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잠든 사이에-26화 (26/96)

26화.

눈을 뜨자마자 보인 탄탄한 가슴에 화들짝 놀란 연이 어깨를 들썩였다.

“헙……! 오빠?”

붉게 충혈된 설우의 눈동자가 길었던 새벽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 잤어?”

“네, 오빠는요?”

“잘 잤을걸.”

네가 여기 있단 걸 알기 전까지는.

“죄송해요, 침대까지 올라온 적은 없었는데.”

빠른 사과와 함께 일어나려는 연의 이마가 꾹 눌렸다.

“잠깐 있어 봐.”

“왜요.”

“그대로 잠깐 있어. 팔 저려.”

“아, 네!”

바르작거리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가 베고 있던 것이 설우의 팔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꿈꿔서 온 거야?”

“기억이 안 나요.”

“무사히 잘 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오빠 눈이 빨개요.”

“속세에 찌들어서 그래.”

“네?”

연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네가 너무 색정적이었단 답을 내어놓을 순 없었다.

“오늘 같이 회사 갈까?”

“그래도 돼요?”

머리채를 잡고 싸운 이후로 설우의 집무실에 가겠다 나서지 못했다.

“괜찮아, 같이 가자. 어차피 저녁도 밖에서 먹어야 하니까.”

다정한 속삭임이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너른 품에 안겨 있음을 인지하니 볼이 금세 달아올랐다.

평소의 가벼운 포옹과 안겨서 함께 누워 있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몰래 오빠 침대로 기어 올라오다니. 미쳤나 봐, 진짜.

“연아.”

“네?”

“나랑 자고 싶었어? 진작 말을 하지. 그럼 내가 네 방으로 갔을 텐데.”

“아, 아, 아니에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세상살이에 무지하다고 해도 남자와 여자가 한 침대에 오르는 의미 정돈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저를 전담하던 간호사 아줌마가 워낙 외설적이기도 했고.

“한 번만 봐줄게. 또 와서 안기면 잡아먹을 거야.”

어흥.

복숭아를 지나쳐 토마토로 향해가는 얼굴빛이 재미있어 설우가 씩, 웃으며 짓궂은 장난을 쳤다.

순간 넋이 나갔던 연이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웃는 그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지. 잡아먹혀도 괜찮다는 말이 목 끝을 맴돌았다.

“이제 갈게요.”

몹쓸 짓에 이어 헛소리까지 하기 전에 가야지.

“싫은데?”

“응?”

“한 이불 덮었다고 반말까지 하네.”

“아침부터 왜 자꾸 놀려요.”

감탄사나 다름없는 대답마저 물고 늘어지자 연이 울상을 지었다.

“억울해서 괴롭히고 싶어.”

“뭐가 억울한데요.”

너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거든.

“속세에 찌든 내가 억울해. 나만 더러운 놈 같잖아.”

“누가 오빠 더럽대요? 아닌데. 엄청 깨끗한데. 양치도 잘하고, 샤워도 잘하고.”

“이거 봐. 나만 더러운 거 맞아.”

허탈하게 웃은 설우가 뜨끈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새벽보다 선명해진 하얀 속살이, 제 침대를 차지한 연의 향이 다시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럼 가기 전에 팔 주물러 줄게요. 내 머리 받치느라 고생했으니까.”

착잡한 설우와 달리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연이 몸을 돌려 엎드렸다.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짚어 상체를 세운 그녀가 가로로 쭉 뻗은 탄탄한 팔을 주물렀다.

와, 딴딴하다.

조금 전까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연은 잔 근육이 가득한 설우의 팔을 만지며 감탄했다.

인내심 테스트가 지나치잖아.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아니, 작은 손길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었다.

헐렁하고 나풀거리는 잠옷을 입고 엎드리니 쇄골은 물론 그 안의 여린 살결이 훤히 드러났다.

금색, 금색, 하얀색, 또 하얀색. 아니, 하얀색이 섞인 살색. 그다음은 뭐지?

꼭 찰흙을 빚듯이 제 팔을 꾹꾹 누르는 연을 바라보던 설우가 불순한 생각을 잊으려 눈을 감았다.

악의 없이 날 쥐고 흔드는구나.

“시원해요?”

“아니, 뜨거운데.”

“뭐예요, 그게.”

“연아.”

“네.”

“나 변태 같아?”

“흐응, 알겠다.”

연의 손이 멈췄다. 더럽다느니, 변태라느니. 설우가 이상한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뭘 아는데.”

“이든이 놀렸죠? 오빠 보고 더러운 변태라고.”

“…뭐?”

“신경 쓰지 마요. 이든이 저번에 나한테는 까먹기 좋은 땅콩 같다고 했어요.”

“까먹기 좋은 땅콩?”

“네. 놀리기 쉽고, 굴리기도 쉽다나. 그래도 더러운 변태는 너무 나빴다. 내가 이든 혼내 줄게요.”

멋대로 결론을 내린 연이 종알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하하! 미치겠다, 진짜.”

커다란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뜬금없이 웃기 시작한 설우를 어리둥절하게 내려 보던 연이 미소를 지었다.

“오빠 웃음소리 되게 듣기 좋은 거 알아요?”

“아니, 몰랐는데.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서. 웃는 모습이 좀 비싸거든.”

연을 만나기 전엔 소리 내어 웃을 일이 없었다. 소리는커녕 웃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하지만 이젠 웃음이 헤펐다.

“많이 웃어요. 웃으면 행복해진대요.”

설우의 시선이 잠시 연의 입술로 향했다.

예쁜 말만 골라 하는 입술은 어떤 맛일까. 지나치게 달콤하겠지.

“이미 충분히 좋아, 널 찾았으니까.”

“나, 나도 좋아요.”

또다시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은 연이 급히 침대를 벗어났다.

넋 놓고 안기기 전에 방으로 가야겠다.

지독한 갈증이 묻은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았다.

“씻을 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네, 이따 봐요.”

“아, 한 가지 더.”

“네.”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 긴장한 연이 동그란 눈을 굴렸다.

“이든이랑 첸한테 덥석 안기지 마. 그러는 거 아니야.”

“알겠어요.”

“나한테만 안겨. 다른 사람은 안 돼.”

우스운 질투란 걸 알지만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든과 첸에게 연은 사랑스러운 여동생일 뿐이겠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대답 안 해?”

“네, 오빠한테만 안길게요.”

“좋아, 이제 가.”

기다리던 허락이 떨어지자 후다닥 방으로 돌아온 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뛰어대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설우의 귀에 닿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남다른 애정을 쏟는 그를 느낄 때마다 매번 이 모양이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벽에 기대 쪼그려 앉은 연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설우가 좋았다. 화를 내는 모습도, 자상하고 멋있는 모습도 좋지만 남자로서 욕심낼 수 없었다.

드라마 속 연인들이 할 법할 행동을 일삼는 설우에게 헛된 기대를 했다가도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내면 안 돼, 선우연. 오빤 곧 결혼하는걸.

축복이 가득한 단어와 함께 표독스러운 주희의 얼굴이 떠오르니 이상하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평생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지만, 다른 여자의 곁에 선 설우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

서준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한 설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멋들어지게 솟은 기와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뒤를 따라온 체격 좋은 가드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있는데 얘네가 필요할까?”

“혹시 모르잖아.”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한정식이야. 꼬맹이 먹기 힘들게.”

“포크 쓰면 돼.”

가지런히 정리된 연의 금발을 쓰다듬자 은은한 샴푸 향이 풍겨났다. 오늘 새벽 제 침대 위로 스몄던 향과 같았다.

씻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왜 이렇게 진한 거야.

설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낯선 이가 연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오빠, 왜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설우 때문에 금세 주눅이 든 연이 두 손을 맞잡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자.”

손님이 도착했단 소식을 들은 안내인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나무 문을 열었다.

식당 내부로 들어서니 잘 꾸며진 정원과 함께 여러 개의 기와집이 나타났다.

각기 다른 조명으로 처마를 밝힌 집은 프라이빗 공간을 위한 독채 형식의 식당이었다. 때문에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나 정계 인사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비밀 유지는 끝내주겠군. 우린 왜 여길 몰랐지?”

굳게 닫힌 문 옆으로 높은 담장이 둘려 있었다. 펠리체만큼은 아닐지라도 보안이 꽤 철저한 듯싶었다.

“올 일이 없었나 보지.”

설우는 앞서 돌담길을 걷는 연에게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 약효가 다할지 모르니 딱딱한 것투성이인 길에선 더욱 조심해야 했다.

똑똑, 가볍게 창호지를 두드린 안내인이 천천히 문을 열자 민준과 서준이 차례로 일어났다.

“오셨어요?”

“예, 식당 구조가 마음에 드네요.”

“모든 룸이 독채라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게 장점이죠.”

민준과 설우의 형식적인 인사를 제쳐둔 서준이 곧바로 연을 찾았다.

“오랜만이에요, 연이 씨. 평상복 입은 거 처음 봐요.”

“아, 저 계속 환자복 차림이었죠.”

“예뻐요.”

“감사합니다. 서준 씨도 되게 멋있어요. 제가 보는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요.”

연이 수줍게 이마를 긁적였다.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혼자 골라 입은 연분홍색 원피스가 남들 눈에도 퍽 괜찮은 모양이었다. 홍조 띤 연이 다소곳이 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설우는 이미 기분이 상한 채였다.

유치한 감정을 드러낼 순 없었지만, 첸과 이든이 아닌 외간 남자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식전부터 심사가 뒤틀렸다.

오지 않겠다 했을 때 말리지 말 걸 그랬다.

“하하하, 서준이는 연기하는 배우니까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온 게 맞죠.”

“연이 씨가 더 배우 같아요. 누구든 한 번 보면 반할 거예요.”

“그쪽도 반했나 봅니다?”

이든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나치게 굳은 설우를 놀리고 싶었다.

“서준이가 반하면 뭐 합니까. 연이 씨가 전혀 관심이 없던데요? 번호 받으시고 한 번도 연락을 안 하실 정도니.”

“아, 형!”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다. 선을 넘는 농담은 없었고 적당히 어색하고 적당히 친근하게 굴었다. 입을 닫은 건 설우 뿐이었다.

“연이 씨 보호자가 차설우 사장님이란 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덕분에 리조트 광고 계약도 편하게 마무리 지었고요.”

대표라는 직함을 달아 접대가 잦은 민준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앞에 있는 젊은 권력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수가 적은 남자라는 건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2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사생활이 시끄러운 편은 아니시죠?”

설우의 답은 서준에게 향했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연이 즐겨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며 마주 보고 웃는 둘이 못마땅했다.

“술, 담배, 여자. 전부 관심 없습니다.”

여자에 관심 없는 자식이 연이는 왜 저딴 눈으로 보는 거야.

좌식 테이블 아래 놓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생기가 도는 밝은 눈동자가 서준에게 닿아 있으니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거지 같은 기분이다.

“와, 우리 형은 셋 다 좋아했는데. 그치?”

“보통 남자들이 그렇죠. 이 자식이 지나치게 깨끗한 겁니다.”

“오빠. 술, 담배, 여자 좋아해요?”

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우가 술을 먹는 모습은 한 번 밖에 보지 못했고, 담배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알싸한 담배 향은 맡은 거 같기도 하고. 여자는, 있지.

“아니, 이든이 장난치는 거야.”

연에겐 다정한 미소를 보였지만, 이든의 뒤통수를 치고 싶은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짜증이 묻은 손길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설우를 향한 서준의 시선이 묘했다.

“그런데 두 분은 관계가?”

연의 보호자가 설우라는 걸 알게 되고 계속해서 궁금했다.

외모로 보아 친동생은 절대 아닐 텐데, CH그룹엔 알려진 혼외자가 없었다. 숨겨진 혼외자인가?

얼마 전 연을 소중히 업고 나오는 설우를 봤던 서준은 그들이 핏줄 아니면 연인, 둘 중에 하나라고 확신했다.

사이좋은 핏줄이길 바랐지만 같은 자리에서 보니 아닐 듯싶었다.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설우에게 쏠렸다. 대답이 늦어졌다.

지금까지 늘 고민 없이 동생이란 관계를 선택했지만 대놓고 연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자 앞에선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우와 어울리지 않는 머뭇거림이었다.

“식사 올려드리겠습니다.”

노크 소리와 지나고 정갈한 음식들이 원목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답을 회피하기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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