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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4화 (24/96)
  • 24화.

    한참을 울고 설우의 품에서 나온 연이 퉁퉁 부은 눈으로 이든을 살폈다.

    “이든, 다쳤어요?”

    흐트러진 옷차림을 빼면 멀쩡한 설우와 첸과 다르게 이든의 얼굴엔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

    이길 순 있지만 한 대도 맞지 않을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밑에 있는 놈이 너 때렸다던데. 입술 터졌네, 멍도 들었어.”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눈도, 코도, 심지어 귓불까지 여전히 빨간 연이 금세 웃기 시작했다.

    “일단 가자. 안고 갈까? 아니면 업어 줄까?”

    연의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귀 뒤로 넘겨준 설우가 물었다.

    “꼬맹이, 신박하게 목마 어때. 나랑 가자.”

    “여기서 네 위에 타면 머리 박아. 나랑 가자, 연아. 그러면 집에 가서 핫케이크 해줄게.”

    나란히 선 세 남자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며 연의 선택을 기다렸다.

    혼자 남아 두려움에 떨었을 연을 걷게 할 생각은 없었다.

    “오빠랑 갈게요.”

    연은 고민 없이 설우를 택했다.

    이든과 첸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진심으로 서운해하진 않았다.

    기억하지 못해도 무의식이 그를 찾는 것인지, 병원에서 도망친 그녀를 처음 구해준 이가 설우이기 때문인지.

    설우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적어도, 엄격하게 굴고 다그쳐도 연은 늘 설우를 먼저 찾았다.

    “업고 가자.”

    너른 등판이 침대 위에 앉은 연에게 향했다.

    분명 밥을 잘 챙겨 먹이는데, 왜 이렇게 가벼운 거야.

    “편하게 기대. 잠 오면 자고.”

    “네.”

    떨어지지 않게 팔을 건 연이 설우의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하아, 다행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어.”

    이제야 한시름 놓은 이든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었다.

    첸에게 전화를 받은 후로 무슨 정신으로 이곳에 왔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설우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웠어.”

    이든의 어깨에 팔을 두른 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졸인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바보 신난 것 봐.”

    앞서 걷는 둘을 보던 이든이 피식거렸다.

    앞뒤로 팔랑거리는 작은 발이 연의 기분을 말해주었다.

    “어떻게 저렇게 밝게 컸을까. 타고난 천성인가.”

    “단순해서 다행이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좀 배워야겠어.”

    첸이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첸과 이든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친부모에게 버려지고 해외로 입양된 후에도 제대로 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이든과 첸은 마피아 소굴에서 몸을 굴리며 살아남았다.

    설우를 만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됐지만, 과거의 그늘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끔찍한 시간을 산 탓에 고치지 못할 병까지 얻은 연의 맑은 미소는 그런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연이 때렸다는 놈은 주워 갈 거야.”

    “뭐 하게.”

    “뭐든. 제 잘못을 뼛속 깊이 새겨 넣을 때까지 아프게 만들어 줘야지.”

    “잔인한 놈.”

    “셋 중에 내가 제일 덜 잔인할걸? 그 자식도 설우 형 손에 잡히는 것보단 내가 나을 거야.”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지막 말엔 격하게 공감했다.

    “밑에 정리는 잘 된 거야?”

    “애들 도착하는 거 보고 올라왔어. 대충 다 치웠을 거야.”

    “VIP 병동에서 빼간 걸 보니 평창동 노인네 짓이 분명한데 물고 늘어질 증거가 없네.”

    욕정이 덕지덕지 묻은 백창석의 주름진 얼굴을 떠올린 첸이 인상을 썼다.

    뭐가 부족해서 아직도 욕심을 부리는 걸까. 딸도 아니고 손녀 벌인 아이를 데려다 어쩌겠다고.

    “걸리기만 해, 그 노인네.”

    이든이 꺼내 문 담배를 잘근거렸다.

    백창석의 손에 들어갔다면 연이는 저 사랑스러운 미소를 영영 잃어버렸겠지.

    “이든, 첸! 빨리 와요.”

    설우의 등에 편히 올라탄 연이 계단을 내려가기 전 손을 흔들었다. 이든과 첸이 동시에 손을 들어 화답하자 설우가 짧게 미소를 지었다.

    셋의 마음 한구석엔 연을 두 번 다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자리 잡았다.

    동양인, 서양인 가릴 것 없이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우르르 나타난 남자들을 구경하던 서준과 민준이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 주저앉아 있던 둘은 연을 업은 설우가 나오자 벌떡 일어났다.

    “어, 원우다.”

    “진짜 이름은 한서준이에요. 괜찮아요?”

    멀쩡하지 않은 차림새로 멀쩡하게 웃는 연에게 답한 서준이 한걸음 다가섰다.

    배우 한서준을 모르던 연이 작품 속 제 모습을 알아주길 바랐었는데. 저를 드라마 속 인물로만 여기는 게 언젠가부터 서운했다.

    “네, 괜찮아요. 어떻게 왔어요?”

    “병원에서 끌려가는 걸 봤어요. 이상해서 따라왔고요.”

    “이든, 연이 좀.”

    바닥으로 내려온 연을 잡은 이든이 그녀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

    “감사합니다.”

    설우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첸과 이든에게서 작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이들도 설우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낯설었다.

    “아, 아니 뭐 이렇게까지.”

    당황한 민준이 덩달아 인사를 했다. 잘나가는 연예 기획사 대표란 지위를 가져도 범접할 수 없는 자리를 가진 이들은 존재했다. 지금 고개를 숙인 차설우 사장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설우에겐 연을 무사히 찾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정체 모를 약을 매달고 묶여 있던 그녀가 머릿속에 새겨진 탓에 무언갈 재고, 따지고, 계산할 여력 따윈 없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연을 잃을 뻔한 걸로 모자라 연이 제게 오기 전 이 병원에서 7년 동안 당했던 감금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설우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CH파라다이스 홍보 모델 계약 건으로 홍보팀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요구 사항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 네. 언질은 받았습니다. 최종 결재만 남았다고.”

    “제가 곧 결재할 예정입니다. 계약서 작성하고 같이 식사 한번 하시죠.”

    설우가 명함을 꺼내 민준에게 내밀었다. 다급히 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찾아낸 민준도 설우에게 건네주었다.

    “식사는 연이 씨도 같이 하나요?”

    흑심이 다분히 담긴 질문에 설우의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평소 같으면 단칼에 잘랐겠지만, 커다란 신세를 진 상황이었다.

    “연이 어떡할래.”

    “네, 저도 갈래요!”

    거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대답을 넘겼지만, 그녀는 아니요, 라는 말 따윈 모르는 사람이었다.

    “일정 맞춰지면 식사하는 걸로 합시다. 고생하셨어요. 연아, 인사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이 꾸벅 인사를 하자, 닮지 않은 형제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가 맺혔다.

    “다음에 봐요.”

    “첸, 이든이랑 같이 와.”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 설우가 연의 어깨를 감싸 차에 태웠다.

    “아침도 다 남겼다며. 배고프겠다.”

    “아뇨, 지금은 속이 안 좋아요.”

    “어떻게 안 좋은데. 빨리 이야기했어야지.”

    “그럼 또 병원 가야 하잖아요.”

    설우의 눈치를 살핀 연이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설우, 너 지금까지 대체 뭘 한 거냐.

    보호해 주려고, 그저 예쁘게 웃게 해주려고 했는데.

    연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저 병원으로 가는 거예요?”

    사흘도 채우지 못하고 병원을 나오게 되었으니, 다시 혼자 입원을 해야 한다고 지레짐작한 연이 눈꼬리를 내렸다.

    “아니, 이제 병원은 안 가.”

    “진짜요?”

    “응. 네가 어딜 크게 다치지 않는 이상 다시는 안 보낼 거야.”

    된통 당하고 나니, 연 만큼이나 병원이 싫어진 설우였다.

    적당한 의사를 고용해 집으로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건데.

    “잡혀가는 순간엔 정말 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집으로 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어제 입원하기 싫다고 막 소리 지르고 그래서 미안해요.”

    하지 못했던 사과의 말을 전한 연이 묵묵히 운전하는 설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현태에게 끌려와 약에 취하기 전 설우의 얼굴을 떠올렸었다. 어긋나는 부분 없이 완벽한 이 모습이 왜 생각나지 않았을까.

    산길을 벗어나니 금세 신호가 걸렸다.

    뜨거운 시선을 받던 설우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빛을 머금은 말간 눈동자가 심장에 박혀 들었다.

    “그건 내가 미안하지. 억지로 입원시킨 걸로 모자라 이런 일까지 겪게 만들고.”

    “오빠 탓 아니에요.”

    “네가 없어졌다는 걸 듣고 너를 찾을 동안 지옥 바닥을 수천 번 굴러다닌 거 같아.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 사실 지금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없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판단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작은 천사는 꾸준히 제 심장을 쥐고 흔들었다.

    평소엔 살살 간질였다가 간간이 터질 듯 뛰게 했다가 이번엔 쥐어짜듯 아프게 했지.

    “죄송해요, 걱정만 시키고.”

    그리고 그렇게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단 열망이 차오른다.

    “이번엔 내가 잘못한 거야. 만질래?”

    설우가 곧게 뻗은 손을 내밀었다.

    어감이 퍽 이상했지만, 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와, 이거 바다예요?”

    잡혀갈 땐 보지 못했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자 설우의 손가락을 쥔 손이 꼬물거렸다.

    “응. 오늘은 쉬고, 다음에 더 가까이서 보자.”

    “네, 좋아요.”

    “내가 널 잃어버렸으니 소원 하나 들어줄게. 뭐든 말해 봐.”

    “오빠가 잃어버린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날 찾아온 거죠.”

    가죽 시트에 나른하게 기대 있던 연이 상체를 벌떡 세우며 설우의 팔을 잡았다.

    죄책감으로 얼룩진 그가 안타까웠다. 답지 않게 축 쳐진 어깨를 위로하고 싶었다.

    설우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뱉었다.

    쪼끄만 게 속은 깊어서.

    크게 뜬 눈 사이를 툭 건드리자 화들짝 놀란 연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소원 없어?”

    “음….”

    “먹는 거 말고.”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먹은 스테이크를 사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먹보가 뻔하지. 다른 거 생각해.”

    “정말 다 들어줄 거예요?”

    “응, 전부 들어줄 거야.”

    “가보고 싶은 데가 있긴 해요.”

    금빛 눈동자에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신호가 너무 길다. 여섯 갈래로 나뉜 거리, 지나치게 긴 빨간불을 만난 설우가 바짝 다가온 탐스러운 눈동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어딘데.”

    “그, 그, 어디였더라? 어, 어디냐면요.”

    “하하하! 말을 왜 이렇게 더듬어.”

    “오빠가 눈에 뽀뽀했잖아요! 아, 얼굴 터지겠다아.”

    시트 위로 다리를 접어 올린 연이 무릎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운 척은 혼자 다하면서 뭐 저렇게 노골적으로 입에 담아.

    제 행동을 되짚는 그녀가 귀여웠다. 신호가 바뀌지 않았다면 잔뜩 오므린 입술까지 바랄 뻔했다.

    “기억나면 말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자약한 설우를 흘기며 요동치는 왼쪽 가슴을 누른 연이 그의 입술이 닿았던 눈을 비볐다.

    “내가 더러워?”

    “간지러웠다고요.”

    “네 속눈썹이 길어서 그래.”

    “아! 생각났어요. 놀이공원!”

    “…어디?”

    “놀이공원요.”

    신이 난 얼굴을 외면한 설우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뭐든 다 해준다더니.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연이 입을 꾹 다문 설우를 흘겼다.

    “버릇없이 오빠 노려보는 거 아니야.”

    “하!”

    “하?”

    “이럴 줄 알았어요. 이든한테 가자고 할 거예요.”

    “누가 안 간대?”

    “갈 거예요?”

    “갈 거야.”

    소원도 딱 저 같은 걸 비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설우가 질색할 장소였다. 그 역시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졸지에 꿈과 환상의 나라에 가게 생겼군.

    들뜬 웃음소리가 끊긴 것을 보니 고새 잠이 들었나 보다.

    “연아, 자?”

    역시 눈꺼풀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운 설우가 조심스럽게 시트를 뒤로 젖혀 주었다.

    “미안해.”

    피멍이 자리 잡은 여린 볼엔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연은 아무렇지 않게 굴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길 생각은 없었다.

    입가를 매만진 설우가 다시 시동을 걸며 다짐했다.

    그녀를 끔찍한 장소로 향하게 만든 길을 닦은 이는 누구든, 톡톡히 죗값을 받아 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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