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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원하시는 대로-123화 (123/488)
  • 123화

    “앤디 님. 데리고 나가 주세요.”

    더 버티려 했던 밀로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이엘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제게서 등을 졌다. 그 좁고 작은 등이 오늘따라 한없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고집을 버려야 했다. 결국 앤디의 손에 끌려 성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이엘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적당히 왕의 비위를 잘 맞춰 쉽게 돌아가면 좋을 텐데.

    “폐하. 한 가지 청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뭔데.”

    “밀로의 화상 자국. 폐하께서 치료해 주십시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 상처. 분명 말은 안 해도 상당한 고통을 동반하고 있을 것이다. 발끝에 조금 닿았을 때도 죽을 것처럼 아팠는데. 하물며 밀로는 한쪽 뺨이 불에 우그러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넘길 순 없었다.

    “부디 엘타의 일을 기억하신다면…… 제게 한 번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목숨을 구해 달라며 비는 게 아니라 종족도 뭔지 모르는 우논의 얼굴을 걱정하고 있다. 레온은 삐딱하게 그녀를 내려보다가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로를 향해 고갯짓을 하곤 말도 없이 알현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이엘은 바닥에 엎드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만 같다.

    *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고마워, 로.”

    “별말씀을요.”

    “밀로의 일은 내가 대신해서 사과할게. 제멋대로기는 해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나한테 상의도 없이 여기로 올 정도였으면, 그 애한텐 정말 다급한 일이었던 모양이야. 그래도 갈기를 가져가려 했던 건 명백한 우리의 잘못이야.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미안해, 정말.”

    이엘이 허리까지 접어 사과하자 로는 두 손을 홱홱 흔들며 손사래 쳤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 털이 뽑힌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밀로라는 그분은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손을 떼셨거든요.”

    “…….”

    “놀라긴 했지만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폐하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해서 더 죄송한걸요. 오헬 님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런 말 하지 마. 잘못은 우리 쪽이 했어. 그건 사실이야.”

    “아, 그리고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밀로 님의 뺨에 생겼던 화상은 폐하께서 치료해 주셨어요. 아픔은 여전하겠지만 흉터는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생색내기 싫었는데 엘타의 일까지 거론하며 부탁한 게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이엘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는 푹 쉬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갔다.

    이제 정말 어떡하지. 어쩌다 보니 인질 신세가 되어 버렸다. 레온이라는 남자는 성미가 깐깐하긴 했지만 무자비하진 않았다. 노아의 편지를 읽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시간을 버릴 때가 아니란 거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다고 노아와 약속했는데. 분명 소식을 전해 듣고 놀라서 곧장 찾아오겠지. 이엘은 푹신한 침대 위에 널브러져 긴 한숨을 쉬었다.

    레온이라고 그랬지. 여태 만났던 다른 종족들의 왕과 달리 체격 자체가 가늘고 호리호리했다. 또 목소리도 위엄은 실려 있었지만 굉장히 미성이었고. 언뜻 레니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레니였다면 그렇게 매섭진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만 하더라도 퍽 사이가 좋았는걸. 물론 혼자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마는. 어쨌든 레니는 아니다.

    이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커다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밀어 올렸다. 이곳은 정말 이상한 곳이다. 그 어떤 영지보다 기후가 온난하고 좋은데도 늑대의 영지보다 추웠고 뱀의 영지보다 음습해 보였다. 르네의 옛 영지처럼 죽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는 아까 레온의 곁에 서 있던 기사였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 이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투박하게 인사했다.

    “인사드립니다. 왕실 근위대장 란트라고 합니다. 폐하의 명으로 찾아뵙습니다. 혹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신지요. 손님방이 개방된 건 오랜만이라 꽤 낡았을 텐데, 말씀해 주시면 속히 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좋은 방을 주셔서 폐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보다 저는 여기서 뭘 하면 좋을지…….”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에만 있기 갑갑하시다면 나가셔서 산책하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음. 다른 곳이면 몰라도 여긴 산책하기에 썩 좋은 영지는 아니다. 그때 봤던 성체들이 언제 또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지 모를 일이고. 웃기게도 깐깐한 왕이 거하는 왕성이 그녀에겐 가장 안전한 곳인 셈이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이엘이 다급히 란트를 불렀다.

    “혹시 뒤뜰을 구경하는 것도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란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왕을 대신해 허락했다.

    *

    갑갑한 가면을 벗어 던진 레온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손으로 털어 헤집었다. 솔직히 괜한 트집을 잡은 건 맞다. 굳이 그 인간 소년의 방문을 요청했고, 굳이 그의 목숨값을 요구했고, 굳이 인질이 되길 강요했다. 노아가 알면 얼마나 황당해할지. 친히 편지까지 함께 보낼 정도로 신경 쓰는 모양인데.

    몇 번을 생각해도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레온은 검은 가면을 손에 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핑계는 아니었다. 시작하려는 영지 일이 이래저래 복잡하고 까다로워 손이 부족한 건 맞으니까. 게다가 제 종족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서 왕의 명령에도 따분한 표정을 지을 게 빤하다.

    허수아비 같은 위치가 되었지만 그는 명백한 왕이었다. 그것도 네 종족이나 이끄는. 그러니 슬슬 왕다운 일을 할 때도 되었다.

    재상 일을 겸하고 있다고 했지. 마침 며칠 전에 재상이 병이 나 시작부터 사업이 막혔다. 종족마다 살아가는 환경이 다른 건 당연했지만, 그럼에도 레온은 노아의 영지 운영 방식을 꽤 괜찮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특히 늘 곁에서 수행하는 안드로의 일 처리는 어려서부터 눈여겨볼 정도였으니까.

    “폐하.”

    “아, 란트 경. 방에 다녀왔나?”

    “네. 말씀하신 대로 전했습니다. 뒤뜰을 다녀오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괜찮습니까?”

    “뒤뜰? 뜬금없이 뒤뜰은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뒤뜰엔 별게 없다. 취미 삼아 꾸민 화단과 엉성한 밭이 있을 뿐. 곰곰이 생각을 덧대던 레온이 일순 미간을 좁혔다.

    “나드.”

    “네?”

    “지금 나드가 산책할 시간이 아니던가?”

    “맞습니다. 오늘은 폐하께서 업무로 바쁘다고 하셔서 시종장이 대신 나드를 데리고 돌고 있을 텐데요.”

    “마주칠 수도 있겠군. 나드가 알아볼 수도 있겠는데.”

    “그 인간 소년이 나드를 본 적이 있습니까?”

    “전에 잠깐 마주쳤어.”

    나드는 영리한 편이라 기억력이 꽤 좋았다. 말만 못 할 뿐이지, 다른 우논과 다를 바 없는 새끼 우논이었다. 레온은 란트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그렇게 복도를 지나려다 제 침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불편한 제복을 입고 있었네. 한참 생각에 빠진 레온이 침실로 들어가 가벼운 옷으로 환복하고 뒤뜰로 나왔다.

    딱히 나드와 이엘이 마주치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나드의 존재는 대외적으로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레온은 잘 정리된 뜰을 거닐었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일이 꽤 커졌다. 뜰을 가득 메운 밭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레니 님?”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레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엘이 환하게 웃으며 레온의 앞으로 뛰어왔다.

    “역시 여기 계실 것 같았어요.”

    “……날 찾았어?”

    “네. 전에도 여기서 뵈었으니까요. 혹시나 하고 왔어요.”

    “근데 넌 여긴 또 무슨 일로 온 거야?”

    시치미 떼며 물었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왕이란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완전한 변조는 아니었지만 목소리를 어느 정도 깔았으니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로 알아보지 못할 줄이야.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번엔 좀 대형 사고를 쳤거든요.”

    “또 우리 폐하한테 찍혔어?”

    “이번엔 제대로요. 겨우 얼굴을 뵙나 싶었는데, 차라리 전에 왔을 때가 더 나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아요.”

    “이번엔 또 왜? 너 또 뭐 훔치러 왔어?”

    “제가 아니라 제 동생이…… 아니, 제가 또 훔치러 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 사람은 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이엘이 뚱하게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왕성을 무단 침입한 전적이 있으니 신뢰가 가는 상대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아무튼 이엘은 멋쩍은 얼굴로 괜히 땅을 발로 콕콕 찼다.

    “우리 폐하 성격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잡히면 절대 안 놔주실걸.”

    “그럼 곤란한데요. 저는 빠른 시일 내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왜? 여기도 꽤 살 만해.”

    늑대들이 사는 곳보다 따뜻하잖아? 레온의 심드렁한 말에 이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노아 님이 기다리실 거예요. 빨리 돌아간다고 약속하기도 했고.”

    “노아 님이라면, 늑대의 왕? 그쪽 왕이랑 제법 가깝나 봐?”

    “가깝다기보다는……. 애매하긴 하네요, 뭐라고 딱 단정하기엔.”

    “글쎄. 내 생각엔 넌 쉽게 못 돌아갈 것 같은데. 폐하께서 안 보내 주실 것 같거든.”

    “그래요? 그럼 또 저번처럼 탈출이라도 해야 하나.”

    왕인 제 앞에서 탈출 계획을 세우는 게 퍽 우스웠다. 레온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차였다. 별안간 저 멀리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드!”

    시종장이 나드의 이름을 부르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미 왕의 냄새를 맡은 모양인지 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장에게서 도망치듯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새끼 타이곤이 그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뛰어들었다.

    레온이 아닌 이엘에게.

    “아!”

    짧은 비명을 지르며 이엘이 뒤로 넘어갔다. 나드는 전에 봤을 때처럼 그 귀여운 앞발로 연신 이엘의 얼굴을 파닥파닥 내려치고 있었다. 딴에는 그녀를 알아보고 반갑다며 인사하는 모양이었다.

    “레, 레니! 저, 저 좀……!”

    앞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이엘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허리를 접어 나드를 냉큼 품에 안아 들었다. 그의 품속에서도 나드는 갸릉갸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앞발을 허공에 퍼덕거리고 있었다.

    “쉿, 나드. 앞발로 얼굴 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크아앙!”

    “나드는 내가 돌볼 테니 그대는 들어가도록 해.”

    혹시나 저를 알아보고 쓸데없는 말을 할까, 레온은 서둘러 시종장을 돌려보냈다. 눈치를 보던 시종장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왕성으로 먼저 돌아갔다. 레온은 여전히 품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나드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신기하네요. 테르인가요? 이렇게 어린 이종족은 처음 봐요.”

    “…….”

    “아무리 테르여도 보통 성체 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나요?”

    그녀의 물음에 레온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는 제 품에 얼굴을 비비는 나드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이엘을 향해 나드를 내밀었다.

    “안아 볼래?”

    “그래도 되나요?”

    나드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그녀를 향해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나드를 건네받았다. 처음엔 안은 자세가 불편한 건지 몸을 비틀던 나드가 곧 안정을 되찾고 이엘의 품에 쏙 기댔다. 이엘은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너무 귀여워요. 어쩜 이렇게 작을 수 있죠? 새끼 때는 다들 이렇게 작나요? 근데 다른 개체들은 금방금방 크던데, 나드는 왜 이렇게 작아요? 너무 귀여워요, 레니. 어쩜 이렇게 앙증맞지?”

    인간이 품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라니. 갓 태어난 완전한 새끼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이야기다. 레온은 씁쓸하게 나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엘도 나드와 시선을 마주치며 레온의 뒤를 따라 걸었다.

    벌써 석양이 깔리며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석양빛에 레온의 금색 머리카락도 덩달아 타오를 듯 붉어졌다. 이엘은 연신 나드를 향해 웃으며 손가락으로 간지럼을 태웠다. 갸릉갸릉,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던 나드가 곧 지친 모양인지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렸다.

    “레니. 나드가……,”

    “나드는 불량품이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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