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제 목숨이 굳이 필요하시다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건방지군. 감히 내게 말대답을 하는 것이냐.”
“밀로가 훔치려던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미수에 그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제 목숨이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십시오.”
“…….”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라도 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러겠습니다.”
언뜻 무람없는 말투였으나 레온은 트집 잡지 않았다. 화가 난 모양이지. 불퉁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레온이 흐리게 웃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건조했다. 참 신기한 인간이다.
이엘은 그런 레온의 마음을 모르고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늑대의 대리인으로 이곳에 왔으며, 분명 폐하께서 저를 초대하셨기에 온 것입니다. 밀로의 일과 별개로 폐하께서 절 초대하셨음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인 저와 제 동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죄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함부로 저와 제 동생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습니다.”
레온은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차분하게 제 할 말을 마친 이엘이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그가 란트를 향해 턱짓을 했다. 란트는 빠르게 앞문을 열어 그곳에 있던 남자 하나를 끌어 데려왔다.
“미르……!”
맙소사. 제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에 찬 이엘이 밀로의 얼굴을 보았다. 왼쪽 뺨이 불에 타 화상을 입은 채였다. 이엘은 순간적으로 이전에 만났던 레니를 떠올렸다.
씨앗을 훔치기 위해 왕성을 몰래 넘는 자신을 막기 위해 레니가 줄 끝에 능력을 썼다. 그의 불이 줄을 태우고 제 다리까지 먹었을 때, 참지 못할 정도로 아팠던 그 고통을 아직도 기억한다. 비록 그가 손으로 능력을 거두어 화상은 면했지만 고통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따금 비슷한 통증이 불시에 찾아올 때도 있었으니까. 저 종족의 능력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다.
“미르!”
“오헬. 나 데리러 왔어?”
아프지도 않은 건지 저를 향해 씨익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두 주먹을 바르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렇게 두면 어떡해. 영영 자국이 남을 텐데……. 보복이라기엔 다소 잔혹하지 않은가. 하긴. 이쪽 왕은 인간 자체를 혐오한다고 했지. 이엘은 밀로의 상처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곁에 서 있던 앤디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밀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저 망할 용 놈, 진짜. 대체 왕의 뭘 건드린 거냐고. 아무리 레온 님이라지만 저렇게까지 하실 분은 아닌데. 대책 없이 어마어마한 걸 건드린 건 분명하다.
“뭘 훔치려 했는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라.”
레온은 팔걸이 위에 턱을 괴고 밀로와 이엘을 번갈아 쳐다봤다. 밀로는 경악에 물든 이엘의 표정을 마주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몰래 훔치려던 거였는데…….
“갈기.”
“…….”
“타이곤의 갈기를 훔치려 했어.”
이엘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입을 가렸다. 갑자기 왜? 왜 하필 타이곤의 갈기를……. 그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목인 동시에, 늘 가슴에 묻고 살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비밀을 알아챈 건 아닐 거다. 그럼 밀로는 대체 무슨 용도로 그걸 훔치려 했던 걸까.
“고향에 아픈 친구가 있거든. 그래서 필요했어. 갈기가.”
이종족은 각 종족마다 특수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또한 같은 종족이 아니면 다른 종족 사이에서 번식은 불가능한데, 드물게 그게 가능한 종족들이 생긴다. 이를테면 타이곤이나 라이거와 같은.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혹은 만들어진 종족들은 아주 드물게 새로운 능력이 부가적으로 생기기도 한다.
타이곤의 갈기가 그랬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치료 효능이 있는 치료제. 나자르의 성력과 비견할 만큼 뛰어난 치료제였다. 과거 제국이 부흥하던 시기에 무분별하게 타이곤과 라이거를 만들기 위해 사자와 호랑이들을 괴롭혔던 것도 그 능력 때문이었다.
“예전에 저 꼬마가 늑대의 영지를 방문했을 때 타이곤이었다는 걸 알았거든. 뭐, 그래서 쟤 털을 조금 가져가려다 딱 들켰어.”
이엘은 아랫입술을 말아 깨물며 침묵을 지켰다.
“그럼 이제 네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
레온이 물었다. 이엘은 가만히 밀로와 눈을 마주하다가 주먹을 쥐었다.
갈기를 가진 타이곤은 없는 개체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 개체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갈기는 양날의 검이었다. 갈기가 곧 그들의 수명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영존하는 우논이라 할지라도 털이 빠지면 수명이 깎인다. 정확히는 생명의 빛을 잃어 간다.
“감히 로의 목숨을 취하려 한 죄. 충분히 목숨으로 갚아도 되겠지.”
“…….”
“나는 다른 종족, 특히 인간에겐 자비 따위 베풀 마음이 없다.”
제대로 잘못 걸렸군. 차라리 지금 여기서 밀로가 용으로 변해 도망치는 게 낫겠어. 앤디가 그렇게 생각하며 밀로에게 신호를 보냈다.
안 그래도 밀로는 곧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쪽 종족이 늑대와 깊은 관계가 아니었다면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겨우 땅덩어리 벗어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오헬에게 정체를 들키는 건 좀 내키지 않지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앤디가 깜짝 놀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현명하신 왕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면 별것 아닌 제 목숨 드리는 게 뭐가 아깝겠습니까.”
“…….”
“하지만 저는 지금 늑대의 영지에서 재상의 일을 겸하고 있으며, 오늘은 사절단의 역할로 이곳에 왔습니다. 제 목숨으로 폐하의 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다만.”
여전히 제법이네. 레온은 저도 모르게 가면 안에서 웃음을 삼켰다.
“이후에 있을 늑대와의 불화는 결코 늑대의 잘못이 아님을 아셨으면 합니다.”
네 잘못이야. 선명한 녹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엘은 레온의 앞으로 다가와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노아의 친서였다. 안 봐도 추리 가능한 내용이었지만 레온은 편지를 펼쳐 읽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의 눈썹이 어느새 위로 조금 틀어져 있었다.
굳이 어릴 때의 이야기까지 꺼내며 레온의 이해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예전에 장미 종자를 얻으러 왔던 소년에게 보냈던 그 냉혹한 편지와는 상이했다. 편지를 쓴 늑대의 왕은 잡힌 밀로의 안전보다 사신으로 떠난 인간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투였다.
「……녀석이 너희 새끼 호랑이를 구해 줬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다시 말하지만, 오헬은 죄가 없다. 네가 보내라 해서 별수 없이 보내는 것이다. 또한, 나는 네 편지를 믿어. 약속은 지켰으면 좋겠다.」
구태여 죄가 없다는 말은 왜 하는 건지. 시작은 이해를 바라는 내용이었으나 마지막은 협박에 가까운 사과였다. 동맹관계를 명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니까.
레온은 자신이 노아에게 썼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분명 오헬이 온다면 밀로를 풀어 주겠다고 쓰긴 했지. 이제 와 마음이 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편지를 봉투에 넣어 란트에게 넘겼다. 그새 노아에게 소중한 존재라도 되었단 말인가? 늑대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당하고도 인간에게 정을 주는 건, 못된 습성이다. 나쁜 습성. 필요 없는 습성.
안타깝고 씁쓸한 습성…….
“좋다. 동맹관계를 무너뜨릴 순 없지. 그러나.”
“…….”
“저놈의 행위에 대해선 마땅한 보수를 받아야겠다.”
레온은 네 종족을 이끄는 왕이었다. 모든 개체가 그에겐 다 애틋하고 소중했지만 그중에서 으뜸은 단연 타이곤이었다. 자신과 같은 종족. 만들어지거나 생겼거나. 사연 많은 제 종족의 개체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기 때문에 더욱더 과보호할 만했다. 그러니 비록 미수라 할지라도 로를 공격하려 했던 밀로의 죄를 쉽게 용서할 순 없다.
한참의 침묵이 알현실을 맴돌았다. 마침내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턱을 괴던 손을 치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는 이곳에 남아 내 일을 돕도록 해라.”
“폐하! 오헬은……!”
“앤디. 나는 지금 네게 말한 게 아닌데.”
싸늘한 레온의 목소리에 앤디가 열었던 입을 꾹 다물었다. 어지간히 화가 나셨군. 저런 모습의 레온은 또 처음이라 앤디도 적잖게 당황했다. 빌어먹을 하이에나들만 아니었다면 이곳에 온 건 노아 님이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의 자신처럼 무능력하게 지켜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이러다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겼다.
“어이, 왕. 잘못은 내가 했는데 왜 오헬더러 남으라는 거야?”
“멍청한 너보단 저쪽이 더 쓸모 있을 듯해서. 내 말이 틀렸나?”
“앤디 님. 오헬 데리고 나가. 난 신경 쓰지 말고.”
밀로가 앤디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깟 타이곤의 갈기 좀 가져간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뭐. 이엘과 앤디가 영지를 떠나면 저 꼬마 타이곤의 털 몇 가닥만 뽑아서 용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는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다. 자신도 처지란 게 있다. 귀찮게는 됐지만 타이곤 털을 꼭 받아서 돌아가야겠다.
“그렇게 할게요. 제가 남겠습니다. 앤디 님, 미르와 함께 먼저 돌아가세요.”
“오헬!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잘못이잖아.”
“…….”
“기억해, 미르. 정당한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순 없어.”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자신 역시 타이곤의 갈기가 필요했으니까. 대가 없이 무언가를 바라선 안 된다. 자신이 주드와 기름을 맞바꾸었던 것처럼. 무언가 한 가지의 희생이 필요로 따라온다.
“오늘 난 널 위해 이곳에 남을 거야.”
“오헬.”
“미안하다면 잔말 말고 앤디 님이랑 함께 돌아가.”
“네가 왜……,”
“널 오냐오냐 응석받이로 키운 내 잘못이야. 돌아가, 그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유쾌하니 성격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이엘은 밀로를 볼 때마다 늘 불안했다. 황족이었던 자신보다 더 안하무인처럼 구는 행동은 결코 밀로에게 좋지 않다. 늑대들이야 호의를 가져 다행이라지만 다른 종족에게 그런 수가 통할 리 없다.
그녀는 아직도 밀로가 인간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인간이라고 밝혔고 또 그렇게 인간처럼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최소한의 규례는 지킬 줄 알길 바랐다. 행동에 대한 책임 또한, 가볍게 여기지 않길 바란다.
이곳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건 그만큼 숨 막히는 일이니까.
“곧 연락할게요. 부탁드려요, 앤디 님.”
“아, 정말 미치겠네……. 폐하께서 아시면 펄쩍 뛰실 텐데.”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동맹관계잖아요.”
그놈의 동맹관계에 널 희생할 필요가 있냐고. 걱정 섞인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던 앤디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밀로를 잡아끌었다.
“폐하. 노아 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헬을 잘 부탁드립니다.”
“죽이진 않을 테니 그대는 속히 돌아가도록.”
“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오헬은 제겐 친동생과 다름없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제가 걱정하는 건 당연하죠.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밀로 녀석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단단히 교육시킬 테니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레온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앤디를 주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앤디는 평소 껄렁거리기는 해도 언제나 제 앞에선 깍듯했던 자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처사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굴며 인간을 보호하고 두둔했다. 마치 죽이는 것뿐 아니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것처럼.
노아뿐 아니라 다른 늑대들까지 전부 인간에게 정을 줬나? 하여간 늑대들이란, 참 쓸데없이 인간에게 무르다.
“나 안 가!”
“시끄러, 인마. 넌 진짜…… 아우, 속 터지는 놈. 일단 영지로 가서 얘기해.”
“오헬,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