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활짝 열린 창문 안으로 서늘한 바닷바람이 밀려들자 새하얀 이불 속에 파묻힌 금발이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특유의 향이 섞인 해풍이 만들어낸 공기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펠리체와 확연히 달랐다.
홀로 잠에서 깬 연이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여기 어디야?
제 방도, 설우의 방도 아니었다.
천장을 타고 흘러내린 캐노피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온수 매트가 주는 열기와 바닷바람이 주는 찬기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니 이불 속에서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오빠? 이든, 첸?”
하지만 혼자 있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연이 결국 침대를 벗어났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묶여있지 않은 손발을 의아해할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에 넋이 나간 연은 눈을 비비며 테라스로 향했다.
안전가드를 열고 나가니 투명한 유리 난간 밖으로 온통 푸른색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와,예쁘다.”
홀린 듯 난간으로 다가간 연이 조심스레 유리를 톡, 건드려 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탓에 밖으로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유리의 실체를 확인한 연은 가슴까지 오는 난간에 두 팔을 걸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구경했다.
“연아!”
달그락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설우의 놀란 목소리가 전해졌다.
팔을 내린 연이 뒤를 도는 것보다 달려온 설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게 더 빨랐다.
“일어난 거야? 왜 이러고 있어, 떨어지면 어쩌려고.”
깨어나길 기다리며 지키고 서 있을 땐 미동도 없더니.
룸서비스를 받으러 다녀온 잠깐 사이에 테라스 난간에 매달린 뒷모습을 보게 된 설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어났어요. 오빠 여기 뭐예요? 너무 예뻐요. 동화 속에 들어온 줄 알았어요.”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혼자 있는데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면 어떡해, 위험하잖아.”
“놀랐어요?”
“나 심장 하나야, 적당히 해.”
너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을 지옥 끝까지 다녀온다고.
“죄송해요. 근데 진짜 여기 어디예요? 난 분명 펠리체에 있었는데.”
안심한 설우가 팔에 힘을 풀자 재빨리 뒤를 돈 연이 탄탄한 허리를 끌어안았다.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잠들었더라고. 그래서 내가 납치해왔지.”
“이런 납치라면 매일 당해도 좋겠는데요. 첸이랑 이든은요?”
“버리고 왔어. 오늘은 둘이 놀자.”
“회사는 정말 안 가도 되는 거예요?”
“인천에 있는 파라다이스 리조트 꼭대기 층이야, 지사 관리차 출장 온 셈이지.”
“어쩐지 엄청 높더라. 그럼 우리 뭐 하고 놀 건데요?”
“일단, 연이 밥부터.”
품에 안겨 꼼지락거리는 연을 떼어놓은 설우가 테이블에 내던진 것치곤 멀쩡한 음식들을 가리켰다.
“맞아, 나 배고픈 거 같아요.”
아침은 전부 토해내고 자느라 점심도 걸렀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연이 깨기도 전에 나가 미리 룸서비스를 시켜놓은 이유였다.
“많이 먹어.”
“스테이크!”
“세 덩이나 주문했어. 천천히 먹으면 전부 먹게 해줄게.”
“진짜요?”
“진짜.”
설우가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자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한 향을 풍기는 스테이크를 앞에 두니 빨간 입술이 쉼 없이 달싹거린다.
“오빠, 오빠. 이제 먹어도 돼요?”
그런 연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운 설우는 두꺼운 스테이크 한 덩이를 다 썰 때까지 간절한 금빛 눈동자를 외면했다.
매번 허락을 구하는 그녀가 가엽지만, 살 떨리게 사랑스러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가 않다.
“응, 먹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직인 포크가 순식간에 세 조각을 찍어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또 세 조각.
천천히 먹겠다는 다짐은 금세 잊고 두 볼이 빵빵해지도록 고기를 채워 넣는다.
으, 귀여운 내 다람쥐.
“천천히.”
간질거리는 속마음을 숨긴 채 눈을 가늘게 뜬 설우의 지적에 포크를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고칠 건 고쳐야지. 몸을 상하게 하는 나쁜 버릇까지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특히 오냐오냐 우리 연이, 만 외치는 두 놈이 있어 식습관을 고치기가 힘들었다.
“밥 다 먹고 뭐해요?”
“내려가서 바다를 볼까? 아니면 항구에 수산물 시장 구경? 물고기 엄청 많아.”
“으음, 아뇨. 바다는 위에서 볼래요.”
“왜? 가까이서 봐야지. 나가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잖아.”
“저게 더 하고 싶어요.”
“저게 뭐…?”
연이 눈짓한 테라스 안쪽을 들여다본 설우가 스테이크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
펠리체 욕실에 있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거대한 욕조, 오션뷰를 감상하며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둔 스파 욕조였다.
“저거 하고 물고기 구경할게요.”
“너 수영복 없잖아.”
수영복은 사면 그만이다. 코앞에 있는 백화점에 갈 필요도 없이 리조트 안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침대에 있는 너로 모자라 물에 젖은 너까지 참아보라고? 불가능한 일이다.
“수영복 있어야 해요?”
“없으면, 옷 입고하게?”
“아뇨? 벗고 하면 되잖아요, 다 벗고 같이.”
진작에 얼어붙은 설우의 손에서 은색 나이프가 툭, 떨어져 나갔다.
매번 예측 불가능한 답이 돌아온다.
선악을 맘껏 넘나드는 연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뽀뽀 한 번에 얼굴이 벌게졌다가도 키스를 하고 싶다며 달려들고, 잠결에 제 침대로 올라온 걸 부끄러워하다가도 같이 자고 싶다며 졸라댄다.
얼마 전까진 와이셔츠만 벗어도 눈을 감더니, 리조트 테라스에서 같이 스파를 하자니.
“싫어.”
“오빤 왜 그렇게 싫은 게 많아요? 그럼 구경해요, 나 혼자 할게요.”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지.”
“아닌데요.”
“다 벗고 어떻게 스파만 해. 내가 진짜 참나무라도 되는 줄 알아? 차라리 고문을 하든지.”
퍽퍽, 잘라둔 스테이크가 모조리 사라지자 설우가 괴팍하게 나이프를 움직였다.
은근히 눈치가 없단 말이지.
까칠하게 답하는 설우를 뾰로통하게 흘기던 연이 잠시 포크를 내려두었다.
이 와중에 고기를 썰어주는 자상한 남자가 너무 좋으니까. 보살핌을 받는 동생 같은 느낌을 지우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뜨거운 입맞춤을 받아도 무언가 부족했다. 그래서 오빠를 전부 가진 여자가 되고 싶다.
“그것만 하자고 안 했잖아요. 이든이랑 첸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 같죠? 나 오늘 잡아먹힐게요, 오빠한테.”
천진한 얼굴로 환장할 말만 골라 뱉는 연 때문에 귀가 새빨개진 설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요? 또 싫어요?”
“아니, 좋아. 물 받으러 갈 거야. 후회하지 마, 너.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5개 남았어요. 이것만 다 먹고 갈게요.”
스테이크가 넘어가?
벌써 후끈거리는 목덜미를 주무른 설우가 앙증맞게 스테이크를 입에 넣는 연을 보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온도차이가 너무 극심하잖아, 연아.
혹시나 연이 잠들까 봐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설우는 뜨거운 물을 받고 가림막까지 꼼꼼히 쳐두고 나서야 테이블로 돌아왔다.
“벗고 갈 거야, 가서 벗을 거야.”
나는 미치겠는데 너는 멀쩡한 거 같아서.
억울함에서 비롯된 짓궂은 질문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연이 헐렁한 홈웨어 상의를 냅다 벗어 의자 위에 걸어두었다.
곧장 드러난 하얀색 브래지어가 기다란 금발 사이로 스치듯 보였다.
교통사고 후 연의 옷을 갈아입힌 도우미가 이너웨어는 잊은 모양이었다.
“그만해, 내가 벗길래.”
거침없이 후크로 돌아가는 손을 저지한 설우가 제 티셔츠를 벗어 던지며 가는 허리를 낚아챘다.
커다란 상체를 맞이한 연의 허리가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흐응….”
그만큼 거친 키스로 시작을 알린 설우는 손쉽게 그녀의 다른 옷가지들을 벗겨냈다.
“하아…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네?”
낮에 자는 시간이 늘고, 사고 트라우마까지 나타나 괴롭히니 은연중에 지쳐 있을 그녀를 쉬게 하고 싶었다.
눈과 입이 즐거운 곳에서 종일 품에 안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녀의 불안을 달래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 착한 생각들이 무색하게도 눈앞을 일렁이는 하얀 나체는 무섭도록 탐스러웠다.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색, 금색, 분홍색. 세 가지 색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몸 구석구석이 두 눈에 박히자 끓어오르는 피가 비명을 지른다.
제 등짝이 어디에 치이건 말건. 연의 부드러운 살결을 맘껏 탐하며 테라스로 나오니 찬 공기가 녹기 직전인 머리를 식혀주었다.
“오빠.”
“응?”
“…너무 좋아요, 지금까진.”
“더 좋아지게 해줄게.”
욕조에 걸터앉은 연의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새긴 입술이 차근차근 내려앉았다.
둥근 살덩이 주변을 맴돌던 혀가 멈추고 정점을 강하게 빨아들이자 연이 저도 모르게 설우의 어깨를 쥐었다.
그게 꼭 더 해달라는 뜻인 것만 같아 한껏 달아오른 그의 날카로운 이가 여린 살을 물었다.
“아흣…!”
깨무는 입과 굴리는 손이 동시에 느껴지니 연의 온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오빠 말이 맞았네. 정말 아픈데 좋잖아.
경험하지 못한 쾌락에 몸서리친 연이 숨을 몰아쉬자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설우가 바지와 함께 드로어즈까지 벗어 내렸다.
“들어가, 추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설우의 맨몸을 정면에서 마주한 맑은 금안에 혼돈이 담겼다.
벗고 씻자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부풀어 올라 정상을 찍은 부위를 멍하니 훑던 연이 휘청거리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시선은 한 곳에 고정.
“그렇게 뚫어져라 봐야겠어? 난 이미 한계라서 더 흥분할 수도 없다고. 너무 자극적이야, 네 눈.”
“이, 이게 나한테 들어와요?”
출렁거리는 물을 방패 삼아 연이 스멀스멀 뒤로 물러났다.
“물론.”
설우는 점점 더 앞으로.
“오빠, 나 졸린 거 같아요.”
“너 안 졸려. 이리 와.”
“우앗!”
머지않아 설우에게 잡힌 연이 그의 위로 올라 앉혀졌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준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연의 볼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겁도 없이 왜 덤벼.”
“내가 못 자라서 너무 애 같으니까… 하고 싶었어요.”
맞닿아 있는 허벅지 사이가 욕조에 들어찬 뜨거운 물보다 더 큰 열기를 가져다주었다.
“어쩌지. 여기까지 와서는 나도 도리가 없는데.”
기척 없이 내려간 설우의 손이 자연스레 벌어진 허벅지 안쪽을 타고 깊숙이 들어갔다.
태어나 처음 남의 손길이 닿은 곳은 한없이 예민했다.
흠칫 놀란 연이 허리를 뒤틀어 보았지만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최대한 인내하고 아주 느긋하게.
내가 주는 열락에 취해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으흣, 오빠. 자, 잠깐만!”
등줄기가 아릴 만큼 능숙한 손길에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들썩이던 연이 황급히 설우의 목을 감싸 안으며 달라붙었다.
“괜찮아.”
“아니, 흐응, 안 괜찮아요, 아!”
“아니, 괜찮을걸.”
“오, 오빠! 이제 손 그만요. 차라리 그냥 할래요.”
불덩이가 가득한 아랫배의 끝자락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둥둥거린다.
손가락이 뭐 이렇게 제각각 움직여?
제 입에서만 연신 신음이 터져 나오니 창피해진 연이 설우에게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해?”
“응, 해. 할래요.”
“그래, 그럼 침대로 가자.”
“다 젖었는데요?”
“좋잖아, 축축하고.”
“방금 웃는 거 좀 변태 같았어요.”
연을 번쩍 안아 든 설우가 물을 뚝뚝 흘리며 침대로 향했다.
“내가 매번 말했잖아, 나 변태 맞다고.”
체격 차이가 큰 몸이 어렵사리 겹쳐지고 두꺼운 시트가 흥건히 젖어갔다.
“아흣!”
오목조목 잘 빚어진 작은 체구를 뒤덮은 그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끌어올렸다.
물기가 남은 살이 부딪히니 귓가를 울리는 소리조차 색정적이다.
“미안해, 연아. 조금만 참아.”
낯선 고통을 맞이한 연의 골반이 파르르 진동했다.
“으으, 아파…!”
아파, 정말 아프다. 첫 경험이란 게 이런거구나.
바들거리는 손으로 시트를 틀어쥔 연이 안쓰러움이 가득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많이 아파?”
“아니, 괜찮아요. 무서워서 엄살 부린 거예요.”
촉촉해진 눈으로 배시시 웃는 연의 얼굴에 닿는 대로 짧게 입을 맞춘 설우가 부드럽게 그녀를 오르내렸다.
속이 들여다보일 것처럼 투명했던 금안이 점차 색욕으로 탁해졌다.
“크윽…!”
그에게서도 목울대를 울릴 만큼 억눌린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좋을 줄 알았다. 지나친 욕정을 가져다줄 게 뻔해서 참고 또 참았다.
한번 시작하면 더는 참을 수 없을까 봐.
이후로 끝없이 너를 짓이기고, 내 흔적을 남기고, 그렇게 너에게 취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까 봐.
사람 잡는 쾌락에 끊어져 나가려는 이성을 단단히 틀어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아프게 하면 안 돼. 적당히, 제발 적당히.
분명 처음보다 깊고 빨라졌지만, 적정선을 유지하려 애쓰던 설우가 제게 맞춰 들어 올려진 미끈한 허리를 받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환장하게 좋으면 앞으로 난 어떡하라고. 여린 몸이 상할까 매일 안을 수도 없는데, 젠장.
“하읏, 어떡해… 오, 오빠 나 좀 이상해요, 이제 안 아파. 좋은 거 같은데, 좋은 건가?”
밝은 형광등 아래 적나라하게 몸을 드러내고도 솔직한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얇은 이성의 끈마저 갉아먹으려 드는 못된 다람쥐 같으니라고.
“연아.”
“네?”
“넌 천사의 탈을 쓴 악마야.”
“아니, 읏, 아니거든요!”
“네가 너무 좋아, 미칠 거 같아.”
“나도요. 그러니까 나 절대 버리지 말아요.”
“내가 널 어떻게 버려. 나 이제 너 없이 못 살아. 아프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사랑해.”
색기 넘치는 그의 저음에 온몸이 현혹되는 것만 같다.
저를 끌어안고 한없이 무너지는 남자를 보니 이상한 희열이 찾아왔다.
언제나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그와 이제야 동등해지는 기분이다.
“사랑해요.”
“사랑해.”
무엇 하나 참을 수 없어 일그러진 얼굴이 연의 가는 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첸과 이든에게 붙잡혀 배가 갈려도. 아니, 너를 탐한 대가로 지옥불에 떨어진다 해도 포기하지 못할, 제게도 낯설기만 한 열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