자빈의 탄일에 출궁할 정도로 그곳에 뭔가가 있는 것인가?

    대비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것을 본 상궁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그곳에서 한 계집만 만난다고 했사옵니다. 앞서 풍시전에도 그 계집을 데리고 가, 화월국 최고의 의복을 자랑하는 풍시전 포목점의 의복을 싹 사들여 그 계집에게 주었다 하옵니다.”

    “뭐라!”

    새된 목소리가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역정을 낼수록 갈라진 그 목소리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기괴하게 흘러나왔다.

    “음… 요물 같은 것이 거기 있었던 모양이군. 하여 그리 반듯한 세자를 홀린 게야. 그렇지 않고서 우리 세자가 저리 한량 같아질 수가 없지. 암! 그 요물 때문에 세자빈까지 멀리하는 게야.”

    “대비마마, 저하께옵서는 처음부터 세자빈 마노라를 멀리하셨사옵니다.”

    바른말을 고하는 상궁을 홱 노려본 대비는 입술을 벌리지도 않고 상궁을 꾸짖었다.

    “하여간! 언제고 그 입 때문에 호되게 당할 것이야, 응?”

    “…잘못하였나이다.”

    금세 반성하는 상궁을 노려본 대비는 고개를 절레거렸다.

    “내 서신을 써 줄 터이니 당장 좌의정에게 전해주거라. 제아무리 건강 때문에 두문불출하는 좌의정이지만, 여식 앞을 가로막는 천한 요물이 있다 들으면 간과하지만은 않을 테지.”

    “대비마마, 그것만으로 저하의 발길을 궁으로 돌리실 수 있겠나이까? 차라리 환궁하라는 명을 내리심이 어떠실지….”

    조심스레 다른 제안을 말하는 상궁을 본 대비가 피식 웃었다.

    “내가 왜 머리에 든 것 없는 좌의정 같은 자를 곁에 두었겠느냐?”

    “…?”

    “제 욕심을 차리기 위해 뭘 하든 증좌를 남기지 않지. 물욕이 넘치고 그 물욕을 갖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머리에 든 것과는 별개니 이럴 때 유용하게 써먹으려 곁에 두는 것이니라. 그런 좌의정의 권력에 조정의 균형을 이루니, 이는 우리 주상의 행보가 순탄해지는 것이지.”

    “아, 예.”

    “더욱이 우리 세자에게 미움받을 일을 뭣 하러 내 직접 하겠느냐? 그런 일은 그런 일이 맞는 적임자가 해야지. 아, 방 내관을 동행시켜, 좌의정이 확실히 처리하는지 확인하라 일러라.”

    히죽 웃은 대비는 빠른 손놀림으로 서신을 써 내려갔다. 서신을 받아든 상궁은 방 내관과 함께 걸음을 재촉해, 좌의정의 사가로 향하였다.

    ***

    한편 스님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온 두화가 평상에 앉아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쓱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세자다.

    “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쳐다보기만 하니, 두화도 똑같이 바라보다가 환자가 들이닥칠지 몰라 이내 시선을 피해 제 할 일에 몰두했다.

    “흠, 흠.”

    재차 힘주어 헛기침하는 세자다.

    “…?”

    “흠!”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될 것이지, 뭘 저리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왜 그러시는데요?”

    “몰라 묻느냐?”

    지척에 도헌이 서 있기에 자한은 작게 말하였다.

    “저하, 하실 말씀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마시고 그냥 말해 주시지요. 미천한 저는 대갓집 규수들처럼 고상하지 못해서 어려운 말 모르고, 빙빙 돌려서 하는 말은 더더욱 알아차리지 못해서요.”

    이 나라 세자인 제가 연정을 드러냈는데, 어찌 이리 오만방자하게 모르는 척 구는지 모르겠다.

    ‘듣고자 하는 답은 듣지도 못하고, 쌀쌀맞은 못된 입담만 듣는구나.’

    답답하기만 한 자한은 묵직한 한숨을 속으로 삼키었다.

    세자인 제가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한심스럽다. 하나, 그런데도 이 아이가 밉지 않으니 정말 고치지 못할 병에라도 걸린 모양이다. 퉁명스럽게 저리 못된 말만 하는데도 제 눈엔 어여뻐 보이니 말이다.

    “답을 듣지 못하였다, 아직.”

    “…!”

    난감해.

    어쩌지?

    두화는 아까의 일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슴이 두근두근 마구 뛰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나. 어떡하면 좋아!’

    그녀의 벌게진 얼굴과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본 자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쓱 고개를 낮추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세자 때문에, 놀란 두화가 두 눈을 깜빡여댔다. 한데 왜 이리 갈증이 이는지 간신히 목으로 숨만 삼키었다.

    “내가 싫지는 않지?”

    “…”

    “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다고 여기마. 하면 내가 신경은 쓰이느냐?”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매일같이 찾아와 귀찮게 구는 성질 못된 세자라고 여겼는데, 그 모든 것이 절 마음에 품어 그랬다니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건 당연하잖아.

    ‘그저 흥미로워서 날 연모한다고 한 것인 게야.’

    두화는 마음을 다잡고 제 생각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두화를 본 자한은 그 모습을 오해해, 호탕하게 웃으며 무척 기뻐했다.

    “좋다. 방금 너 또한 인정한 것이다. 이젠 날 밀어내면 아니 되느니!”

    이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니거든요! 방금 그건 그냥 저 혼자 생각에 제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아니라고 해명하려 하지만, 이내 제 입술에 긴 손가락이 사뿐하게 내려앉아 눌러 막는다.

    “읍!”

    “이젠 안 속는다. 앙탈도 귀엽구나, 우리 두화.”

    톡!

    콧등을 손가락으로 친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더니, 뒷짐을 지고 그늘로 가 앉는다.

    으… 악!

    누가 앙탈이 귀여워?

    그리고 뭐? 우, 우리 두화!

    ‘악! 아버지, 저 이제 어떡해요? 이 나라 세자가 미쳤나 봐요.’

    거의 울기 직전인 그때 열린 싸리문을 넘어 환자가 몰려들었다.

    스님은 급한 환자부터 보기 시작하였고, 두화 역시 정신을 차리고 스님이 하시는 일을 열심히 도왔다.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엔 환자가 많았다. 두화는 웃는 낯으로 스님을 도왔다.

    우두커니 있던 세자와 도헌도 불을 피우고, 아이들과 말벗이라도 하며 간단한 것이라도 이곳의 일을 도왔다.

    도헌은 때때로 두화를 바라보는 세자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것은 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사냥감을 두고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탐색하며 예의주시하는 꼴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두화는 세자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것을 어느새 잊었다. 조금 한가해지자 이번엔 도헌이 다가왔다.

    “고생이구나.”

    “예? 아… 저야 조금 돕는 것뿐인걸요.”

    “지금은 좀 한가한 것 같으니, 잠시 이야기 좀 하자꾸나.”

    부드럽게 말하는 장군을 보자니, 두화는 아까 세자가 제게 했던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괜히 지금 이 상황이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현실을 인지했다.

    ‘아니, 막말로 내가 세자 부인도 아닌데 장군을 만나든, 다른 사내를 만나든 껄끄러울 것이 뭐야? 참 내.’

    “예. 하면 저쪽으로 가셔요.”

    괜히 그늘에 앉아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세자를 한번 쳐다봐 주고는 당당히 도헌의 뒤를 따랐다.

    모퉁이를 지나 뒤꼍으로 갔다.

    “예서 언제 돌아가는 것이냐?”

    “스님께서 돌아가실 때 같이 가려고요. 아마도 며칠 걸릴 것 같아요.”

    “그래.”

    잠시의 정적이 찾아오자, 뒤꼍 너머 산에서 바람이 불어 대숲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다 느껴졌다.

    “…이런 내가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인귀라 불리는 장군이 미치기까지 하면, 뭐라 불러야 하나?

    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아까의 세자의 눈빛과 비슷했다. 두화는 저 홀로 상상하다가 이내 그가 꺼낼 말이 혹, 불편한 말이 아니길 바랐다.

    “하면 어서 의원을 찾으셔요. 저도 몇 번 미친… 광녀를 본 적이 있는데, 보기에 썩 좋지는 않거든요. 하니,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의원을 찾아 약이라도….”

    뒤돌아선 도헌의 진지한 모습에 두화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차라리 미치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한데!”

    “…?”

    “내가 두화 너를….”

    이런 상황 또 낯설지 않다.

    장군도 제게 상당히 곤란한 말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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