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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7화 (27/96)
  • 27화.

    휘둥그레진 금안이 바쁘게 움직였다.

    식전 죽과 인삼 샐러드로 시작해 차례로 놓인 메인과 서브 음식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중이었다.

    서준과 민준은 직원이 가져온 포크를 잡는 연을 보고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음식이 엄청 많아요.”

    입을 쩍 벌린 연이 설우의 와이셔츠 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혀가 녹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었지만 이렇게 많이, 한 번에 놓인 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네가 다 먹을 거잖아. 죽부터 먹어, 뜨거우니까 천천히.”

    김이 펄펄 오르는 죽은 두꺼운 사기그릇에 담겨있었다.

    설우를 따라 숟가락을 휘젓던 연은 설우가 한술 뜨고 난 후에야 죽을 먹기 시작했다.

    “술 한잔하시겠어요?”

    “좋죠, 형은?”

    “난 됐어.”

    “연이 씨는요?”

    “…한 잔만 마셔볼까요?”

    입꼬리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연이 눈치를 살피며 술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겠다고?”

    “안 돼, 꼬맹이. 엄청 써.”

    “한 잔만요. 이든은 맨날 마시고 취하잖아요.”

    “내가 언제!”

    “애 보라고 뒀더니 술만 처마셨나 보네. 너 얘한테 까먹기 좋은 땅콩이라고 그랬다며. 진짜 죽어 볼래?”

    “와, 선우연 고새 일렀네!”

    “이든이 설우 오빠한테 더러운 변태라고 했다면서요. 그 얘기 하다 보니까 저절로 나왔는걸요. 이, 이른 거 아니에요.”

    “푸흐읍!”

    “쿨럭!”

    까먹기 좋은 땅콩은 그렇다 쳐도 더러운 변태는 뭐람.

    동시에 사레가 들린 서준과 민준이 거칠게 헛기침을 하자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졌던 셋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아, 여기 우리만 있는 거 아니었지.

    “아니, 근데 잠깐만. 나 형한테 더러운 변태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맞아 죽을 작정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하겠어?”

    서준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벽을 타고 날아다니며 싸움을 하는 사람이 맞아 죽는다고? 과장이 심하시네.

    “안 했어요?”

    “안 했어.”

    “흐응, 이상하네. 설우 오빠가…”

    “선우연, 손님들도 계시니까 조용히 밥 먹자. 놀이공원 가고 싶으면 말 잘 들어야지.”

    설우가 엄한 척을 하며 연의 말을 막았다.

    “네에.”

    가준다면서 이제 조건을 붙이네, 치사하게.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삐죽거린 연이 육사시미로 눈을 돌렸다. 그녀에겐 생소한 음식이었다.

    “그거 먹을 거야?”

    “먹어 보려고요.”

    “생마늘 먹을 수 있어?”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니까요.”

    제 식사는 뒤로 미뤄둔 설우가 윤기가 흐르는 육사시미에 기름장을 찍어 연의 앞접시에 올렸다.

    가장 얇은 고추와 마늘을 집어 그 위에 쌓아준 그가 어서 먹어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매울 거 같은데, 형.”

    “고추는 빼자, 그럼. 포크 이리 줘 봐.”

    마늘을 가운데 두고 육사시미로 돌돌 말아 포크에 말끔하게 꽂아 넘겨주었다.

    “오! 진짜 맛있어요.”

    “많이 먹어.”

    같은 모양으로 세 개를 더 만들어준 설우가 제대로 식사를 시작했다.

    멋대로 남을 판단하고 관찰하는 것은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젓가락을 든 채 멍하니 앉은 서준은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묘한 관계를 추측하다가도 금발을 찰랑거리며 멈추지 않고 포크질을 하는 연을 보니 이상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질릴 때까지 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먹던 연을 보는 남자들의 시선엔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들이 담겼다.

    “저, 이거. 제가 광고하는 휴대 전화인데요. 연이 씨 휴대 전화가 없다고 하셔서 선물로 드리려고요.”

    서준이 사각형 박스를 내밀자 설우의 눈매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놀이공원에 가는 날 서프라이즈로 사주려고 했는데.

    “와, 감사합니다. 오빠 받아도 되죠?”

    “네 선물인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킥킥, 이든이 숨죽여 웃었다.

    남들은 몰라도 잔뜩 신경질이 난 설우를 그는 알고 있었다.

    “명의만 등록해서 쓰시면 될 거예요. 그땐 제 번호 꼭 저장해주시고요.”

    “네, 그럴게요! 오빠한테 쓰는 법 배워서 연락할게요.”

    “누가 가르쳐준대?”

    “왜 심술을 부려요? 그럼 이든한테 배울게요.”

    뾰로통한 설우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연이 박스를 열어 휴대 전화를 구경했다.

    해맑은 미소가 만연한 얼굴을 보니 가볍게 쥐고 있던 설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렇게 좋아할 게 뻔해서, 내가 사주고 싶었는데.

    연에게 휴대 전화를 사줄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해 너무 여유를 부린 게 독이 되었다.

    “연이 씨가 너무 좋아하셔서 서준이가 뿌듯하겠어요.”

    민준은 나쁜 감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 말간 얼굴이 신기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그렇고. 꼭 다른 세상에 살다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천사라고 해도 믿겠군.

    “꼬맹이, 그렇게 좋아? 진작 사달라고 하지 그랬어.”

    “사달라고 하긴 좀 그렇죠.”

    “다음부턴 사달라고 해. 식사도 끝났으니 이만 일어나시죠.”

    그녀의 처음은 모두 자신이어야 하는데. 선수를 빼앗겨 속이 상한 설우가 좁아진 미간을 문질러댔다.

    “네, 그러시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설우는 연과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며 웃는 서준이 못마땅했다.

    불쑥 앞으로 한발 나선 설우는 연을 제 뒤로 숨겼다. 차설우 답지 않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움직임이었다.

    빼앗기기 싫고, 온전히 가지고 싶다. 다양한 온도를 느끼게 하고 심장이 떨리게 만든다. 재고 따지던 이성이 걷히자 여러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모두 사랑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

    최신 가요가 아닌 조용한 클래식이 라이브로 연주되는 곳.

    호텔의 이벤트 홀을 빌린 투자모임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그래 봐야 주먹구구식 모임이겠지만.

    K건설의 차남 김성원이 장세희의 딸 서연주를 초대한 가벼운 모임이자 파티에 참석한 첸은 따분한 얼굴로 샴페인을 홀짝였다.

    나도 연이랑 저녁이나 먹고 싶은데, 젠장.

    어찌 됐든 연을 위한 일이니, 불평불만을 잠시 접어두고 이곳에 선 그였다.

    모임의 주최자는 김성원을 포함해 그와 비슷한 수준의 기업 자제들이었다.

    K건설은 CH나 현진에 비하면 그저 소기업 정도였다. 실제로 K건설은 현진건설의 하청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 모임은 상위 10퍼센트 바깥쪽 뱁새들의 황새 따라 하기쯤 되겠지.

    “파티 수준하고는.”

    마주치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렸다. 대학생에서 사회 초년생의 나이정도.

    여자들은 잘 가꾼 몸매를 마음껏 드러내는 옷을 입고 돌아다녔고, 술에 취한 남자들은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김성원의 옆에 착 달라붙은 서연주 역시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며 여우 같은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연이는 절대 못 입게 해야지.

    모임을 주최한 이들은 이벤트 홀 가운데 자리 잡고 떠드는 중이었다.

    어찌나 목소리들이 큰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귓속에 콕콕 박혀 들었다.

    “어디?”

    “성진물산이라고 이번에 상장하면 대기업에서 제대로 밀어줄 거래. 주가 폭등은 떼놓은 당상이니 지금 빨리 사라는 거지! 아직 여의도에도 안 풀린 고급 정보다?”

    “그래서 넌 샀냐?”

    “소문 듣고 아빠한테 말만 했지. 10만 주에 팔천이야.”

    “이름 없는 기업치고 시가가 좀 세다?”

    “수익성이 확실하다니까. 무조건 10배 이상 뛰어. 딱 200만 주 풀린다는데. 아, 내가 요즘 아빠한테 밉보여서 가진 돈이 없다!”

    잘도 떠드네.

    고의로 타깃을 잡고 흘린 거짓 정보를 대단한 고급 정보라도 되는 양 떠들어대는 남자를 보는 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의심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멤버들도 있었지만, K건설의 김성원이나 주식을 즐기는 엄마를 가진 서연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담아들었다.

    연의 인생을 망가뜨린 이들에게 줄 고통 중 첫 단계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남은 샴페인을 털어 넣은 첸이 이벤트 홀을 나섰다.

    시작이 순조로웠다. 저 정보가 곧바로 장세희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빠른 남자 둘이 짠 판이니, 실패는 없을 것이다.

    ***

    “잘 먹었습니다, 차 사장님. 다음엔 제가 살 테니 술 한잔하시죠.”

    “식당이 마음에 들어 저희도 잘 먹었습니다. 음식도 깔끔하네요. 술은 이든이랑 하세요, 술 좋아하거든요.”

    “형도 좋아하잖아.”

    “오빠 저 물고기 보러 가도 돼요?”

    “인사하고 가서 봐.”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선물 정말 감사합니다!”

    “네, 다음에 또 봬요.”

    커다란 잉어를 볼 생각에 신나게 외친 연과 다르게 아쉬운 서준은 멀어지는 밝은 머리칼을 따라 눈을 돌렸다.

    “광고 계약과 관련해 문제가 있으면 추후에 연락하시고요, 워낙 잘하시는 분이니 광고는 그럴듯하게 뽑히겠죠?”

    연을 등진 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럴듯하게, 라는 말은 기분 나쁘라고 골라 뱉은 건가.

    “광고주가 원하는 콘셉트의 콘티만 잘 나온다면 그럴듯하게 나올 겁….”

    “어어, 안 돼. 연이! 연아!”

    남자들이 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혼자 통통 튀어 나가 연못 안 잉어들을 구경하던 연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각성제를 먹고 나왔다고 긴장을 풀었던 것이 실수였다.

    이든이 외치는 순간에 잽싸게 달려나간 설우가 그녀를 품에 안고 함께 연못으로 빠졌다.

    다행히 깊지 않았지만, 손으로 땅을 짚은 탓에 날카로운 돌멩이에 베인 설우의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형! 괜찮아?”

    잠이 드는 순간에 차가운 물에 빠지게 된 연은 몸이 들썩거릴 만큼 화들짝 놀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어, 괜찮아.”

    “…끅!”

    “연아, 안 다쳤어? 많이 놀랐지.”

    “끅! 죄송해요, 괜히 혼자 돌아다녀서.”

    “아냐, 우리가 한눈팔았어. 이든, 연이 좀.”

    이든이 가뿐히 연을 안아 올렸다.

    설우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지 못한 연은 땅에 내려서자 흠뻑 젖은 옷을 대충 짜냈다.

    이든이 딸꾹질이 멎지 않는 연의 등을 톡톡 쓸어주는 동안 설우가 멀찍이 떨어졌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대충 닦아낸 설우는 손수건을 꺼내 쥐고 그 위로 검은색 슈트 재킷을 들었다.

    상처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지만, 연이 모르는 편이 나았다.

    “형, 손….”

    “다물어. 연이 몰라. 카디건 좀 벗어서 연이 입혀.”

    “아, 그래.”

    이든이 재빨리 베이지색 카디건을 벗어주었다.

    평균보다 키가 작은 연이 평균보다 큰 이든의 옷을 입으니 카디건이 원피스처럼 길게 내려왔다.

    “아픈 덴 없어? 어디 부딪혔다거나.”

    “없어요, 오빠는요?”

    “나도 괜찮아. 얼른 집에 가자, 감기 걸리겠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카디건을 여며준 설우가 눈인사를 끝으로 연을 데리고 식당을 나섰다.

    “저번에 병원에서도 그렇고 멀쩡하다가 픽픽 쓰러지는 거 보니까 신경계 쪽에 문제가 있나 보네. 그러니까 입원도 자주 하는 거고.”

    “저 정도면 거의 시한폭탄인데. 다치기 십상이겠어.”

    “그러게. 저걸 어떻게 케어하지? 대단하다. 이 악물고 뛰어가던데. 어떡하냐, 한서준. 차 사장 이기기 힘들겠는데?”

    “그건 두고 봐야 알지. 저 사람 서울시장 딸이랑 결혼하잖아. 얼마 전에도 정재계 유착이니 뭐니 뉴스 났었고.”

    “아, 맞아. 아니 그럼 대체 뭐지? 제 몸 안 사리고 뛰어드는 걸 보니 저건 분명 남녀 간의 애정인데. 설마 그건가. 결혼 따로, 연애 따로.”

    “그럴 수도 있겠네.”

    “하여튼 정계나 재계나 연예계나 깨끗한 사람 찾기가 힘들어. 근데 난 차설우 사장 성질 되게 더럽다고 들었거든. 그렇지도 않네.”

    듣는 귀가 있을까 문가를 흘깃거린 민준이 목소리를 줄였다.

    “성질 더러운 거 맞을걸. 한 번씩 살벌하게 노려보던데. 우리도 그만 가자, 피곤하다.”

    “그래.”

    픽, 웃은 서준이 형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딱 밥 한 끼 하는 자리였지만, 그에겐 충분했다.

    휴대 전화도 주었으니 천천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낯선 사이를 친근하게 바꿀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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