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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21화 (121/488)
  • 121화

    “어서 오십시오, 앤디 님! 그리고 오헬 님!”

    그때처럼 성루에서 작은 소년이 고개를 쏙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로는 예의 바르게 고개까지 숙이더니 쪼르르 성루를 내려갔다. 곧이어 뻑뻑한 쇳소리와 함께 커다란 성문이 열렸다.

    이엘은 길게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지난번처럼 양옆에 줄을 이어 호랑이와 사자가 서 있다면 미리 각오를 해야겠지. 그 눈을 피하는 게 만만치 않겠지만.

    “어서 들어오세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지가…… 조용하네.”

    “지금쯤 낮잠 잘 시간이거든요. 하루 일과 중 가장 바쁠 시간입니다.”

    로가 코를 찡긋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허탈할 정도로 입구가 조용했다. 저번처럼 대놓고 먹잇감 보듯 저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곁에 늑대가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명령 때문에 그런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쓸데없는 기 싸움을 피하게 되어 체력 소모를 줄였다.

    이곳은 여전했다. 생기가 넘치는 늑대들의 영지완 달리 따뜻한 기후인데도 썰렁하기 짝이 없는 영지였다. 이엘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오에에에―!”

    아. 엘타.

    하도 흘려서 눈물이 다 마른 줄 알았는데, 바보같이 또 속에서부터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새끼 호랑이가 저 멀리서부터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엘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이도 저도 아닌 바보 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오에에에―!”

    “엘타.”

    발음이 다 새는데도 왜 그렇게 제 이름이 선명하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감정을 억누르며 엘타를 향해 흐리게 웃어 주자 새끼 호랑이는 성큼성큼 뛰어와 그녀의 품에 안겨 들었다. 말이 새끼지, 거의 다 자란 탓에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이엘은 엘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지만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커다란 호랑이를 그러안았다.

    “엘타. 잘 지냈어?”

    “오에. 오에에!”

    “응, 난 잘 지냈지. 아픈 덴 다 나았니? 몸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성장했구나?”

    호랑이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신 그녀를 핥았다. 뭐가 그렇게 조급한지 엘타는 한참 동안 새는 발음으로 웅얼거리다가 그녀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발톱으로 바닥을 직직 긋기 시작했다.

    ― 안넝. 보고 십어써.

    어수룩한 글씨체에 철자는 엉망진창이었지만 이엘은 울먹이며 마주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종족이, 그것도 테르가 이 글자를 쓰기까지 얼마나 고생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자신을 보자마자 안부 인사를 적었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자신에게 보여 주고자, 이 글자를 쓰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겠지. 그 생각에 또 감정이 북받쳐 와, 끝내 이엘은 고개를 숙여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 순간 엘타가 커다란 머리로 그녀를 톡톡 건드렸다. 나 그거 해 줘! 엘타의 순수한 눈망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엘이 오랜만에 손을 뻗어 엘타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자 엘타가 갸릉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히죽히죽 웃었다.

    “로. 귀빈이 왔으면 성 안으로 안내해야지, 뭘 하느냐.”

    짐짓 위엄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엘은 엘타에게서 손을 떼고 가만히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논과 테르들을 곁에 거느린 채 남자가 뚜벅뚜벅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이자, 옆에 있던 앤디도 허리 숙여 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아. 저 사람이 왕이구나. 앤디의 말을 들은 이엘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의 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네가 엘타를 구해 주었다던 인간이냐.”

    미성이었지만 좌중을 압도할 만큼 단단하고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이엘은 살짝 시선을 올려 가까워진 남자를 보았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성으로 초대할 테니 따라오거라.”

    남자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인간인 자신과 얼굴을 대놓고 마주하는 게 싫다는 건가? 그들의 왕이라던 레온이란 남자는 보란 듯이 망토를 휘날리며 싸늘하게 등을 돌려 앞서 사라졌다.

    “그럼 같이 가시죠. 앤디 님, 오헬 님.”

    이엘이 엘타에게 나중에 보자며 인사를 하곤 로의 뒤를 따랐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앤디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레온 님은 갑자기 웬 가면을 쓰신 거야……?”

    저런 이상한 취미도 있으셨나.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분이라니까.

    *

    “아무리 동맹관계라 하더라도 내가 이런 짓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드물게 앤디가 바짝 긴장한 채 답했다. 타 종족의 왕이 어려운 건 당연하지만 그중에서도 화가 난 레온은 상대하기 더 어려운 편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노아가 왔더라도 레온은 쉽게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앤디는 그 생각에 마른침을 삼키며 레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게다가 인간 주제에 성격이 아주 제멋대로더군.”

    “죄송합니다, 폐하.”

    “듣자 하니 인간, 네 동생이라던데. 사실이냐.”

    “예, 폐하. 제 동생입니다. 응석받이로 키운 제 불찰이고 부덕입니다. 감히 폐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엘이 차분히 대답했다.

    레온은 옥좌에 앉아, 가면 너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몇 달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네. 안 본 사이에 얼굴이 더 상해 있었다. 하긴. 종족회의가 끝나던 날 습격을 당했지. 그리고 아끼던 늑대 친구를 잃었다고. 당연한 건가.

    당시 레온은 종족회의를 마치고 제 종족을 챙겨 본영지로 향하던 중이었다. 독수리와 늑대의 영지가 서로 가까운 것에 비해 레온의 영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다. 늑대가 뱀과 인간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레온이 영지로 귀환하고 나서야 접했다. 동맹관계면서 제대로 된 도움 하나 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던 차였다.

    그래서 솔직히 제 성에 붙잡힌 그 밀로라던 놈을 용서해 줄 마음도 있었다.

    ‘이봐, 왕. 그냥 날 풀어 주는 게 좋을 텐데?’

    낄낄거리며 웃는 낯짝이 짜증 나지만 않았더라면.

    레온은 상상 이상으로 인간을 혐오하는 이종족 중 하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란 종족의 씨를 죄 말려 버리고 싶을 만큼, 그는 인간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근데 감히 그 인간 따위가 제 영지로 쳐들어와 로를 괴롭히다니. 게다가 반성할 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입을 나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온은 밀로에게서 기묘한 흔적을 찾았다. 이건 도무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냄새였다.

    ‘너, 이름이 뭐라고?’

    ‘밀로인데요?’

    ‘인간?’

    ‘그렇습니다?’

    레온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디서 전전하며 살던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은 잘도 숨기며 살았나 보군. 그러나 온 감각이 예민한 자신의 눈까지 속이진 못했다.

    저놈은 우논이다.

    ‘폐, 폐하!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렴, 로. 저 인간은 내일 사형시키지.’

    ‘그러시면 안 돼요! 오헬 님이 슬퍼하실 거예요!’

    ‘오헬? ……오헬이 왜?’

    ‘그야 내가 오헬 동생이니까.’

    우논이…… 인간의 동생이라고? 밀로는 뺨 한쪽이 불에 일그러졌으면서도 낄낄거리며 웃기 바빴다.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진 제 왕을 힐끗 쳐다보며 로가 불안하게 발을 동동 굴렀다.

    로는 저 남자를 늑대의 영지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 이엘의 곁에 있던 남자였다. 저 남자가 왜 이곳에 와서 날 괴롭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밀로라는 남자를 죽이면 그때 봤던 오헬 님이 충격받으실지도 몰라……. 게다가 늑대와의 동맹에도 문제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그 걱정에 레온을 올려보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한편 레온은 이엘의 이름이 나온 시점부터 무심하게 밀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분명 우논인데? 무슨 종족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절대 인간은 아니다. 그럼 인간인 척하며 오헬에게 의탁하고 있는 건가? 겁 없이 무단 침입하는 꼴은 그 녀석과 똑같다마는.

    갑자기 그 인간을 떠올리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겁니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도요.’

    단단하고 흔들림 없던 그 목소리를 여전히 기억한다. 루나 님을 닮은 인간. 루나와 관련되면 언제나 약해지는 제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그 인간. 레온은 가만히 밀로를 노려보다가 지하 감옥에 가두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사실 자신도 잘 모르겠다. 왜 굳이 노아에게 편지를 썼고, 왜 하필 오헬이란 저 아이를 이곳에 보내라고 했는지. 자기가 써 놓고도 이유를 모르겠다. 복잡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쉬던 레온은 제 얼굴에 걸린 검은 가면을 톡톡 건드렸다.

    그냥 자신이 왕이었노라고 밝히면 될 일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에 검은 가면을 쓰고 있더라. 자꾸만 상식 밖의 일을 스스로 하는 꼴이 우스워 자조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다.

    “폐하. 제 동생이 얼마나 큰 중죄를 저질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녀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물끄러미 그 작은 등을 바라보았다. 감춰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의 예민한 감각을 일깨웠다.

    레온은 이엘이 영지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묘하게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었다. 의심은 어느덧 확신으로 변해 간다. 역시 넌……. 무언가 생각을 덧대던 레온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다. 별 관심도 없고.

    레온은 비뚜름하게 옥좌에 기댄 채 자세를 낮춘 이엘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저게 우논인 줄 알고나 감싸는 걸까? 종족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우논을 감싸며 자신이 무엇이든 갚겠다는 인간의 태도가 퍽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이토록 인간을 경멸하는데 저 우논과 인간은 서로를 형제라는 이름으로 두둔한다? 레온의 입가에 불퉁한 심술이 어렸다. 그는 원래 성격이 나쁜 왕이었다.

    “네 목숨으로 갚으라 하여도?”

    “…….”

    “그리하겠느냐?”

    레온의 곁에 서 있던 근위대장 란트는 뜬금없는 레온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치떴다. 가, 갑자기 목숨까지……? 왕께서 인간을 싫어하시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인간 소년은 이전에 엘타 사건으로 왕의 아량을 사지 않았던가. 왕께선 정말 인간들에겐 가차 없으시구나. 란트는 괜히 서늘한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노아 님…… 어쩌죠?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데요……. 옆에 서 있던 앤디는 선뜩해진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연실색했다. 출발 전에 분명 노아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번엔 친히 초대를 받아 가는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요.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아요, 폐하…….

    앤디는 여차하면 이엘만이라도 챙겨 달아날 계획을 머릿속에 짜야 했다. 그깟 용은 알아서 오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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