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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5화 (25/96)
  • 25화.

    뻐억-

    턱뼈가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였다.

    평창동 백창석의 집 별관으로 끌려온 상철은 굳은살 가득한 주먹 한 대를 맞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흔들리는 정신을 부여잡은 상철이 고개를 털었다.

    탄탄하게 뭉친 근육의 주인은 불법 격투장을 즐겨 찾는 창석이 사들인 챔피언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손수 차려준 밥상을 뒤엎을 정도로 한심한 인사일 줄이야.”

    널찍한 가죽 소파에 기댄 백창석은 애첩 중 하나를 무릎에 앉혀 주물렀다.

    그 아이를 여기 앉혔어야 했는데. 부드러운 살결을 탐하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겠습니다.”

    “자네 지금 늙은이를 놀리는 겐가.”

    창석의 가는 눈에 노기가 서렸다.

    혈압을 올리지 않으려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지만, 차오른 분노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을 어린아이처럼 들떠 새희망 정신병원에 도착했던 창석은 난장판이 된 로비를 확인하자마자 계획이 어그러졌음을 눈치챘다.

    제 손안에 들어올 연을 두 번이나 코앞에서 빼앗긴 창석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상철을 꿇어앉히는 걸로 화를 풀어내고 있었다.

    “크흡…!”

    남자의 긴 다리가 상철의 복부를 가격했다.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을 구르던 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데려오겠습니다, 어르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상철이 나무 바닥으로 납작 엎드렸다.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린 상철을 가소롭게 깔아보던 창석이 여자를 잠시 놓아주었다.

    “차설우가 만만해 보이나. 이젠 빈틈 따윈 없을 걸세. 반격도 들어올 테지.”

    “그, 그럼….”

    다미를 포기하겠냐는 질문이 목 끝에 걸렸다. 제발 포기했으면 싶었다.

    병원은 쑥대밭이 되었고 현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 되어 빼도 박도 못 할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겠다는 말은 그저 이 순간을 모면하려는 말이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장담할 수 없었다.

    젠장, 괜히 다미를 보여줘서는.

    “그래도 자네가 데려와야지. 희망 고문은 두 번이면 족하네. 또 한 번 실패하면 다른 대가를 내놓아야 할 거야.”

    “아, 알겠습니다.”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지는 새우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미에게 어지간히 푹 빠진 것인지. 기어이 그녀를 찾아낸 재벌 3세도, CH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다미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창석도 두려운 상대였다.

    하지만 이겨내야 한다. 다미를 안겨줘야 저를 어린 권력자에게서 보호해주겠지.

    “언제까지 그러고 앉아있을 게야, 그만 가게.”

    “예, 알겠습니다.”

    “훈아.”

    “예, 어르신.”

    “한 마담 시켜서 이 아이 머리카락 색 좀 바꾸라고 해. 저기 사진 속 아이처럼.”

    “예.”

    변태 같은 노인네.

    뒤를 돈 상철이 얼굴을 구겼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양반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다미를 느끼기 위해 염색까지 시킨다니.

    “뭐 하고 앉았어. 옷 챙겨 입고 머리하고 와.”

    “네.”

    창석의 수발을 들던 여자가 저고리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뜬금없는 요구였지만 평창동 저택 안에서 창석의 말은 곧 법이었다.

    ***

    물 흐르듯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연의 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는 집에서 이어졌고, 바쁜 설우와 첸을 대신해 이든이 연을 도맡아 케어했다.

    “꼬맹이,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했다며.”

    “네, 오빠가 가준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뻥친 거 같죠?”

    연이 소곤거렸다. 교정 젓가락으로 메추리알을 건져 올리느라 매끈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에이, 설마. 그나저나 젓가락질이 왜 이렇게 안 늘어.”

    “매번 이렇게 올려주니까 안 늘죠.”

    동그란 알을 집기 위해 낑낑대는 연을 안타깝게 보던 이든이 결국 대신 잡아 밥그릇에 넣어 주었다.

    “그래, 올려주지 말랬잖아.”

    “오셨어요?”

    “응, 잘 놀았어? 넘어지진 않았지?”

    숟가락을 내려두고 벌떡 일어난 연에게 다가간 설우가 그녀를 한 바퀴 빙 돌려 살폈다.

    “두 번 잠들었어. 약효가 들쑥날쑥해.”

    “약이 독해서 입술도 바짝 마르고 손끝이 다 갈라지는데, 효과까지 별로라니.”

    낮에는 기면증 치료를 위해 각성제를 먹고 밤에는 수면제, 거기다 항우울제까지 추가되니 부작용이 상당했다.

    분명 몸이 힘들 텐데. 연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견뎌냈다.

    “괜찮아요.”

    착잡한 한숨이 튀어나왔다.

    연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창백한 얼굴과 부르튼 입술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내일 한서준이랑 저녁 식사하기로 했어. 첸은 못 갈 거고, 장소는 그쪽에서 정할 거야.”

    “오빠, 그… 생각해 보니까 전 안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왜.”

    “젓가락질도 그렇고.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이긴 창피하잖아요.”

    “뭐가 창피해. 못 할 수도 있지.”

    연의 볼을 죽 늘어뜨린 설우가 마른 입술을 툭 건드렸다.

    “오빠도 못 한다고 혼냈잖아요. 나 안 창피해요?”

    “야, 꼬맹이! 무슨 그런 소릴 해.”

    “괜찮아. 그냥 포크로 먹으면 돼. 너무 눈치 보지 말고.”

    아직 다 비우지 못한 밥공기를 쓱 바라본 설우가 연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형은 저녁 먹었어? 첸은?”

    “먹었어. 첸은 다른 할 일이 좀 있어서 늦을 거야.”

    “놀이공원은 언제 갈 거야? 꼬맹이는 형이 뻥친 거래. 계속 안 가준다고.”

    “놀이기구 타다가 잠들까 봐 그렇지.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하기도 하고.”

    가주겠다 답은 했다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 이후로 연을 위한 가드를 따로 붙이기도 했고, 그녀에게 처음 선물한 천사 펜던트 속에 위치 추적기까지 달았지만,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낼 순 없었다.

    백창석은 집요하고 욕심이 많았다. 특히 여자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노인네가 연을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다시 접근하겠지.

    “어쩔 수 없죠. 이제 막 약 먹기 시작했으니까 좀 좋아지면 가요.”

    빠른 체념이었다. 씩씩하게 밥을 퍼먹는 연을 빤히 보던 설우가 휴대 전화를 들었다.

    -예, 사장님.

    “목요일에 일정 좀 비우지.”

    사람이 많은 주말보단 평일이 낫겠지.

    -다른 일정은 비울 수 있습니다만, 목요일 오후에 회장님께서 본사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들어간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 연이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쿨하게 체념하는 척하더니. 기대가 담긴 큰 눈을 발견한 설우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가.”

    “가?”

    “가요? 목요일?”

    “그래, 목요일.”

    “와! 고마워요, 오빠!”

    벌떡 일어난 연이 설우의 허리를 감아 안겼다.

    스킨십이 이렇게 자유로워서야. 버릇을 잘못 들였지.

    “연아, 나도! 나도 같이 갈 거니까 안아줘.”

    “네, 이든도.”

    “어딜. 앉아서 밥이나 먹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쪼르르 이든에게 안기려는 볼록한 이마를 커다란 손이 가로막았다.

    “와, 치사한 것 봐.”

    “오늘 이든 몇 번이나 안아줬어.”

    “음, 이든이 아이스크림 사줘서 한 번, 게임에서 져서 또 한 번, 또 있나요 이든?”

    “크흠!”

    연이 손가락을 접어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설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저게 순진한 애를 꼬드겨서는.

    “어, 설우 오빠 또 눈으로 욕해요.”

    “하하하! 뭐?”

    딴청을 피우던 이든이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난 설우를 표현하는 문장이 새로웠다.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설우는 눈가에 힘을 풀어냈다.

    “이렇게 딱 째려보면 엄청 무섭잖아요.”

    “오, 관찰력 좋은데. 형이 좀 날카롭게 생긴 편이지.”

    “빨리 밥이나 먹어.”

    “네에.”

    장난스럽게 히죽거리던 연이 순순히 밥을 떠넣기 시작하자 설우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이닝룸을 나섰다.

    전과 같은 평범한 하루였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한 하루였다.

    폐쇄 병동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

    약에 취해 있던 시간도, 취해 있지 않은 시간도. 누군가의 삶을 포기하게 만들긴 충분했다.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선택으로 죽음을 맞이한 많은 이들을 두 눈에 담아야 했다.

    죽고 싶단 열망을 참아내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 건 마지막 발악이었다.

    ‘평창동에 보내신다고요?’

    ‘어디든 팔아넘길 참이었어. 세희도 그러길 바라고.’

    ‘괜찮을까요? 상태가 영 안 좋은데.’

    ‘여자에 환장하는 노인네야. 다미 사진 한 장에 이미 홀딱 넘어갔어. 워낙 특별한 아이잖아.’

    상철과 현태의 대화를 듣게 된 건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연에게 수면제를 잔뜩 꽂아 놓은 이들은 경계심 없이 그녀의 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창동에서 다미를 마음에 들어 하면 형님 입지도 굳건히 할 수 있겠네요.’

    ‘당연하지. 누구라도 욕심낼 년이야. 네놈도 흑심 품었었잖아.’

    ‘크흠,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못한 거지. 다미가 지랄발광을 해서 나한테 걸렸으니.’

    ‘그땐 제가 술에 취해서….’

    ‘됐어, 이미 지난 일이야. 내일 데리고 나가서 준비나 잘 시켜. 정신연령이고, 지능이고 대가리 딸리는 건 이해해주실 거야.’

    부모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잔인한 걸까. 아픈 내가 잘못인 걸까.

    비명이 터져 나올 뻔한 입을 꾹 다문 연은 남몰래 눈물을 쏟아야 했다.

    물론 약 기운이 돌아 그마저도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지만.

    ‘근데 평창동 어르신은 그 나이에 가능하답니까?’

    ‘별채에 데려다 놓은 애들만 수십이야. 어린애들 정기 빨아 먹고산다는 게 사실일지도 모르지.’

    ‘으, 역겨워.’

    ‘별수 있나. 그 밑에 빌어먹고 사는 입장인데.’

    그때 도망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이켜 최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오한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붙잡혔을 때 더욱더 두려웠다.

    행복한 시간을 가져본 탓에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터벅, 터벅. 작은 조명등만이 남은 복도에 느릿한 발소리가 울렸다.

    펠리체의 구조에 완전히 적응한 연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묶여있는 모습을 마주한 설우는 선명한 자국이 남은 손목에 차마 끈을 대지 못했고 연이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면 한두 시간을 지켜본 후 자리를 떴다.

    아무 일도 없이 여러 날이 지나 연도 설우도 꽤 마음을 놓은 타이밍이었다.

    반쯤 눈이 풀린 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달칵. 익숙한 설우의 방앞에 도착한 연이 문을 열었다.

    비틀비틀, 힘없이 앞으로 나아간 연은 푹신한 시트 위로 파고들었다.

    베개 아래로 깊숙이, 보드라운 이불 속으로 감겨든 연은 이내 설우의 팔에 닿았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한 번, 두 번. 낯선 온기를 느끼고 눈을 깜빡인 설우가 이불을 걷어냈다.

    “뭐가 이렇게 꿈틀거리나 했더니.”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연의 머리카락이 하얀 시트를 물들였다.

    베개도 없이 깊은 잠에 빠진 연이 제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을 보니 상황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통로에 블라인드 때문에 문으로 온 건가.

    조심스럽게 팔을 빼낸 설우가 텅 빈 목 아래를 받쳐주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연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달콤한 장미 향이 가차 없이 덮쳐오자 머릿속이 아찔해진 설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적당히 해라, 차설우.

    꾸준히 차오르는 욕망이 빠르게 커졌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구체적인 형태로 변해갔다.

    어디를 만지고 싶고, 어떻게 안고 싶다는 불순한 감정들이 저를 사로잡았다.

    나풀거리는 잠옷 속 하얀 속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설우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든한테 한 대 쳐달라고 해야 하나.

    티 없이 맑기 때문일까, 동생이라는 감투를 씌워서일까.

    작은 천사에게 색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죄악으로 여겨졌다. 다 큰 성인남녀에겐 분명 자연스러운 감정일 텐데.

    “우음….”

    그래, 너는 다 자라지 못했지.

    연의 얇은 다리가 설우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한층 가까워진 숨결이 목덜미를 맴돌았다.

    “젠장, 잠은 다 잤군.”

    아랫배가 뻐근하게 뭉쳐졌다. 지나치게 분비되는 호르몬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열이 오른 몸과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연이 깨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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