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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50화 (50/96)
  • 50화.

    나나, 나나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연이 파란색 장미의 줄기 끝을 톡톡, 자를 때마다 이든은 홍조 띤 볼을 톡톡, 건드렸다.

    꽃꽂이 수업을 위해 앉은 이든은 제 몫으로 놓인 장미를 연의 장미 위에 섞어 놓은 지 오래였다.

    “형이랑 둘이 놀러 갔다 온 게 그렇게 좋았어? 얼굴에 생기가 가득하시네?”

    “좋았어요. 바다도 보고, 물고기도 보고.”

    오빠도 보고.

    “매정하다. 나랑 첸 형은 펠리체에 버려두고 둘이서만 룰루랄라.”

    “다음에 같이 가면 되죠!”

    “너 결혼하고 한남동 가면 정신없어서 아무것도 못 할걸.”

    한남동. 떠올릴 때마다 서운한 세 글자에 이든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설우와 연의 결혼까지 앞으로 열흘 남짓. 펠리체에서 함께 먹고 자는 시간도 열흘 남짓.

    아침에 데려다준다고 해도 같이 사는 것과 따로 사는 건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설우 형이 열심히 보살펴도 분명 고생할 텐데.

    “한남동에서 3개월만 살 거래요. 더 일찍 나올 수도 있고. 그 정도는 우리 넷 다 참을 수 있어요.”

    종알종알 떠들면서도 손에서 파란 장미를 손에서 놓지 않던 연은 이든이 사탕 껍질을 벗기기 무섭게 알사탕을 채갔다.

    새우깡 채가는 갈매기와 흡사했다.

    “컨디션이 지나치게 좋은데? 몸짓이 아주 빨라.”

    “이든, 나 오빠랑 점심 먹을 수 있나 물어봐 주세요. 이것도 오빠 주려고요.”

    “아, 맞아. 너 이제 휴대 전화 써야 하는데.”

    투명한 화병에 파란 장미를 가지런히 꽂아 넣은 연이 뿌듯한 얼굴로 이든의 팔을 찔렀다.

    꽃을 다듬는 실력이 제법 좋아졌는지 평소보다 훨씬 깔끔한 결과물을 얻었다.

    “또 연이 씨한테 전부 시킨 거예요?”

    “연이가 좋아서 하는 거라니까요. 지금도 자기 애인 준다고 신났어요.”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꽃꽂이 강사가 매시간 농땡이를 피우는 이든을 타박했다.

    잔소리를 들은 이든은 눈썹을 들썩이며 잠시 휴대 전화를 내려두었다.

    “어머, 연이 씨 애인 있어요?”

    “얘 펠리체 유명 인사예요. 소문 못 들었어요?”

    “펠리체가 외부인한테 얼마나 야박한데요. 특히 돈 받고 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그런 소문 절대 못 들어요.”

    꽃꽂이 강사가 목소리를 줄였다. 이렇게 터놓고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도 연과 이든, 둘뿐이었다.

    날 때부터 물질만능주의의 정점에서 자라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다른 곳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당 때문에 떠날 수도 없었다.

    펠리체 안에서 생계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주민들과 다른 관점의 물질만능주의 속에 갇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곤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왕따를 잘 시키긴 하죠. 얘도 사실…….”

    “이든!”

    “하하하, 알았어.”

    화병에 리본을 묶던 연이 틈만 나면 놀리는 이든을 흘겼다.

    “근데 애인한테 파란 장미를 주려고요? 파란 장미보단 빨간 장미나 주황, 분홍 장미 같은 게 더 나아요.”

    “왜요? 파란 장미가 오빠랑 제일 잘 어울리는데.”

    “나는? 나는 무슨 색이 잘 어울려?”

    “이든은 꽃이랑 안 어울려요.”

    연이 삐죽 혀를 내밀었다. 꽃꽂이 강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현실 남매 같은 연과 이든의 장난을 구경하는 게 새로운 유희가 되었다.

    둘을 보고 있으면 7살짜리 아들 아래로 딸을 하나 낳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 장미의 꽃말이 뭔 줄 알아요?”

    “아뇨, 몰라요. 뭔데요?”

    “기적, 희망,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자주 쓰지만, 불가능,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의미도 있어요. 인위적으로 태어난 아이라 그런지 의미가 이중적이죠. 어쨌든 기적 같은 사랑보단 열렬한 사랑이나 영원한 사랑이 낫잖아요.”

    친절한 설명을 듣고 고민에 빠져 멍하니 파란 장미를 보던 연이 이내 환하게 웃었다.

    “아뇨, 파란 장미로 줄래요. 나한테 오빠는 기적 같은 사람이거든요.”

    “와, 방금 한 말 형이 들었으면 좋아서 난리 쳤을 텐데.”

    “연이 씨는 얼굴만큼 마음씨도 참 예쁘네요. 사람은 역시 귀하게 커야 하나 봐.”

    “한 선생! 여기 좀 봐줘.”

    “수업 마무리됐으니까 먼저 가 봐도 돼요. 다음 시간에 봐요.”

    이든의 못마땅한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꽃꽂이 강사가 자리를 떴다.

    “이든, 나 귀하게 큰 거처럼 보여요?”

    “모르고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 귀하게 안 컸어도 우리한텐 세상에서 제일 귀해.”

    “오빠들한테 넘치게 사랑받아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불쌍하거나 아픈 사람처럼 안 보여서요.”

    “으유, 우리 순둥이. 기다려 형한테 전화 걸게.”

    “네.”

    반질거리는 정수리를 살포시 쓰다듬은 이든이 휴대 전화를 들자 연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응.

    “연이가 형이랑 점심 먹고 싶다는데.”

    -지금?

    “왜? 안 돼?”

    허락을 기대하던 눈꼬리가 축 가라앉았다.

    실시간으로 보이는 반응에 이든이 킥킥거렸다.

    -제이 가는 중이야.

    “권, 이 아니라 그 남자 보러?”

    -연이 옆에 있어?

    “센터 수업 이제 막 끝났어.”

    -그럼 한 시간 후에 만나. 메뉴는 연이가 먹고 싶은 걸로.

    “알았어.”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연이 힘없이 화병을 만지작거렸다.

    “가자, 꼬맹이.”

    “어디요?”

    “형이랑 밥 먹으러. 한 시간 후에 먹자고 했으니까 드라이브하면서 천천히 가자.”

    “된대요?”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나 생각해.”

    고개를 마구 끄덕인 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렇게 좋을까. 기대감으로 발갛게 오른 볼이 씰룩거렸다.

    리조트에 데려가서 애를 제대로 홀려놨나 보네.

    연이 가방을 둘러매자 대신 화병을 들어준 이든이 작게만 느껴지는 손을 쥐고 센터를 나섰다.

    철컹.

    제이의 주인이 지하실로 내려오자 문을 지키고 있던 백인 가드 둘이 육중한 철문을 밀었다.

    천장을 타고 내려온 두툼한 가죽끈에 양손이 묶인 상철이 꿇어 앉혀져 있었다.

    이딴 건 또 언제 달아 놓은 거야.

    현태를 잡아 왔던 이든이 그를 괴롭히는 걸 꽤 즐긴 듯했다.

    설우에게 의자를 가져다준 가드는 땅만 바라보고 있는 상철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으윽….”

    두피가 뜯겨가는 악력에 억지로 고개가 들린 그는 신음을 흘려댔다.

    “또 보네.”

    “재벌이랍시고 고고한 척은 다 하고 살면서 깡패 두목이랑 다를 게 뭐야.”

    상철은 입술에 굳어진 피딱지를 혀로 쓸며 빈정거렸다.

    “아아, 이든하고 첸이 미국에 있을 때 좀 위험한 집단에 있었거든. 둘이랑 같이 데려온 애들이야. 이 나라 깡패랑 비교하면 서운하지. 하는 짓이 배로 잔인한데.”

    긴 다리를 꼰 설우는 느긋하게 담배를 물었다.

    독 안에 든 쥐새끼 주제에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는군.

    “다미는 어때,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뻐억.

    “크흡!”

    설우의 손짓 한 번에 커다란 주먹이 날아들었다. 평창동에서 맞았을 때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딴 이름 갖다 붙이지 마, 기분 더러워.”

    제기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백창석에겐 하염없이 빌었지만 작정하고 저를 가둔 그에겐 소용이 없을 것이 뻔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 오늘은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

    고작 주먹 한 대에 두려움이 깃든 눈이 우스웠다.

    겨우 이 정도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그럼 연이는?

    갑갑한 병실에서 내내 발버둥 쳤을 가여운 그 아이는.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야, 다미 병원 기록… 커헉!”

    느긋한 손가락이 다시 허공을 젓기 무섭게 가드가 거칠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빨에 짓이겨져 터진 입안에 핏물이 고였다.

    “그 이름은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네 딸한테나 쓰라고.”

    사고 이후 연이 사용한 이름은 새희망 정신병원 어딘가에 있었을 권상철의 친딸이었다.

    권다미. 연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찾을 수 없었던 이름.

    만일 그날 연이가 이 가게로 들어오지 못했더라면 우린 평생 만날 수 없었겠지. 치가 떨릴 만큼 소름 끼치는 가정이었다.

    “그 애 병원 기록 같은 건 없어! 주고 싶어도 못 준다고!”

    “주지 마, 그럼. 기록이 있든 없든 너와 네 와이프의 앞날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정말 걜 데리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웃기지 마. 색다른 외모에 홀려 옆에 끼고 있는 것도 잠깐이야. 걔 혼자 다치는 걸로 안 끝나. 잠결에 주먹으로 얻어맞는 건 어린애 장난이지. 목을 조르고, 유리병을 내려치기도 한다고.”

    “너희가 연이를 병원에 가둔 건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잖아. 아무리 양심이 없어도 애가 아픈 걸 방패로 내세우면 안 되지.”

    “아니, 결국 너도 네 손으로 걜 병원에 보내게 될 거야. 그년이 멀쩡했다면 정신병원에 처박진 않았을… 으아악!”

    기다란 손가락에 꽂혀 연기를 피워내던 담배가 상철의 허벅지 위로 짓이겨졌다.

    살을 녹이는 불씨에 고스란히 노출된 그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부림을 쳤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잔인한 응징을 마친 설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파서가 아니라, 돈이었지. 가족을 전부 잃은 연이가 상속받은 돈이 욕심나서 꼭꼭 숨긴 거잖아. 묶고, 재우고, 때리고. 그리고 그 돈을 다 쓰고 나니 데리고 있을 가치가 사라진 연이를 평창동 노인네한테 팔아넘기려고 했던 거고.”

    “크으윽, 미친 새끼….”

    “기대해. 가진 게 많아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놈이 어떤 미친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천천히 보여줄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으니 절로 눈물이 고였다.

    촉촉해진 눈을 치켜뜨는 상철을 가소롭다는 듯 깔아보던 설우가 사진 한 장을 바닥으로 던졌다.

    “세, 세희는 내버려 둬! 뭐든 나한테 하라고!”

    여의도 증권가에서 찍힌 세희였다.

    “개소리는 사람 봐가면서 하라고 했을 텐데. 애초에 다친 연이를 데리고 사라진 건 이 여자였어. 이 여자가 주범이라고. 진성 물산? 아니, 성진이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설계한 작전주인데 기억이 안 나는군.

    설우의 중얼거림을 들은 상철이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굴렸다.

    설계한 작전주라고?

    연주가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던 주식이 설마!

    “장세희가 전 재산을 털어 넣는 순간, 펑. 그 돈은 전부 휴지조각이 된다는 뜻이지.”

    “…안 돼.”

    “평창동 김 전무한테까지 손을 벌릴 줄이야, 간도 크지.”

    “차, 차라리 빨리 이리로 데리고 와. 어차피 잡아 올 거라며!”

    눈이 시뻘게진 상철이 발악했다.

    함께 일했기에 김 전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희가 김 전무에게 잡혀간다는 상상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곧, 데리고 올 거야. 김 전무 돈을 못 갚은 그 여자가 화류계 바닥을 2달쯤 굴러다닌 후에?”

    “이, 이 봐, 차 사장. 아니, 차 사장님. 시키는 건 뭐든 할게요. 구둣발을 핥으라면 핥고 기라면 길 테니 제발 세희 좀 살려주세요. 김 전무 손에 놀아나지 않게 제발, 으흑… 부탁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애원하는 상철을 보고 있으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치의 죄책감도 없이 저질러 온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애원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어찌 보면 피차일반이군.

    사랑하는 여자의 고통을 갚아 주기 위해 잔혹한 보복을 일삼는 나 역시 정상은 아니지.

    “김 전무가 평창동 노인네한테 여자 데려가는 놈인 건 알지? 장세희도 예외는 아닐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아, 아아! 안 돼! 그 변태 새끼한테 세희는 안 돼! 제발, 제발 그냥 이리로 데리고 와 줘. 이렇게 빌게, 흐으윽….”

    “장세희는 안 되고 연이는 돼?”

    “……!”

    제 말실수를 깨달은 상철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 변태 새끼한테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연이는 왜.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그건.”

    서슬 퍼런 눈으로 상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설우의 목덜미를 타고 핏대가 불거졌다.

    당장에라도 저 이중적인 입을 찢어내고 싶었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철에게 다가갈 때 블레이저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

    발신인을 확인한 설우가 뒤를 돌아 문 쪽으로 다가갔다. 멀어지는 설우를 확인한 상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 어디야? 연이 스테이크 먹을 거래.

    “또? 왜 맨날 스테이크야.”

    -너 고기만 좋아한다고 혼낼 거래.

    -거짓말. 줘요, 내가 통화할래.

    -싫은데? 내가 할 건데?

    -진짜 못됐어. 오빠 오면 다 이를 거야.

    이든의 목소리 너머로 제가 가장 애정하는 천진한 음색이 들려오자 굳었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이든에게 놀림을 당하며 바둥거리는 모습이 눈앞을 떠다녔다.

    “장소 찍어 보내. 금방 갈게.”

    -꼬맹이가 형 준다고 장미를….

    -아, 이든! 조용히 해요!

    -뭐야, 서프라이즈야?

    -한 달 동안 이든이랑 손 안 잡을 거예요.

    -Why! 미안, 잘못했어.

    “그만 괴롭혀. 그러다 잠들어.”

    -알았어, 전화 끊고 장소 보낼게.

    티격태격하는 대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힌 설우가 잠시 눈가를 문질렀다.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한숨도 재우지 마. 미치기 직전에 다시 올 테니까.”

    “네, 사장님.”

    제이를 총 관리하는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상철을 무심하게 돌아본 설우는 그대로 지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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