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행복한 일상이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기업 임원 자리를 포기한 다정한 아빠, 8살 차이의 여동생이 예뻐 죽는 든든한 오빠.
엄마의 부재를 사랑으로 이겨낸 가족에겐 언제나 웃음꽃이 만연했다.
“연아,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단정한 교복을 입은 연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재잘대기 바쁜 동생이 조용하니 옆으로 바짝 다가온 준이 장난을 쳤다.
“아니, 없어.”
“같은 반 남자애 한 명이 유독 괴롭히나 봐.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싶다고 한참 징징거렸어.”
“괜찮아. 연이가 너무 예쁘니까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거야.”
“오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검은색인데 왜 나만 이래?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는 거 짜증 나.”
15살. 슬슬 사춘기가 오는 나이의 연은 말썽을 피우진 않았지만 특별한 제 색에 이목이 끌리는 것을 못 견뎌했다.
“네가 엄마를 많이 닮았으니까. 자, 선물. 이거 받고 기분 풀어.”
“이게 뭐… 어! 설우 오빠다.”
편안한 차림의 설우가 반짝이는 야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금세 밝아진 낯빛을 보며 뿌듯하게 입매를 올린 준이 그저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 전에 받았어. 방학 때 놀러 오래, 올해는 한국에 못 들어올 거 같다고.”
“사진 찍을 땐 좀 웃지. 오빠 웃는 거 진짜 멋있는데.”
“우리가 많이 웃겨주자.”
“맨날 자기 편할 때만 연락하고, 전화하면 받아주지도 않는데 뭐가 예쁘다고.”
“설우 집안이 원래 그래. 경영 수업 중엔 외부와 연락을 끊거든. 그래도 너희는 특별대우받고 있잖아. 통화도 하고, 사진도 받고, 설우 한국 들어오면 만나기도 하고.”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뒤를 돌아본 재호가 찰싹 붙어 앉아 사진을 보는 남매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어쩜 저렇게 사이가 좋을까.
“오빠 보고 싶다.”
“또 안아달라고 하게?”
“아니거든! 그리고 안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빠가 안아주는 거야. 내가 아직도 7살인 줄 아나 봐. 근데 재작년보다 키가 많이 커서 이제 한 손으론 못 안을걸?”
“너 아직 엄청 작아.”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볼을 잡아당기자 입술을 삐죽인 연이 준의 팔을 감싸 안고 얼굴을 비볐다.
“나도 미국 데려갈 거지?”
“당연하지. 차설우 바라기를 두고 갔다가 얼마나 원망을 들으려고. 아빠 가도 되죠?”
“그래. 아빠랑 새엄마도 같이 가서 설우도 보고 여행도 좀 다니자.”
차 회장을 오랜 시간 보필한 탓에 재호는 집안사람 만큼이나 CH의 교육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설우가 올해 25살이니 마지막 만남이 될 듯싶었다. 설우도 그걸 알고 아이들을 미국으로 부르는 거겠지.
공부를 마칠 때까지 한동안 설우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할 준과 연의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설우 오빤 나이를 먹을수록 잘생겨져.”
“6살 때부터 설우랑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일편단심이네, 우리 딸.”
“결혼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냥 잘생겼다는 거지.”
“연아,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오빠가 다음에 올 때 사다 줄게.”
“아니이, 오빠만 오면 돼.”
“으, 이 애교쟁이.”
“또 언제 와? 다음 주?”
“아니, 다다음 주.”
연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준이 매주 제주도로 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가 돌아갈 때마다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다. 오빠도 맨날 제주도에 있고 설우 오빠도 보고.”
헤어짐을 앞두고 서로의 손을 잡은 남매의 눈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 짧은 눈 맞춤이 마지막일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 달 금방 가. 아빠 공항 얼마나 남았어? 비행기 시간 넉넉하면 연이랑 떡볶이라도… 어? 아빠 앞에!”
비행기 탑승 시간이 넉넉히 남았으면 연이랑 떡볶이라도 먹고 가겠다고.
한동안 못 볼 여동생과 조금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준이 내비게이션을 보기 위해 정면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육중한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그들의 차를 들이받은 건.
재호가 재빨리 핸들을 틀었지만 이미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
연이, 우리 연이.
눈을 질끈 감은 준이 연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렸다.
힘없이 구겨진 세단은 그대로 전복되어 도로를 굴렀다.
“어머, 세상에. 어떡하면 좋아.”
“자기야, 신고했어?”
“어, 곧 도착할 거래.”
차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명이 되어 귀를 울렸다.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뒤로 한 채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린 연이 제 옆에 쓰러진 준을 바라보았다.
연을 감싸 안았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으윽, 오빠 괜찮아? 오빠, 오빠아.”
역한 비린내가 코끝을 찔러댔다.
갈 곳을 잃고 움찔거리는 손바닥에 주인을 모르는 끈적한 피가 묻어났다.
연이 뒤집힌 차의 시트를 바라보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아빠, 오빠가 이상해. 오빠가 대답을 안 해.”
하지만 운전석에서도 연이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 대답 좀 해봐! 윽, 우으흑… 오빠, 오빠.”
미약하게 느껴지던 숨결마저 사라지자 연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
쾅, 쾅.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도착한 구조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학생, 괜찮아요? 조심, 조심해서 꺼내!”
“오빠… 우리 오빠도 꺼내주세요. 그리고 아빠….”
먼저 차에서 나온 연이 재호를 찾았다. 연달아 구조된 재호와 준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고개를 내저은 구급대원들은 재호와 준을 두고 멍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은 연에게 다가갔다.
“어디가 크게 다쳤을지 모르니 일단 병원으로 가야 해요. 학생 일어날 수 있겠어요?”
“오빠랑 아빠는 왜 저렇게 가만히 둬요? 왜 눈을 안 떠요? 오빠랑 아빠부터 치료해 줘요, 난 멀쩡하잖아!”
“그, 같이 탑승하신 가족분들은….”
“야!”
현장에서 즉사.
제정신이 아닌 어린 여자아이에게 잔혹한 말을 내뱉으려는 동료를 말린 구급대원이 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학생. 머리에 출혈도 있고, 상처도 많이 났으니까 일단 병원으로 가요.”
“…죽었어요?”
“네?”
“우리 아빠랑 오빠 죽었어요? 아니죠? 괜찮은 거죠?”
“아, 미치겠네. 후. 유감스럽지만, 사고 직후에 이미….”
자주 보는 사고 현장이고, 자주 보는 피해자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건 언제나 곤혹스럽다.
“아니야, 아니야. 아악! 오빠가 왜! 으흐흑, 우윽….”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무너진 연이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
사고 현장에서 웅성거리던 이들도 처절한 오열에 입을 다물었다.
“나만 두고 가지 마, 으흑! 제발, 오빠….”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무심한 하늘은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조차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게 준과 재호를 제품으로 데려갔다.
“어어, 학생! 야, 배드 가져와, 빨리!”
터져 나오는 눈물을 박박 닦으며 준과 재호를 보기 위해 일어나려던 연이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지옥의 시작이었다.
***
높은 천장, 푹신한 베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제가 있는 곳을 차례로 확인한 연이 눈을 깜빡였다.
“연아.”
“오빠. 나 또 잠든 거예요? 근데 회사로 안 가고 왜 집으로 왔어요?”
“어? 아, 음, 그게. 갑자기 회사 가기가 싫어져서. 마침 너도 잠들어서 그냥 집으로 왔어.”
연이 사고를 기억하지 못한다.
예상하지 못한 첫 마디에 당황한 설우가 횡설수설 핑계를 만들어냈다.
그저 평소처럼 자다 일어난 거라 생각하는 연이 상체를 세우다 제 손목에 달린 주삿바늘을 발견했다.
“이건 왜요? 나 어디 아파요?”
“아니, 영양제. 비실비실 자꾸 픽픽 쓰러지니까 하나 해달라고 했어.”
“나 요즘 되게 건강한데요?”
“아니야, 부족해.”
“와, 어쨌든 오빠 회사 안 가는 거예요? 종일 같이 집에서 놀아요?”
“응. 어차피 회사 가서도 종일 같이 놀았잖아.”
“아니거든요. 회의하고, 미팅하고, 또 회의하고. 오빠 바빠서 나 맨날 혼자 놀았는데.”
겁에 질려 속을 게워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르르 눈을 굴리며 웃는다. 뭐가 저렇게 좋다고.
“아픈 데 없지?”
사고 당시의 기억이 나고도 모른 척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아뇨, 전혀.”
반달로 접힌 눈은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거 다 맞을 동안 얌전히 누워있어. 이든이랑 첸 들여보낼게.”
“오빠는요? 어디 가게요?”
일어나는 설우의 옷자락을 다급히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
“윤 교수 보내고 다시 올 거야.”
“아아, 알았어요!”
곧바로 손을 뗀 연이 두꺼운 이불을 펄럭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때요, 나 말 잘 듣죠? 연의 표정이 하는 말을 알아들은 설우가 설핏 웃어주고 침실을 나섰다.
“형! 꼬맹이는?”
“깼어, 방에 들어가 봐. 사고 난 건 기억 못 하니까 입조심하고.”
“기억을 못 해?”
“응. 난 윤 교수랑 얘기 좀 하고 올게.”
걱정스러운 마음에 하염없이 복도를 서성이던 이든과 첸이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연이 일어났어요, 이만 가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윤 교수가 있는 거실 소파로 다가온 설우가 힘없이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안 보고 가도 됩니까?”
“사고 났던 걸 잊었어요. 사고 순간에 기억이 났던 거 같은데 그것까지 전부 잊은 거 같아요.”
“그 기억을 잊기 위해서 조금 전 사고까지 같이 지운 거겠죠.”
“네?”
“수면장애는 뇌 손상에서 비롯된 거지만 기억상실은 심인성인 거 같네요.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지운 거죠. 사고 후 10년 가까이 전혀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트라우마가 극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 끔찍했을 거야.
뒤늦게 받아본 사고 자료 속 사진들은 처참했다.
트럭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으로 발생한 사고는 천사 같던 두 사람의 생명을 단숨에 앗아갔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아이.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다고 했으니 그 모든 장면이 두 눈에 담겼었겠지.
잊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겠지.
“이제 보니 다행이었네요.”
“네?”
“전부 잊은 게 다행이었다고요. 앞으로도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만 일어나시죠.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윤 교수를 배웅한 설우가 정원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문득, 연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던 준이 떠오른다.
준아, 그렇게 아끼던 연이를 혼자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니.
쓰라린 마음이 담배 연기와 함께 날아갔으면 좋겠건만.
목울대까지 차오른 열기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너는 연을 다시 만나 사랑하고 있으니 과거의 기억 따윈 필요 없는 거냐고. 연에게서 잊힌 재호와 준이 저를 원망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전부 잘라낼 만큼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뒤늦게 돌아와 연을 괴롭히지 않게, 차라리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