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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48)화 (148/177)
  • #148.

    내 머릿속에서 한 줄기 남아 있던 인내심이 뚝, 끊기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재촉하는 거라고 여길 겁니다.’

    ‘재촉하는 거라고…….’

    ‘재촉…….’

    그것은 천상의 상투스처럼 나의 정신을 몽롱하다 못해 황홀하게 하기 충분했다.

    곧이어 내 안의 음란 마귀가 히죽 웃으며 막 승전보를 외치기 직전, 다행히도 구세주가 등장했다.

    캐서린에게 보냈던 키나가 막 서신을 들고 도착한 탓이었다. 아키드에게 들이받을 듯이 날아오는 키나에 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키나가 나와 부딪치지 않으려 커다란 덩치를 뒤로 물리며 날갯짓해 속력을 줄였다.

    커다란 날개가 거세게 움직이기를 한참.

    까악.

    불퉁한 울음을 내뱉은 키나가 똑바로 착지하며 나를 툭툭, 건드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는 행동만 봐도 내가 아키드를 막아선 게 몹시 불만이라는 듯했다.

    ‘역시 일부러 박치기를 하는 거였구나.’

    슈리가 옆에서 아무리 키나를 흉봐도 나는 키나를 믿었었다.

    하지만 아키드에게까지 들이받으려 하다니 이건 좀 따끔한 교육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박아도 아키드는 안 되지.’

    살면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상대였다. 아무리 소중한 키나라고 해도 나의 덕질 규칙에 예외는 없었다.

    “키나, 방금 무얼 하려고 했지요?”

    갑자기 존댓말을 하자 키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서 간식이나 내놓으란 듯이 건포도가 든 주머니를 툭툭, 쳤다.

    이전에는 귀엽게만 보이던 행동이 지금은 무척이나 건방지게 느껴졌다. 나는 건포도 주머니를 단단히 봉하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허.”

    - 깍?(뭐야?)

    키나는 건포도 주머니가 열릴 기미가 없음에 당황스러운 울음을 토해 냈다.

    그가 평소에 안 하던 애교까지 부렸으나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를 단단히 쥔 채로 엄히 말했다.

    “착지 못 하는 척은 연기였어?”

    - 깍깍!(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키나는 내가 잘못 짚었다는 듯이 발을 구르며 반항했다. 나는 더더욱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기는. 내가 막으니까 바로 멈추었으면서!”

    내 힐난에 키나가 투레질을 하며 맞섰다. 새와 인간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키드가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계속 이러면 아키드에게 자꾸 못되게 굴지도 몰라요.”

    현장을 잡았을 때 따끔히 혼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도로 키나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때였다.

    아키드가 뒤에서 나를 가만히 안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조류도 질투를 하나 보죠.”

    “네?”

    조류라는 호칭이 몹시도 까칠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뒤이어 아키드가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로네 옆은 저일 텐데. 참 귀여운 반항이지 않습니까?”

    그러곤 나를 더욱 바짝 끌어안은 탓에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포옹에 언제 화가 났냐는 듯이 표정이 노곤해졌다.

    이에 키나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달려들 것처럼 요란을 부렸다.

    - 깍깍깍깍!(재수 없어, 재수 없어, 재수 없어!)

    물론 키나가 무어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잠시 후, 나는 키나에게서 겨우 서신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토라져서 안 주려고 한 탓에 애를 좀 먹었다.

    역시나 서신은 캐서린에게서 온 것이었다

    [응. 나도 여전해. 네 말대로 꿈을 꿀 때마다 깊게 생각해 보고는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네.

    아참, 구슬은 잘 가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구슬이 무언가 해 줄 거라 여겼던 건 내 지나친 낙관이었을까?

    캐서린은 그날 이후로도 별다른 차도가 없는 모양이었다. 곁에 있던 아키드가 물었다.

    “무슨 편지입니까?”

    “그냥 캐서린에게 온 안부 편지예요.”

    나는 아키드의 관심이 불편하기라도 하다는 듯 다소 성급하게 대답했다.

    캐서린이 진짜 메이벨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처음 보인 과민 반응이었다.

    “그렇군요.”

    아키드는 내 날카로운 대답에 짧게 수긍하고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딱 봐도 상처받은 표정이었지만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는 조금 두려웠다.

    캐서린이 실은 진짜 메이벨이란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내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탓이다.

    원래였다면 아키드가 좋아할 사람도 그녀였을 텐데, 하는 어두운 생각까지 들면 정말 온종일 우울할 정도였다.

    물론 계속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을 나는 아니었다. 캐서린이 진짜 메이벨이든 아니든 간에, 현재 아키드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니까.

    ‘어차피 메이벨은 아키드한테 관심도 없었잖아. 아키드도 딱히 메이벨에게 구애할 생각도 없었고.’

    애초에 원작에서 그는 한결같은 짝사랑 포지션이었다. 메이벨에게 고백하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한 번 결혼했던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망설였던 걸까?

    아니면 그만큼 로에나의 죽음이 강렬해서 여전히 잊지 못하던 걸까?

    이쯤 되니 원작 속 아키드의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내가 본 원작에서 그는 얼마든지 남주가 될 자질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 거로 유명했다.

    독자들은 작가가 제로니스와 여주를 밀어주고자 일부러 아키드의 매력을 죽이려는 거라고 여겨 불만을 토로하는 댓글을 달 정도였다.

    ‘이상하긴 하네. 지금의 아키드라고는 상상도 못 할 소극성이야.’

    워낙 불도저처럼 행동하는 요즘의 아키드인지라 괜히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 아키드가 내 뺨을 붙들며 말했다.

    “화났습니까?”

    “아뇨?”

    “제가 괜히 사생활에 끼어들어 불쾌했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요 며칠 신경 쓸 게 많아서 예민해진 거 같아요. 미안해요.”

    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그가 도리질하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제게 화가 난 게 아니라면 그거로 됐어요.”

    “그래도……. 자꾸 이렇게 응석 받아 주면 저 버릇 들지도 몰라요.”

    “그건 그것대로 좋은데요?”

    이것 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나는 아키드의 호구성 발언에 말문이 막혀 입술만 뻐끔거렸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키드가 다정히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러면 위로가 필요할 때면 제게 먼저 달려오실 테니까요.”

    “…….”

    “그러니 응석은 제게만 부리십시오. 아버지나 어머니 말고.”

    아키드는 내 응석조차도 대공 부부에게 빼앗기기 싫다는 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반응이 너무도 어이없고 유쾌해서 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키드는 날마다 새롭게 나를 반하게 하는 데 도가 튼 것 같다고 여기면서.

    * * *

    한편 캐서린과 제로니스는 아카데미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제로니스가 그녀에게 포장을 뜯은 샌드위치를 건네며 물었다. 오늘 메뉴는 소풍 온 기분을 느끼기 위한 간편식이었다.

    “캐시, 혹시 요즘 에드워드한테 뭐 화가 난 거라도 있어?”

    제로니스의 물음에 캐서린이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런 거 없는데.”

    “요즘 네 얼굴 보기 힘들다고 여간 귀찮게 구는 게 아니거든. 마젠타 펜트하우스에서도 얼굴 보기 힘들다고 성화야.”

    제로니스의 조심스러운 말에 캐서린이 눈을 도르륵 굴리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닌데……. 그냥 요즘 조금 바빴어.”

    “그래? 그럼 또 그 자식이 괜히 요란을 피우나 보네. 성에서도 네가 얼굴을 안 보여 준다고 어찌나 극성을 부리는지.”

    “오늘은 얼굴이라도 비쳐 줘야겠네.”

    캐서린이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거듭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것 없어. 걔도 이젠 여동생과 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여동생이라는 단어에 캐서린이 움찔하며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뒤이어 그녀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도 벌써 내가 피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 있구나.’

    실은 요 며칠 캐서린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로에나에게는 꿈을 봐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캐서린은 그날 이후로도 계속해서 꿈을 꾸었고, 그 꿈속에선 말도 안 되는 내용이 펼쳐졌으니까.

    마치 로에나가 맡긴 구슬에 꿈이라도 심어 둔 것처럼 평소 꾸던 것보다 길고 이상한 꿈이었다.

    그것도 메이벨의 시점으로 변한 꿈인지라 더더욱 혼란이 가중되었다.

    마치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겠는 꿈.

    꿈을 꾸면 꿀수록 캐서린은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몸은 캐서린 에셀이 분명한데 꼭 저가 메이벨이 된 것만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꿈이라 그녀는 모두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그건 눈앞의 제로니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제로니스가 캐서린의 입가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보고 손을 뻗으며 말했다.

    “또 칠칠치 못하게 묻히고 먹…….”

    하지만 그의 손길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내쳐졌다. 캐서린이 저도 모르게 제로니스의 손을 쌀쌀맞게 쳐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놀랐어? 나는 그저 입에 뭐가 묻어서 닦아 주려고…….”

    “……괜찮아. 내가 할게.”

    “응…….”

    제로니스가 무안해진 손을 거두며 어색하게 웃자 캐서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자꾸만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스스로가 답답하면서도 조절이 잘 안 되었다.

    “미안, 제로. 나 아무래도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아. 교수님이 시키신 일을 아직 다 못 끝냈거든.”

    “아, 데려다줄…….”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럼 나중에 봐.”

    캐서린은 저를 따라나서려는 제로니스의 어깨를 눌러 도로 앉히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제로니스는 멀어지는 캐서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제 약혼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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