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9)화 (149/177)

#149.

내 예상대로 나탈리 후작과 제이드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애당초 제이드에게 비밀로 하고 움직이는 걸 보면 평소에도 그녀가 그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둘 사이를 갈라놓는 건 더더욱 수월했다.

그리고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듯 상황은 예기치 못한 호재가 겹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나탈리 후작은 제이드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쉐리부터 찾았다.

아마도 방해되니 없애려던 모양인데, 쉐리가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였다고 들었다.

‘제이드의 생부가 엠버 가주라고 하니까 혼비백산하면서 사라지던데요?’

쉐리는 제이드를 한 방 먹인 게 유쾌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실은 예전에 걔가 생모 무덤에서 울면서 말해 준 적이 있걸랑요. 생부의 유품을 무덤에 같이 묻었다고. 그래서 못 믿겠으면 파 보라고 했죠.’

실제로 제이드의 생모 무덤이 파헤쳐진 흔적이 생긴 걸 보면 나탈리 후작도 제이드의 정체를 눈치챈 것 같았다.

제례가 시작하기도 전에 분열되기 시작한 흑마법사 무리를 상대하는 건 그만큼 쉬우리라.

분명 따로따로 행동하다가 서로가 덜미가 되어 엉망진창이 되겠지.

그 틈에 나는 카타콤도 부수고, 흑마법사도 부수고, 복수까지도 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방심은 하지 말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도 한 끗만 잘못되면 다 그르치는 게 인생이었다.

나는 자만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나에게 주어진 최선은 아키드에게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벌써 제례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걸 말해도 되는지, 말하고 나서 혹여라도 거부당하지는 않을지.

하지만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실은 아키드가 내 지난 생애를 공감해 준 게 결정적으로 용기를 얻게 된 이유였다.

만약 아키드가 모든 사실을 듣고 나를 경멸한다고 해도, 그가 나를, 유이나를 이해해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 마음이 아프겠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례 하루 전, 나는 아키드의 방문을 노크하며 말했다.

“로에나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랐는지 안쪽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잠시 후, 셔츠 차림을 한 아키드가 문고리를 당겨 나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입니까?”

탁하게 갈라진 음성을 보아하니 선잠을 잤던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그의 잠을 깨운 건가 싶어 어색하게 웃었다.

“전할 말이 있어서요.”

내 서두에 아키드가 두 눈을 깜박이다 이내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소파에 다소곳이 앉은 채 심호흡했다.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에 아키드가 옆에 앉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그러곤 손까지 다잡아 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청회색 눈동자에는 어떤 채근도 없었다.

잔잔한 호수에 잠기듯이 편안함만이 가득했다. 나는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다 이야기했다.

“실은 그동안 말하지 못한 게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거의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를테면 제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날부터요.”

과거 내가 로에나의 몸에 빙의한 순간에 대해 언급하자 아키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자살을 시도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사건은 아키드에게 꽤 큰 충격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터.

갑자기 그 일을 거론하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아키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그날 어쩌면 로에나 하델루스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죽다니요?”

아키드는 내가 버젓이 살아 있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하긴 내가 로에나인데 로에나가 죽었다니. 누구라도 황당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저절로 찌푸려진 미간을 애써 펴며 힘들게 입을 뗐다.

“저는 로에나 하델루스가 아니에요. 이전 삶에서 다들 저를 ‘이나’라고 불렀어요.”

‘이나’라는 단어에 아키드의 입술이 벌어졌다. 나는 차마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수그렸다.

“아마 세체르가 말한 영혼이 피해를 입었다는 말은 제가 로에나가 된 걸 의미할 거예요.”

“…….”

“사실 저는 제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었거든요. 원래라면 전염병으로 진즉 죽었어야 할 몸인데…….”

나는 힐끗 아키드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그때까지 아키 옆에 있고 싶었어요. 전 로에나가 되기 전부터 아키를 알고 있었으니까.”

꿈에서 이나가 열심히 아키드를 앓던 걸 지켜보았을 테니 그는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 터였다.

“아키 꿈에서 제가 읽던 책에 이곳 이야기가 적혀 있었거든요. 그래서 다 알고 있었어요. 로에나 하델루스의 미래가 무엇인지.”

방언이 터지듯 숨겨 둔 이야기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자연히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로에나로 살면서 한 번도 진지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보너스 인생으로 최애의 전 부인이 되어 실컷 덕질할 생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에 동화되면 동화될수록 삶에 미련이 생기고, 욕심이 불어났다.

눈앞의 아키드가 웃었으면 좋겠고, 날 좋아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예뻐해 주는 시부모님에게도 정을 잔뜩 주고 말았다. 에이프릴 일가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스스로가 로에나인 것처럼 행세하며 살았다. 어차피 시한부 인생인데 그 정도 호사는 누려도 되지 않을까, 합리화하면서.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계속해서 로에나로 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건 모두 내가 로에나 하델루스일 때라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란 걸.

유이나로서는 절대 얻지 못할 관심과 애정들이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어느새 뜨거워진 눈가로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가까스로 눈물이 떨어지지 못하게 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그동안 당신을 속이고 로에나인 척 살았어요. 이런 제가 이기적이고 역겹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아키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여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때 내내 침묵하던 아키드가 나직이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흠칫, 떨었다.

그러자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미약한 힘에 끌려 올라간 턱으로 주르륵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손에도 눈물이 번졌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집요히 따라오는 청회색 눈을 마다할 수 없었다.

아키드가 말했다.

“이기적이지도, 역겹다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원해서 얻게 된 몸도 아니잖습니까.”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는 부정하듯 몸을 떨었다. 아키드의 입에서 나를 두둔하는 말이 먼저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가 내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내내 궁금했습니다. 당신이 달라진 이유가 정말 그날 서둘러 당신을 구한 제 행동 때문이 맞는 건지.”

“…….”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으니까요.”

아키드의 손길이 닿은 자리가 뜨겁고 축축했다. 한 번 터져 버린 눈물이 계속해서 볼을 적시고 그의 손마저 적시고 있었다.

아키드는 울음보가 터져 버려 그칠 줄 모르는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히려 기쁩니다. 예전부터 당신이 나를 알고 있었고 지금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몇 년을 속여 온 게 무섭다거나 밉지 않나요?”

“글쎄요. 제 눈에 당신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한 후론 한 번도 밉다고 여겨 본 적 없습니다. 설령 전처럼 저를 막 대한다고 해도 똑같을 겁니다.”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나는 과거 로에나의 만행을 떠올리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나였다면 이를 빌미로 앞으로 저에게 잘하라고 으름장을 놨을 터였다. 속없이 다 좋다고 할 게 아니라.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동시에 이 착해 빠진 남자가 내 남편이라서, 내 연인이라서, 내 비밀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라서 너무 벅찼다.

“히잉, 아키는 왜 이렇게 착하고 멋지고 잘생기고 훌륭한 거예요. 이러면 내가 자꾸자꾸 기대고 싶잖아요.”

“전에 제가 한 말은 까맣게 잊으신 모양이군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저는 로네가 제게만 기대 주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씨잉, 그 말도 너무 멋있잖아요오.”

내가 우는지 웃는지 모를 표정으로 칭얼거리자 아키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그가 내 눈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떼며 말했다.

“그만 울어요. 자꾸 우니까 속상하네.”

“방금 하신 거 한 번 더 해 주면 눈물이 그칠 거 같아요.”

내 뻔뻔한 요구에 아키드가 여러 차례 눈가에 입을 맞춰 주었다.

축축하게 눈물이 밴 눈가에 부드러운 입술이 훑고 가자 약을 바른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고 행복감이 몰려왔다.

“더 필요해요?”

“네, 네. 좀만 더.”

“푸흡. 큼. 좋아요, 만족할 때까지 해드리겠습니다.”

아키드가 큭큭거리며 내 요구를 계속해서 들어주었다. 닿은 자리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고해성사를 하고 용서를 구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아키드는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위로를 마쳤다.

아주 훌륭한 위로법이라 나도 다음에 써먹어야지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아키드에게 더는 숨기는 비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큰 비밀이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안일하게도 말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