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 시집살이 너무 쉬운데요 (150)화 (150/177)

#150.

‘무덤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나탈리 후작은 제 손에 쥐고 있는 회중시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엠버 가문의 인장이 음각된 회중시계. 뚜껑을 여니 그 속엔 죽은 엠버 가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설마 했는데, 사생아가 남아 있었을 줄이야.”

그녀의 눈빛이 점차로 차가워졌다. 쓸 만하다고 생각한 자가 실은 호랑이 새끼였던 모양이다.

그간 엠버 가문의 이야기를 알고도 시치미를 뗀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생부를 싫어하는 게지.

나탈리 후작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어차피 살아 있는 흑마법사 중에 ‘엠버의 난’의 진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제이드도 자신이 제 생부와 그 가문을 몰살시켰을 줄은 꿈에도 모를 터.

“이를 어찌한담.”

이대로 모른 척 후계로 세워 둘지, 아니면 싹을 잘라야 할지 몰랐다.

거사가 코앞인데 괜히 분쟁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나탈리 후작이 처분을 고민하는데 곁에 선 인형들이 제이드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상황을 보고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준비라는 건 제례 때 마계의 문을 여는 일을 의미했다.

성녀가 활약하는 틈에 정령사인 로에나를 훔쳐 카타콤으로 달아날 계획을 전부 포함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탈리 후작이 몸을 빙글 돌려 제이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충성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니 쾌감이 일었다.

하나같이 재수 없고 저 잘난 줄 알던 엠버가에 이런 ‘들개’가 살아남다니.

그것도 자신의 사냥개가 되었다니.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 하하!”

나탈리 후작이 돌연 웃음을 터트리자 제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에게서 전과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그게 제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제이드는 분간이 되질 않았다.

‘후작이 당신에게 수장 자리를 물려줄 거라고 생각하진 마. 그 여자가 하고자 하는 일에 미래 따위는 없으니까.’

‘미래가 없다고?’

‘흑마법사들의 목표가 뭔지는 귀에 닳도록 들었을 테니 알겠지. 고대의 광영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들 말이야.’

‘…….’

‘그게 다 허상이거든. 나도 나중에 알았어, 그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나도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그것까지 설명하고 싶지 않아. 다만 내가 조언해 줄 수 있는 건 그 여자를 믿지 말라는 것뿐이야. 괜히 조직이 생매장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몸 사리라고.’

메이벨은 나탈리 후작이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미래에서 본 내용일 터.

게다가 후작은 요 며칠 생각이 많아 보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말해 주지 않는 걸 보면 제이드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어영부영 갈피를 못 잡는 건 제이드뿐인 것 같았다.

그때 웃음을 겨우 멈춘 나탈리 후작이 온화하게 말했다.

“크흠, 거사를 앞두고 내가 기분이 좋은가 보다. 웃음이 자꾸 나오는 걸 보니 말이야. 놀랐니?”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이드. 나는 여전히 너한테 실망이란다. 네가 호언장담했던 제물의 약점을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게 말이다.”

“…….”

“설마 알아내고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떠보는 듯한 질문에 제이드는 찔리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받아쳤다.

이미 메이벨이 어떤 금기를 어겼는지도, 약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뜻 나탈리 후작에게 고하지 못한 건 그녀가 미래에 저를 죽일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생부를 죽인 것에 대한 노여움은 없었다. 애초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비인 데다 저와 어머니를 버린 사내이니까.

오히려 제이드는 생부보다도 나탈리 후작에게 애정을 느꼈다.

비참했던 과거에서 저를 구해 내준 은인이자 주인이고 어머니이니까.

“그런데 카타콤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제이드가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카타콤은 흡사 지하 신전처럼 음습하고 웅장한 느낌을 풍기는 곳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살 곳이라기보다는 인신 공양을 하기 좋은 구조였다.

오랜만에 제단 위에 비단이 덮여 있었다. 커다란 제단 위는 비어 있었다.

나탈리 후작이 그를 따라 제단을 응시하며 말했다.

“계획을 조금 변경했단다.”

“예?”

갑작스러운 변동에 제이드가 움찔하자 나탈리 후작이 음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례를 시작하는 건 위에서만이 아니란다.”

“그 말은…….”

“마계의 문을 열면 평소보다도 많은 피가 땅에 흐르지 않겠니?”

섬뜩한 대답에 제이드가 몸을 떨었다. 그 말은 제례를 빌미로 어떤 의식을 시작하겠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럼 제단에 쓸 제물은…….”

제이드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살폈다. 암만 보아도 제물로 쓸 만한 동물도, 어린아이도 없어 보여서였다.

그녀가 호갑투를 혀로 날름 핥으며 말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는 듯이 무기질적인 눈빛을 하고서.

“제물이야 위에서 알아서 만들어 주겠지.”

* * *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메이벨이 따라붙는 인기척을 느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세체르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제겐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을 텐데요.”

살살 달래는 음성은 그녀를 잘 다독여 제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메이벨을 더더욱 자극하기만 했다. 메이벨이 도끼눈을 뜬 채 힐난했다.

“필요 없다 했잖아! 애초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이런 몸을 하면서까지 금술을 저지르지도 않았어.”

“그래서, 이곳에 원하던 게 있던가요?”

“지금 내 꼴을 보고 놀리는 건가?”

날 선 대답에도 세체르는 할 말을 계속했다.

“애초에 금기를 어기는 행위는 불행만 불러올 뿐입니다. 이미 내가 겪어 봐서 잘 알아요.”

메이벨은 세체르가 불편했다. 다짜고짜 찾아와 자신도 금기를 어긴 죄를 짊어진 자라며, 더 늦기 전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했을 때는 광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께에 선명한 문신을 보니 그게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세체르를 신뢰할 만한 증표는 아니었다.

나탈리 후작도 저에게 달콤한 말로 다가왔었으니까. 믿었던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금기를 어긴 자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닙니다.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금기의 영향으로 불행한 삶을 살 뿐이죠. 오히려 망각이 축복이겠다 싶을 만큼 아주 괴로워요.”

“이제는 겁이라도 주려는 건가? 정체도 불분명한 미친 노인네가 하는 말을 나보고 다 믿으라고?”

“첫 생을 시작한 때가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이 버리고 온 것들이 얼마나 큰 건지 당신은 아직 몰라요.”

“시끄러워요! 어차피 돌아가 봤자 사형만 당할 인생이라고! 버리긴 뭘 버려? 어차피 내가 버리기도 전에 버려질 인생인데!”

메이벨이 경기를 일으키며 세체르에게 흑마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이미 몸속에 축적된 오염들과 한데 섞여 엄청난 위력을 발산했다.

세체르는 다친 손을 부여잡으면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어리석은 것. 너는 반드시 오늘 나를 그냥 보낸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싸늘한 눈으로 노려본 세체르는 지체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는 모습이 놀라울 만도 한데 메이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건 빌어먹을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한 거고, 또 제로니스를 사랑하게 된 거야.”

이제는 제로니스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집착인지도 모를 만큼 그녀는 지친 상태였다.

‘어차피 이번에도 망해 버린 인생이라면 두 사람이 괴로웠으면 좋겠어.’

메이벨은 당장 내일 있을 일을 떠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주변에 검은 아지랑이가 넘실거렸다.

금기를 어긴 제물에게서만 보이는 음습한 기운이 그녀를 완전히 삼키는 일은 순식간이었다.

* * *

제례 당일엔 날이 아주 맑았다. 나는 아침부터 키나에게 몰래 청포도 한 송이를 주며 말했다.

“키나, 거듭 말하지만 오늘 네 임무는 캐서린을 지키는 거야. 혹시라도 메이벨이 접근하려 한다면 나에게 알려야 해. 알겠지?”

- 깍깍, 까아악.(거참, 그렇게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듣는다고. 나를 새대가리로 아는 거야?)

어쩐지 심기가 나빠진 키나가 포도씨를 바닥에 다다다다 연발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포도씨를 손수건으로 주우며 눈을 흘겼다.

이러니 슈리가 키나에게 포도를 주지 말라는 게지.

나날이 건방져지는 전령새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맘 같아선 내가 캐서린 곁에 붙어 있고 싶지만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이윽고 나는 발버둥 치는 키나를 붙들어 은신 마법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 커다란 덩치로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면 누구라도 내 전령새인 줄 알 것 같아서였다.

배불리 포도를 먹은 키나가 몇 차례 투레질하다 퍼드득 날아갔다.

나는 키나가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유유히 에셀 성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제로니스에게 온 서신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내게 캐서린의 일을 의논했다.

[계속 고민하다가 이렇게 편지를 쓰네. 그래도 자네가 캐시와 가까우니 잘 알 것 같아서 말이야.

실은 요즘 캐시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아 걱정이네.

나도 처음엔 지나친 기우라고 여겼네만 언제부턴가 캐시가 말수도 줄고 생기가 없어졌어.

듣자 하니 에디와 공작도 피하는 것 같아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도통 뭔지 모르겠어.

혹시 캐시와 뭔가 나눈 얘기는 없는가?

괜찮다면 자네가 캐시를 만나 봐 주었으면 하네.]

나는 캐서린이 모두를 피하고 있다는 말에 문득 그녀의 기억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피하기 시작한 때도 내게서 구슬을 돌려받은 시점과 일치하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